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끈적한 사랑 이야기, 대체 언제 시작하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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끈적한 사랑 이야기, 대체 언제 시작하냐고!

[금정연의 '요설'] <운명론자 자크>②

☞금정연의 '요설' 이전 이야기 바로 가기 : <운명론자 자크>①

<제15장>
선생님, 디드로의 넓적다리는 다른 어느 소설가의 다리보다 더 깁니다


돈 키호테는 자신 앞에 넓게 열린 세상을 향해 떠났다. 그는 자유로이 세상으로 들어갈 수 있었고, 아무 때건 원하기만 하면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유럽 최초의 소설들은 무한해 보이는 세계를 편력하는 여행담들이다. <운명론자 자크>의 첫 장은 길을 가는 두 주인공을 포착하고 있다. 사람들은 그들이 어디서 오는지, 어디로 가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 그들은 시작도 끝도 없는 시간 속에 있으며 아무런 경계도 없는 공간, 창창한 미래로 열린 유럽의 한가운데에 있는 것이다. (<소설의 기술>(권오룡 옮김, 민음사 펴냄) 18쪽)

그것이 바로 <운명론자 자크>(김희영 옮김, 현대소설사 펴냄)에 대해 말하는 일이 그토록 골치 아픈 이유다. 그것은 여행사들이 난립하기 이전에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세계로 떠난 자유여행, 정해진 루트를 가기는커녕 목적조차 불분명한 기묘한 여행이다. "코사무이 6일 - 젊고 트렌디한 휴양지인 코사무이의 고급 풀빌라에서 둘만의 아름다운 시간", "여름 NO.1 북해도(홋카이도) 4일 - 더 매력적인 북해도의 여름! 시원한 바람 부는 북해도에서 여름 안녕!", "섬 속의 島 우도팔경과 제주일주여행 3일 - 고운 모래와 푸른 바다가 있는 우도 실속 여행" 같은 요약이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그건 제법 이상한 일이다. 이 코너에서 다루었던 디드로의 여러 선배들을 생각해보라. 가령 그들이 오늘, 할리우드 영화 제작자 앞에서 자신들의 작품을 '피칭'하는 장면 같은 것을.

