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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형은 계란을 낳아야 하지 않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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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형은 계란을 낳아야 하지 않겠어요?"

[금정연의 '요설'] <미크로메가스.캉디드 혹은 낙관주의>③

☞금정연의 '요설' 지난 호 바로 가기 : <미크로메가스.캉디드 혹은 낙관주의>② 긍정 사기꾼을 디스! '불평 트위터리안'의 원조는…

<제14장>
닥터 팡글로스 혹은: 캉디드는 어찌하여 낙관을 멈추고 정원을 가꾸게 되었는가


캉디드는 베스트팔렌 지방의 고귀하신 툰더 텐 트론크 남작의 성에서 자랐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가능한 최선의 세계 안에 존재하는 모든 성들 가운데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성으로 이름 높은 곳이었다. 전화투표를 통해 세계 7대 경관을 선정해준다는 '뉴세븐원더스' 같은 재단도 없던 시절이다(그러니 그것이 국제사기일 가능성은 생각하지 않아도 좋다). 그렇다면 툰더 텐 트론크 남작의 성은 어떻게 가장 아름다운 성이라는 타이틀을 얻게 되었을까? 바로 '충족이유율'과 '인과율' 덕분이다.

라이프니츠는 충족이유율과 인과율을 사용해 자신의 낙관주의 철학을 펼쳤다.

신은 모든 측면에서 완전하다(이는 신에 대한 표준 정의를 구성하는 부분이다). 이로부터 신은 우주를 정확하게 자신이 고안한 형태로 만들기 위한 훌륭한 이유를 가졌음에 틀림없다는 결론이 따라 나온다. 아무것도 우연에 맡겨질 수 없었다. 신은 모든 측면에서 절대적으로 완전한 세계를 창조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세계를 신으로 만들 터인데, 왜냐하면 신은 존재하거나 존재할 수 있는 가장 완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은 가능한 세계들 중에 가장 좋은 세계, 즉 이런 결과를 성취하기 위해 필요한 가장 적은 악이 도사린 세계를 만들었음에 틀림없다. 작은 부분들을 결합하는 데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은 있을 수 없었다. 어떠한 설계도 더 적은 악을 사용하여 더 많은 선을 산출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나이절 위버턴 <철학자와 철학하다>(이신철 옮김, 에코리브르 펴냄) 117쪽)

남작 집안의 예언자이자 가정교사인 팡글로스는 라이프니츠의 이론을 빌려, 남작의 성과 몸무게가 대략 158킬로그램은 되는 남작 부인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사실을 완벽하게 증명해낸다.

"사물들이란 달리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 증명되었습니다. 모든 것은 한 가지 목적을 위해 만들어졌으며 반드시 최선의 목적을 위해 존재하기 때문이지요. 코는 안경을 걸치기 위해 만들어졌고 그래서 우리는 안경을 쓰는 겁니다. 두 다리는 바지를 입기 위해 만들어졌고 그래서 우리는 바지를 입는 것이지요. 돌멩이는 다듬어져서 성을 쌓기 위해 그런 모양이 되었고, 그렇기에 영주님은 너무나 아름다운 성을 가지고 계십니다. 이 지방에서 가장 훌륭한 남작은 가장 훌륭한 곳에서 사셔야 하니까요. 돼지는 잡아먹히기 위해 태어났으니 우리는 일 년 내내 돼지고기를 먹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것이 선이라고 주장하는 것만으로는 말이 안 됩니다. 모든 것이 최선이라고 말해야 하는 거죠." (<캉디드 혹은 낙관주의>(이병애 옮김, 문학동네 펴냄) 48쪽)

과연 팡글로스에게는 모든 것이 최선이었다. '그렇기에'라는 마법의 접속사 덕분에 남작의 성에서 가장 훌륭한 스승으로 명성을 떨치며 행복하게 지내고 있었으니까. <꿈꾸는 다락방>(국일미디어 펴냄)을 통해 베스트셀러 저자가 됨으로써 '생생하게(vivid) 꿈을 꾸면(dream) 이루어진다(realization)'는 자신의 이론(라이프니츠도 울고 갈만한 아름다운 수식 'R=VD')을 스스로 증명한 우리 시대의 어느 작가처럼, 그는 자신이 설파하는 낙관주의 철학의 살아있는 증거였다. 그야말로 지행일치다.

