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도덕인가>(안진환 이수경 옮김, 한국경제신문 펴냄) 역시 철학계와 일반인 모두를 독자로 삼고 쓴 현실 정치에 대한 정치철학자의 정치 비평 에세이 모음집이다. 이 책을 읽는 미국의 학생 독자들이 정치철학 교과서로 집필된 책보다 낫다는 평가를 할 만큼 현실에 대한 안목을 줄 뿐만 아니라, 진보와 보수 양쪽 모두 이 책을 통해서 다른 쪽을 알게 된다는 호평도 받았다.
샌델의 정치철학은 공동체주의 쪽으로 분류되곤 한다. 샌델은 1981년 <자유주의와 정의의 한계>(초판)에서 롤스의 <정의론>이 칸트 철학의 전통에 서 있는 것을 놓고 비판을 하면서, 이른바 '자유주의-공동체주의 논쟁'의 물꼬를 텄다. 그는 1998년에 이 책의 2판의 서문에서 "자신은 공동체주의자가 아니다"라고 밝혔다. 또 그는 최근에 국내에 소개된 학생들이 인터뷰를 해서 만든 책(<하버드, 철학을 인터뷰하다>)에서 자신을 '시민 참여 공화주의자'로 규정했다. 그러나 학계에서는 국내외를 막론하고 여전히 그를 공동체주의자 진영에 포함시킨다.
▲ <왜 도덕인가>(마이클 샌델 지음, 안진환 이수경 옮김, 한국경제신문 펴냄). ⓒ한국경제신문 |
이 때문에 그는 포럼을 통한 공적 토론을 강조한다. 또 국가와 개인 사이에 놓인 중간 사이즈의 공동체, 즉 시민사회 제도의 역할을 매우 중요시한다. 다시 말해서 도덕 교육의 장으로서의 학교와 마을, 도시 등의 가치를 존중함으로써 시민을 소비자로서만 사는 게 아니라 포럼의 주인공으로, 정치 참여의 역량을 갖춘 민주 시민으로 서게 된다는 것이다.
'시민 참여 공화주의'와 덕 윤리를 옹호하는 입장에서 당연한 주장이다. 최근 그는 영국의 한 대학에서의 윤리 강좌에서도 시장에서 뭐든지 사고팔아서야 되겠느냐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 이런 주장을 하게 된 배경에는 경제 논리의 과잉과 소비 문화의 과잉, 그리고 시민들이 스스로에게 떨어지는 사회정치적 환경에 대해 속수무책으로 있으면서 불안해하는 현실이 있다.
샌델은 자유와 자아에 대한 공화주의적 인식과 자유주의적 인식을 비교하면서, 자유주의 이전의 미국 사회에서 자유의 양은 민주 제도의 역할과 힘의 분산에 따르는 것이었는데, 국가에 힘이 집중된 이후의 시점에서 자유란 단지 국가가 보장해야 하는 권리로서만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고 비판한다.
샌델은 경제적인 삶에 치우진 근대적 삶의 형식을 자유주의 정치철학이 조장까지는 아니더라도 용납하고 있다고 전제하고, 공동체의 가치나 시민의 도덕 교육, 정치 참여를 강조하는 공화주의적 가치를 외친다. 사실 시민의 정치 참여 부분이나 도덕 교육에 대한 강조는 민주주의 이론과도 직결된다. 민주주의란 국민이 정당성과 권력의 원천인 정체를 의미할 때 다수주의와 관련된다. 그러나 민주주의가 자치나 자기결정의 의미를 가질 때 공화주의적 시민 참여와 관련되는 것이다.
시민의 도덕 교육과 유교 전통을 생각해보자. 법적인 권리는 최후의 보루로 남기고 가족 내에서의 도덕 교육에 대한 강조와 가족에 대한 헌신, 그리고 타인의 물질적 복지에 대한 관심, 교육에서의 능력주의 등은 유교의 중심 가치로 일컬어지는데, 이런 유교 전통으로부터 공동체주의적 가치를 끌어낼 수 있다.
그런데 서구의 개인주의 과잉에 대한 우려로부터 유래한 공동체주의를 유교 전통에 익숙한 우리 사회에 적용하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이 질문은 동아시아의 가치와 근대 세계에 대해 연구한 다니엘 벨이 일찍이 던졌던 질문인데 마침 지금 우리에게 적절한 문제가 아닐까?
벨은 샌델이 <민주주의의 불만>이라는 책을 통해서 근로자가 경영에 참여하고 기업 운영에 대해 공동 책임을 가지게 함으로써 시민적 역량을 키우자는 브랜다이스를 인용한 부분을 고찰하면서, 반문한다. 여러 공동체에 대한 헌신 사이의 충돌 문제가 발생할 경우 어떻게 해야 할까?