*

제작자 – 준비된 사수부터 시작하시죠.
라블레 – 저의 <가르강튀아>는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대중소설 <거대한 거인 가르강튀아의 위대하고도 지고한 평전>을 패러디한 이야기로, 호탕한 거인 왕의 행적을 통해 사회 풍자와 웃음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았습니다. 또한 가르강튀아의 아들 팡타그뤼엘을 주인공으로 한 속편까지 전체 5부작 시리즈로 기획….
제작자 – 좋아요. 시리즈라는 부분이 특히 마음에 드는군. 거인 왕이라, <반지의 제왕>과 <해리 포터>를 잇는 판타지 대작이 될 수도 있겠어. 다음?
세르반테스 – <돈 끼호떼>는 과도한 독서로 머리가 살짝 돌아버린 시골 영감의 이야기인데요, 자기가 기사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는 영감의 기행과 유쾌한 시종 산초 판사와의 브로맨스, 그리고 둘씨네아 아가씨와의 로맨스가 덧붙여진 코믹 어드벤처로….
제작자 – 흠, 브로맨스도 좋고 로맨스도 좋은데, 주인공이 너무 올드하지 않나? 조니 뎁 정도면 그림 나올 거 같으니 나이 수정해서 다시 이야기합시다. 다음?
스위프트 - <걸리버 여행기>라는 제목 그대로, 영국 샌님 걸리버가 소인국과 거인국, 하늘을 나는 섬과 휴이넘의 나라를 방문하며 결국 인간 혐오에 빠지는 이야기입니다.
제작자 – 스위프트 씨, 지금 저랑 장난합니까? 잭 블랙이 주연한 영화 못 봤어요? 표절을 하려면 제목이라도 바꾸던가. (경비원에게) 당장 끌어내! (한숨을 내쉬며) 인간혐오라니… 세상에. 다음!
볼테르 - <캉디드 혹은 낙관주의>는 낙관주의자 캉디드가 우연찮은 일에 휘말려 고향을 떠나 세계를 떠도는 이야기로, 가혹하고 상호 관련이 없는 연속적인 불행이 아주 순진하고 아무런 준비도 없는 사람들의 머리 위로 마른하늘의 소나기처럼 쏟아져 내리지만 결국 살아남아 해피엔딩을 맞는….
제작자 – 그래, 그렇지. 낙관주의! 해피엔딩! 바로 그게 우리의 돈줄이지. 좋았어, 다음.
볼테르 – 아, 여기서 말하는 낙관주의란 일종의 반어법으로….
제작자 – 다음!
볼테르 – 그렇지만 "낙관주의란 나쁠 때도 모든 것이 최선이라고 우기는 광기야!"라는 주인공의 대사가 핵심인데….
제작자 – 다음! 다음!
디드로 - (가만히 제작자를 바라본다.)
제작자 – 귀가 먹었소? 다음!
디드로 – 그러니까 선생님은 지금 제게 <운명론자 자크>에 대한 이야기를 하라는 말씀이시죠?
제작자 – 그렇소.
디드로 – 그러니까 자크라는 하인과 그의 주인이 여행을 떠나는 이야기입죠.
제작자 –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디드로 – 그러니까 무슨 일이 일어난다고 할 수도 있고, 일어나지 않는다고도 할 수 있는데, 일단은 자크가 주인에게 자신의 지난 사랑 이야기를 들려주는 이야기라고 해야겠네요.
제작자 – <타이타닉>이나 <노트북> 같은 액자식 구성인가. 그래, 그렇다면 분명 감동적인 러브 스토리겠지?
디드로 – 그러니까 꼭 그렇다고는 할 수 없고, 자꾸만 끼어드는 사람들 때문에, 그러니까 선생님이 지금 그렇게 하시는 것처럼요. 자크의 이야기가 자꾸 끊기는 이야기입죠.
제작자 – 복잡한 건 질색인데. 그럼 현재 시점에서 주인공들이 추구하는 건 뭐요?
디드로 – 그러니까 주인은 자크의 사랑 이야기를 듣고 싶은데 자꾸 다른 사람들이 자꾸 이야기를 끊고, 다른 사람들은 저마다의 이야기를 하고 싶고, 자크는 말하기를 좋아하지만 사랑 이야기보다는 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할까, 그리고 목이 아플 때면 주인의 사랑 이야기도 듣고 싶고요. 뭐 그런 걸 추구하는 거죠.
제작자 – 뭐야, 당신 예술가요? 폴 토마스 앤더슨이야? 이봐, 지금 당신이 뭔가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 모양인데…
디드로 – 선생님, 인생이란 일련의 오해와 착각으로 이루어집죠. 사랑, 우정, 정치, 재정, 교회, 사법부, 상업, 아내, 남편들의 오해와 착각들.
제작자 – 지금 내 말을 끊은 건가? 자기가 뭐라도 된다고 생각…
디드로 - 물론 자기가 대중의 마음을 꿰뚫고 있고, 작품을 보는 눈을 가졌다고 믿는 영화 제작자의 착각은 말할 것도 없고요.
제작자 – 당장 나가!
(머리를 흔들며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디드로를 커다란 덩치의 경비원이 가볍게 들어 밖으로 옮긴다.)