그렇다고 팡글로스를 곡학아세하는 사이비 철학자라고 오해하면 곤란하다. 그는 시대의 참스승이었고, 참스승답게 강의실 밖에서도 학생들을 가르치기를 멈추지 않았다. 남작의 딸 퀴네공드가 숲을 산책하다 무성한 잡초 사이에서 그의 모습을 목격했을 때도, 팡글로스 박사는 '갈색머리에 대단히 예쁘고 온순한 남작 부인의 하녀'에게 '신체 실험 강의'를 하는 중이었다.

퀴네공드는 과학적 재능이 뛰어났으므로 그 증인이 되어 반복되는 실험을 숨죽이고 지켜보았다. 그녀는 박사가 말한 '충족 이유'와 '원인과 결과'를 분명하게 이해하게 되었고, 자신이 젊은 캉디드의 '충족 이유'가 될 수 있고 캉디드도 자신의 '충족 이유'가 될 수 있으리라는 상상을 했다. 그리고 몹시 흥분한 상태로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자신도 학자가 되고 싶다는 열렬한 욕망을 가득 품은 채 발걸음을 돌렸다. (50쪽)

▲ <미크로메가스.캉디드 혹은 낙관주의>(볼테르 지음, 이병애 옮김, 문학동네 펴냄). ⓒ문학동네
그러니까 그녀는 아무런 인과관계도 없는 두 '단자'가 자애로운 신의 뜻에 따라 '예정된 조화'(라이프니츠의 모나드론 또는 빅토리아 베컴이 몸담았던 그룹 스파이스 걸스의 노래 '2 become 1'을 참고할 것)를 이루는 성스러운 순간을 목격한 것이다. 아,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이론과 실천의 합일인지! 그러니 그녀가 그 자리에서 학문([발음 : 항문])을 향한 주체할 수 없는 감동에 젖어버렸다 해도 놀랄 일은 아니다.

하지만 이어진 결과는 다소 의외였다. 성으로 돌아오는 길에 캉디드를 만난 퀴네공드의 얼굴이 붉어졌고, 캉디드의 얼굴도 따라 붉어졌으며, 다음날 병풍 뒤에서 만난 수줍은 청춘남녀가 예정된 조화를 따라 입을 맞춘 것 까지는 좋았다. 문제는 또 하나의 아름다운 합일이 시작되려는 순간, 병풍 근처를 지나던 남작이 이 '원인과 결과'를 보고야 말았다는 사실이다. 남작은 캉디드의 엉덩이(또는 항문)를 발길로 걷어차고는 바로 성에서 내쫓았다. 잠시 기절했던 퀴네공드는 정신이 들자마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남작 부인에게 대략 158킬로그램의 중량이 실린 싸대기를 맞았다. 모든 것이 최선인 세상에서 캉디드와 퀴네공드에게 닥친 첫 번째 불행이었다. 불행은 이제 시작일 뿐이었다. 볼테르는 주요 인물을 소개하고, 곧 조롱거리로 만들 철학을 늘어놓고, 교육을 위한 정사와 두 남녀의 입맞춤 장면을 그리고, 이어진 불행을 그리는 데 고작 4쪽(정확하게는 3쪽 반)을 할애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우리에겐 아직 156쪽이 남았다.

이어지는 것은 물론 낙관주의에 대한 맹렬한 공격이다. 신실한 낙관주의자이자 낙원에서 추방당한 탕아 캉디드는 네덜란드에서부터 포르투갈, 남아메리카, 프랑스, 영국, 베네치아, 터키를 유랑하며 당대에 일어났던 온갖 사건을 몸소 겪는다. 1755년의 리스본 대지진, 종교재판소의 화형식, 식민 정책을 반대했던 파라과이의 예수회 신부들과 열강의 갈등, 매독, 지중해와 대서양을 무대로 벌어지던 해적질, 모로코의 대살육전, 그 밖의 온갖 자잘하고도 구차한 작은 사건들까지…. 볼테르는 캉디드가 겪는 이 모든 수난이 '가능한 최선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최선의 일'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끊임없이 상기시키며 순진한 낙관주의를 철저히 조롱하고 있는 것이다.

