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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장>
로렌스 스턴 혹은 글쓰기의 기술 : 첫 문장은 내가, 다음 문장은 하느님께
지금보다 어리고 민감하던 시절 직장 상사가 충고를 한 마디 했는데 아직도 그 말이 기억난다.
"누군가를 비판하고 싶을 때는 이 점을 기억해두는 게 좋을 거다. 세상의 모든 사람이 다 너처럼 유리한 입장에 서 있지는 않다는 것을" 같은 말이었다면 물론 좋았겠지만, 나는 닉 캐러웨이가 아니고 그 역시 나의 아버지는 아니었다. 세상 모든 직장 상사가 그렇듯 '사려 깊음'이라는 덕목과는 백만 광년쯤 떨어진 그의 말은 다음과 같다.
"야, 마감이 영어로 뭐야? 그래, 데드라인이지. 데드라인이라는 말을 생각해봐. 데드, 죽음. 라인, 선. 넘으면 죽는 선이라는 거야. 죽는다고, 죽어. 알겠어?"
그 이상은 말하지 않았지만 나는 그의 말이 훨씬 더 많은 뜻을 함축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당신이 직장인이라면 내 말을 이해할 것이다. 아직 모른다면, 나는 당신이 영원히 알지 못하길 바란다. 세상엔 알아서 좋지 않은 것들도 있으니까. 이것이 오늘의 교훈이다. 그러니 이 글에서 교훈을 찾는 사람은 여기서 페이지를 닫아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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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치열한 무력을>(사사키 아타루 지음, 안천 옮김, 자음과모음 펴냄). ⓒ자음과모음 |
교훈에는 두 가지가 있다. 앞 세대가 그 때문에 실패했으므로 후세 사람은 그걸 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의 교훈이 하나. 앞 세대는 그 때문에 실패했고 후세 사람도 실패할 것이 뻔하지만, 그렇다고 하지 말라고 할 수도 없는 교훈이 또 하나. (사사키 아타루 <이 치열한 무력을>(안천 옮김, 자음과모음 펴냄) 77쪽)
오늘의 교훈은 후자에 속하는 것이므로, 단순히 '하지 말라'고는 말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어차피 인간은 죽으니 살지 마십시오, 라고 말할 수 없는 것처럼. 알지 못하길 바란다고 말한들 아무 소용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사실은 아무것도 말하지 않은 것이나 다름없다. 직장을 구하지 못한 채 물려받은 유산도 없이 그렇게 살다가 죽으라는 말을 하는 게 아니라면. 물론 그것은 교훈이 아니고, 나는 그런 말을 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 잠깐, 그렇다면 나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글쎄.
일단은 로렌스 스턴과 <신사 트리스트럼 섄디의 인생과 생각 이야기>(김정희 옮김, 을유문화사 펴냄)를 해야겠지. 급할 건 없다. 어차피 250여 년이나 기다린 양반들이다. 조금 더 기다리게 한다고 화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니 조금만 더 세워두기로 하자. 미안합니다, 신사 양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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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사에 대한 반작용이라고 해야 할까. 직장을 그만둔 후로 나는 모든 원고를 마감 직전까지 미루는 버릇이 생겼는데, 그 때문에 애꿎은 편집자의 속을 썩이게 했고, 종종 생명을 위협 당하기도 했다. 그들의 심정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내게도 나름의 이유는 있다. 마감이 코앞에 닥치지 않으면 좀처럼 원고를 쓸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이다. 들지 않는 정도가 아니다.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입을 다문 채 그곳에서 할 수 있는 한 멀리 달아나고 싶은 생각마저 든다. 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외면하는 것처럼. 아, 가능하다면 세상의 모든 책을 태워버리고도 싶다.
하지만 아무리 도망쳐도 자기 자신으로부터 도망칠 수 없다. 죽음도 마찬가지다. 그것이 실존주의의 교훈이다. 그런 게 있다면 말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라면 죽음이라는 확실하지만 언제일지는 모를 무규정적인 죽음의 위협을 외면한 채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반면 마감이란 구체적인 날짜로 못 박히는 것이다. 무작정 외면할 수 없다는 뜻이다. 처음에는 작은 가시처럼 눈에 잘 띄지 않던 마감은, 시간이 흐를수록 조금씩 커지며, 종국에는 커다란 말뚝이 되어버린다 말뚝에 찔리면 되게 아프겠죠. 그러니 별 수 없다. 쓰는 수밖에. 한 마디로, 죽기 싫어서 쓴다는 거다. 천일 하고도 하루 동안 끊임없이 이야기를 늘어놓아야 했던 세헤라자드가 그랬던 것처럼.
