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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리스 힐튼과 '청소 노동자'가 있는 지옥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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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리스 힐튼과 '청소 노동자'가 있는 지옥도

[프레시안 books] <자본주의, 그들만의 파라다이스>

1

<자본주의, 그들만의 파라다이스>(마이크 데이비스 외 지음, 유강은 옮김, 아카이브 펴냄)는 두 다리 뻗고 마음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책이 아니다.

이 책을 읽다 들이차는 착잡함과 침울함은 우연히 지나가게 된 호화찬란한 명품 백화점 1층 회랑에서 맞닥뜨리는 기분과 흡사할 듯싶다. 어쩌면 나와는 큰 상관이 없고 알고 싶지도 않은 그 상점들 곁을 총총히 지나면서 우리 눈에 띄는 것은 문가에 도열한 쇼핑객의 초조한 표정이었을 뿐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렇게 반쯤은 경멸감과 또 반쯤은 위화감을 억누르며 황망하게 스쳐 가던 그 상점 안으로 걸음을 딛고 그들이 주고받는 대화를 들을 기회가 생겼다면, 그 때 드는 기분은 어떤 것일까.

나는 그 때 들이닥칠 기분이 이 책을 읽었을 때의 느낌과 흡사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따라서 책 뒤표지에 실린 "자본의 상상력과 억만장자들의 욕망이 빚어낸 19편의 지옥도"란 글귀는 신랄하지만 이 책을 읽을 이들이 감지할 기분에 충분히 호소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우리는 주의를 기울이자고 작정했으면 모두 알 수 있었을 이야기를 굳이 알고 싶어 하지 않는 편이다.

▲ <자본주의, 그들만의 파라다이스>(마이크 데이비스 외 지음, 유강은 옮김, 아카이브 펴냄) ⓒ아카이브
이 책에 실린 이야기도 역시 다르지 않을 것이다. 억만장자의 야단스럽고 구역질나는 삶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넘쳐나리 만치 많지 않는가. 미국 호텔 재벌인 힐튼의 손녀, 패리스 힐튼의 엽기적인 일상에서부터 중국 베이징 부잣집 도련님의 명품 스포츠카 폭주족 동호회 이야기에 이르기까지 매일 우리는 TV와 점잖은 신문에서부터 싸구려 잡지의 가십을 통해서까지, 초현실적인 부자들에 관한 이야기들을 허다하게 듣고 본다.

이 책에서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미국 신자유주의적 도시 공간의 상징이자 증후라 할 "폐쇄형 주거 단지"가 예시하듯이 우리는 부자들만을 위한 파티와 이벤트가 열린다는 소식을 심심찮게 듣는다. 온갖 보장이 다 된다는 암 보험이니 생명 보험이니 하는 광고들이 허술한 의료 보험으로 인해 겁에 질린 가난한 이들의 낯빛을 집요하게 반사한다면, 수천만 원을 호가하는 개인 맞춤 건강 진단 서비스를 제공하고 첨단 의료 경영을 실현하여 수익성 높은 의료 기관으로 거듭나게 되었다는 국내 굴지 병원들의 호들갑은 천국과 지옥이라기보다는 현실과 초현실의 차이라 불러야 옳을 것이다.

과연 그 엄청난 부자들에게도 천국과 지옥이 있을지 우리는 확신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새로운 도시 개발과 공간 형성의 원리를 위하여 동원된 포스트모던 철학을 비웃기 위하여 곧잘 들먹이는 철학적인 비유들 가운데 하나가 말해주듯이 말이다. 존재와 비존재 사이의 제3의 공간에 위치한 사람들처럼 대다수의 사람은 이 물리적인 공간 속에서 단단하게 현존하지만 그 세계가 내세우는 공간적 체험과 지각의 원리로부터 배제되어 있다는 점에서 그 공간 속에서 살고 있다고 감히 말하기는 어렵다.

내가 지각하고 체험하는 것이 세계란 것을 내세우는 이 환상적인 공간 속에서 우리는 어차피 빠져나와 있다. 이를테면 내가 서울 어딘가에 은신할 곳을 두고 살아가고 전철을 타고 그 곳을 쏘다닌다 하더라도 어차피 서울은 내가 사는 곳이라는 감각을 제공하지 않으므로 나는 서울에 산다고 말하기 어렵다. 외려 나는 서울에 적을 두고 있지만 나는 서울에서 객이다. 서울은 사람들이 사는 도시라기보다는 방문하고 관람하고 떠돌아다니는 공간처럼, 철학적인 잘난 체를 한다면, '현상할' 뿐이다.