*

<운명론자 자크>(드니 디드로 지음, 김희영 옮김, 현대소설사 펴냄, 책의 절판으로 인해 이 책의 사진은 인터넷 서점 알라딘의 중고 판매자 '예이제'님께서 올린 사진을 가져왔음을 밝힙니다.). ⓒ현대소설사
그러니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다른 이의 말을 빌리기로 하자. 알다시피 이런 이야기를 요약하려면 적지 않은 품이 드는 법이다. 그리고 누군가의 품을 무시하는 건 옳지 않은 일이다. 내 생각에 그것은 1)좀처럼 2차 텍스트라고는 찾아보지 않는 게으름이거나(60퍼센트) 2)단어 몇 개와 문장 구조를 바꿔 자신의 말처럼 도용하는 뻔뻔함이거나(35퍼센트) 3)쉬운 길도 돌아가는 괴팍함일 뿐이다(5퍼센트). 원한다면 3)을 가리켜 성실함이라고 해도 좋다. 뭐라고 부르건 마감과 적은 고료로 영원히 고통 받는 자유기고가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성격이다. 물론 2)는 아주 권장할 만한 덕목이지만, 아쉽게도 나는 아직 갖지 못했다.

<죽기 전에 꼭 읽어야 할 1001권의 책>(피터 박스올 책임 편집, 박누리 옮김, 마로니에북스 펴냄)는 <운명론자 자크>를 한 문장으로 정리한다. "이 작품은 놀랄 만큼 재미없는 플롯에도 불구하고 놀랄 만큼 재미있는 소설이다." 참으로 명쾌한 문장이다. 봤죠, 이렇게 재미있는 소설입니다, 여러분도 꼭 한 번 읽어보세요, 하고 마무리하고 싶을 정도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2)를 갖지 못했고, 대신 다른 사람의 말을 빌린다.

소설의 서두에서부터 우리는 목적지도 이유도 모르는 여행의 흐름 속으로 빠져들어 간다. 주인은 이런 여행의 무료함과 피로를 달래기 위해 자크에게 이야기를 요청하고, 자크는 그의 사랑 이야기를 시작한다. 싸구려 포도주에 취해 아버지에게 매를 맞고 홧김에 입대를 했다는 이야기며, 전투에서 입은 무릎 부상 이야기, 초가집에서 치료받는 이야기, 그러나 선행을 베푼 대가로 데글랑 성주의 성에 가게 되고 거기서 드니즈를 만나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현재 그들이 하는 여행과 모험 이야기로 자꾸만 중단되고, 그리하여 그들은 도중에 그랑세르 여인숙에서 여장을 푼다. 거기서 데자르시 후작의 변절에 분노한 포므레 부인의 복수극 이야기를 듣게 되고, 다시 여행은 계속되며 감기에 걸려 목병이 심해진 자크 대신 주인이 자신의 불행한 과거 이야기를 한다. 생투앵 기사의 사기에 걸려 아가트와의 결혼을 강요당하다 그녀가 낳은 사생아의 양육비마저 부담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여행의 종말에 그들은 사생아의 집에 갔다가 주인이 10년 만에 우연히 만난 생투앙 기사를 죽이고 도망가자, 대신 자크가 감옥으로 붙잡혀갔다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이 난다.

그러나 가상의 편집자의 결론 덕분으로, 산적떼의 습격을 받아 감옥에서 빠져나온 자크가 드디어는 사랑하는 여인 드니즈와 결혼을 하여, 주인의 사랑을 받으며 스피노자와 제논의 제자들을 만들며 데글랑 성에서 행복하게 살았다는 것으로 이 소설은 막을 내린다. ('작품해설/디드로의 글쓰기' <운명론자 자크> 321쪽)