그런데 잠깐, 무언가 이상하다. 나는 방금 죽기 싫어서 쓴다고 썼다. 그렇지만 어떤 글쓰기는 때때로 쓰는 이를 죽음에 이르게 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안다. 이를테면 스턴의 경우.
▲ <트리스트럼 샌디 1>(로렌스 스턴 지음, 홍경숙 옮김, 문학과지성사 펴냄). ⓒ문학과지성사 |
그러니 나는 이쯤에서 쓰기를 멈춰야 할지도 모른다. 죽기 위해서 쓰는 글이 오히려 건강을 해쳐 죽음에 이르게 한다면 쓰지 않는 것이 낫다. 어차피 마감이란 상징적인 죽음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이미 너무 많은 말을 했다. 글쓰기에 대한 어쭙잖은 자의식을 늘어놓고 말았다. 세상에, 글쓰기에 대한 자의식이라니! 아시다시피 21세기에 그런 말을 거리낌 없이 뱉을 수 있는 것은 오직 힙합 MC들뿐이다.
오늘도 난 몇 장의 평범한 글을 노트에 적었고
그 대부분은 쓰레기통으로 가요
단어들이 소금 이 까마득한 백지 위를 채우려니
내 영혼이 통째로 쓰라려
- 매드 클라운, 'Get busy' 중에서
Can't sleep now 노트를 펼친 다음
가사를 쓰기로 해 beat를 looping 시킨 다음
문득 밖을 봐
하늘은 깜깜해 can't fly 6년째 but I'm still grindin'
오늘은 더 좋은 가사를 쓸 수 있겠지
백지 위 서툰 솜씨로 그린 단어에 스케치
– 매드 클라운, 'Stars (Feat. 크루셜 스타)' 중에서
아마 오늘 어떤 '문필가'가 이런 글을 썼다면, 그리고 그것에 랩이 동반되지 않는다면, 어떤 멘트가 붙어 RT가 될지는 뻔하다. '리스펙트'란 힙합 용어일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시작한 이 글쓰기에서는 호라티우스의 원칙뿐 아니라 이 세상에 존재했던 어느 누구의 원칙에도 얽매일 생각이 없다"고 당당히 밝힐 수 있었던 스턴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는지. 실제로 그는 <트리스트럼 섄디> 곳곳에 이야기의 흐름과는 아무 상관없는 '스웨거(swagger)'를 늘어놓는다. 심지어 고작 여섯 페이지가 지난 시점에서 이렇게 쓰기도 한다.
세상에는 독서가들도 있지만, 독서가가 아닌 좋은 사람들 역시 수없이 많다는 것을 안다. - 이런 사람들은 당신에 대해 무엇이든,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비밀에 전적으로 가담시켜 주지 않으면 매우 심기가 불편해진다.
내가 이렇게 세세한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는 것은 이런 사람들의 기분을 제대로 맞춰 주고 싶은 순수한 선의와, 또 살아 있는 그 어느 누구도 실망시키기를 꺼리는 내 천성 때문이다. 사실상 나의 인생과 생각 이야기가 세상에 제법 파장을 일으킬 것 같은 데다, 내 추측이 맞다면 모든 계층과 직업, 종파의 사람들을 다 독자로 끌어들일 것이고, - <천로 역정> 못지않게 널리 읽힐 것이고 – 게다가 마침내는 몽테뉴가 자신의 수필집이 그렇게 될까 두려워했던 바로 그대로, 즉 거실 창문 앞에 놓이는 책이 될 것이 분명해 보이니 – 내가 모든 사람들이 제각각 원하는 바를 어느 정도 신경을 써 주어야 할 필요가 있을 것이 아닌가. 그러니 내가 지금까지 했던 방식을 조금 더 고수하더라도 양해해 주기 바란다. (15~16쪽)
이런, 그러고 보니 신사 트리스트럼 섄디 씨를 그냥 세워두고 있었네. 늦었지만 소개합니다. 독자 여러분, 트리스트럼 섄디 씨입니다. 트리스트럼 섄디 씨, 독자 분들입니다. 이 트리스트럼 섄디 씨로 말씀 드릴 것 같으면 1706년 2월 <런던 매거진>에 실린 익명의 서평을 통해 이런 평가를 받으신 분입니다…
▲ <신사 트리스트럼 섄디의 인생과 생각 이야기>(로렌스 스턴 지음, 김정희 옮김, 을유문화사 펴냄). ⓒ을유문화사 |
1760년이면 1, 2권(이라고 해도 국내 번역본 기준으로 200페이지 남짓)이 출간된 시점이다. 트리스트럼 섄디는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킬 거라는 강렬한 확신에 사로잡힌 채 자신의 인생과 생각에 관한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는데, 너무 세세하게 이야기를 늘어놓은 나머지 두 권을 쓸 동안에도 그는 태어나지 않았다. 아직 어머니의 뱃속에 있는 것이다("선생님, 당신과 나로 말하자면 전혀 낯선 사이인데, 나와 관련된 상황을 한꺼번에 너무 많이 알려 주는 것은 합당치 않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자신의 창작 비결을 "첫 문장은 내가 쓰고 그다음 문장은 하느님께 맡긴다는 식으로(다시 말해, 그가 "Hip"이라고 쓰면 하느님이 "Hop"이라고 쓰는 식으로)" 밝히고 있는 스턴의 서술이 장황한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단순히 그것 때문만은 아니다.