놀라운 건 이 모든 일들이 고작 남은 156쪽 안에서 펼쳐진다는 사실이다. 더 놀라운 건 닉 혼비의 제보에 따르면 영역본은 총 90여 쪽이라는 사실, 나아가 이탈로 칼비노의 말을 믿는다면 그가 본 판본은 고작 80쪽(그는 <캉디드>를 가리켜 '80페이지 안에 세계 구석구석을 비추는 영화'라고 표현한다)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해답은 바로 리듬과 속도에 있다.

오늘날 <캉디드>가 우리에게 읽는 즐거움을 주는 것은 그것이 '철학소설'이기 때문도, 특유의 풍자가 넘치기 때문도 아니다. 물론 뒷부분으로 갈수록 점점 더 뚜렷해지는 어떤 도덕관념이나 세계관 때문은 더욱 아니다. 이 책이 주는 재미란 바로 그 리듬에 있다. 불운한 사고와 온갖 수난과 학살이 빠른 속도로 민첩하게 매 페이지마다 경합을 벌이듯 이어지고 장이 넘어갈 때마다 튀어나오며 이야기별로 갈라져 나가거나 증식하는데, 이 때문에 독자들은 숨 가쁜 흥분과 원시적인 활력을 흠뿍 느끼게 된다. (…) 유머 작가로서의 볼테르가 구사한 이 위대한 발견은 코미디 영화에서 가장 즐겨 사용되는 유머 기법이기도 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재앙이 정신을 못 차릴 만큼 빠른 속도로 덮치는 것이다. (이탈로 칼비노 <왜 고전을 읽는가?>(이소연 옮김, 민음사 펴냄) 156~157쪽)

▲ <왜 고전을 읽는가>(이탈로 칼비노 지음, 이소연 옮김, 민음사 펴냄). ⓒ민음사
성에서 쫓겨나 들판을 헤매다 불가리아 군에 징집된 캉디드는 첫날엔 곤봉 서른 대, 이튿날엔 곤봉 스무 대를 맞고 셋째 날에는 2000명이 넘는 연대원에게 돌아가며 서른여섯 대씩 맞은 후 가까스로 군대를 탈출해 정처 없이 떠돌던 중 "종기가 잔뜩 나고 눈빛은 퀭하고 코끝은 빨갛고 입은 비뚤어지고 이빨은 누렇고 목구멍에서 그렁그렁 소리가 나고 심한 기침으로 괴로워하"는 거지를 만난다. 거지의 정체는 바로 팡글로스. 한때 잘나가던 철학 선생은 옛 제자에게 불가리아인들이 성을 침략해 퀴네공드는 겁탈을 당할 만큼 당한 후에 병사들한테 배가 갈라져 죽었고, 남작의 머리는 박살났고, 부인은 난도질을 당했으며, 성에는 돌멩이 하나, 헛간 한 채, 양 한 마리, 오리 한 마리, 나무 한 그루 남아나지 않았다는 소식을 전해준다. 그렇다면 팡글로스가 이렇게 끔찍한 몰골이 된 '원인과 결과'와 '충족 이유'는 무엇인가?

"저런! 그건 사랑 때문이네. 사랑, 인간의 위로자이며 우주의 수호자, 감각 있는 모든 존재의 영혼인 부드러운 사랑 말일세." 팡글로스가 말했다.
"아아! 사랑, 저도 압니다. 이 사랑, 마음을 지배하는 군주, 우리 영혼의 영혼이지요. 제게 사랑은 한 번의 입맞춤과 스무 번의 발길질입니다. 그런데 그 아름다운 원인이 어떻게 당신에게 이토록 무서운 결과를 낳았단 말입니까?" 캉디드가 말했다.
팡글로스는 이런 말로 대답했다. "나의 사랑스러운 캉디드! 자네도 파케트를 알겠지. 우리 존귀하신 남작 부인의 귀여운 시녀 말일세. 나는 그녀의 품에서 천국의 행복을 맛보았는데, 그것이 지금 자네가 보다시피 나를 집어삼킨 지옥의 고통을 낳았다네. 그녀는 성병에 걸려 있었고 아마도 그 때문에 죽었을 게야. 파케트는 꽤나 학식 있는 성 프란체스코 수도회 수사한테서 그 선물을 받았지. 역사는 거기서부터 시작되었다네. 왜냐하면 그 수사는 늙은 백작 부인에게서 그 병을 옮았고 백작 부인은 기병대장에게서, 기병대장은 후작 부인에게서, 후작 부인은 어느 시동에게서, 시동은 한 예수회 수사에게서 옮았다니까. 그는 수련 수사 시절에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일행 중 한 사람에게서 직접 그 병을 옮았다네. 나는 아무한테도 옮기지 않을 걸세. 나는 죽어가고 있으니까." (61쪽)