도대체 무슨 이야기인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만, 단언컨대 이것이 가장 훌륭한 요약이다. 자세한 사정이 궁금하다면 책을 읽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운명론자 자크>는 절판된지 오래니(물론 그것은 내 잘못이 아니다) 결국 모든 것은 내 손에 달린 셈이다. 디드로라면 이쯤에서 목에 힘을 주고 "독자여, 그러니 이 정도라도 볼 수 있는 것에 대해 내게 감사하라"고 말했겠지. 나는 다만 그와 같은 뻔뻔함을 갖지 못한 자신이 원망스러울 뿐이다. - 하지만 이렇게 늘어놓는 것 자체가 이미 뻔뻔스러운 것 아닌가? - 그렇게 생각한다면 독자여, 당신은 아직 뻔뻔함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것이다. - 지난 회 원고는 여름휴가라는 핑계로 대충 때우더니 이번에도 그렇게 하려는 건가? 이게 뻔뻔함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 질문, 질문, 질문. 당신은 내가 <운명론자 자크> 이야기를 하는 것을 원치 않는단 말인가? 이번에야말로 당신이 생각하는 바를 진짜 말해 보라. 이 이야기가 당신 마음에 드는가? 아니면 들지 않는가? 들지 않는다면 창을 끄면 그만이고 마음에 든다면 나를 되바라진 하인과 덜떨어진 주인의 이야기로 돌아갈 수 있도록 내버려두라.

- 어디로 돌아간다고?
- 어디로든.

나는 "92. 11. 14. 土 . 실비아. 저녁 무렵. 산책 나갔다가…"라는 낙서가 있는, 친애하는 동생이 헌책방에서 발견해 내게 선물한 빛바랜 <운명론자 자크>를 집어, 이제는 중년이 되었겠지만 한때는 아름다웠을 것이 분명한 실비아라는 이름의 여인을 상상하며, 혹시나 그녀의 성이 크리스텔이 아니었을까 추측도 하면서, 만약 그렇다면 나의 '개인교수'가 분명할 그녀와의 기억을 잠시 더듬은 후, 일종의 아련함을 안은 채, 아무 페이지나 펼친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문장을 발견한다.

왜 그대는 죽은 사람들에게만 관대한가? 그대가 이런 편파성에 대해 조금만 생각해 본다면 그것이 어떤 사악한 원칙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대가 순진하다면 그대는 내 책을 읽지 않을 것이고, 그대가 타락한 사람이라면 내 책을 별 탈 없이 읽을 것이다… (…) 그대 중의 누가 감히 볼테르에게 <동정녀>를 썼다고 비난할 수 있단 말인가? 아무도 없다. 그렇다면 그대는 인간의 행위를 판단하기 위해 두 개의 저울을 가지고 있단 말인가? "하지만 볼테르의 <동정녀>는 걸작이다!"라고 그대는 말하겠지. - 그거 안됐군, 그렇다면 사람들이 더 많이 읽을 테니. - 게다가 당신의 <자크>는 사실적인 것과 상상적인 것을 멋없이 아무렇게 나열해 놓는 무미건조한 잡동사니에 지나지 않는다. - 그거 잘됐군, 그렇다면 나의 <자크>는 덜 읽힐 테니. (242쪽)

혹시 당신도 눈치 챘는지 모르겠다. 나는 조금 전에 마치 우연의 힘(자크의 표현을 빌자면 운명)에 모든 것을 맡길 것처럼, 어떤 페이지, 어떤 문장이 나오더라도 순순히 따르고 그에 맞춰 이야기를 진행할 것처럼 썼다. 사실이 아니다. 나는 몇 번이고 책을 뒤져 그럴 듯한 문장을 발견하고 그것을 옮겼다. 하지만 독자여, 그것은 사소한 일일 뿐이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비로소 약간의 뻔뻔함을 얻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넓은 아량으로 축해주시길. 그리고 내가 고심해 고른 문장들로 서둘러 돌아가도록 하자.

