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정연의 '요설' 지난 호 바로 가기 : <미크로메가스.캉디드 혹은 낙관주의>① 외계 거인이 준 진리의 문서… 지구인 '경악'! |
<제13장>
닉 혼비가 <캉디드 혹은 낙관주의>를 싫어합니다. 그래서 어쩌라고?
별다를 것도 없는 어느 오후, 멍한 눈으로 깨어나 담배를 문다. 숙취에 찌든 몸은 해장을 원하지만 그런 게 있을 리 없다. 라면은 지겹고 매식은 귀찮다. 하릴없이 앉아 순댓국이니 북엇국이니 해장국이니 쌀국수니 하는 것들의 이름을 불러본다.
그때, 누군가 벨을 누른다. 아마 택배겠지. 하지만 몸을 움직일 마음은 들지 않는다. 일단 문을 열면 이런저런 변명을 해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다. 낯선 방문자가 대뜸 "저기, 평일 오후인데 아직 눈곱도 떼지 않으셨네요…"라고 묻는 일은 없을 테지만, 나도 모르게 "하하, 제가 프리랜서라… 어제는 마감한 김에 한 잔 했습니다…"라고 말해버리지는 않을까 두려운 것이다. 물론 나는 마감을 하지 않았고 한 잔만 마신 것도 아니다. 모르는 사람한테 거짓말을 늘어놓을 수는 없는 일이다.
하지만 낯선 이는 좀처럼 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 초인종을 누르는 것으로 모자라 문을 두드리더니 큰소리로 사람을 찾기 시작한다. 여자 목소리. 별 수 없이 무거운 몸을 일으킨다. 만면에 미소를 띤 아주머니와 약간 몽롱해 보이는 아가씨다. 내게 전해줄 좋은 말씀이 있단다. 나는 솔깃했다. 그건 이런 말씀이었다.
▲ <미크로메가스.캉디드 혹은 낙관주의>(볼테르 지음, 이병애 옮김, 문학동네 펴냄). ⓒ문학동네 |
그러니까 눈은 눈곱이 끼기 위해 만들어졌고(그래서 내 눈에는 눈곱이 껴있고), 입은 담배를 피우기 위해 만들어졌다(그래서 나는 담배를 피우고 있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내가 원래 그렇게 생겨먹었고 그게 최선이라는 것인데, 퍽이나 위안이 되는 말씀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게 좋은 말씀을 혼자서만 듣고 있기에는 내 그릇이 너무 작았다. 나는 그 자리에 선 채 고민에 잠겼다. 이 분들을 출판사로 보내 마감은 어기라고 만들어졌고, 그래서 필자들이 그렇게 자주 마감을 어기며 사실은 그게 최선이다, 라는 식의 복음을 전파해달라고 부탁하면 어떨까? 하지만 그렇게 하는 대신 나는 그냥 문을 닫아버렸다. 문은 닫으라고 만들어진 것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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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테르의 철학 콩트 <캉디드 혹은 낙관주의>는 '모든 것이 최선으로 존재한다'는 라이프니츠의 낙관주의 명제에 대한 철저한 조롱이다. 그리고 닉 혼비는 2005년 10월의 독서일기를 통해 볼테르의 <캉디드>를 살짝 '디스'한다.
우리가 고전을 읽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인생을 살다 보면 자신이 '문학가'인지, 아니면 그저 독서애호가인지 결정해야 하는 시점이 온다. 그리고 나는 독서애호가가 더 재미있게 산다는 것을 깨닫는 중이다. 문학가는 <캉디드> 같은 책을 읽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문학가로서의 함량이 약간 미달되기 때문이다. 반면 독서애호가는 뭐든 원하는 대로 읽어도 된다. (<런던 스타일 책읽기>(이나경 옮김, 청어람미디어 펴냄) 260쪽)
그는 속 편한 독서애호가로 남을 수 없는 스스로에 대한 한탄과, 얄팍한 분량(영역본의 경우 90페이지)에 귀여운 표지로 자신을 속인 출판사에 대한 분통을 늘어놓는다. 심지어 다음 달 독서 일기에는 별로 웃기지도 않은 마이클 프레인의 소설에 앤서니 버지스가 "지난해 읽은 책 가운데 웃음을 터뜨리게 한 몇 안 되는 소설"이라는 추천사를 쓴 것을 두고, "버지스는 <캉디드>를 분명히 읽었을 것이다. 그것도 기쁨의 눈물을 줄줄 흘리며(나는 최근 <캉디드>와 안 좋은 일이 있었다)"라고 부연하기도 한다. 문학가들이란 대체로 이렇게 뒤끝이 '쩌는' 법인데, 그렇지 않으면 문학가로서의 함량이 약간 미달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닉 혼비는 물론, SNS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는 영락없는 문학가라고 해야겠다. 문학이 팔리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렇다면 닉 혼비가 <캉디드>를 싫어하는 이유는 무얼까? 그는 <캉디드>의 문제가 "실제로는 읽었든지 안 읽었든지 간에 모두 다 읽었다고 말하는 책(비교하자면 <동물농장>, <1984>, <걸리버 여행기>, <파리대왕>) 가운데 하나"라고 말한다(그것은 오늘날 통용되는 고전에 대한 표준 정의다). 우리가 이해하기도 전에 그 작품들의 풍자와 알레고리는 이미 해독되어 있어서, 설령 처음 읽는다고 해도 동어반복적인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어쨌든, 낙관론의 정체를 잔혹하게 폭로할 필요가 없는 시대에 사는 사람이 있다면, 그게 바로 우리다. 우리는 사방의 모든 것이 언제나 끔찍하다고 믿는다. 사실, 볼테르는 그 점을 처음으로 지적한 사람들 가운데 하나고, 그가 너무나 성공적으로 해내는 바람에 우리는 인생에 팡글로스 한 명쯤은 필요하게 되어버렸다. 씁쓸한 주석. (262쪽)
하지만 과연 그런가? 말하자면 그는 '고전 무용론'을 완곡하게 펴고 있는 셈인데, 선뜻 동의할 수 없는 이야기다. 고전 마케팅으로 불황을 극복하려는 출판사들과 고전에 대해 쓰고 강의하며 생계를 꾸려가시는 여러 '독서 멘토'님들도 동의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성공적인 작품의 핵심 아이디어가 세월의 흐름 속에서 낡고 진부한 것으로 전락하는 일은 흔하다. 하지만 우리는 언제든지 그것을 또 다른 관점에서 다시 읽을 수 있고, 다시 읽어야 한다(물론 그러는 동안 어떤 작품은 영영 잊히기도 하고, 주목받지 못했던 작품이 새롭게 고전의 지위를 획득하기도 한다. 어떤 것을 고전 혹은 정전으로 인정하느냐는 문학사의 해묵은 논쟁거리인데, '정전'이니 '인정'이니 하는 단어에서 드러나듯, 아니, 사람이 하는 일이 다 그렇듯, 그것이 공정하고 객관적인 일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런데 내가 지금 '읽어야 한다'고 썼나? 젠장, 나도 어느새 독서 멘토 다 된 모양이다.