이것을 보면 사람이 역사를 쓰는 작업에 착수했을 때, - 그게 그저 잭 히카스리프트의 역사나 엄지손가락 톰의 역사(*민화나 동화, 싸구려 책의 주인공들)에 불과할지라도, 가는 길에 어떤 장애물이나 방해물을 만나게 될지, 어떤 모험을 만나게 될지, - 어떤 춤에 휩쓸리게 될지, 작업이 끝나기 전까진 자기 발뒤꿈치를 못 보는 것만큼이나 모를 일이란 것을 알 수 있다. 노새 몰이꾼이 노새를 몰고 가듯이 역사가가 – 똑바로 앞만 보고 – 이야기를 이끌어 갈 수 있다면, 예를 들어 그 역사가가 로마에서 로레토까지 왼쪽이건 오른쪽이건 고개 한 번 돌리지 않고 똑바로 갈 수만 있다면, - 목적지에 언제 도착할지 한 시간도 틀리지 않게 예측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도덕적으로 말해서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약간이라도 기백 있는 사람이라면, 가는 길에 이런저런 사람들과 어울리느라 직선에서 벗어나 옆길로 새게 되는 상황을 50번도 넘게 만날 것이고, 이런 일은 아무리 애를 써도 결코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는 끊임없이 자기의 눈길을 끄는 정경이나 경치를 만날 것이고, 그가 걸음을 멈춰 그것을 구경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그가 날아다닐 수 없다는 것만큼이나 확실한 일이다. 더구나 그는 여러 가지
처리해야 할 계산,
주워 모아야 할 일화,
판독해야 할 비문,
짜 넣어야 할 이야기,
걸러서 골라야 할 전해 오는 이야기,
방문해야 할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이 대문에는 칭송의 글을,
저 대문에는 풍자문을 갖다 붙여야 할 일도 있을 것이다.
(52쪽)
그래서 그는 그렇게 한다. 스턴과 섄디의 뒤를 이은 디드로가 그의 자크와 주인을 그렇게 만든 것처럼. 끊임없이 이야기의 진행을 지연시키는 동시에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함으로써 독자들을 혼란에 빠지게 하는 것이다. 마치 인생이 우리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것처럼. 당신은 우리가 책을 읽는 이유가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잘 정돈된 이야기를 읽는 기쁨을 누리고 싶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럴 듯한 말이다. 하지만 스턴은 그런 독서를 반대한다. 그는 자신의 책을 주의 깊게 읽지 않는 어느 부인을 질책하며 이렇게 말한다.
그것은 요즘 그녀 외에도 수천 명의 사람들 사이에 퍼지고 있는 아주 사악한 취향을 질책하고자 하는 것이다. - 사람들이 이런 성격의 책을 그 책이 요구하는 식으로 읽어 주면 틀림없이 얻을 수 있는 깊은 학식과 지식은 찾아볼 생각도 하지 않고 이야기 줄거리만 좇으면서 마냥 읽어 가는 현상 말이다. 책을 읽을 때는 현명한 성찰을 하고 참신한 결론을 끌어내는 습관을 가져야 한다. (75쪽)
좋아, 그런데 도대체 <신사 트리스트럼 섄디의 인생과 생각 이야기>가 우리한테 주는 깊은 학식과 지식이 뭐야? 무슨 현명한 성찰을 하고 참신한 결론을 이끌어내라는 거야? 그러니까 그건 바로… *****와 ********라는 것인데, 아아, 자세하게 말하기엔 오늘은 너무 늦었다. 사실 건강을 생각한다면 이 글은 이미 오래전에 끝냈어야 한다.
그러니 독자여, 이만 이 페이지를 닫아주시길.
섄디 씨, 죄송하지만 조금 더 기다려주셔야겠네요.
살아서 만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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