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집 <서서비행>(마티 펴냄)의 저자이자, 같은 제목의 북 칼럼을 '프레시안 books'에 연재해 온 활자유랑자 금정연이 2013년부터 새로운 연재 '요설-우스운 소설들의 계보'를 시작합니다. 왜 '요설'인가는 이 글 끝에 필자의 설명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칼럼은 격주로 연재됩니다. <편집자> |
<제1장>
라블레는 어떻게 방귀를 뀌었는가 또는 그의 엉덩이가 품고 있던 놀라운 것들에 관해서
프랑수아 라블레는 <가르강튀아>(<가르강튀아.팡타그뤼엘>(유석호 옮김, 문학과지성사 펴냄)의 서문을 다음과 같은 돈호법으로 시작한다.
고명한 술꾼, 그리고 고귀한 매독 환자 여러분. (내 글은 다른 사람들이 아니라 바로 당신들에게 바치는 것이다.)
나는 그를 따라 이 글을 이렇게 시작할 생각이다.
고명한 트위터리언, 그리고 고귀한 소비자 여러분. (이하동문)
그러니 쉴 새 없이 갱신되는 타임라인과 시시각각 우리를 유혹하는 물건들의 목록 사이에서 바쁜 시간을 쪼개 이 글을 보아주시는 당신들에게 먼저 감사의 인사를 올리는 것이 사람 된 도리가 아닌가 한다. 하지만 나는 도리 없는 사람이므로, 인사치레는 다음으로 미루도록 하자.
그렇다, 아무리 도리 없다 한들 사람은 사람이다.
라블레 또한 도리 없는 사람이었다. 1483년(혹은 1493년)에 태어나 1553년 세상을 떠난(것으로 추정되는) 프랑스 르네상스 시대의 대표적인 작가 겸 수도사 겸 의사 겸 인문주의자. 과거를 미화하고 또 신비화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는 우리의 역사 교육 덕에 이런 교과서적 설명이 그에게 어떤 후광과 거리를 덧씌운다 하더라도, 인정할 건 인정해야 한다. 그의 이름을 딴 라블레시언(Rabelaisian)이라는 단어를 보라. 흔히 "라블레 풍의(섹스와 인체를 풍자적으로 다루는)"라고 알려진 그 단어의 뜻을 아서 골드워그는 이렇게 정의한다.
천하고 무식한 유머. 사내아이들이 방귀 소리를 흉내 내며 놀 때 '라블레시언'이라고 한다. (<이즘과 올로지>(이경아 옮김, 랜덤하우스코리아 펴냄) 548쪽)
'적확하다'는 표현은 바로 이럴 때 쓰는 것이다.
뿡뿡, 뿌우웅웅, 뿌루룽, 뿡! — 이것이 바로 '라블레시언'이다.
라블레의 위마니슴(humanisme) 또한 마찬가지다. 보통 인문주의, 인본주의 등으로 번역되는 그 단어의 뜻을 이 자리에서 설명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만약 그것이 고작 몇 개의 문장을 통해 밝혀질 수 있는 것이라면, 두꺼운 책과 유료 강의를 통해 우리를 깨우쳐주시는 모든 선생님들의 노고를 무시하는 일이 될 것이다. 그러니 미슐레가 창안하고, 부르크하르트에 의해 널리 알려진 "세계와 인간의 발견"이라는 슬로건으로 자세한 설명을 대신하도록 하자.
라블레의 경우, 그가 발견한 것은 똥이었다. 당신이 오늘 아침, 혹은 점심, 아니면 어제, 적어도 지난 한 주 동안 한 번 이상 보았음직한 바로 그것 말이다(다시 보니 이 말은 '정치적으로 공정하지' 못한 것 같다. 무심한 서술에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고 있을 세상의 모든 변비 환자들에게 심심한 위로를 전한다. 참고로 본 필자가 그것을 본 것은 바로 어제였다).