이런 서울을 일러 '세계 디자인 수도'라 한다면 그건 그렇다 쳐둘 일이다. 그런데 이는 물론 포스트모던한 공간을 예찬했던 이들이 희구했던 사악한 유토피아가 실현된 모습이라는 것을 잊지는 않아야 할 것이다. 이를테면 우리는 서울시 종로구 북창동 몇 번지라는 마을보다 한옥 마을이라는 이름을 더 선호한다. 전통이나 공유하는 삶의 의미, 오랜 사회적 상호작용의 경험이 침전된 공동체를 예찬하는 포스트모던한 공간은 획일적으로 격자화된 잿빛 도시의 콘크리트 숲을 증오하는 척한다. 그렇기 때문에 개발 국가가 만들어놓은 공간의 도구적 추상화를 반영하는 행정 구역상의 명칭보다 한옥 마을이니 하는 공동체적인 후광이 더 근사하고 가치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이 실은 '장소 마케팅'이라는 신종의 신화 팔아치우기 혹은 장소 브랜드를 만들려는 미사여구일 뿐이라는 것을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장소 없음(placelessness)'을 개탄하며 추상적이고 기하학적인 근대적인 공간의 정언명령에서 탈출하여 그 장소에 서식하는 또는 거처하는 인간의 장소를 되찾거나 창안해야 한다는 전투적인 포스트모던 건축가들과 도시 계획자들의 심미적 이념은 공간의 경제적 현실을 은폐한다. 이 아름다운 장소 회복의 꿈은 부동산 개발 업자와 투기 자본, 지대를 추구하는 금리 생활자의 탐욕에 이바지하기 위한 미끼라는 것을 말이다. 나아가 그것이 진정으로 은폐하는 것은 공간이 교통, 배수, 안전을 비롯한 다양한 공적인 서비스를 위하여 구성된 근대 도시의 공간적 편성이기도 하다.

이제는 제법 유명해진 푸코의 말을 빌자면 근대 자유주의 국가가 공간을 집합적인 생명체로서의 '인구'를 위한 것으로 상상하였을 때, 공간은 언제나 그것의 상대 항으로서 공간 안팎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을 어떻게 파악하고 규율할 것인지에 대한 이해를 동반하였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공간을 생태적 환경이란 개념으로 다듬어냈을 때 그것은 단순히 공간을 둘러싼 지식이 바뀐 것에 머물지 않는다. 이는 공간을 영유하는 인간을 생물학적인 삶을 살아가는 생명체로 구성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고전적 자유주의가 인구-도시의 짝을 만들어 냈다는 푸코의 제안을 수긍한다면 신자유주의는 공간 속에 살아가는 이들을 어떤 새로운 배치 속에 밀어 넣는 것일까. 아마 우리는 이에 답하기 위하여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할지도 모른다. 데이비드 하비의 제안처럼 복지국가 혹은 사회국가에서 신자유주의 국가로의 이행은 관리주의적 도시(managerialist city)로부터 기업가적 도시(entrepreneurial city)로의 이행과 궤를 같이 한다는 주장은 물론 설득력이 있다.

그렇지만 그것은 서구의 대도시를 위한 분석에 그치고 마는 아쉬움이 있다. 지금은 대통령의 자리에 오른 전직 서울 시장은 CEO 시장으로 자신을 내세우며 기업가적 도시 행정의 모범을 보여주었고, 그를 생각할 때 하비가 관측하는 기업가적 도시 모델은 1980년대 후반 민주화를 전후한 지방자치제의 실현을 목격한 한국 사회의 공간 관리를 이해하는데 전연 손색이 없는 도식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책이 보여주듯이 남미와 아프리카 그리고 아시아의 많은 도시들을 이해하는데 이 같은 모델은 많은 부족한 부분을 보여준다. 무엇보다 금융 세계화를 전후하여 나타난 새로운 자본의 지구적 운동이 국가 내외부에서 이뤄지는 정치적 규율과 맞물리면서 공간을 어떻게 새롭게 재편하는지 이해하는데 기업가적 도시란 모델은 너무나 국민국가란 공간적 이미지에 매달린다.

그렇다고 해서 사스키아 사센 같은 이들이 말하는 '글로벌 도시' 역시 대안이 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지구화가 어떻게 세계 주요 도시들을 국민국가라는 사회적 신체로부터 떼어내어 허브니 명령 센터니 하는 이름으로 자본과 지식, 정보의 폐쇄 회로를 형성하였는지 밝혀내고 그 도시들을 글로벌 도시라 부르는 것은 분명 매력적이고 또 충분히 설득력 있다. 그렇지만 글로벌 도시와 동시 병행적으로 만들어지는 그 도시 아닌 도시들의 윤곽은 흐릿해질 뿐이다. 그러나 이 대목에서 비약하여 신자유주의적 공간의 시학(詩學)을 읊는 일로 나아가서는 안 될 것이다.

