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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은 곳에 쓰여 있는 네 글자, '여.름.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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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은 곳에 쓰여 있는 네 글자, '여.름.휴…'

[금정연의 '요설'] <운명론자 자크>①

☞금정연의 '요설' 지난 회 바로 가기 : <미크로메가스.캉디드 혹은 낙관주의>③ "어쨌든 형은 계란을 낳아야 하지 않겠어요?"

<막간의 장 : interlude>
운명론자 자크 혹은 글쓰기의 모험 혹은 여름 그리고…
※이번 장은 드니 디드로의 <운명론자 자크>의 글쓰기를 패러디한 글입니다.

그들은 어떻게 만났는가? 모든 사람들이 그렇듯이 어쩌다 우연히. 그들의 이름은 무엇인가? 당신에게 그게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그들은 어디에서 오고 있었는가? 가장 가까운 곳에서. 그들은 어디로 가고 있었는가? 사람들은 자기가 가는 곳을 안단 말인가? 그들은 무슨 말을 하고 있었는가? 주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자크는 여기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좋고 나쁜 일은 저기 높은 곳에 씌어 있다고 그의 전주인인 대위가 말했다고 한다. (드니 디드로 지음 <운명론자 자크>(김희영 옮김, 현대소설사 펴냄) 11쪽)

*

편집자 – 그래, 지난번에는 낙관주의를 늘어놓더니 이번에는 운명론자란 말이지.
서평가 – 여기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좋고 나쁜 일은 저기 높은 곳에 씌어 있다고 말하는 하인과 그의 주인에 관한 이야기입죠.
편집자 – '저 위의 누군가가 나를 좋아하나봐'(커트 보네거트 <타이탄의 미녀>의 과거 번역본 제목) 같은 건가…
짧은 침묵 후에 편집자는 소리를 질렀다. "그렇게 가는 거지!"(커트 보네거트 <제5도살장>에서 반복되는 대사)
편집자 – 그렇다면 당신이 매번 마감에 늦는 것도 높은 곳에 씌어 있기라도 하다는 건가?
서평가 – 그건 제가 싸구려 술을 마시기 전에, 혹은 마신 후라도, 숙취 해소 음료를 마시는 것을 잃어버리기 때문입죠. 부분적으로는 트위터 때문이기도 한데, 술에 취해 트위터에 주정을 늘어놓다 보면 신세한탄으로 이어지게 마련이고, 그러면 홧김에 책을 불태워야 한다느니 같은 소리를 주절거리게 되는 것입죠. 그러는 동안에도 시간은 흘러 하필 무더위가 시작되는 바람에….
편집자 – 그래서 책도 태우지 못하고 마감 시간을 맞이했단 말이지?
서평가 – 잘 맞추셨네요. 마감이 어김없이 제 뒤통수를 때렸습죠. 다음에 이어질 엉터리 서평도 모두 그 마감 때문이라는 것은 명백한 사실입죠. 세상의 모든 일들은 모두 재갈사슬의 고리처럼 연결되어 있습죠. 마감이 뒤통수를 때리지 않았더라면 저는 예컨대 평생 원고지 한 바닥도 채우지 못하고, 따라서 이런 가망 없는 작업에 매달리지 않았을 테니 말입니다.
편집자 – 그래 엉터리 서평이라는 건 알고 있단 말이지?
서평가 – 그렇습죠.
편집자 – 그리고 그건 마감 때문이라는 거지?
서평가 – 그렇습죠. 그리고 원고료 때문이기도 하죠.
편집자 – 그런 말은 한 번도 한 적이 없었잖느냐.
서평가 – 아마도 그럴 겁니다.
편집자 – 왜 그랬지?
서평가 – 그건 조금 일찍도 조금 늦게도 말해질 수 없기 때문입죠.
편집자 – 그렇다면 이제 모든 이야기를 할 때가 왔단 말이냐?
서평가 – 누가 아나요?
편집자 – 어쨌든 시작해 보게나.

*

▲ <운명론자 자크>(드니 디드로 지음, 김희영 옮김, 현대소설사 펴냄, 책의 절판으로 인해 이 책의 사진은 인터넷 서점 알라딘의 중고 판매자 '예이제'님께서 올린 사진을 가져왔음을 밝힙니다.). ⓒ현대소설사
그러니 이 서평은 이렇게 시작된다. 마감을 몇 시간 앞둔 오후였다. 날씨는 무더웠고 (내면의) 편집자는 잠이 들었다. 그들이 텍스트 주변을 어슬렁거리고 있을 때 혼란이 찾아왔다. 그들은 길을 잃었다. 편집자는 몹시 화가 나 회초리로 서평가를 세게 매질하기 시작했다. 그 불쌍한 서평가는 매를 맞을 때마다 "이것도 필경 저기 높은 곳에 씌어 있겠지"라고 말하곤 했다.

