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아픔, 좌절, 희망 그리고 기상-할아버지 청음 김상헌의 발자취
(☞연재 지난회 바로 가기 : 상처를 입고 다스리던 시절 ①)
문곡 김수항의 문집인 <문곡집>의 맨 처음에 실린 시(詩)가 청나라 심양에 끌려가 고초를 겪고 있던 할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읊은 내용이었음을 지난번에 말하고 나왔다. 문곡 평생 할아버지 청음 김상헌은 그렇게 깊은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그 영향은 스승 같은 할아버지였기 때문에 중요한 것은 아니다. 청음이 그 시대의 아픔, 좌절, 희망, 기상 같은 것을 대표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청음은 1590년(선조 23) 진사(進士)가 되었고, 1596년 임진왜란 중에 실시한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 권지 승문원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에 임명되었다. 이후 홍문관 관원후보인 홍문록(弘文錄)에 뽑혀 들어갔다. 선조 33년(1600)에 작성된 홍문록에는 인조 이후 조정에서 같이 활동하였고 재상을 지냈던 오윤겸(吳允謙. 호는 추탄(秋灘), 1559(명종14)∼1636(인조14)), 홍서봉(洪瑞鳳. 호는 학곡(鶴谷). 1572(선조5)∼1645(인조23))이 포함되어 있었다.
특히 기억해둘 인물로는 김제남(金悌男. 1562(명종17)∼1613(광해군5))이 있다. 김제남은 이 홍문록에 들어간 지 2년 뒤인 선조 35년(1602)에 딸이 왕비에 책봉되는 경사를 맞이하는데, 이 왕비가 곧 인목왕후이다. 이 경사가 불과 10년 뒤인 광해군 5년(1613) 비극적인 계축옥사로 이어졌으니, 사람의 일은 장담할 수가 없다. 뒤에 말하겠지만, 김제남은 청음의 사돈이기도 하다.
촉망과 견제를 함께
이렇게 청음은 대표적인 청직(淸職)인 홍문관을 거의 떠나지 않았다. 곧 사간원 정언을 거쳐 이조 좌랑에 임명되었는데, 이 무렵 홍여순의 무리들에게 배척당해 오래도록 평범한 직책에 머물러 있다가 이때에 이르러 이 직책에 임명되었다고 한다. 홍여순(洪汝諄)은 이이첨(李爾瞻)과 함께 대북(大北)을 형성한 인물이었다.
이 무렵 영의정은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이었는데, 여러 차례 사직을 청하며 관직에서 물러나려고 하였다. 선조는 백사를 만류하며 허락하지 않았다. 이렇게 국왕이 신하의 사직 등을 허락하지 않는 답변을 불윤(不允 허락하지 않음) 비답(批答)이라고 하는데, 이 글을 청음이 지었다. 그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앓던 병이 이제 나았으니 약 효험을 본 것인데, 사직서를 계속 올리니 물러나려는 뜻이 정말 고집스럽도다. 어지러운 환란 속에서 감당하지 못할 나를 두고 경은 어찌 그리도 용감하게 급류에서 벗어나려 하는가. 오늘날 위급한 정세를 생각한다면 대신이 물러나 쉴 때가 못 된다. 한창 치성해지는 북쪽 변방의 근심을 어떻게 대처할 것이며, 급하기만 한 남쪽의 경보(驚報)는 누가 미리 대책을 세울 것인가? 바라건대 경은 이 어려움을 널리 구하라. 나에게 지워진 일을 다 하지 못할까 두렵도다."
윗글에서, '급류에서 용감하게 벗어나려 한다'는 말은 고사가 있다. 중국 송나라 때 전약수(錢若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어떤 고승(高僧)이 전약수를 보고 말하기를 "이 사람은 급류에서 용감히 물러날 사람이다"라고 했다. 뒤에 전약수가 과연 벼슬이 추밀원 부사(樞密院副使)에 이르렀을 때 40세의 나이로 즉시 물러났다. (<송사(宋史) 권266 전약수열전(錢若水列傳)>) 곧 앞날이 창창할 때 미련 없이 과감하게 물러나는 것을 비유한다. 요즘은 개나 소나 다 쓰는 말이 되어버린 '용퇴(勇退)'라는 말이 바로 여기서 나왔다.
길운절 역적모의 사건
이 해에 청음은 제주에 다녀와야 했다. 제주 안무 어사(濟州安撫御史)의 자격이었다. <선조실록>에는 "김상헌은 전에 전랑(銓郞)으로 있을 때 의논에 변별(辨別)함이 많아 그 때문에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많았는데, 이때에 이르러 상이 특별히 김상헌을 명하여 보낸 것이다." 아마 청음이 무슨 일이든 대충 넘어가지 않고 따졌던 모양이다. 그래서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그러나 제주에 보낸 것은 단순히 이런 형편을 고려해서 취한 조치는 아니었을 것이다. 제주에 안무(安撫), 즉 민심을 안정시키고 어루만지기 위해 파견되었던 것으로, 이는 길운절(吉云節)이라는 사람의 역모 사건을 수습하는 일이었다.