뉴욕, 파리, 도쿄, 런던, 상하이, 두바이 같은 휘황찬란한 신자유주의적 도시의 세계가 결국은 대다수의 삶을 안전 무법 지대, 일자리 없는 빈곤의 나락, 갖은 질병과 죽음의 위협이 도사린 연옥 속으로 몰아넣고 있다는 것은 전연 맞는 말이고 또한 명심할 일이다. 그러나 이를 비참과 고통의 서정적 풍경 속에 가두어 놓고 이를 다양한 철학적 요설로 감싸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닐 것이다. 그들을 호모 사케르라고 부르든 아니면 배제되고 추방된 자들이라 부르든 그것은 이 책의 글 가운데 하나에서 언급하듯 인도주의적 자선의 대의를 참칭하며 국제적인 비즈니스를 운영하는 저 잘난 비정부기구를 위한 윤리적인 핑계가 되어줄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변화된 자본주의가 어떻게 공간을 규정하고 지배하는지 이해하기 위한 걸음을 이제 떼고 있다는 점을 솔직히 인정하고 그 변화의 규칙과 그에 대항할 수 있는 공간적인 투쟁을 위한 전략을 사고해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지저분하고 구역질나는 부유한 부르주아들과 그들이 사는 장소들의 모습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착취와 탈취, 점유와 개발, 구획과 투자 같은 다양한 경제적, 사회적 실천이 벌어지는 곳이고 또한 그에 예속되고 착취당하며 투쟁하는 자들이 머무는 곳이자 가장 첨예한 공간적 갈등이 벌어지는 장소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그들만의 파라다이스>가 지닌 진가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불편하고 거북하지만 그것은 어느 시대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부패와 허영의 세계를 묘파하는 풍경화가 아니다. 이 책은 우리 시대의 공간을 둘러싼 운동을 위해 고려해야 할 주요한 쟁점들을 망라하는 지도책일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을 흔해 빠진 속물근성의 또 다른 이름이 되어버린 인문 교양을 살찌우는 그저 또 한 가지 군것질거리로 취급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 책이 아무리 우리 시대의 공간의 질서를 둘러싼 역겨운 추문을 폭로하는 짜릿한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다 해도 말이다.

2

두바이, 아르그에자디드, 카불, 베이징, 홍콩, 요하네스버그, 노에바 마나과, 부다페스트, 메데인, 브라질, 이집트 드림랜드, 애리조나, 오렌지카운티 그리고 테드 터너의 목장, 개인 미술관, 라이프스타일 관광지가 된 수도원, 해상 도시의 꿈을 희구하며 10만 명의 주민을 태우고 유랑하겠다는 프리덤십호 프로젝트 등등. <자본주의, 그들만의 파라다이스>에 등장하는 도시와 사유지, 관광지, 프로젝트 따위의 이름이다.

모두 19개가 꼽혔고, 이렇게 "새로운 배제의 지리학과 부의 풍경"을 대표하는 아이콘으로 선정된 이 19개의 장소는 또한 우리 시대의 가장 불길한 현장이기도 하다. 그곳이 천국이라면 바로 길 하나 건너의 거리에 혹은 은폐된 그 곳의 어느 다락방에 지옥이 숨어있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의 부유층이 기거하는 이 19개의 아이콘적 공간은 또한 그 공간을 건축하고 유지하며 재생산하기 위해 살아가는 자들의 참담한 세계를 끝내 숨길 수 없을 것이다.

아마 이 책과 짝을 이루어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인, 이 책의 편집자 마이크 데이비스의 눈부신 저작 <슬럼, 지구를 뒤덮다>(김정아 옮김, 돌베개 펴냄)에서 고발하고 있는 그 세계 말이다. 그 세계를 기억할 때 편자 서문에서 묶은 이들이 아도르노를 인용하여 말하듯이 천국과 지옥의 변증법이 고스란히 현상하는 이미지가 만들어질 것이다.

