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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 이이는 이단이다!"

[오항녕의 '응답하라, 1689!'] 눈 속에서도 꽃은 피나니 ③

☞연재 지난 글 바로 가기 : 눈 속에서 꽃은 피나니 ②

곡절 끝에 효종이 즉위하였다. 인조가 궁궐 안의 조귀인(趙貴人) 세력이나 친청파(親淸派) 김자점(金自點) 세력에 편중되어 국정을 운영하면서 조선의 정세와 행보는 매우 혼란스러웠던 것이 사실이다. 소현세자의 죽음도 급작스러웠거니와 뒤를 이어 벌어진 옥사로 인한 세자빈 강씨(姜氏)의 죽음에 대해서는 억울하다는 여론이 훨씬 많았다. 조정 신하들도 그다지 수긍하지 못했던 인조의 처사였다.

사관은 인조가 '청나라에 대한 사대를 부끄럽게 여기는 신하들을 항상 미워했다'고 하였다. 그러니까 인조는 척화파를 싫어했다는 말이다. 이는 인조가 친청파 김자점과 가까웠던 이유이기도 하고, 동시에 결과이기도 하다.

하물며 소현세자의 세 아들이 제주로 유배를 갔지 않은가. 소현세자의 큰아들 석철(石鐵)은 귀양 간 지 한 해만인 1648년 9월 제주에서 죽었고, 둘째 석린(石麟)은 12월에 죽었다. 셋째 석견(石堅)만 살아남았으나, 그 역시 22살의 젊은 나이에 요절하였다.(1665, 현종 6년) 민심이 편할 리 없었다. 석철과 석견이 죽은 이듬해 효종이 즉위했다.

흩어진 민심을 수습하고자 효종은 인조대 후반 정치상황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서인(西人) 산림(山林)들을 먼저 조정에 초빙하였다. 문곡 김수항의 할아버지 청음 김상헌에 대해서는 인조가 내내 편치 않게 생각하였던 바 있었다. 남한산성에서 항복하던 때 청음이 안동으로 내려간 일은 그렇다 쳐도, 심양에서 귀국했을 때에도 인조는 청음을 만나려고 하지 않았다. 강빈(姜嬪)의 오라비 강문명(姜文明)은 김광현의 사위였는데, 김광현은 강화도에서 순절한 선원 김상용의 아들이니 청음의 조카이고, 문곡의 당숙이었다. 결국 문곡 집안은 인조와 편치 않았다.

경상도에서 온 상소

18세 때(1446) 성균관 진사시험에 장원을 했던 문곡은 곧바로 성균관에 들어가지 않았다. 아마 인조 말 불편한 상황도 하나의 이유였을 것이다. 부친을 따라 통진(通津, 지금의 김포)을 다녀오든지, 장인 나성두(羅星斗)가 나가 있던 황해도 봉산(鳳山)에 다녀왔다. 22세 되던 효종 원년(1450)에는 성균관에 들어와 있었다.

그때 경상도의 진사 유직(柳稷) 등 900여 명이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의 문묘종사(文廟從祀)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효종 즉위년 12월 홍위(洪葳)와 이원상(李元相) 등이 율곡과 성혼의 종사를 청했다가 효종이 일단 신중히 처리하자고 반려했는데, 그에 대한 반론이었다.
문묘는 공자(孔子)의 사당으로, 성균관 대성전(大成殿)을 말한다. 나라에 국왕의 종묘가 있듯이, 학문의 기준을 공자로 삼는 상징이 곧 문묘였다. 문묘에 배향(配享, 함께 제사를 받음)된다는 것은 곧 학문의 정통성이 사회에서 인정받았다는 뜻이었다. 유직 등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이가 천륜(天倫)을 끊고서 공문(空門, 불교)에 도망하여 숨은 것은 참으로 명교(名敎)에 죄를 얻은 것이니, 그 당시에도 사마시에 뽑혀서 성묘(聖廟)에 배알하는 것을 오히려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성혼은 나라의 후한 은혜를 입고서도 임금이 파천하던 날 달려오지 않은 것은 참으로 왕법에 용서받지 못할 바로서 선묘(宣廟)께서 내린 준엄한 하교가 어제의 일 같습니다.(<효종실록> 권3 1년 2월 22일(을사))

