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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를 외친 샌델, 이제 '윤리'를 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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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정의'를 외친 샌델, 이제 '윤리'를 논하다

[편집자, 내 책을 말하다] <생명의 윤리를 말하다>

자, 당신이 연구원이라고 가정하고 한번 생각해보자. 당신은 지금 불임클리닉센터에 있고 갑자기 불이 났다. 방에는 여섯 살 난 여자아이 하나와 냉동 배아 스무 개가 있다. 둘 중 하나만 구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당신은 누구를 구하겠는가?

사람들 대부분은 어린아이를 구하겠다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태아의 전 단계인 배아 세포 스무 개를 구하겠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왜냐하면 이 사람은 배아를 '인간'으로 보기 때문에 한 명보다는 스무 명을 구하는 게 더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할 테니까.

또 이런 경우는 어떤가. 청각 장애를 가진 레즈비언 커플이 자신들과 같은 장애를 가진 아이를 갖기 위해서 5대째 청각 장애인 남자에게 정자를 받아 청각 장애아를 낳았다. 이 일이 언론에 보도된 이후, 어떻게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에게 그런 형벌을 줄 수 있느냐며 많은 사람들이 그 커플을 거세게 비난했다.

한편, 비슷한 시기에 하버드 대학교 학보에는 이런 광고가 났다. 불임 부부가 난자 공여자를 찾는다는 광고였는데, 공여자는 키 175㎝ 이상, 날씬한 몸매에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 고득점을 받은 사람이여야 한다는 조건을 달았고, 대가로 5만 달러를 지불한다고 적혀 있었다. 하지만 이 광고를 본 사람들은 광고를 낸 사람들을 크게 비난하지 않았다. 태어나지 않은 아이의 유전적 형질을 부모가 선택한다는 측면에서 이 두 사례는 크게 다르지 않은데, 왜 이렇게 사람들의 반응은 달랐을까.

내친김에 스포츠 게임에서 일어나는 사례를 하나 더 보자. 육상 선수나 사이클 선수, 크로스컨트리 스키 선수처럼 장거리를 뛰는 선수들은 혈액 속에 적혈구의 농도가 높으면 근력이 극대화되기 때문에 좋은 성적을 내는 데 유리하다고 한다. 그래서 일부 선수들은 잘 검출되지 않는 적혈구 농도를 증가시키는 호르몬이나 약물을 사용하기도 하는데, 국제스포츠연맹에서는 선수들이 이렇게 도움을 받는 것을 강력히 금지하고 있다.

그런데 한 유명 스포츠 회사가 인공적으로 고도를 조절해, 선수들이 밀폐된 특정 공간에서 훈련을 받고 잠을 자는 것만으로도 혈액의 적혈구 농도를 올려주는 특수 '고도 조절 훈련소'를 개발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 훈련소는 금지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 훈련소는 괜찮고 왜 호르몬이나 약물 처방을 받는 것은 잘못 됐는가?

올해 출판계와 서점가의 가장 큰 화제 거리는 바로 '정의(Justice)' 열풍이었다. <정의론>의 존 롤스를 비판하는 논문을 발표하며 최연소로 하버드 대학교 교수가 된 마이클 샌델은 국내 일반 독자들에게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학자였지만, <정의란 무엇인가>(이창희 옮김, 김영사 펴냄)를 통해 국내 독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인문서로서는 이례적으로 30만 부 이상 판매된 만만치 않은 이 정치 철학 책의 기록적인 판매 행진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출판평론가나 기자들은 그 이유를 크게 두 가지로 정리했다. 정의가 땅에 떨어진 바로 이 시대에 독자들에게 정의의 의미를 던져 주었다는 점, 누구나 동경할 만한 미국 최고의 대학의 강의실이 개방됐다고 광고한 출판사의 하버드 대학교 마케팅이 효과를 봤다는 것이다.

나는 <정의란 무엇인가>를 읽으며 시대적 의미와 마케팅적 요소 외에 이 책에는 더 큰 힘이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바로 샌델이 주제를 풀어가는 자신만의 독특한 화법이다. 그는 독자를 브레이크가 고장 난 열차 기관사로 만들어 선로에서 일하고 있는 인부들에게 끌고 가거나, 태평양 한 가운데 독자들을 조난당하게 만들어 놓고 자신의 논리를 펼쳐나간다.