원인과 결과, 혹은 팡글로스의 매독을 둘러싼 하나의 작은 '역사'는 볼테르의 손에서 일종의 '케빈 베이컨 게임'이 되어버린다. 아홉 명의 남녀와 (최소한) 여덟 번의 섹스가 얽혀 있는 복잡다단한 계보 속에서 개개인의 사연들은 깨끗하게 제거한 채, 날렵한 솜씨로 성직자와 공직자와 귀부인들의 풍기를 풍자할 뿐이다.

그들은 우연히 만난 자크라는 인물의 도움을 받아 병을 치료하고 일자리를 얻어 배를 타고 리스본을 향하지만 대지진이 일어나 배가 침몰한다. 흥분해서 자신을 때린 수부를 구하려던 자크는 죽고, 살아남은 것은 캉디드와 팡글로스 그리고 그 못된 수부뿐이었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논리의 마술사 팡글로스가 이 모든 현상의 '충족 이유'를 완벽하게 설명해내는 동안, 대화를 엿듣고 있던 종교재판관의 첩자에 의해 체포된 스승과 제자는 종교재판에 회부된다. 한 사람은 사제 같은 태도로 말했고 다른 사람은 그 말을 들었다는 게 그 이유였다. 교회는 지진으로 상심한 사람들을 달래줄 무언가가 필요했고, 그래서 몇 사람을 태우기로 결정한 것이다(지진과 종교재판의 상관관계에 대해서는 1647년 산티아고 대지진을 다룬 클라이스트의 단편 '칠레의 지진' 참고).

하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팡글로스는 교수형에 처해진다. 스승의 죽음을 바라보며 "이곳이 가능한 세계의 최선이라면 도대체 다른 세상은 어떨까?"라는 절박한 질문을 던지던 캉디드는 볼기 몇 대를 맞은 후 석방되었다. 어디선가 나타난 노파를 따라간 캉디드는 그곳에서 꿈에도 그리던 퀴네공드를 만난다. 그런데 잠깐, 당신은 겁탈당하고 배가 갈라진 거 아니었어? 시련을 겪으며 어느덧 성숙해진 그녀는 당차게 말한다. "맞아요. 하지만 그 두 가지 일로 해서 반드시 죽는 것은 아니랍니다." 사연은 이렇다.

"하늘이 우리들의 아름다운 툰더 텐 트론크 성에 불가리아인을 보냈을 때 저는 침대에서 깊이 잠들어 있었어요. 그들은 아버지와 오빠의 목을 베고 어머니를 난도질했어요. 내가 그 광경에 넋이 나간 것을 보고 키가 195센티미터나 되는 불가리아 병사가 나를 겁탈하려 했지요. 그 바람에 정신이 번쩍 들었고 의식을 되찾아 소리치고 발버둥치고 그 사람을 물어뜯고 할퀴었어요. 그 키 큰 불가리아 병사의 눈을 뽑아버리고 싶었답니다. 아버지의 성에서 일어난 모든 일이 세상에서는 흔한 일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으니까요. 그 못된 놈이 칼로 내 왼쪽 옆구리를 찔렀어요. 아직도 상처 자국이 남아 있어요."
"오, 저런! 보고 싶어요." 순진한 캉디드가 말했다.
"보게 되겠지요. 지금은 이야기를 계속할게요." 퀴네공드가 말했다. (76쪽)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퀴네공드의 이야기를 아우어바흐는 이렇게 논평한다.