▲ 성균관 대성전에서 열리는 석전(釋奠) 광경. 조선시대에 종묘가 정치적 정통성을 보여준다면, 문묘는 학문의 정통성을 보여주는 곳이었다. ⓒ연합뉴스

양현(兩賢, 율곡과 우계)의 종사는 인조 때에도 제기된 적이 있었으나 조정에서는 시기상조라며 일단 유예한 바 있었다. 유직 등의 상소에 따르면, 이이는 젊어서 불교에 귀의한 적이 있으므로 실절(失節)한 것이고, 성혼은 임진왜란 때 파주에 있었으면서 의주로 파천하던 선조를 호종하지 않았으므로 실절이라는 것이었다.

"그는 이단이다"

또 하나, 관심을 가져야 할 대목은 이이의 학문이 기를 위주로 하고 기(氣)를 리(理)로 인식하여 이기(理氣)를 일물(一物)로 처리한 나머지 양자의 범주적 차이를 무시하고 심(心)을 기로 보았다는 것이었다.

이이의 학(學)은 오로지 기(氣)자만을 주장하여 기를 이(理)로 알았습니다. 이 때문에 이와 기를 같은 것으로 여겨 다시 분별함이 없었으며, 심지어 마음이 바로 기이고 사단(四端)과 칠정(七情)이 모두 기에서 생긴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병통의 근본은 원래 도(道)와 기(器)를 변별하지 않은 육구연(陸九淵)의 견해에서 나온 것으로서 그 폐해는 작용(作用)을 성(性)의 체(體)라고 한 석씨(釋氏)의 주장과 같습니다.

유직 등은 이이가 평소 이러한 점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가 퇴계가 죽은 뒤에 퇴계의 학문을 공격했다고 비난했다. 아울러 "주자의 설을 살펴보면 '이(理)가 있은 연후에 기(氣)가 있다'고 하였으니, 이와 기는 결단코 둘이며 '사단(四端)은 이에서 발하고, 칠정(七情)은 기에서 발한 것이다'고 하였으니, 이것이 이와 기가 호발(互發)한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주자의 정론(定論)이 이토록 명백한데도 오히려 믿지 않았습니다. 이황의 학은 바로 주자의 학이었으니 이이에게서 배척을 당한 것은 당연합니다."라고 하여, 퇴계야말로 주자의 이론과 같았는데, 이이가 헐뜯었다고 강조하였다. 결국 율곡의 학설은 불교의 학설과 같다는 말이고, 곧 이단(異端)이란 뜻이었다.

주리(主理)와 주기(主氣)

그런데 유직의 상소에 '주기'란 말이 나온다. 잠시 주리론과 주기론이라는 용어의 어원을 살펴보겠다. "또한 이이의 학문은 기(氣)자를 오로지 주로 하였다.[且珥之學, 專主氣字]"라는 말이 그것이다.

현재 한국 사상사 논문을 보면 '주리론'이니 '주기론'이니 하는 말이 많이 나온다. 아마 조선시대사에 관심 있는 분들은 들어보셨을 것이다. 나는 '주리론'과 '주기론'이라는 용어에 석사논문을 쓰면서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는데, 사료에서는 거의 발견되지 않는 것을 보고 당황한 기억이 있다. 지금 거론하는 유직의 상소에서 '주기(主氣)'라는 표현을 보고 반가웠을 정도로 희귀한 용어였다.(실록에서 '주리'라는 말은 여기에서 딱 한 번 나온다.)