독자여, 그대도 보다시피 내 이야기는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 그리고 내 마음대로 편집자와 서평가를 헤어지게 하고, 그들을 온갖 위험해 처하게 하여 그대로 하여금 <운명론자 자크>의 서평을 1년, 2년 혹은 3년 후에나 듣게끔 기다리게 하는 일도 오로지 내 손에 달려 있다(하지만 정직하게 말하자면 당신은 그저 신경을 끄면 되니, 이 게임은 언제나 당신의 승리다). 어느 출판사에서 정리해고를 하는 방식처럼 편집자를 물류담당자로 발령하거나, 또 다른 출판사들에서 하는 것처럼 서평가를 홍보담당자로 만들어 겉만 번지르르한 찬사를 늘어놓게 한다 해서 누가 뭐라고 말할 것인가? 서평을 쓴다는 것은 얼마나 쉬운 일인가! 하지만 그것은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었으니, 세상엔 그보다 중요한 일이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노벨문학상 유력 후보이자 '오징어 냄새나는 소설을 쓴다'는 평을 동시에 받고 있는 무라카미 하루키 또한 언젠가 이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 <저녁 무렵에 면도하기>(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남희 옮김, 비채 펴냄). ⓒ비채
예전에 어떤 월간지의 서평을 부탁받은 적이 있다. 나는 책을 쓰는 사람이지 비평하는 사람은 아니니 서평은 가능하면 쓰고 싶지 않다. 하지만 그때는 사정이 있어, "뭐, 좋아요, 하죠"하고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냥 하면 재미가 없으니까, 가공의 책을 만들어서 그것을 자세히 평론하기로 했다.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사람의 전기에 대한 서평을 한번 써봤더니 여간 재미있는 게 아니었다. 없는 책을 만들어내는 것이니 그만큼 머리는 써야 했지만, 책 읽는 시간은 절약할 수 있었다. 게다가 거론한 책의 저자에게 "그 자식,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써대다니"하고 개인적으로 원망 살 일도 없었다.

이 가상 서평을 쓸 때는 나중에 누군가에게 "돼먹잖은 거짓말하지 마"하는 항의 편지나, "어디 가면 이 책을 구할 수 있어요?"하는 문의가 오지 않을까, 각오를 단단히 했다. 그렇지만 문의가 한 건도 오지 않아 되레 기운이 빠졌다고나 할까, 그건 그것대로 안심이었다고나 할까. 결국 월간지 서평 따위는 아무도 진지하게 읽지 않는구나 싶었는데 실상은 어떨는지. (<저녁 무렵에 면도하기>(권남희 옮김, 비채 펴냄) 150쪽)


어쨌거나 내가 지금 서평을 쓰고 있지 않다는 것은 확실하다. 서평가라면 틀림없이 언급했을 것들을 무시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내가 쓰는 것을 헛소리로 간주하는 자는 서평이나 고백, 혹은 그 밖의 다른 잡소리로 간주하는 자보다는 덜 오류를 범하는 셈이다. 하지만 그건 공정하지 못한 일이 될 것이다. 그러니 시작도 끝도 알 수 없는 길을 걸으며 끊임없이 신소리를 나누는 자크와 주인의 이야기로 돌아가기로 하자. 시작한 적도 없는 이야기로 '돌아가는' 일은 언제나 근사한 법이다.

그들은 여자에 대해 끊임없는 논쟁을 하기 시작하였다. (…) 이런 논쟁을 하면서 그들은 한 순간도 말을 멈추지 않고 그렇다고 의견의 일치도 보지 못한 채, 아마 지구 한 바퀴라도 돌았을 것이다. 그때 폭우가 쏟아져 그들은 …을 향해 갈 수밖에 없었다… - 어디로? - 어디로라니? 독자여 그대여 호기심은 귀찮을 정도군. 그게 도대체 그대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내가 그곳이 퐁투아즈나 생제르맹, 노트르담 드 로렛 또는 생자크 드 콩포스텔이라 한다 해서 그게 당신에게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당신이 계속해서 고집을 부린다면 난 그들이 …을 향해 가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지. 그렇군. 그렇게 말하지 말라는 법은 없으니… (<운명론자 자크> 33쪽)

그대는 내가 장난친다고 생각하겠지. 자크와 그의 주인에 대한 이야기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에 상상력이 고갈된 사람들이 항상 그렇듯이 저 '패러디'라는 걸로 도피한다고 말이다. 나는 패러디나 표절 등에서 끌어낼 수 있는 모든 풍요로움을 희생하고 그대가 원하는 것을 모두 받아들이겠다. 다만 한 가지 조건이 있다. 그건 자크와 주인의 이야기에 대해서라면 그대가 보통 생각하는 서평이라는 것의 기준을 들이밀어 날 괴롭히지 않기다.

*

그들은 말을 탄 채 길을 따라 걸으며 끊임없이 이야기를 나눈다. 주인은 자크의 사랑 이야기가 궁금하지만, 저기 높은 곳에 씌어진 것들이 그것을 바라지 않기에 자크의 말은 거듭해서 끊기고, 그들은 이런저런 사건들에 휘말린다. 이런저런… 이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이런저런… 사건들이다.