지금은 문화 비평의 정전이 되어버린 발터 벤야민의 아케이드 분석은 자본이 만들어내는 신기루 같은 도시의 환등상을 분석하면서 그것이 우리에게 어떻게 현실을 환영적인 풍경으로 대체하였는지 고발한다. 그런데 그의 동료였던 아도르노는 이러한 분석만으로는 부족하다고 힐난하였다고 한다. 이는 또 다른 환상의 명부(冥府)인 지옥이 벤야민의 묘사 속에 지워져있다는 이유에서였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아도르노의 비판을 과대평가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것은 비판이기에 앞서 벤야민이 매혹당한 19세기 후반의 파리 풍경과 다른 지옥의 풍경에 경악한 이들이 그려낸 수많은 도시의 초상도 잊지 말자는 당부에 다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얼마 전 우리말로 번역된 제인 제이콥스의 <미국 대도시의 죽음과 삶>이나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영국 노동자계급의 삶의 상태>를 위시해 페비언협회를 이끈 베아트리스 웹의 영국 노동자 거주지에 대한 조사 같은 글들은 바로 벤야민이 매혹당한 풍경의 음화들을 묘파한다. 즉 천국의 길 건너편에는 지옥이 있다는 것이다.

어쨌든 천국과 지옥은 서로의 부정적 규정일 뿐이다. 천국과 지옥이 서로 다른 세계인 것이 아니라 그것은 서로를 자신의 부정적인 존재조건으로 정립한다. 이는 이 책을 여는 첫 번째 글이자 편자 가운데 한 명인 마이크 데이비스가 쓴 '노동자들은 배제된 낙원, 두바이'에서 생생하게 목격할 수 있을 것이다. 자본의 낙원이 되었고, 연일 30도가 넘는 뜨거운 사막 도시인 두바이는 이제 세계에서 가장 큰 실내 스키장, 세계에서 가장 높은 빌딩, 세계에서 가장 큰 쇼핑몰을 가진 도시가 되었다. 알막툼이 이끄는 왕실 가문이 지배하는 이 작은 도시-기업은 세계에서 최고, 최선이라 할 만한 것들은 모두 게걸스럽게 삼킨다.

그렇지만 이 도시의 휘황한 풍경의 보이지 않는 장막 뒤에는 필리핀, 스리랑카, 인도에서 온 수많은 건설 노동자들이 그 어떤 권리의 체계와는 아랑곳없이 그 최선과 최고를 만들어내기 위한 노예 노동에 시달리며 살아간다. 그러나 차라리 '두바이 주식회사'의 모습은 새로운 자본주의적 도시의 풍경을 적나라하리만치 투명하게 보여주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어떤 점이지대도 가지지 않은 지옥과 천국이 동거하는 희한한 세계인 두바이를 목격하게 될 때 우리가 예상할 수 있는 것은 불길한 최후일 뿐이다. 과연 어느 누가 이 죄악으로 가득 찬 세계를 좌시하겠는가. 따라서 두바이는 공간을 걸고 윤리적 내기를 걸고 있을 뿐이다.

그렇지만 유사한 논리에 따라 움직이는 이란의 인공도시 아르그에자디드나 아프가니스탄의 카불, 이집트의 도시들은 어떨까. 이 도시들은 너무나 불투명한 것처럼 보일 수밖에 없다. 적어도 이 책에 실린 글을 읽기 전까지는 말이다.

이슬람 혁명을 경과하며 퇴폐적인 서구의 라이프스타일과 가장 거리가 먼 세상으로 변한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이란. 그 나라의 경제자유구역 도시인 아르그에자디드는 자본의 유연함이 무엇인지 잘 보여준다. 보수주의자들의 악몽에 가까운 예측과 달리 자본의 논리는 전통과 관습을 비롯한 모든 것을 형해화시키기는커녕 그것과 화해하며 나아가 그 안에서 더욱 번식하고 성장한다. 본야드라는 이슬람 재단은 이슬람 전통 경제 기관이 되어 이제는 신자유주의적인 개발의 첨병이 되어버린다. 아르그에자디드가 바로 그것을 보여준다. 따라서 서구의 자유주의자들이 갖은 악담을 퍼부으며 자유와 민주주의적 가치의 변방이라고 규탄하는 곳에서 자본은 자유를 만끽한다. 그리고 이로부터 얻은 부를 행사하는 신심 깊은 이슬람 부르주아지들은 쾌적한 환경과 결합된 자신들의 도시에서 행복을 만끽한다.