그대가 어느 쪽 편을 들든 간에 그대는 틀렸다. 내 책이 좋은 것이라면 그대에게 기쁨을 줄 것이고, 나쁜 것이라면 그렇다고 해서 그대에게 해를 끼치지도 않을 테니 말이다. 나쁜 책보다 더 순진한 책도 없다. 나는 그대가 저지르는 바보짓을 여러 이름들을 빌려 쓰며 즐기는 것이다. 그대의 바보짓이 나를 웃기는데 그대는 내가 쓴 것에 화를 내다니. 독자여, 솔직히 말해 우리 둘 중에 더 사악한 사람은 내가 아니다. 그대가 그대 자신을 내 책의 위험이나 권태로부터 보호할 수 있는 것만큼 그대의 비난으로부터 내 자신을 보호하는 일이 쉬울 수만 있다면 난 만족할 것이다! 비열한 위선자여, 날 좀 가만히 내버려두라. 미쳐 날뛰는 당나귀같이 교… 교미하라. 내게 교미하라란 말을 쓰는 것을 허락해 달라. 난 그대에게 그렇게 행동하는 것을 허락할 테니. 내게 그 말을 허락해 달라. 그대는 뻔뻔스럽게 죽이다, 훔치다, 배반하다란 말은 하면서도 그 말은 감히 하지 못하고 입안에서만 어물어물대니 말이다. 소위 상스러운 말이라고 일컬어지는 말은 내뱉지 않으면 않을수록 더 그대의 머릿속에 남아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자연스럽고도 필연적이며 정당한 생식기적인 행위가 어떻게 했길래 그대의 대화에서는 그 표현이 배제되어야 한단 말인가. (같은 쪽)

여기서 '교미하다'라는 말의 자리에 디드로가 쓴 것은 foutre라는 프랑스어다. 네이버 프랑스어 사전에 의하면 "[속어] 여자를 차지하다, 성교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타동사로, 구글 번역기에 따르면 한국어로는 '씨발', 영어로는 'fuck'이라는 단어로 변역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니 화자가 더듬으며 뱉은 문장은 정확히 말해 "미쳐 날뛰는 당나귀처럼 떡… 떡이나 쳐라"가 되어야 할 것이다. - 감히 그런 말을 하다니! - 그렇다면 나는 디드로를 따라 다시 묻겠다. 왜 그대는 죽은 사람들에게만 관대한가? 그렇게 자연스럽고도 필연적이며 정당한 생식기적인 행위가 도대체 어떻게 했길래? - 하지만 당신은 지금 악의적으로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구절을 빌려와 욕을 하고 있지 않은가? - 오해다. 나는 그것이 꼭 필요했기 때문에 인용한 것일 뿐이다. 내가 지금 옮기려는 문장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운명론자 자크>에서 서술 행위와 플롯 사이의 강력한 유비성으로 인해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저자가 서술 도중에 분기, 단절, 재개, 궤도 이탈, 대화 상대방의 호기심이나 의혹과 같은 문제에 부딪힌다면 인물 역시 어떤 이야기를 하느라 작은 액자 구조의 서술자 역할을 할 때면 이와 같은 문제에 부딪히는 것이다. (란다 사브리 <담화의 놀이들>(이충민 옮김, 새물결 펴냄) 213쪽)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운명론자 자크>에서 각각의 인물-서술자가 "이야기를 시작하는" 과정은 두 순간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진다. 하나는 인물-서술자가 시작할 채비를 하는 순간이고 다른 하나는 그가 중단된 이야기를 재개하거나 이어가는 순간이다. 그런데 이 두 순간 사이의 부분, 곧 진짜로 이야기를 시작하는 순간은 텅 비어 있어서 시작은 실어증에라도 걸린 듯 사라진다.
"주인 – 네 연애담을 이제는 들을 수 있겠느냐?
자크 – 누가 알겠어요?
주인 – 아무렇게나 시작하거라.
자크는 자신의 연애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때는 식사 후였고 날씨는 무더웠다. 주인은 잠이 들어버렸다. 그들은 한밤중에 들판 한가운데서 깨어났다. 그들은 길을 잃은 것이다"
여기서 (1)텍스트는 시작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지만 우리에게 시작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2)텍스트는 이 시작이 길을 잃었다는 것을 분명히 말해주지 않고 서술자와 청취자가 대로에서 멀리 떨어져서 길을 잃은 사건을 통해 간접적으로 말해준다. (295쪽)