이처럼 끔찍한 사건들이 희극적으로 보이는 것은 광대놀이처럼 빠른 속도로 마구 벌어지고 또 그것들이 신의 뜻이며 어디에서나 흔한 일로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사건의 끔찍함이나 희생자들의 의향과는 희극적인 대조를 이루고 있다. 거기다가 마지막에는 색정적인 신소리가 첨가되어 있다. 날카로운 대조법에 의한 문제의 단순화, 문제를 삽화의 차원으로 격하시키는 것이 어지럼증 나는 급한 속도와 함께 소설 전체를 지배하고 있다. 연이어서 불행이 일어나는데 이 불행은 필요한 것이며 그럴 만한 원인에서 비롯된 것이고 이치에 맞는 것이고 모든 가능한 세계 가운데서 최상의 세계에 값하는 것이라고 되풀이해서 설명되어 있다. 이것이 이치에 닿지 않음은 명백하다. 이리하여 냉정한 성찰은 웃음 속에 파묻히고 말아 흥이 난 독자는 볼테르가 라이프니츠의 논의나 형이상학적인 우주조화관 전반을 정당하게 다루고 있지 않다는 것을 전혀 보지 못하거나 보게 되더라도 가까스로 겨우 보게 되는 것이다. (에리히 아우어바흐 <미메시스>(김우창·유종호 옮김, 민음사 펴냄) 542쪽)

▲ <미메시스>(에리히 아우어바흐 지음, 김우창·유종호 옮김, 민음사 펴냄). ⓒ민음사
아우어바흐는 볼테르의 솜씨를 인정하지만("그의 속도는 미적 성질을 잃어버리는 법이 없다"), 그의 작품을, 적어도 <캉디드>를 좋아하지 않는 것이 분명하다(만약 닉 혼비의 소설을 읽었다면 뭐라고 했을지 궁금하다). 볼테르에게 있어 리얼리즘의 요소는 계몽주의적 이데올로기에 봉사하는 부차적이고 공허한 기교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사건의 원인을 극도로 단순화함으로써 현실을 왜곡하고, 인간의 운명이나 신념을 결정하는 역사적 조건을 탐구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글쎄, 나는 다만 옆구리의 상처 자국을 보고 싶다는 캉디드에게 "보게 되겠지요"라고 말한 퀴네공드가 약속을 지켰는지가 궁금할 뿐이다. 물론 결과적으로는 약속을 지킨 셈이 되겠지만, 언제 지켰느냐에 따라서 감상이 달라지기 때문이다(여기에는 이 자리에서 밝히기 힘든 복잡한 사정이 있다). 개인적으로는 '색정적인 신소리'가 없는 소설은 좋아하지 않는다.

그녀는 계속해서 사연을 늘어놓는다. "썩 잘생겼고 희고 부드러운 피부를 가"진 불가리아 대장에게 끌려갔다가, 석 달 후 네덜란드와 포르투갈에서 암거래를 하며 여자를 몹시 밝히는 어느 유대인에게 팔려 시골 별장에 오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다시 종교재판장의 눈에 띄어 두 남자의 공동 소유가 되었다. 월요일과 수요일과 안식일은 유대인과, 나머지 요일은 재판장과 보내게 된 것. 그리고 유대인을 겁주기 위해 열린 화형식을 구경하러 갔다가 팡글로스 선생과 캉디드를 보고 노파에게 부탁해 그를 그곳으로 데려왔다는 것이었다.

그때, 슬슬 지루해진다 싶었는지 문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유대인이 등장한다. "뭐야! 갈릴리의 개 같은 년, 종교재판장으로는 성이 안 찬단 말이냐, 이 녀석도 나와 나누라는 거야?" 유대인이 칼을 들고 덤비자 캉디드 또한 반사적으로 칼을 뽑아든다. 순식간에 쓰러지는 유대인. 시체를 두고 우왕좌왕하는 사이 맞은편 문이 열린다. 새벽 한 시, 일요일이 시작되었고 이날은 종교재판장이 그녀를 차지하는 날이었던 것이다. 캉디드는 주저하지 않고 종교재판장을 찌른다. 캉디드와 퀴네공드는 노파의 도움으로 말을 타고 도망치고, 퀴네공드는 참았던 눈물을 터뜨린다.

