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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감한 형제', 2013년에도 나올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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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용감한 형제', 2013년에도 나올까요?

[오항녕의 '응답하라, 1689!'] 눈 속에서도 꽃은 피나니 ①

인사동에서 나다

문곡 김수항의 어린 시절 기록은 그리 많지 않다. 문곡의 둘째 아들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에 따르면, 문곡은 기사년(1629, 인조7) 8월 1일 사시(巳時 오전9시~11시)에 경성(京城 한양) 대사동(大寺洞)에 있는 외갓집에서 태어났다. 정묘호란 2년 뒤의 일이었다. 대사동은 '큰 절', 그러니까 원각사(圓覺寺)가 있었던 지금의 인사동이다.

원래 청음 김상헌에게 후사가 없어서 둘째 형인 김상관(金尙寬)의 아들인 김광찬(金光燦)을 아들로 삼았고, 따라서 김수항의 본생 할아버지는 김상관이 된다. 5세에 어머니 연안 김씨가 별세하여 외조모 정씨(鄭氏)에게서 컸다. 8세에 글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이때부터 이미 스스로 부지런히 공부하여 번거롭게 꾸짖을 일이 없었다고 한다. 흔히 문집에서 나오는 '주례사 문구'가 아니라, 문곡은 정말 그랬을 듯하다.

어머니가 돌아간 이듬해에 병자호란이 있었다. 필력이 모자라 제대로 전달할 수 있을지 걱정이지만, 내 느낌에 문곡에게는 묘한 차분함이 있다. 할 말을 안 하는 것은 아니다. 이미 숙종이 장희빈에게 유혹되어 정치를 그르칠 때 문곡이 보여준 단호함은 이미 우리가 살펴본 바이다. 그런데 상황을 다 깊이 있게 받아내면서도 차분하다.

겉모습은 '범생이'로 나타난다. 당시에는 그런 말이 없었겠지만 '엄친아' 느낌이 나는데, 색조가 그윽하다. 어머니를 일찍 여읜 생각 깊은 아이. 이 총명하고 생각 깊은 아이에게 기개를 얹어준 것은 청음 김상헌과 선원(仙源) 김상용(金尙容) 두 할아버지였을 것이다.

"담배 피우다 사고 난 것"

문곡이 여섯 살 때 병자호란이 일어나고 일곱 살에 남한산성에서 인조가 청 태종에게 항복하였다. 그 한복판에 청음과 선원, 두 할아버지가 있었다. 선원이 청음보다 형이다. 선원의 생몰연도(1561~1637)에서 알 수 있듯이, 선원은 병자호란 당시 순절했다.

선원은 청음에 비해 결코 부족하지 않은 형이었다. 광해군 1년, 막 시작된 공납제 개혁인 대동법이 광해군과 대북세력에 의해 좌절될 기미가 보이자 도승지로 있던 선원은 경기 백성들과 함께 대동법의 지속적인 추진을 요구하는 연명장을 전달하기도 했다. 아마 선조 때 정주 목사로 지방관을 지낼 때 얻은 선정(善政)의 명성은 허명이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형조판서까지 지냈으나 이이첨이 반대세력을 몰아내려고 조작한 계축옥사 때 연루되었다가 파직되었다. 광해군 6년 다시 등용되었으나, 광해군 9년(1617) 인목대비를 몰아내려는 폐모론에 반대하고 벼슬을 그만두었다.

계해반정 이후 다시 관직에 나왔는데, 이때 선원의 사람됨을 알 수 있는 일화가 있다. 1624년(인조2) 5월, 인조는 체직된 병조판서의 후임으로 선원과 이정구(李廷龜), 이홍주(李弘冑) 세 사람 가운데 누가 나을지 대신들에게 물었다. 좌의정 윤방(尹昉)은 '이정구는 전에 이미 여러 차례 경력이 있으나 강직하기는 김상용에 미치치 못합니다.'라고 하였고, 우의정 신흠(申欽)은 "역량은 이홍주가 나으나, 처사가 공정하기로는 김상용이 낫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인조는 선원을 병조판서에 임명하였다.(<국역 인조실록> 권6 2년 5월 28일(신사))