*

서평가 – 나리께서는 제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시는군요? 왜 제 안색이 불길해 보입니까?
편집자 – 아냐 아냐.
서평가 – 다시 말하면 그렇다는 거겠죠. 제가 그렇게 나리를 무섭게 하면 여기서 그만두는 수밖에 없겠군요.
편집자 – 정신이 나갔군. 넌 자신감을 잃었단 말이냐?
서평가 – 아닙니다, 나리. 하지만 어느 누가 자신에 대해 확신할 수 있단 말입니까?
편집자 – 누구든지 선인이라면. 너 또한 조금 전에 이 원고의 진행에 대해 불안감을 느끼지 않았던가? 자, 이제 싸움은 그만하고 자크와 주인의 이야기를 다시 듣자.
서평가 – 안됩니다, 나리. 그 이야기로 돌아가지 맙시다.
편집자 – 넌 나와 독자들이 그 이야기를 더 이상 알기를 원치 않느냐?
서평가 – 항상 원하고 있습죠. 하지만 운명이 원치 않습죠. 이미 1992년에 흠 없는 번역본이 나왔던 그 책이, 이미 작자도 죽고 없어 저작권료도 없을 그 책이 절판된 후 지금까지 개정판이 나올 생각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나리께서도 보시지 않으셨습니까? 다시 말해, 제가 아무리 서평을 늘어놓아봤자 독자들이 그 책을 읽을 수도 없다는 뜻이고요. 아니, 이왕 이렇게 된 거 제가 무슨 소리를 늘어놓건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입니까? 마침 저기 높은 곳에도 그렇게 씌어 있습죠.
편집자 – 뭐라고? 네 눈에는 저기 높은 곳에 씌어진 것들이 보인단 말이냐. 그래, 그럼 그 다음에는 뭐라고 씌어 있느냐?
서평가 – 그게… 너무 멀어서 잘 보이진 않습니다만 대충 "넌 아팠지만 다 나았고 해야 할 일이 있다…"(커트 보네거트의 소설에 등장하는 보코논 교의 교리)라고 적혀 있는 것 같습니다만…

그러나 자크가 탄 말은 다른 의견이었다. 갑자기 날뛰기 시작하더니 늪으로 달려가는 것이었다. 자크가 고삐를 짧게 쥐고 무릎으로 꽉 붙들어 늪의 낮은 곳에 말을 멈추게 하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그 고집 센 짐승은 전속력으로 돌진하여 언덕을 올라가더니 갑자기 멈춰 서는 것이었다. 자크가 주위를 돌아다보니 교수대 사이에 서 있는 것이었다. (54쪽)

독자여, 만약 다른 사람 같았으면 아마도 이 교수대에 무시무시한 처형자를 세워 두고 자크와의 서글픈 해후를 주선했을 것이다. 혹은 자크 대신 가련한 서평가를 그곳으로 보내도 좋다. 어쨌거나 내가 당신에게 그렇게 말했다 한들 당신은 그 말을 믿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는 그보다 더 기이한 우연도 있는 법이고, 그렇다고 해서 사실이 아닌 것은 아니니까. 그러나 교수대는 비어있었다. 대신 교수대 옆에는 커다란 팻말이 놓여 있었다.

말이 숨을 돌리도록 잠시 내버려두자 말은 스스로 언덕을 내려와 늪을 건너더니 자크를 주인 옆에 다시 데려다놓았다. 주인이 말했다.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느냐? 네가 죽을 줄 알았으니… 하지만 넌 딴 생각을 하고 있구나.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자크 – 제가 거기서 본 것에 대해서요.
주인 – 뭘 봤는데?
자크 – 교수대, 형장이요.
주인 – 제기랄, 나쁜 징조군. 하지만 네 학설을 기억해라. 그것이 저기 높은 곳에 씌어 있다면 네가 무슨 짓을 한들 넌 결국 교수형에 처해지게 될 것이고, 만약 씌어 있지 않다면, 말이 거짓말한 셈이 되겠지. 말이 영감을 받은 것이 아니라면, 변덕을 부리는 경향이 있으니 조심해야 되겠군… (55쪽)


나는 이쯤에서 쓰기를 그만두고 잠시 웃는다. '말'이 '거짓말'을 한 셈이 된다는 주인의 말 때문이다. 그 말이 무슨 말이건 간에 무척 웃기는 말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 잠깐, 그런데 교수대 옆에 있는 팻말에는 무슨 말이 적혀 있었지? - 독자여, 그대가 내 말을 중단하고 또 나도 매번 중단한다면 자크와 주인의 이야기는 어떻게 되겠는가? - 아니, 아니, 팻말 이야기를 해달라. - 잠시 동안의 침묵 후에 자크는 이마를 비비며 귀를 흔들었다. 마치 사람들이 불길한 생각을 떨쳐 버리려고 할 때 하는 것처럼. 그러다 갑자기 말을 했다… - 팻말 이야기, 팻말 이야기를 해달라고. - 그냥 어느 곳에나 있는 평범한 팻말일 뿐이다. 그것이 당신과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 팻말 이야기를 해달란 말이다. - 안알랴줌. - 짱시룸. - 좋아, 당신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도록 하지. 대신 화는 내지 않기오. - 화는 내지 않겠소.

자크가 바라본 팻말에는 커다란 글씨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여, 름, 휴,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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