말하자면 공적인 생활에 대한 헌신은 가족 생활에 대한 헌신과 상충하는데 양쪽에 시간과 에너지를 쏟을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일본의 직장에서의 강한 유대가 긍정적인 면도 많지만, 과로사를 유발하고 가족과 식탁에 앉아 저녁식사를 할 권리를 앗아갈 수도 있다.
한국의 가족주의는 어떤가. 민주주의 정체를 확립하는 데에 가족주의의 결점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는 논의가 쭉 있어 왔다. 자유 시장 자본주의가 가족 공동체의 가치를 훼손한 것이 사실이고, 정치인들의 정치 과정도 부패시켰는데, 시민의 공공생활에 대한 참여가 가능하지 않아, 규제를 다시 관료주의 과정에 맡기는 형국으로만 돌아간다면, 국민들의 정치적 수동성은 샌델의 시민 참여 민주주의와 멀어져만 갈 것이다.
요약하자면 이렇다. 샌델이나 서구 공동체주의자들이 경제적 합리성에 치우치는 정치에 의해 시민이 정치 과정에서 소외되고 공동체의 가치는 저평가되는 데 대해, 공동체주의를 들고 나왔을 때에 유교적 전통을 가진 한국 사회에 던지는 의미는 무엇인지 고민해야 한다.
유교주의가 다른 가치에 대한 고민을 하지 않지만, 서구 공동체주의의 가치 다원주의로부터, 다른 가치의 가능성을 일깨울 수가 있다거나, 가족에 중한 짐을 지우는 데 대해서 다른 공동체의 가능성이 근대 세계에서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든지, 능력주의 임용으로 인해 생기는 시민의 정치적 배제를 다른 방식으로 가능하게 한다든지, 우리의 전통이나 습관이나 관습에 대한 재검토로부터 출발해서 샌델을 봐야 할 것이다.
이 책 <왜 도덕인가>의 에세이들을 아우르는 주제가 한눈에 부각되지는 않지만, <정의란 무엇인가>의 주제를 현대의 이슈에 적용해서 말하고 있다. 말하자면, 개인의 권리나 공정성, 평등이라고 하는 자유주의적인 가치에 호소하는 것만으로는 미국의 민주 사회적 기반으로 충분치 않다는 것이다. 앞서 말한 공동체의 중요성을 인식할 필요가 있고, 정치적인 논란이 도덕의 문제를 직접 다룰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철학적 윤리학자들에게는 낙태나 줄기세포 문제를 종교나 정치계에서만 논의하게 놔두는 데 대해 비판하고, 정치권에 대해서는 생명윤리의 문제 등을 직접 부딪쳐 논의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정계와 학계와 사회를 향해 자신의 논리를 일관되게 꾸준히 주장하는 모습을 배울 수 있다.
샌델의 비판대로 자유주의의 한계는 명백하다. 사적 합리성의 추구가 공적 합리성을 보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유주의자들이 제도적 공리주의나 게임이론 등의 이론으로 현실을 보면서 공적 합리성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만족스러운 정책 결정을 찾아보려고 하는 것이 이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자유주의만의 한계가 아니다.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가 연속 종합 1위를 달리는 와중에 김순덕 논설위원이 <동아일보>에 쓴 칼럼('모두를 미소 짓게 하는 정의는 없다')에서, 주의를 환기시키는 글을 본 적이 있다. 그는 오히려 자유주의 쪽 입장을 더 관심 있게 들여다봐야 하는 것 아니냐며 아마르티아 센이라고 하는 정치철학자도 주목하자고 주장했다.
아주 적절한 지적이라고 생각한다. 센은 개발경제학자이지만 경제와 윤리, 민주주의와 정체성, 인류보편의 가치 등을 오랫동안 고민했다. 그의 통찰에서도 배울 게 많다. 그는 센댈과 다르게 오히려 정체성(개인의 인격적 정체성에서부터 종교나 국가 정체성에 이르기까지)이 도덕과 평화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음을 강조한다.
한국 사회에서 이참에 롤스에게서 정치적 자유의 평등과 최저 수혜자에 대한 관심, 샌델에게서 다수주의에 대한 우려와 시민의 공적 토론의 중요성과 이를 고취하는 교육에 대한 강조, 센에게서 구체적인 복지의 내용에 대한 이론들을 비판적으로 공부하는 분위기가 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다시 말하지만, 롤스, 샌델, 센 등의 이론은 그들의 사회에 대한 비판적 사유에서 나온 것이다. 다른 사회의 경험과 정치 비평에서 배우고 우리 사회의 관습과 의식과 제도를 지탱하는 전제에 대한 비판적 사유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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