최장집이 막스 베버를 해석하는 방식에 동의하는 건 아니지만 이 글은 베버보다 최장집에게 초점을 맞춘다. 왜냐하면 한나 아렌트나 위르겐 하버마스를 비롯한 많은 학자들이 베버의 이론이나 합리성 개념의 문제점과 한계를 이미 지적한 바 있고, 권력과 폭력을 구분하지 않는 정치관이 현실에서 많은 비판을 받아왔으니 굳이 베버에 대한 비판을 되풀이할 필요는 없을 듯하기 때문이다.
사실 내가 궁금한 건 한국 정치의 미래를 논하면서 최장집이 베버를 끌어들인 이유이다. 최장집이 최근 한국 사회에 베버라는 유령을 부활시킨 첫 번째 인물은 아니지만 "우리 현실에서 좀 더 시급하게 읽혔으면 하는 정치철학자"로 베버를 꼽은 이유는 아주 궁금하다. 최장집이 다른 사상가들을 빼고 굳이 베버를 먼저 얘기하는 건 그에게 기댈 만한 구석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글이 따지고 싶은 건 베버의 이론 자체보다 지금 이 시점에서 베버를 논의하는 '맥락'과 최장집의 '판단'이다.
좋은 정치인이 필요하다?
▲ <막스 베버 소명으로서의 정치>(막스 베버 지음, 최장집 엮음, 박상훈 옮김, 폴리테이아 펴냄). ⓒ폴리테이아 |
최장집이 단지 좋은 직업 정치인 몇 명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정치인이라는 사람의 문제를 다루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정치 시스템의 문제를 얘기한다. 좋은 정치인이나 카리스마적 지도자가 갖춰야 할 덕목들을 제안하고 발전시킬 방법을 찾는 것이 책의 중심 주제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정당의 동원 기구(머신)와 의회 정치의 중요성을 주장한다.
이런 오독을 온전히 독자의 책임으로만 돌릴 수 없는 것은 최장집이 "새로운 직업 정치가들이 (…) 직업 정치인으로서 어떤 생각으로 어떻게 민주주의를 실천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는 한국 민주주의의 미래와 관련해 더없이 중요하다"는 식의 얘기를 계속 흘리기 때문이다. 소명 의식을 가진 정치인의 필요성이 강조되는 듯하지만 그 정치인의 범주는 정당 머신을 가진 정당 정치인이다. 정치인의 범주를 매우 좁게 보면서도 그냥 정치인이라 얘기하니 착각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최장집은 민주주의와 정치인의 필요성도 같은 차원에서 다뤄 오해를 낳는다. 한국 사회에서 '민주주의가 더디다'와 '좋은 정치인이 필요하다'가 같은 차원에서 논의될 수 있을까? 물론 민주주의 하에서도 좋은 정치인은 필요하다. 하지만 좋은 정치인들이 시민을 대신하는 정치 체제를 우리가 민주주의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최장집은 "현대의 대의제 민주주의는 관료화된 강력한 국가가 그 사이에 위치함으로써 3자 관계의 구조를 갖기 때문"에 차이점을 가지지만 고대의 민주주의와 현대의 민주주의가 "지도자-대중의 관계라는 점에서 동일하"다고 주장한다. 허나 민주주의는 지배 양식이 아니라 민중이 권력을 행사하는 정부 형태이다. 말의 뜻 그대로 민중이 지배권을 가져야 민주주의라 불릴 수 있다. 제 아무리 좋은 정치 결과를 낳더라도 민중이 지배권을 갖지 못한다면 그것은 군주정이나 귀족정이라 불려야 한다.
민주주의가 다른 정치 체제와 구분되는 건 민중이 정치인을 선택하는 만큼 그를 몰아낼 수도 있다는 단순한 사실에 있다. 시기심에 사로잡힌 시민들이 탁월한 정치 지도자를 쫓아낼 수도 있고 전쟁에 이긴 개선장군을 처형할 수도 있는 체제가 바로 민주주의이다. 이렇게 시행착오를 거듭할 수 있는 정치 체제, 시행착오를 거쳐야 하는 정치 체제가 바로 민주주의이다. 그럼에도 민주주의가 좋은 정부 형태라 불리는 것은 힘과 부를 독점한 소수의 사람들의 손에 정치 공동체의 운명을 맡기는 것보다 민중들이 정치 공동체를 운영하는 것이 훨씬 더 낫기 때문이다. 이런 공리(公理)를 무시한 채 정치를 설명하니 자꾸 헷갈린다.