하지만 주리-주기라는 용어는 이미 훨씬 전부터 사용되고 있었다. 이미 잘 알려진 퇴계와 고봉 간의 사단칠정 논쟁에서도 주리-주기라는 개념을 통해 논의를 벌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그 빈도나 강도로 보아 퇴계나 고봉 당시보다 바로 이 유직의 상소를 전후하여 주리-주기 구도는 훨씬 늘어나고 강화되었다.

퇴계와 고봉(율곡도 고봉과 같은 견해이다.) 사이의 사단칠정 논쟁은, 성리학의 근본적 문제의식, 즉 기(인욕 人慾)의 세계에서 이(천리 天理)의 주재성과 내재성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 하는 데서 파생된 두 경향, 곧 이(理)의 주재성을 기(氣)의 현실성과 별개로 확보하려는 노력(퇴계)과, 이의 내재성을 기의 현실성 속에서 확보하려는 노력(고봉, 율곡) 사이에서 벌어진 논쟁이다. 둘은 얼핏 같은 말 같지만 상이한 편차를 낳는다. 사단칠정 논쟁에서 '주리(主理)'와 '주기(主氣)'는 퇴계와 고봉(율곡)의 입장을 가리키는 말이다.

난감한 개념-구도

유직 등의 상소 전후로 주리-주기라는 말이 쓰이기는 했지만 그걸 사상사의 구도로 정착시킨 것은 일제 강점기의 다카하시 도오루(高橋亨)의 <조선유학사>였다. 그리고 그의 분류가 지금까지 학계에서 널리 통용되고 있다. 그런데 그의 분류에는 문제가 있다.

숙종~영조 연간에 '성인(聖人)과 보통 사람의 마음[心]이 같은가, 다른가', '인간과 동물은 본성이 같은가, 다른가'를 주제로 한 또 한 번의 굵직한 논쟁에서 문제점이 드러난다. 이 논쟁을 호락(湖洛) 논쟁이라고 하는데, 충청도의 남당(南塘) 한원진(韓元震)은 차별성을 주장했기에 호론이라고 불렀고, 같은 충청도 출신이지만 외암(巍巖) 이간(李柬), 문곡의 아들인 농암 김창협 등과 함께 동론(同論)을 주장했으므로 낙론이라고 불린 데서 연유한다.

호락 논쟁에서 굳이 '주기-주리'라는 용어를 쓴다면 당연히 호론이 주리파가 되고, 낙론이 주기파가 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론을 주기파라고 보거나 낙론을 주리파라고 한다. 같은 율곡 제자들인데 호론의 경우 완전히 주리-주기가 뒤바뀌게 되어 '같은 학파-다른 이론'이 되는 것이다. '같은 학파-다른 이론'이란 실로 형용모순이다. 즉 이런 학파는 학파가 아닌 것이다. 분류 자체로도 적절하지 않다.

▲ <한국유학사>의 저자 이병도. 그는 다카하시 도오루가 <조선유학사>에서 썼던 조선시대 사상사를 도식화하기 위해 '주리-주기' 구도를 그대로 차용했다. 그 구도 속에서 조선의 정치는 당쟁(黨爭)이 되고, 사상은 공담(空談)이 되었다. 모르고 차용했다면 어리석은 것이거나 압도된 것이고, 알고도 차용했다면 식민주의자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
한원진 같은 율곡학파의 호론만 그런 것이 아니다. 한때 실학의 발달을 '주기론'에서 찾기도 했는데, 그러자니 율곡의 기호학파에 연원을 둔 북학파는 상관이 없지만, 성호(星湖) 이익(李瀷)이나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의 연원은, 굳이 연결하자면, '주리론'인 퇴계에 닿아있어서 앞뒤가 맞지 않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그래서 나는 '주기-주리'라는 개념이 조선에서 보이는 성리학의 자기화 과정의 역사성을 이해하는 데 방해가 되었으면 되었지, 도움이 되지 못하는 개념-구도라고 생각한다. 이 병폐는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주기-주리'의 개념을 통해 정치사를 설명하면 '실제적인 사상사와 정치사의 분리 현상'이 나타난다. '학파 따로, 정파 따로', 정치에 이념이나 사상이 없고, 학문에 정책이 없다는 말이다. 이 말은 곧 조선시대 정치는 권력 투쟁이었을 뿐이고, 학문은 현실과 무관한 관념놀음, 공리공담이었다는 뜻이다.