다시 말해, 이 도무지 요약할 수 없고 설명할 수 없는 이야기의 분위기를 전달하기 위해 디드로의 형식을 흉내 내 글을 쓰던 중 나는 'foutre' 같은 느낌에 부딪혔고, 무리하고 과격한 인용을 통해 내가 'foutre' 그 자체라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드러냈다는 말이다. - 그것이 지금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가? - 글쎄, 솔직히 나도 잘 모르겠다. 다만 한 가지 청을 하고 싶다. - 무엇인가? - 내게 마지막으로 'foutre'라는 말을 쓰는 것을 허락해 달라. foutre!

어쩌면 나는 다른 부분을 인용해야 했는지도 모른다. 자연스럽고 필연적이며 정당하지만 여전히 상스러운 단어 대신에, '사랑'이라는 따듯한 단어가 반복해서 등장하는 아래와 같은 부분을.

그런데도 독자여, 여전히 사랑 이야기라니. 내가 그대에게 한 하나, 둘, 셋, 네 개의 사랑 이야기나 아직도 그대에게 해야 할 서너 개의 사랑 이야기나, 여하간 사랑 이야기는 수없이 많다. 하지만 나는 그대를 위해 글을 쓰는 것이므로 당신이 그렇게도 사랑 이야기를 좋아한다면 당신의 찬사에는 개의치 않던가 아니면 당신의 취향에 따라 사랑 이야기를 계속 써야만 할 것이다. 운문이나 산문으로 씌어진 모든 단편도 사랑 이야기며, 당신의 시도, 비가며 전원시며 목가며 노래며 서한체 시며 희극이며 비극이며 오페라도 모두 사랑 이야기다. 거의 모든 그림이나 조각품도 사랑 이야기다. 당신이 태어난 이래 그대는 오로지 사랑 이야기만으로 양분을 취했으며, 그런데도 당신은 전혀 싫증을 느끼지 않고 있다. 남자며 여자며 큰 아이며 작은 아이며 이런 식이요법에 당신들을 붙잡아놓았고 또 앞으로도 오랫동안 붙잡아 놓을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당신은 싫증을 느끼지 않을 테니까. 사실 그건 놀라운 일이다. 난 데자르시 후작 비서의 이야기가 여전히 사랑 이야기이기를 바란다. 하지만 그것은 사랑 이야기가 아니며 그래서 당신이 지겨워하지나 않을까 두렵다. 데자르시 후작이나 주인, 자크, 그대 독자나 나에게는 안 된 일이지만 할 수 없지 않은가. (198쪽)

투덜대고, 논평하며 종종 가상의 독자와 다투는 둥 끊임없이 텍스트에 끼어드는 '작가' 디드로다. "당신의 취향에 따라 사랑 이야기를 계속 써야만 할 것" 같고 "데자르시 후작 비서(누군지는 중요하지 않다. 자크의 사랑 이야기를 방해하는 수많은 사람 중의 하나일 뿐이다)의 이야기가 여전히 사랑 이야기이기를 바란다"면 그냥 사랑 이야기를 쓰면 될 게 아닌가?

하지만 디드로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것이 그가 바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모두가 바라마지않는 사랑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것. 그렇기에 자크의 이야기는 끊임없이 중단되고, 중단되며 다시 중단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랑 이야기가 중단된 자리를 채우는 것은 여담, 논평, 신소리, 철학적 단상, 소설론, 그 자체로 하나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 단편 들이다. 이리저리 뒤틀리고 깨어진 액자들.