1636년 4월 후금의 태종은 후금을 청으로 고치고 조선에게 군신(君臣) 관계를 강요하였다. 이를 거부하자, 12월 1일 청 태종은 12만 대군으로 조선을 침략하였다. 청나라 군대는 압록강을 건너 열흘 만에 한양에 육박하였고, 조정에서는 윤방과 선원에게 종묘사직의 신주를 받들고 세자빈 강씨, 봉림대군 등을 인도하여 강화로 피난하도록 하였다. 인조도 밤에 강화로 가려고 했으나 이미 길이 끊겨 남한산성에 피난하였다.

강화 수비의 실패는 수비대장 검찰사(檢察使) 김경징(金慶徵)의 무책임이 지적된다. 1월 22일 적의 선발대가 두 척의 배에 수십 명을 싣고 건너왔는데, 강화유수 장신(張紳)과 김경징은 모두 배를 타고 달아났다. 이 일로 후일 조정에서는 장신과 김경징에게 사사(賜死)하였다.

선원은 일이 이미 끝난 것을 알고 다시 성에 있는 관사로 들어왔다. 성이 함락되려 하자 선원은 하인에게 입었던 옷을 벗어주며 아들에게 전하여 뒷날 허장(虛葬)의 제구로 쓸 수 있도록 부탁하고는 남문으로 향하였다. 선원은 남문에 있는 화약궤에 걸터앉아 불을 질렀다. 나이 77세였다. 폭발이 얼마나 세었던지, 남문루가 날아가 버렸다고 한다. 선원의 시신은 물론 수습할 수도 없었다. 짧은 글이 절명시로 전해온다.

해는 강가에 저물어 가는데 日暮江頭
신의 힘 어찌할 수 없나이다 臣力無何


선원이 하인에게 선원이 "불을 가져오라"고 했을 때, 기미를 알아챈 하인이 불을 가져오지 않았다. 그러나 선원은 남초(담배)를 피우려고 한다고 말하여 불씨를 얻어냈고, 다른 사람들에게 떨어지라고 손짓을 했다. 이때 별좌인 권순장(權順長 1607~1637)과 생원 김익겸(金益兼 1614~1636)이 다가왔다.

"상공께서는 어찌 혼자만 좋은 일을 하려고 하십니까?" 선원은 이들을 말렸다. 특히 김익겸은 아내가 만삭이었다. 뱃속에는 훗날 <구운몽>의 저자 서포(西浦) 김만중(金萬重)이 들어 있었다. 결국 권순장과 김익겸은 선원 곁을 떠나지 않았다.

▲ 선원 김상용이 순절한 강화 남문. 문곡의 서(庶) 사촌형 수전도 13살의 나이로 할아버지를 따랐다.

곁에 13살 먹은 손자 수전(壽全)이 있었다. 하인에게 데려가라고 했음에도 아이는 한사코 할아버지를 떠나지 않으려고 했다. 비록 서손이었지만 수전은 문곡의 사촌 형이었다. 하인 승선(善承)도 운명을 같이 하였다. 이래서 알려진 인물은 다섯 명이었지만, 또 누가 있었는지 알겠는가.(김병기, <조선명가 안동김씨>(김영사 펴냄) 55~59쪽)

시신을 잃은 선원은 옷만 선영이 있는 양주군 도혈리(陶穴里) 언덕에 묻었다. 그런데 이 죽음을 둘러싸고 의혹이 제기되었다. 김상용이 담배를 피우려다 실수로 불이 화약에 옮겨 붙어 죽은 것이지, 순절한 것이 아니라는 소문이었다. 이 때문에 선원에 대한 제사를 일시 보류하고 제문도 짓지 못하게 하였다.(<국역 인조실록> 권35 15년 10월 28일(임술)) 이렇게 되자 승정원을 비롯, 신익성(申翊聖), 강화에 같이 피난했던 강석기(姜碩期)가 실상을 인조에게 적어 올렸다.