방귀가 잦으면 똥이 나온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 <가르강튀아.팡타그뤼엘>(프랑수아 라블레 지음, 유석호 옮김, 문학과지성사 펴냄). ⓒ문학과지성사 |
라블레의 시대에 그의 작품들은 당연하지 않은 것이었다. 여전히 중세의 신 중심적인 가치관이 지배하던 시절이다. 인간적이고 세속적인 현세의 가치들은 터부시되었고, 먹고 마시고 잠자고 사랑하고 싸고 살아가는 존재가 느끼는 육체적 쾌락은 외설스럽고 음탕한 것으로 치부되었다. 그러니 그의 작품들이 교회에 의해 몇 번이고 거듭해서 금서로 지정되었다고 해서 놀랄 필요는 없다.
놀랍지 않은 것은 그뿐만이 아니다. 오늘날에도 우리는 라블레의 진가를 알지 못한다. 심지어 프랑스에서조차 라블레를 단순한 인본주의적인 사상가로, "유희, 활기, 기발, 음란, 웃음" 등 그의 작품의 진정한 진가를 무시한 채 '진지성(眞摯性)'의 표본으로 가르치고 있다고 하니, 동서를 막론한 우리 시대의 교육이 추구하는 목표라는 것이 하나도 놀랍지 않아 코가 막히는 느낌이다. 쿤데라는 라블레에 대한 '팬심'으로 이런 현실을 비난한다.
그것은 아이러니나 기발한 것 등의 거부보다도 더 나빠. 그것은 예술에 대한 무관심, 예술의 거부, 예술에 대한 거부 반응이고 일종의 '미조뮈즈'(*)야. 라블레의 작품을 일체의 미학적 성찰에서 벗어나게 만들기 때문이지. 사료 편찬과 문학 이론이 점점 더 미조뮈즈해지고 있기에, 오직 작가들만이 라블레에 대해서 흥미로운 무엇인가를 말할 수 있어. ('라블레와 미조뮈즈들에 대한 대화', <만남>(한용택 옮김, 민음사 펴냄) 108~109쪽)
(*뮈조뮈즈(misomusist) : 반문화주의 혹은 반문화주의자. 쿤데라의 <커튼>에는 주석이 없다. 그래서 나는 검색을 통해 어느 독자가 민음사 카페에 쓴 항의문을 통해 비로소 이 단어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 이 얼마나 축복받은 시대인가!
참고로 쿤데라의 책에 주석이 없는 이유는 "쿤데라는 전 세계에 출간되는 자신의 작품에 대해 그 어떤 주석이나 해설이 달리는 것도 허용하지 않습니다. 그 때문에 민음사 판 쿤데라 작품에는 주석과 작품 해설이 없습니다. 또한 작가 약력 역시 쿤데라의 요청대로 단 두 줄로 실리는 형편입니다. 제3자의 해설에 따라 독자들의 판단과 의견, 혹은 감동까지 좌지우지되는 것을 쿤데라가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라고 한다. 이 얼마나 축복받은 작가인가!)
물론, 그가 진정으로 말하고 싶었던 것은 자신이 (축복받은) '작가'이고 그렇기에 라블레에 대한 '흥미로운 무엇인가'를 말할 수 있다는 부분일 것이다. 너무 아니꼽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그는 자신이 틀림없는 작가라는 사실을 스스로 증명한다. 이를테면 이런 말들을 통해서.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의 이야기는 유럽의 소설이 모든 규범에서 벗어나 막 태어나기 시작할 무렵에 쓰였다. 그 책들에는 미래의 소설의 역사 속에서 실현되거나 버려질, 어쨌든 전부 우리에게 영감으로 남게 될 가능성들이 가득 차 있다. 있을 법하지 않은 일, 지적 도전, 형식의 자유 사이를 거닐고 있다. (<커튼>(박성창 옮김, 민음사 펴냄) 구판 110쪽)
과연 쿤데라의 말은, 우리나라에서는 오래전 한물 간 '386 취향의 소설가'라는 오명에도 불구하고, 경청할 가치가 있다.