"도대체 누가 내 돈과 다이아몬드를 훔쳐갔단 말입니까?" 퀴네공드가 울면서 말했다. "우리는 뭐로 살아가죠? 어떻게 해야 하나요? 내게 돈을 줄 다른 유대인이나 재판관을 어디서 구한단 말인가요?" (84쪽)

하지면 그녀가 세상에서 제일 불행한 사람은 아니다. 묵묵히 그녀를 도와주던 노파가 자신의 사연을 털어놓는다. 열네 살까지 교황의 딸로 호사를 누리며 살던 그녀가 어떻게 엉덩이가 한 쪽 밖에 없는 늙고 초라한 하녀가 되었는지, 납치와 강간과 전쟁과 기아와 페스트와 인육이라는 키워드를 통해 설명하는 긴 사연이다. 그녀는 산전수전 다 겪은 노인답게 이야기를 끝맺는다.

아가씨가 내 감정을 조금이라도 건드리지 않았다면, 그리고 배 안에서 지루함을 달래고자 이야기하는 것이 으레 있는 일이 아니었다면, 나는 절대로 내 불행을 입 밖에 내지 않았을 겁니다. 마침내 말입니다, 아가씨, 나는 경험을 얻었고 세상을 알게 되었어요. 재미 삼아 배에 탄 사람들에게 자기 이야기를 한번 하라고 해보세요. 가끔 자기 인생을 저주하지 않는 사람, 자기가 세상에서 가장 불행하다고 말하지 않는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있다면 나를 바다에 거꾸로 처넣어도 좋아요. (98쪽)

▲ 영화 <애니 홀> 포스터.
어쩐지 우디 앨런의 영화 <애니 홀>을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 우디 앨런이 연기하는 앨비 싱어는 인생을 두 가지 부류로 나눌 수 있다고 말한다. 끔찍한(horrible) 부류와 비참한(miserable) 부류. 끔찍한 부류는 신체적 장애 같은, 치명적인 악조건과 함께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이고 비참한 부류는 그들을 제외한 모든 사람이다. 끔찍한 부류의 사람들이 어떻게 삶을 견뎌내는지 모르겠다고 고백한 후, 그는 친절하게도 이렇게 덧붙이는 일을 잊지 않는다. 그러니 우리는 자신이 비참하다는 사실에 감사해야 한다고.

과연 캉디드가 살고 있는 최선의 세계에서 모든 인물들은 불행으로 점철된 삶을 살아간다. 심지어 그들에게는 죽음이라는 휴식마저 허락되지 않는다. 볼테르는 음험한 부두술사처럼 그들을 살려내고, 살려내고, 살려낸다. 아직 때가 아니라는 듯이, 아직 더 많은 불행이 남아있다는 듯이. 아우어바흐의 불평처럼 "이렇게 가혹하고 상호 관련이 없는 연속적인 불행이 아주 순진하고 아무런 준비도 없는 사람들의 머리 위로 마른하늘의 소나기처럼 쏟아져 내려 순전히 우연에 의하여 휩쓸려 버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남의 머리 위로 불행이 쏟아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만큼 즐거운 오락도 없다. 막장 드라마가, '판춘문예'가, 트위터 타임라인이 그러한 것처럼.

그러니 우연히 발견한 엘도라도에서 행복한 시간을 보내지만 끝내 속세를 잊지 못하고 다시금 길을 떠난 캉디드가 자초한 불행들에 대한 이야기는 언젠가 직접 이 책을 읽을 당신들을 위해 남겨두기로 하자. 설령 당신이 읽지 않고, 그래서 이 재미있는 구경거리를 놓친다고 해도 그것은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다. 나는 내 몫의 불행만으로도 이미 머리가 복잡하니까.