이어 아들 김광환(金光煥)·김광현(金光炫) 등이 상소하여 선원에 대한 소문이 억울하다고 말했다. 그런 상황에서 그냥 불을 가져오라고 하면 누가 주겠느냐, 담배를 피우겠다고 해야 주지 않았겠느냐고 반문하였다. 그 상소 중 일부이다.

신들이 강도에 들어가 죽은 아비의 유체를 거의 10일 동안 찾았는데, 성안 사람이 와서 신의 아비에 대한 일을 무척 상세히 말하였습니다. 더러 자기 친족이 남문에서 같이 죽은 자가 있어서, "어찌 혼자만 죽지 남도 같이 죽게 하였는가."라고 울부짖으며 원망하였습니다. 이렇듯 평범한 사람들의 칭찬하고 헐뜯는 말은 다르지만, 신의 아비가 자결한 사실은 자연 엄폐할 수 없습니다.

서울 사는 늙은이 염용운(廉龍雲)이라는 자는 강도로 피란하여 신의 아비가 자결할 때 문루 위에 있었습니다. 신의 아비가 낯빛을 돋우며 염용운을 꾸짖어 물리쳤으므로 결국 원망하면서도 문루를 내려갔다고 합니다. 그가 겨우 문로(門路)에 이르자 불이 났으므로 비로소 신의 아비가 자신을 물리친 까닭을 알았다 합니다. 이것은 모두 사람들이 보고 들은 바, 신의 아비가 자결한 사적(事蹟)입니다.


상소가 올라가자 인조에서는 예조에 대대적인 재조사를 명하였고, 예조에서는 당시 사람들에게 묻고 살펴 상소의 내용이 사실과 부합하다고 보고하였다. 인조는 12월 18일에 선원에 대한 제사를 윤허하였다. 그로부터 3년 뒤, 강화 사람들은 선원을 비롯하여 순절한 이상길(李尙吉)·심현(沈誢) 등에게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지냈다.

"자살하는 척 했겠지요"

형 선원이 강화에서 순절하던 비슷한 시기, 9살 어린 동생 청음은 남한산성에서 항복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항복문서는 최명길(崔鳴吉)이 썼다. 최명길이 국서(國書)를 가지고 비변사에 물러가 앉아 다시 수정을 하고 있었는데, 예조판서 청음이 밖에서 들어와 그 글을 보고는 통곡하면서 찢어 버렸다. 후금의 행태는, 중국 송나라 정강(靖康)의 변란에서 보듯이, 결코 나라를 보존하지 못하게 할 것이라는 말이었다.(송나라는 흠종(欽宗) 정강 2년(1127)에 금(金)나라 태종(太宗)에게 변경(汴京)이 함락되어 휘종과 흠종 부자를 비롯해서 많은 황족과 신하가 사로잡혔던 적이 있다.) 그런데 인조와 최명길은 당시 김상헌의 진정성을 신뢰하지 않았고, 후일 냉소적인 태도를 보였다. <인조실록>은 그 상황을 거의 동영상으로 보여주고 있다.

최명길이 아뢰기를,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데에는 절의를 중히 여겨야 하는데, 위급한 이때에 임금을 버리고 떠나니, 그 의리를 모르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오늘날 나라의 일이 이렇게 된 것은 다 시비가 밝지 않은 데에서 말미암았다. 평소 벼슬이 영화롭고 녹이 많은 때에는 떠나는 자가 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는데, 나라가 위태로워 망하게 되자 앞 다투어 나를 버리니, 누가 동방을 예의의 나라라 하겠는가. 김상헌이 평소에 나라가 어지러우면 같이 죽겠다는 말을 하였으므로 나도 그렇게 여겼는데,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먼저 나를 버리고서 젊고 무식한 자의 앞장을 섰으니, 내가 매우 아까워한다."
하였다. 최명길이 아뢰기를,
"식자들은 다 김상헌이 심술을 압니다마는, 젊은 사람들 중에는 사모하여 본받는 자가 많이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가 임금을 속인 것이 심하다."