최장집이 자주 인용하는 미국의 정치학자 로버트 달은 자신의 구상을 '폴리아키'라 불러 오독을 막는데, 최장집은 자기 구상이 민주주의라고 주장하니 오독이 생긴다. 더구나 자기 얘기와 일치하지 않는 논의를 민주주의에 대한 '잘못된 이해'라고 부르니 오독은 더욱더 심해진다. 그러니 엉킨 매듭을 풀어야 하는 사람은 최장집인 것 같다.
한국 시민이 정치를 부정적으로 이해한다?
독자의 오독이 있다면 최장집의 오독도 존재한다. 최장집은 이렇게 얘기한다.
"오늘의 한국 상황에서 정치와 관련해 중요한 것은 정치를 부정적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강하고, 이런 경향이 사회에 널리 확산돼 있다는 점일 것이다. (…) 권력을 권위주의와 동일시하고 정치를 탐욕과 타락을 상징하는 인간 행위로 이해하는 우리 사회의 지배적 경향은, 민주주의를 하나의 통치 체제로서 받아들이고 이를 잘 운영하는 문제의 중요성을 경시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부정적으로 이해'하는 것과 '부정적인 것'은 다르다. 잘못된 것을 잘못이라 비판하는 것은 부정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다. 현재 한국의 정치 상황이 부정적이지 않은가? 투표할 수 있고 선거가 치러지니 부정적이지 않다고 얘기할 수 있겠지만 그것만으로 민주주의를 따진다면 프랑스 사상가 장-자크 루소의 말처럼 우리는 4년에 한번 투표하는 날에만 정치 공동체의 주인이 될 뿐이다.
정치와 경제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공공 영역이 사유화되는 한국의 정치는 매우 부정적이다. 개발의 속도전에 수많은 생명이 죽어가는 것을 보면 한국의 현실은 매우 부정적이다. 인사 청문회가 진행되는 과정을 보면 정치 상황은 충분히 부정적이다. 감시와 벌금으로 얼룩진 삶을 사는 시민운동가들에겐 지금의 정치가 꽤 부정적이다. 그리고 다른 통로로 자신의 의견을 얘기할 수 없는 사람들에겐 지금의 상황이 너무나 부정적이다. 이것은 "정치를 부정적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아니다. 부정한 것을 부정하지 않은 것처럼 보자고 얘기하니 아Q의 정신 승리법이라도 쓰자는 것일까?
그리고 정녕 사람들이 권력을 부정적으로 '이해'할까? 오히려 사람들은 권력이 중요한 힘이자 자원이라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부정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정치가 아니라 정치인이고 권력이 아니라 부패이다. 정치를 부정적으로 이해하는 게 아니라 정치인들이 부정하기 때문에 권력을 탐욕과 타락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이것은 지나친 의심이나 열정이 아니라 합리적인 감시이다. 이것은 왜 정치가 아니란 말인가?
이것이 오독인지 의도된 계산인지 판단하기 어려운 것은 이런 주장이 정치 엘리트의 활동을 정당화시키기 때문이다. 부정적이고 냉소적인 대중이 정치에 직접 참여하기는 어려우니 엘리트들이 정치를 대신해야 한다는 식이다. "베버는 국가나 정당 같은 자율적 정치 조직이 인민 주권, 인민의 이니셔티브를 통해 운영되고 그로 인해 작동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라고 본다. 민주주의도 어디까지나 정치 엘리트에 의해 통치되는 것이고, 인민은 엘리트를 선출하는 수동적 역할 이상을 갖지 못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민주주의에 대해 지극히 현실적이고 극도로 절제된 이해를 발견하게 된다." 베버의 이런 주장이 "지극히 현실적이고 극도로 절제된 이해"라니 그 판단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
결국 최장집의 핵심적인 주장은 이것인 듯하다. "베버에게 민주주의는 기본적으로 카리스마적 지도자가 자신의 목적의식을 대중에게 호소하고, 대중이 그에 호응해서 그를 지지하는 것으로 이루어지는 지도자-대중의 관계, 즉 카리스마적 지도자와 이를 추종하는 대중의 열망 사이에서 발생하는 지배-정당성의 상호관계에 기초를 둔 통치 체제이다. 바꾸어 말하면 민주적 리더십이란 카리스마적 권위의 한 유형인 것이다." 이 이율배반적인 명제가 타당하려면 시민은 부정되어야 한다. 미국식 정치관과 소련식 정치관이 매우 다른 듯하지만 실제로는 동일한 기반 위에 있다. 슘페터의 정치 공학과 레닌의 전위당이 손을 잡는다.