다양한 불행을 겪고 또 목격하며 캉디드는 조금씩 변해간다. 이탈로 칼비노의 지적처럼 "자세히 살펴보면 캉디드와 함께 가장 오래 여행하며 그를 이끈 사람은 불운만 골라 겪는 라이프니츠주의자가 아니라, 세상에서는 오직 악만이 승리한다고 보는 '이원론자' 마르틴이다." 다음의 대화는 그런 마르틴의 성격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말하자면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에 등장하는 염세적인 로봇 마빈의 먼 조상뻘쯤 된다고 할까.

"신부님, 프랑스에는 희곡이 몇 편이나 있나요?" 캉디드가 묻자 신부가 대답했다.
"오륙천 편 정도 되지요."
"많군요. 그 가운데 좋은 작품은 얼마나 되나요?" 캉디드가 말했다.
"십오륙 편쯤 됩니다." 상대가 응수했다.
"많군요." 마르틴이 말했다. (150쪽)


그리하여 마침내 길고도 불행했던 여행의 끝에서, 지치고 성숙한 그들은 세계란 무엇이고 그 속의 인간은 무엇인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마르틴은 인간은 불안의 격동 속에 살거나 아니면 권태의 혼수상태 속에서 살기 위해 태어났다고 결론지었다. 캉디드는 그 말에 동의하지 않았지만 아무것도 확신하지는 못했다. 팡글로스는 자신은 언제나 끔찍할 정도로 고통을 겪었지만 일단 모든 것이 최선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고 강변한 이상 계속 그것을 주장했는데, 사실은 아무것도 믿지 않았다고 털어놓았다. (202쪽)

그들은 터키에서 가장 훌륭한 철학자로 통하는 유명한 이슬람교 수도승이 이웃에 살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찾아간다. 인간이란 무엇이고, 악이란 또 무엇이며,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수도승의 대답은 단순하다. 그건 네가 상관할 바가 아니며 그저 침묵하라는 것. 팡글로스가 원인과 결과와 가능한 최선의 세상과 악의 근원과 영혼의 본성과 예정 조화에 대해 장황한 질문을 던지자 수도승은 면전에서 문을 쾅 닫아버렸다. 알다시피 문은 닫으라고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해답은 가까운 곳에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집 앞 오렌지나무 그늘에서 선선한 바람을 맞고 있는 선한 노인 한 사람을 만난 것이다. 노인은 그들을 초대해 과일과 차를 내오고 향수를 뿌려주는 등 극진한 대접을 한다. 아마도 넓고 비옥한 땅을 갖고 있는 모양이라고 넘겨짚는 캉디드. 노인은 말한다.

"20에이커밖에 안 된다오. 그 땅을 아이들과 함께 경작하고 있지요. 노동을 하면 우리는 세 가지 악에서 멀어질 수 있으니, 그 세 가지 악이란 바로 권태, 방탕, 궁핍이라오." (205쪽)

노동을 악에 대한 예방, 혹은 처방으로 바라보는 관점. <걸리버 여행기>의 4장에서 휴이넘들 또한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다.

주인은 그의 하인들이 야후에게서 발견한 또 다른 특징에 대해 말을 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고 했다. 어느 야후가 갑자기 변덕을 부리며 구석에 누워 있으면서 울부짖거나 신음했다. 그 누구도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게 했다. 주인의 하인들은 그 야후가 왜 그러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젊고 건강한 그 야후에게는 음식과 물도 부족하지 않았다. 그들이 발견한 유일한 치료법은 그 야후에게 힘든 일을 시키는 것이다. 힘겨운 일을 하고 나면 반드시 정신을 차렸다고 한다. (<걸리버 여행기>(신현철 옮김, 문학수첩 펴냄) 335쪽)

하지만 그들은 전혀 다른 결론을 내린다. 걸리버는 고된 일을 통해서야 겨우 진정시킬 수 있는 인간의 본성에 깊은 혐오를 품고 은둔의 길을 선택하는 반면, 캉디드는 인간을 끊임없이 괴롭히는 인생을 그나마 견딜만하게 해주는 유일한 방법을 찾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것은 물론 일이다. 그들은 농사를 짓고, 빵과 과자를 굽고, 수를 놓고, 빨래를 하며 자신들의 집을 직접 지었다. 제 버릇을 버리지 못한 팡글로스는 여전히 옛 제자를 향해 종종 "모든 사건들은 가능한 최선의 세상 안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다네" 운운하며 공허한 낙관주의를 늘어놓지만, 캉디드는 그저 담담히 대꾸할 뿐이다.