하였다. 최명길이 아뢰기를,
"그가 스스로 목을 매어 죽으려 할 때 그 아들이 옆에 있었습니다. 이러고도 죽을 수 있는 자가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김상헌의 일은 한 번 웃을 거리도 못 되는데 무식한 무리는 오히려 남들이 할 수 없는 일이다 하니, 세상을 속이고 명예를 훔치기가 쉽다 하겠다. 호종한 공으로 준 자급까지도 받지 않아서 내가 매우 무안하였다."
하니, 최명길이 아뢰기를,
"그 임금은 범의 굴에 들어갔는데 그 신하는 북문(北門)으로 나갔으니, 고금 천하에 어찌 이런 도리가 있겠습니까."
하고, 또 아뢰기를,
"김상헌이 죽음을 가장하여 아름다운 이름을 얻으려 하였으나, 인간 세상에 어찌 양주학(楊州鶴)이 있겠습니까. 신은 조금도 사사로운 뜻이 없이 나라 안에 시비를 밝히려 할 뿐입니다. 혹 김상헌의 처지를 두둔하는 자가 문산 뇌자(文山腦子)의 말도 끌어대니, 더욱이 우습습니다."
하였다.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양주학(楊州鶴)'이란 많은 욕망을 채우려는 사람을 비유하는 말이다. 예전에 여러 사람이 모여서 각각 뜻을 말하는데, 한 사람은 양주 자사(楊州刺史)가 되고 싶다 하고 또 한사람은 재물을 많이 갖고 싶다 하고 또 한사람은 학을 타고 올라가고 싶다고 했더니, 한 사람이 "허리에 10만 과(貫)의 돈을 두르고 학을 타고 양주에 오르고 싶다" 하여, 세 사람이 욕망을 한꺼번에 바랐다는 일화에서 나왔다.(소식(蘇軾)의 〈녹균헌(綠筠軒)〉에 대한 주석)

또 '문산 뇌자(文山腦子)'는 문천상(文天祥)의 고사이다. 문산은 문천상의 호이고, 뇌자는 독약이다. 문천상이 오파령(五坡嶺)에서 장홍범(張弘範)의 급습을 당하여 휘하 군사가 미처 싸우지 못하고 달아나므로 문천상도 황급히 달아나다가 잡히자 뇌자를 마셨으나 죽지 않았다.(<송사(宋史)> 권418 문천상전(文天祥傳))

최명길과 인조의 말은 김상헌이 죽음을 각오한 듯 척화를 주장했지만 실은 쇼맨십이었다는 것이다. 그걸 보고 젊은 사람들이 따르는데,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고 비웃었다. 인조는 남한산성에 호종한 데 대한 상으로 자급을 올려주었는데 그것을 청음이 받지 않은 것도 서운하게 생각했다. 이해할 수 있는 심정이다. 필자는 20년 전, 청음 김상헌에 대한 논문 발표를 했을 때, 청중석 누군가로부터 최명길이 했던 말과 똑같은 질문을 받았던 기억이 있다.

청음은 국서를 찢은 뒤 엿새 동안 단식을 하며 저항했었다. 68세였다. 청음이 단식을 중지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청나라에서 척화신을 색출하였기 때문이었다. "오랑캐 진영에 끌려가는 것이 싫어서 그걸 피하려고 굶어죽었다는 소리를 듣기 싫다." 그러나 항복은 또 미루어졌다.

마침내 항복하고 한양으로 돌아오던 날, 청음은 노끈과 바지끈으로 자결을 시도했다. 조카들은 삼촌을 알기에 구하지 못했으나, 병조참지 나만갑(羅萬甲)이 방으로 들어가 구해냈다. 이날로 청음은 조정을 떠나 안동 풍산의 청원루(淸遠樓)로 내려가 거처하였다.
▲ 안동 풍산의 청원루. 원래 집은 김반이 지었는데, 누각은 청음이 청나라에서 풀려난 뒤 돌아와 새로 지었다. ⓒ문화재청