다카하시 도오루의 '주리-주기' 논리를 이어받은 이병도(李丙燾)가 여러 유보적 언사에도 불구하고 결국 사단칠정 논쟁과 호락 논쟁을 '관념적 독단' 정도로 이해하고, 나아가 조선 정치사의 흐름을 식민지 시대 일본 학자들의 당쟁론 정도에서 이해하게 되는 근원적 소이가 바로 여기에 있다.

또 올라온 경상도의 상소

유직의 상소가 있고 난 뒤, 다시 경상도의 진사(進士) 신석형(申碩亨) 등 40여 명이 상소하였다. 그들은 유직과는 달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신들이 살피건대, 이이가 문순공(文純公) 신 이황(李滉)을 찾아가 만난 것은 무오년(1558, 명종 13)의 일로서 이때 이이의 나이가 23세였는데, 이황이 즉시 문인 조목(趙穆)에게 글을 보내기를 '후생가외(後生可畏)라고 했는데, 옛 성현이 나를 속이지 않았구나'라고 하였습니다. …… 처음에 이이가 승려였다고 헐뜯으면서 '사마시(司馬試) 때에 알성(謁聖)을 허락하지 않았다.'고 한 것은 계미년에 올린 송응개(宋應漑)의 질투어린 계사(啓辭)이며, 성혼을 처음으로 무함하여 '임금을 버리고 선비를 해쳤다.'고 한 것은 이홍로(李弘老)와 정인홍(鄭仁弘)이 지어내서 모함한 이야기였습니다. (<효종실록> 권4 1년 5월 1일(계축))

이들은 이미 퇴계가 율곡을 인정했다는 점을 들어 둘 사이의 이론적 간극이 문제되지 않았음을 상기시켰다. 또 율곡과 우계에 대한 비방은 곧 송응개와 정인홍이 지어내어 모함한 논거라는 점도 상기시켰다. 송응개는 1583년 율곡의 전력을 문제 삼아 탄핵했다가, 선조가 직접 교서(敎書)를 지어 유배시켰던 일이 있었다, 이홍로와 정인홍은 광해군 때 성혼을 비난했다가 정홍명(鄭弘溟) 등의 반론을 받았고 반정 이후 복주(伏誅)되었다, 그러니 유직 등의 논거는 이미 기각된 논리라는 뜻이었다.

이기(理氣)에 대한 견해도 퇴계와 우계가 같은데 퇴계의 것은 높이고 우계의 것은 내쳤으며, 정인홍 한 사람이 퇴계와 우계 모두 헐뜯었는데 퇴계를 무고한 것은 놔두고 성혼을 무고한 것만 그대로 따라했으므로 공정하지 않다고 비판했다. 결국 이는 율곡과 우계만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퇴계까지도 모르는 것이며, 율곡과 우계만 무고하는 것이 아니라 실은 퇴계까지도 무고하는 것이라고 맹박하였다.

이들은 "우리나라에서 이황은 주돈이(周敦頤)와 정자(程子)에 비유되고 이이와 성혼은 이황에 대해 주희와 장식에 비유됩니다. 후학이 주돈이와 정자는 받들면서 주희와 장식을 배척하는 것은 실로 도리가 아닙니다. 그런데도 시기하고 편벽된 풍조의 결과로 번번이 이황을 편들고 이이와 성혼을 배척하려고 합니다."라는 말로 상소를 정리하였다. 이리하여 상황은 조정 전체의 중대 사안으로 발전하였다. (<효종실록> 권4 1년 5월 1일(계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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