또 가격폭리처벌법이나 대리 출산 등 우리 피부에 와 닿는 현실적인 예를 들어 주제를 풀어나가는 데도 능하다. 지금까지 이렇게 '옳은 일(right thing)'이 무엇인지 재미있고도 속 시원하게 이야기한 책이 있었던가? 그래서 나는 이 책, 원서의 부제 '옳은 일이란 무엇인가?'가 마음에 크게 와 닿았다. 이 책은 누구나 한번쯤 고민하는 '옳은 일'이라는 주제를 살면서 우리가 겪어야만 하는 적절한 예를 들어가며 특유의 화법으로 풀어나간다. 바로 이 글 처음에서 들었던 상황들처럼 거기에 우리를 던져놓고 말이다.

▲ <생명의 윤리를 말하다>(마이클 샌델 지음, 강명신 옮김, 동녘 펴냄). ⓒ동녘
<생명의 윤리를 말하다>는 이렇게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보여준 샌델의 화법을 그대로 이어가고 있다. 이 책의 번역 원고를 처음 받아 읽고 든 생각은 "이 사람 어디에 있다가 이제야 나타난 거야?"였다. 마이클 왈저, 찰스 테일러, 알래스데어 매킨타이어 등과 함께 공동체주의 4대 이론가로 알려졌고, 하버드 대학교에서 20년 동안 '정의'에 관한 강의로 미국 언론의 극찬을 받은 그가 드디어 '정의'와는 또 다른 '생명의 윤리'라는 주제를 들고 우리를 찾아왔다.

<정의란 무엇인가>의 열풍 속에서 출간되는 <생명의 윤리를 말하다>는 '정의'와는 또 다른 문제인 '윤리'의 문제를 다룬다. '윤리', '도덕'이라고 하면 먼저 부담감을 잔뜩 느낄 분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걱정은 접어두시라. 탄탄한 논리와 재미있는 비유들, 속도감 있게 진행되는 그의 이야기에 금세 빠져들게 될 테니까. 비록 이 책은 윤리에 관한 전체적인 일반론이 아닌 생명공학 시대의 윤리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지만, 황우석 신드롬 이후 우리에게 던져진 '생명윤리'의 문제를 깊이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 세대와 함께 다음 세대가 꼭 읽어야 할 책이다.

글의 처음에 들었던 여러 예들처럼, 샌델은 생명공학 시대 우리들에게 일어날 수 있는 여러 현실적인 문제들을 우리들 앞에 툭, 던지고 우리가 스스로 그 대답을 찾아가게 한다. 원고 분량이 많지 않아 책은 가볍지만, 이 책에서 샌델이 우리에게 던지는 물음은 진중하다. 생명공학 기술이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까닭, 부모가 아이의 유전형질을 미리 선택하는 것은 옳은가?

무한경쟁 시대, 경쟁력을 갖춘 아이를 만들기 위해 과도하게 공부시키고 유전학적으로 도움을 주는 것이 과거의 우생학과 다를 게 무엇인가? 생명공학의 시대 우리의 인간성을 만들 것인가 아니면 태어나게 할 것인가? 줄기세포 연구를 허용할 것인가? 등등 샌델은 끊임없이 우리들에게 질문을 던진다. 더 나아가 인류가 오랜 역사 속에서 권력자들이 부를 독점해온 것처럼, 그들이 미래에는 생명공학 기술을 독점할 것이라는 우려의 목소리도 담겨 있다.

'완벽하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본적이 있는가. 우리는 모두 완벽해지기 위해 애쓴다. 날씬해지려고 다이어트를 하고, 조금 더 예뻐지기 위해 성형 수술을 하고, 운동선수는 더 좋은 성적을 내기위해 약물을 복용하고 경기에 출전하기도 한다. 아이들은 수능 점수를 더 잘 받기 위해 각성제를 먹고 공부한고, 똑똑한 아이를 낳으려고 '프리미엄' 난자나 정자를 구하며, 우리 엄마들은 뛰어놀아야할 아이들을 학원이나 과외 수업에 보내기에 바쁘다.

세상이 점점 더 경쟁을 강조하고, 그 경쟁의 속도가 빨라질수록 완벽해지고자 하는 우리의 욕망 또한 그 속도를 앞지르려고 할 것이다. 지금의 한국 사회는 점점 더 우리들을 무한 경쟁 속으로 몰아넣고 있다. 바로 여기서 샌델은 우리에게 묻는다. 조금 불완전하면 어떤가? 왜 인간이 완벽해야한다고 생각하는가? 그의 '반론'은 바로 이 물음에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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