그리고 최장집은 "국가 기구의 관료화와 자본주의 시장 구조의 독점화가 가져오는 제약적 힘에 대응하면서 역동성을 만들어"내려면 정당 머신을 가진 지도자 민주주의가 필요하다고 얘기한다. 허나 베버가 지적했듯이, 관료제는 '수동적 민주주의'의 출현, 즉 지배를 받는 사람들의 평준화와 동시에 진행된다. 제 아무리 뛰어난 정치 지도자라 하더라도 지배당하는 사람들을 대변할지언정 그들의 역량을 끌어내지는 못한다.
관료제는 단지 권력을 독점할 뿐 아니라 사람들을 무기력하게 만들고 평준화한다. 최장집이 말하는 좋은 정치는 쇠창살 안에 갇힌 무기력한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과정일 수 있다. 허나 그것이 진정 행복일까? 시민들이 누려야 할 공적 행복(public happiness)을 정치인들이 계속 독점해야 할까? 참여는 사람들의 욕구를 실현하는 과정일 뿐 아니라 자신의 역량을 강화시키고 공적인 존재로 성장하는 과정인데, 이런 과정을 밟으며 정치에 대한 긍정적인 이해가 늘어날 텐데 최장집 교수는 이런 과정을 의도적으로 생략한다.
정치학자의 현실 감각?
정치학자로서 최장집은 신념 윤리와 책임 윤리의 균형을 얼마나 잡고 있을까? 최장집은 2010년 9월 정치인 손학규의 후원회장을 맡았고 얼마 전에는 손학규후원회 대표 명의로 "노무현 전 대통령이 종로를 버리고 부산에 한 몸 던져 지역주의를 깨뜨리려 했던 것처럼 손학규의 국민 통합을 위한 노력이 반드시 성공하리라 믿습니다"라는 지지의 인사말을 발표하기도 했다. 최장집은 손학규를 성공적인 정치인으로 만들려 하는 것일까?
손학규의 진심을 파악하기란 어렵지만 적어도 뉴라이트전국연합과 한나라당의 일원이었던 손학규의 신념 윤리를 높이 사기는 어렵다. 그리고 그간의 행적을 보면 "사건의 전체 구조, 내지는 맥락에서 행위자가 자신의 결정이 가져올 수 있는 결과를 상상하고, 그가 원래 바라는 목표와 관련해 그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하는 판단력, 사려 깊음"을 의미하는 책임 윤리를 그에게 기대하기도 어려운 듯하다. 그런데도 왜 손학규일까?
그리고 그동안 노무현 정부를 비판해 왔음에도 뜬금없이 손학규와 노무현을 연장선상에 놓는 최장집의 말은 자신의 책임 윤리를 거스르지는 않더라도 신념 윤리를 상당 부분 훼손한 듯하다. (성공회대학교에서 비정규직 행정 직원들이 해고되었는데도 외부에서 비정규직 문제 해결을 주장해온 지식인들이 침묵하고 있는 걸 보면 이런 윤리의 불균형은 한국 지식인들의 문제일지도 모르겠다.)
A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문제인데 이를 B로 해결할 것이 아니라 그것이 진정한 A가 아니었으니 무조건 A를 고쳐야 한다고 고집하는 건 신념이 아니라 집착과 모순이다. 무엇이든 뚫을 수 있다는 창과 무엇이든 막을 수 있다는 방패를 동시에 팔려는 사람은 모순에 빠질 수밖에 없다. 강력한 지도력과 민주주의를 모두 팔려는 최장집의 입장도 그런 모순에서 벗어나기 못하고 있다. 어느 한 쪽을 내려놓아야 입장이 분명해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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