전쟁이 끝나고 청음이 안동에 있을 때, 청나라는 명나라 정벌을 위한 군사 징발을 요청했고 청음을 그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심양으로 압송되었다. 이후 6년을 심양에서 보냈다. 그때 청음에 대한 용골대의 평가나, 최명길과 감옥 옆방을 쓰며 화해했던 일화는 앞서 소개한 적이 있다. 청음이 심양으로 끌려갈 때 남긴 시가 있다. 우리에게 익숙한 구절일 것이다.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
고국산천을 떠나고자 하랴마는
시절이 하 수상하니 올동말동 하여라


세한(歲寒) 연후

선원과 청음, 두 형제는 모두 관리로 학자로 실력과 진정성, 책임과 기개를 갖춘 인물이었다. 실제로 병자호란이라는 전쟁 와중에서 극한 상황을 만났고, 그 극한 상황에서도 자신들이 축적해온 가치와 신념대로 살다가 죽거나 타국으로 끌려갔다. 조선 사람들은 이후 두 형제를 오래 기렸다.

사회가 그런대로 격이 있으면 고상한 사람들을 인정하고 북돋운다. 나도 어지간하면 고상하고 품격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동류의식을 갖기 때문이다. 이로써 그 사회는 전반적인 인격적 고양을 경험하는 경우가 많다. 반면 사회가 허접할 때는 고상한 사람이 잘난 사람으로 보인다. 허접한 심성으로 보면 고상한 게 아니라 고상한 '척'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주는 것 없이 밉다. 이래서 그런 사회는 전반적인 인격적 타락을 경험하기 쉽다.

요즘으로 치면 초등학생 나이일 때 문곡은 선원과 청음을 둘러싼 실상과 소문을 보고 들었다. 어머니를 여의 뒤 외할머니 손에서 자라기도 했지만, 청음이 잠시 안동에 은거할 때는 거기서 머물기도 한 것으로 보인다. 할아버지 청음이 심양으로 끌려간 지 3년이 지난 어느 날 문곡은 할아버지를 그리워하며 시를 지었다.

할아버님이 중국으로 가신 뒤 王父西行後
해가 벌써 세 번 바뀌었기에 星霜已變三
하늘가의 이별이 괴로우니 天涯離別苦
슬하에서 받던 사랑 그립구나 膝下憶分甘
밤이면 꿈은 늘 북으로 가고 夜夢長歸北
가을이라 기러기 또 남으로 향하거늘 秋鴻又向南
까마귀 머리 아직 희어지지 않았으니 烏頭猶未白
어느 날에나 떠나간 말이 돌아올까? 幾日返征驂

(* 까마귀……않았으니 : 전국시대(戰國時代) 연(燕) 나라 태자 단(丹)이 진(秦) 나라에 볼모로 잡혀가 귀국을 요청하자, 진왕(秦王)이 말하기를 "까마귀가 희게 되고 말에 뿔이 난다면 돌아갈 수 있으리라"라고 답하였는데, 마침내 천지신명이 도왔는지 그런 현상이 일어나 태자는 돌아갈 수 있었다고 한다.<論衡 感虛>)

'서쪽으로 가신 할아버님을 그리워하며[憶王父西行]'(<문곡집> 권1)라는 시로, 문곡이 15세 되던 1643년에 지은 시이다. 아마 청음을 모시고 갔다가 소식을 전해주곤 하던 인물로 보이는데, 만호(萬戶) 표정준(表廷俊)에게 준 시도 남아 있다. '할아버님의 시를 차운하여 만호 표정준에게 드리다[伏次王父詩韻贈表萬戶廷俊]'라는, 1644년 16세에 지은 시이다.

현우(賢愚)는 평소 분간하기 어렵지만 賢愚平日自難分
어려움 닥치면 비로소 진실 드러나네 及到窮途始見眞
염량에 따라 지조를 바꾸지 않았으니 不以炎涼移志操
그대가 책 읽는다는 사람보다 낫구나 嗟君猶勝讀書人
(* 염량 : 염량세태(炎凉世態)의 의 준말로, 권력이 성하면 아첨하면서 붙고, 권력을 잃으면 푸대접하고 배반하는 세속의 저급한 행태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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