라블레와 그의 <가르강튀아.팡타그뤼엘>은 소설이라는 장르가 확고한 것으로, 방귀의 뒤를 따르는 똥처럼 자연스러운 것으로 규정되기 직전, 마치 어떤 예감처럼 엉덩이를 간질이지만 그것이 된똥인지 물똥인지 옛날 어른들이 말씀하시던 회충인지 단순히 항문에 난 털인지 혹은 그저 싱거운 헛방귀인지 알 수 없는 순간, 다시 말해 모든 가능성으로 충만하던 시절에 등장했다.
소설은 된똥이나 물똥, 회충이나 제모가 필요한 항문털, 헛방귀가 될 수 있었고, 단지 차가운 곳에 엉덩이를 오래 붙인 탓에 발병한 치질이나 치루일 수도 있었지만, 라블레의 등장 이후, 그의 뒤를 이은 작가들과 완장을 찬 '미학적 검열관'들에 의해 하나의 장르로 규정된 것일 뿐이다. 소설이란 다름 아닌 ㄸ…… 아니, 라블레시언한 비유는 이쯤에서 그쳐야겠다. 대신 이것을 '라블레의 엉덩이'이라고 부르도록 하자. 상자를 열기 전까지 생사를 확인할 수 없는 슈뢰딩거의 고양이처럼, 그의 엉덩이가 소설을 세상으로 내보내기 전까지 우리는 소설이 어떤 것일지 알 수 없었다는 의미에서.
그것이 바로 쿤데라가 라블레의 책들을 가리켜 "미래의 소설의 역사 속에서 실현되거나 버려질, 어쨌든 전부 우리에게 영감으로 남게 될 가능성들이 가득 차 있다"고 말한 이유다. 또한 움베르토 에코가 포스트모던이란 단어가 전가의 보도처럼 쓰이는 현실을 불평하며 "만약 <포스트모던>의 의미가 이런 것이라면, 라블레 또한 포스트모던이다"라고 쓴 이유이기도 하다(거짓말이다. 에코가 이런 말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맥락이 다르다. 다만 내겐 논거를 보충할 권위 있는 이름이 필요했을 뿐이다).
나아가 그것은 '요설'이라는 다소 '과거 지향적인' 이름을 갖고 있는 이 코너가 라블레와 함께 시작될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참고삼아 덧붙이자면 코너명은 '프레시안 books' 편집부의 제안이다. 평소 내가 쓰고 있는 글을 그들이 어떻게 보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알려주는 적절한 예가 아닐까 싶다. 하지만 내게도 양심이란 것이 있는데 "요설饒舌 : 쓸데없이 말을 많이 함"이라는 단어가 부적절한 것이라고 어떻게 말할 수 있었겠는가? 물론 내가 생계를 위해 이 지면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사실은 둘째로 치고라도 말이다.
무엇보다 그것은 우리가 이 자리에서 다루게 될 소설들의 공통점이기도 한 것이다. 내가 속으로만 생각했던 '우스운 소설들의 계보'라는 제목처럼, 이 자리는 우스운 소설들을 위한 자리이고, 그것들은 하나같이 말이 많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혹은, 지금 생각난 건데, '요설'이란 단어가 '요사스러운 소설들'의 약자라고 우기는 건 어떨까? 만약 모두의 예상과 달리 이 코너가 충분히 길게 살아남을 수 있다면, 언젠가는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의 소설을 다루게 될 날도 올지 모른다.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잠깐만 말 끊지 말고, 아직 하고 싶은 말이 남았…, 아니 도대체 뭐하자는 거요?).
잠깐, 이쯤에서 당신은 물을지도 모른다, 아니, 물어야만 한다.
도대체 라블레가 썼다는 그 <가르강튀아>인지 <팡타그뤼엘>인지가 무슨 내용인데?
좋은 질문. 그것이 바로 다음 시간에 우리가 알아볼 내용이다. 미리 말해두자면 <가르강튀아.팡타그뤼엘>은 웃긴, 무엇보다 정말 더럽게 웃긴 소설이다. 물론 이때 '더럽다'는 '어떤 정도가 심하거나 지나치다'는 5번의 뜻과, '때나 찌꺼기 따위가 있어 지저분하다'는 1번의 뜻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
당신들 모두의 쾌변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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