"참으로 맞는 말씀입니다." 캉디드가 대답했다. "하지만 우리의 정원은 우리가 가꾸어야 합니다." (207쪽)

제법 감동적인, 그러나 진부한 결론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캉디드의 생활 철학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여기 두 가지 해석이 있다.

이 구절은 <캉디드>의 도덕이자 이 방대한 조크의 핵심 문구이다. (…) 더 깊은 수준에서 볼테르에게 있어 우리의 정원을 가꾸는 것은 그저 추상적인 철학적 담론이 아니라 인류를 위한 유용한 일의 은유이다. 이는 책 속의 인물들이 번영하고 행복한 삶을 누리기 위해 해야 할 일이다. 볼테르는 이것이 그저 캉디드와 친구들이 해야 할 일에 그치지 않음을 강력하게 시사한다. 우리 모두가 해야 할 일인 것이다. (<철학자와 철학하다> 121쪽)

하나마나한 좋은 말씀에 그치는 나이절 위버턴의 해석과는 달리, 이탈로 칼비노는 조금 더 생각하게 한다.

이것은 너무나 간략하게 압축된 도덕적 경구지만, 우리는 이것을 반(反)형이상학적인 자세를 갖추어야 한다는 지적인 의미로 읽어내야만 한다. 스스로 직접 실천하면서 적용하여 풀 수 없는 문제라면 그러한 문제 자체를 던지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우리는 이 경구를 사회적인 의미 안에서 살펴야 한다. 이는 노동이 모든 가치의 핵심임을 처음으로 선언한 말이다. 오늘날 "우리의 밭을 가꾸어야 한다"라는 말은 자기중심적이고 부르주아적인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다. 이러한 해석은 현대의 우리가 느끼는 불안과 근심이 투영된 것으로, 사실상 실제 의미하는 바와는 거리가 멀다. 노동 행위가 오직 저주의 결과로 그려지고, 인간이 일구어 낸 밭이란 밭은 모두 쑥대밭이 되어 버리는 이 책에서, 이 경구가 마지막 장에 가서야 나오는 것 또한 우연이 아니다. 우리의 밭 또한 옛 잉카 제국 못지않은 유토피아다. <캉디드>에서 이성의 실현은 유토피아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이 말이 이 책에서 하나의 속담으로 전해질 만큼 가장 유명한 문구가 된 것 역시 우연이 아니다. 우리는 이 문구가 전조처럼 예언한, 인식론적이며 윤리적인 면에서의 급격한 변화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이 책은 정확히 바스티유 감옥이 함락되기 30년 전인 1759년에 씌었다.) 인간은 이제 더 이상 초월적인 선이나 악에 따라 심판받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자신이 일구어 낸 결과의 크고 작음에 따라 판단된다. 이러한 전환으로부터 바로 자본주의적 의미에서 '생산적'이라고 표현되는 노동이 지니는 윤리와, 실용적이고 책임을 피하지 않으며 구체적인 행위로서의 도덕(이러한 구체적 행위 없이 인간은 어떠한 보편적인 문제도 풀 수 없다)이 등장했다. 간단히 말해 오늘날 인간의 삶이 직면한 진정한 선택의 문제가 바로 이 책에서 출현했던 것이다. (<왜 고전을 읽는가> 161쪽)

칼비노의 말은 내게 다시 <애니 홀>의 한 대목을 떠올리게 한다. 한 소년이 정신과 의사에게 말한다. "형이 미쳤나 봐요. 자신을 닭이라고 생각해요."의사가 말한다. "한번 데려와 보지 그러니?" 하지만 소년은 난색을 표한다. "안 돼요." "왜?" "그러면 계란을 못 낳잖아요." 우디 앨런은 이렇게 덧붙이는 것을 잊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는 계란이 필요하다고.

어쩌면 볼테르 또한 같은 말을 하고 있는 게 아닐까? 그것이 유토피아에서나 가능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여전히 우리 모두에게는 저마다의 정원이 필요하다고. 요즘에는 그걸 'BAR'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모양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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