따라서 이 작품은 셀린의 <밤 끝으로의 여행>처럼 사실주의적인 악당소설의 형태를 취하면서도 모든 형태의 글쓰기를 수용하며 동시에 거부하는, 그리하여 장르 규정이나 단일한 의미로의 환원이 불가능한 글쓰기의 모험일 뿐이다. 여행이란 테마의 구체적인 동기도 목적도 밝혀지지 않은, 더구나 새로운 세계나 진리의 발견 같은 것의 상징으로 쓰여지는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여행의 의미와도 거리가 먼 그것은, 에릭 발테르의 지적처럼 글쓰기의 모험을 가리키는 은유로 해석될 수밖에 없다. (…) 그것은 우연과 충동적인 생각의 나열에 몸을 맡기는 상상적인 여행을 의미한다. "나는 나의 성찰의 대상이 떠오르는 대로, 그리고 펜이 움직이는 대로 나의 사고를 따라가게 내버려두겠다. 그보다 더 정신의 움직임과 발걸음을 잘 대변하는 방법은 없기 때문이다"란 디드로의 말은 바로 글쓰기의 그 불확실한 모험, 상상력과 충동에 의한 역동적인 글쓰기의 움직임을 반영한다. (324쪽)

우연과 충동적인 생각의 나열에 몸을 맡기는 상상적인 여행으로서의 글쓰기. 그리하여 '저기 높은 곳에 씌어진' 디드로의 충동과 우연은 자크에게는 운명 그 자체가 된다.

자크는 인간에게 자유가 전혀 없고 또 우리의 운명이 저기 높은 곳에 씌어 있다면 그 외에 다른 무엇이 될 수 있냐고 말했다. 인간은 마치 자기 존재를 의식하면서 산기슭을 굴러가는 공처럼, 영광이나 치욕스런 일을 향해 필연적으로 나아가게 마련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리고 인간이 태어난 처음 순간부터 마지막 숨을 거둘 때까지 그의 삶을 이루는 이런 원인과 결과의 연속을 알았더라면 인간은 필연적으로 해야만 할 일을 했을 것이라는 걸 확신하는 것이었다. (195쪽)

한순간 자크는 이야기와 함께 끝나야만 하는 자신의 운명을 본능적으로 거부하기도 하지만("전 할 수 없습니다. 더 이상 말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운명의 손이 또 한 번 제 목에 와 있어 목을 조르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제발 입을 다물게 허락하여주십시오, 나리"), 그래도 잘 해낸다. 마지막 장면에서 영원한 잠에 빠질 때까지.

"자크, 네가 오쟁이진 남편이 되리라고 저기 높은 곳에 씌어 있다면, 네가 아무리 애를 써도 그렇게 될 것이다. 그 반대로 그렇게 안 될 것이라고 씌어 있다면 그들이 아무리 애를 써도 넌 그렇게 안 될 것이다. 그러니 자거라, 내 친구여…"라고 중얼거렸다.
그리하여 자크는 잠이 들었다. (315쪽)


결국 이것은 근대소설의 초창기에 나타난 위대한 소설이자 소설론인 동시에 위대한 반反소설이자 반소설론이다. 그리고 그것은, 결국 소설이다. 우리가 잃어버린 소설. 모든 것으로서의 소설. "놀랄 만큼 재미없는 플롯에도 불구하고 놀랄 만큼 재미있는", 그런 소설. 한두 마디로 요약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는 소설이다. 그렇다면 이 글은 어떻게 끝내야 할까? 글쎄, 걱정은 뒤로 미루고 일단 잠시 쉬도록 하자. 언젠가의 자크와 그의 주인이 그렇게 했던 것처럼.

"우리 여기서 내려 잠시 쉬도록 하자."
- 왜입죠?
- 십중팔구 네 사랑 이야기의 결말에 도달한 것 같으니 말이다.
- 완전히 그런 것은 아닙죠.
- 무릎에 이르렀을 때는 갈 길이 얼마 안 남는 법이지.
- 나리, 드니즈의 넓적다리는 다른 어느 여자의 다리보다 더 긴걸요….
- 그래도 내리자.
(30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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