전쟁 이후의 아프가니스탄의 수도 카불에서 펼쳐지는 정경 역시 이란과 대동소이하다. 탈레반을 몰아내고 미국을 비롯한 연합군의 후원을 통해 자생적인 민주주의 국가로 전환시키겠다는 끝없는 농담을 이제는 아무도 믿지 않지만, 그 저열한 구상이 어떻게 카불이란 도시를 기상천외한 도시로 만들어내는지 알아 볼 필요는 있을 것이다. 민주주의의 복원이란 이름하에 진행된 새로운 개발 계획이 군벌, 정치인, 개발업자들을 배불리기 위해 어떻게 토지 강탈을 묵인하고 나아가 이를 외래 침략자들을 물리친 데 대한 대가로 자축하는 일로 되었는지 그리고 글쓴이가 '군벌 키치'라고 명명한 기괴한 건축 미학을 성행시키게 되었는지 이해하는 것은 단순히 예외적인 부패와 무법의 세계라는 억측만으로는 충분치 않을 것이다.

이는 중국의 베이징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세계적인 스타 건축가들을 총동원하여 연일 기념비적 건축물을 신축하는 중국 도시들의 빌딩 숲 속에서 사회 양극화를 거론하는 것은 이젠 숫제 민망한 일이 되어버렸다. 올림픽 개최를 전후하여 후진타오가 내건 사회적 통합의 슬로건인 '조화 사회'는 박탈당하고 가지지 못한 자들의 울분과 원한을 잠재우는데 그들이 얼마나 발버둥치고 있는지 웅변해줄 따름이다. 그렇지만 이 역시 정실 자본주의의 새로운 혈맥을 잇는 중국 경제의 예외적인 특성 때문이라고 시시덕대는 서구 언론의 말장난을 통해 평가할 수 있는 일이 아닐 것이다. 부유층들이 몰려드는 베이징 외곽의 폐쇄형 주택 단지나 그들이 이용하는 그로테스크한 쇼핑몰 등은 자본의 새로운 운동의 궤적을 통해서만 파악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파르트헤이트를 철폐한 이후의 남아프리카공화국을 둘러싼 환멸의 드라마 역시 요하네스버그란 도시의 비극을 통해 다시금 이해되어야 할지 모른다.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와 좌파 정치 세력의 쇠락에도 불구하고 남아공에서의 변화는 많은 이들에게 세계는 여전히 나은 방향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꿈을 붓는 샘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렇지만 아프리카민족회의는 점진적인 사회주의로의 이행이라는 기대를 저버린 채 '선제 공격식 신자유주의'로 나아갔고, 백인 부르주아 계층과 타협을 통해 보다 자본의 운동에 유리한 세계로 개조하는 남아공식 구조 조정으로 내달렸다. 그리고 그들의 지지 기반이자 운동의 터전이었던 타운십과 거기에 거주하는 대다수 흑인 빈민들을 아파르트헤이트시대보다 못한 빈궁 속으로 내동댕이쳐버렸다. 그리고 요하네스버그를 둘러싼 우리의 응시가 배경을 달리하면 누에바 마나과란 도시로 다시 콜롬비아의 메데인으로 다시 홍콩의 팜스프링스로 이어진다. 이 동종 복제의 공간적 질서를 그저 공간 문화의 지역성 탓으로 돌리는 우리 시대의 흔해 빠진 문화이론은 이제 농담처럼 들려야 마땅하다.

그러나 새로운 자본주의가 생산하는 공간의 착취와 개발이 도시에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세계에서 가장 넓고 비옥한 경작 농지를 보유하고 있으면서도 그리고 녹색 혁명을 경유하였으면서도 농산물 수입국으로 전락해 버렸으며 무토지 농민들의 토지 획득을 위한 운동이 가장 커다란 사회적 이슈가 되어버린 나라인 브라질에서, 도시는 농토의 문제로 바뀐다. 그리고 다시 CNN 창립자이자 세계에서 가장 열정적인 생태운동가로 알려진 테드 터너가 소유한 제주도 네 배 넓이라는 개인 목장이 이어진다. 그리고 이 엄청난 미국 갑부의 기괴한 개인 소유지가 어떻게 생태적인 비전과 새로운 소비 문화와의 제휴를 통해 짭짤한 비즈니스의 원천이 되는지를 배우는 순간, 우리는 다시 저 유명한 미국의 기념비적 쇼핑몰로 들어가게 되고 창궐하는 새로운 개인 미술관들의 세계 속으로 운반된다.

그러나 이 쯤 해두도록 하자. 이 책이 소개하는 우리 시대의 공간을 주유하는 만화경은 서로 다른 수사와 힘으로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는 빼어난 필자들의 글과 해후하면서 누릴 수 있는 쾌락을 반감시키기만 할 것이다. 그러나 어쨌거나 그 어떤 아름다운 솜씨도 지옥을 관람하는 불쾌를 지울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만한 불쾌를 자아내는 책을 근자에 우리가 읽은 적이 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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