낙관론에 대한 부분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닉 혼비가 영국인이라는 사실과 독서 일기가 작성된 시점이 2005년이라는 사실을 감안해야 한다. 이듬해 미국 아마존을 휩쓸고, 그것도 모자라 아시아의 작은 나라를 강타했던 <시크릿>(론다 번 지음, 김우열 옮김, 살림biz 펴냄) 열풍을 보지 못했으니까. "긍정적인 생각과 강렬한 믿음이 만났을 때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는 론다 번 여사의 '걸면 걸리는 걸리버' 같은 헛소리가 여전히 전 세계 독자들을 사로잡고 있는 현실이다. 바버라 에런라이크 여사는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고 있는 긍정주의를 이렇게 분석한다.
긍정적 사고는 고용주의 손에 의해 19세기의 주창자들이 짐작도 하지 못했을 용도로 바뀌었다. 떨치고 일어나 앞으로 나아가라는 권고가 아니라 직장에서의 통제를 위한 수단, 더 높은 실적을 내라고 들들 볶는 자극제가 되었다. 노먼 빈센트 필의 <적극적 사고방식>을 낸 출판사는 1950년대에 일찌감치 기업 시장으로 눈을 돌려 "기업 임원 여러분, 이 책을 직원들에게 주십시오. 커다란 이익을 낼 것입니다"라는 광고를 냈다. 광고는 영업사원이 이 책을 읽으면 자신이 파는 상품과 자기가 속한 조직에 새로운 신뢰를 갖게 될 것이며, 내근 직원들의 효율성도 높아져 퇴근 시간만 기다리는 사람이 현저히 줄어들 것이라고 장담했다. 동기 유발이 채찍으로 사용되면서 긍정적 사고는 순응적인 직원의 품질 보증서가 되었고, 1980년대 이후 다운사이징 국면에서 고용 사정이 악화됨에 따라 채찍을 쥔 손에는 더욱 힘이 들어갔다. (<긍정의 배신>(전미영 옮김, 부키 펴냄) 146쪽)
반면, 볼테르의 솜씨는 좀 더 날렵하다.
"오, 팡글로스!" 캉디드가 소리쳤다. "이런 끔찍한 일을 당신은 예측하지 못하셨습니다. 이렇게 되었으니 결국 나는 당신이 말씀하셨던 낙관주의를 포기할 수밖에 없군요."
"낙관주의가 뭔데요?" 카캄보가 말했다.
"아아! 그건 나쁠 때도 모든 것이 최선이라고 우기는 광기야." 캉디드가 말했다. 그는 흑인을 바라보며 펑펑 울면서 수리남에 발을 들여놓았다. (135쪽)
그러니 아직 우리에게는 낙관주의(혹은 긍정주의)에 대한 더 많은 불평이 필요하다. 불철주야 온갖 불평불만으로 타임라인을 채우는 수많은 트위터리안들의 노고를 무시하는 건 아니지만, 140자는 너무 짧지 않은가. 커피숍 뒷자리에 앉은 여자들 수다가 너무 시끄럽고, 지하철 옆 자리에 앉은 아저씨의 술 냄새가 쩐다(뜨끔)는 불평만으로는 부족하다는 말씀이다. 그렇다고 자책할 필요는 없다. 볼테르가 대신 해주고 있으니까. 그것도 이미 255년 전에.
물론 낙관론이 영 쓸모없기만 한 헛소리는 아닐 것이다. 소금이 그런 것처럼, 적당한 낙관주의는 인생에 맛을 더할 수도 있다. 이 글이 그 증거다.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 회로 미룬 채 변죽만 울리다 끝낸다고 불평할 수도 있겠지만, 조금만 달리 생각하면 재미있는 부분을 다음을 위해 남겨 놓은 것이니 이 또한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별다를 것도 없는 어느 오후, 멍한 눈으로 깨어나 담배를 문다. 숙취에 찌든 몸은 해장을 원하지만 그런 게 있을 리 없다. 라면은 지겹고 매식은 귀찮다. 하릴없이 앉아 순댓국이니 북엇국이니 해장국이니 쌀국수니 하는 것들의 이름을 불러본다. 그리 나쁠 것 없는 오후다. 마감도 했겠다, 여름 해는 길고, 담배는 아직 반 갑이 남았으니까. (#낙관주의의나쁜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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