실록에도 이 사건이 어느 정도 나와 있지만, 조선시대 반역 사건에 대한 조사, 심문 기록인 <추안(推案)>을 보면 당시 길운절 사건을 상세히 알 수 있다. 아마 임진왜란 뒤 민심이 흉흉한 틈을 타서 발생한 사건으로 보이는데, 사건 자체는 조금 허술하였다.
선산(善山) 사람으로, 자신이 야은(冶隱) 길재(吉再)의 후손이라고 하는 길운절이라는 자가 환속한 승려 소덕유(蘇德裕)라는 자와 함께 제주에 들어갔다가 일을 도모하였다고 한다. 길운절은 제주 대정현 향교에서 묵었는데, 양반이랍시고 그곳 무장(武將)의 여자였던 기생 구생(具生)을 빼앗아 살고 있었다.
길운절이 제주에서 쉽게 일을 도모할 수 있었던 것은 목사(牧使) 성윤문(成允文)이 마침 형장(刑杖)을 엄혹하게 다뤄 크게 민심을 잃었기 때문이었다. 이때를 틈타 선동하여 6월 6일을 기하여 기병(起兵)해서 목사와 서울에서 온 관리들을 다 죽이고 그 군량, 군기(軍器)를 확보하는 한편 전마(戰馬)를 조발하여 바다를 건너 곧바로 한양을 침범하기로 하였다. 그래서 성안에서 무리를 모아 거사를 모의하려는 참이었는데, 그때 마침 길운절이 그의 무리와 몰래 말을 나누는 것을 구생이 엿들었다.
구생이 다그치자, 당초 두 마음을 가지고 있던 길운절은 오히려 자신이 고변자로 나섰던 것이다. 자신은 증거를 확보하여 이들을 고발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날짜는 점점 지나가고 증명할 문서는 없어서 마음속으로 걱정이 되어, 사람들이 모이는 곳과 날짜를 꼭 상세히 알아내어 거기서 체포하게끔 해야겠다고 생각하고는 (…) 6월 2일에야 비로소 고변했"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그의 고변은, 잡혀온 사람들의 진술에서 거짓으로 드러났다. 일은 자기가 다 꾸며놓고 마지막에 발을 빼며 남을 고변한 것이었다. 실록의 사론(史論)에는 이렇게 기록했다. "왜 '고변한 사람 누구를 죽였다'라고 쓰지 않은 것인가. 그 이유는 길운절은 자신이 수악(首惡 역모의 우두머리)으로서 어쩔 수 없게 된 뒤에야 비로소 고변하였으니, 고변한 것은 그의 본뜻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그에게 고변한 것을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어사의 장계
이 일로 제주는 적지 않은 사람이 직간접으로 연루되어 한참 어수선하였다. 6월, 7월에 걸쳐 제주와 전라도, 조정에서 길운절 사건을 수습하는 한편, 8월에 청음이 제주에 안무 어사로 내려갔던 바, 11월에 청음은 민심 수습 방안에 관해 장계를 올렸다.
"신이 본주(本州)에 이른 지 한 달이 지났는데, 그 사이에 하루 이틀 이외에는 비가 오지 않는 날이 없고 바람이 불지 않는 날이 없었으나 바다 섬의 기후가 본래 이와 같은 것으로 괴이할 것이 없다고 여겼었습니다. 그런데 오래 지난 뒤에야 유생과 노인들에게 물어보았더니 "금년 9월 이후부터 항상 흐리고 계속 비가 내려 여러 달 개이지 않아 여름철보다 더 심하다. 지금 거센 바람이 크게 일어 밤낮 그치지 아니하니 이는 실로 근고(近古)에 없던 재변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직접 본 바로는 도로가 진창이 되어 봄·여름의 장마철과 같고 들판에 가을 곡식이 손상되어 태반이나 잎이 시들고 썩어 문드러져 거두지 못했습니다. 이리하여 농민들은 손을 놓고 곳곳에서 울부짖고 있으니 굶주려서 곤핍한 상황은 차마 볼 수 없었습니다. 가을인데도 이러하니 어떻게 해를 보낼 수 있겠습니까. 이곳 백성들의 처지가 실로 애처롭습니다.
신이 생각하건대, 이번 역옥(逆獄)을 다루는 데 있어 조정에서 아무리 공평하게 판결하려고 했더라도 연루된 자에 대해 오늘날까지 판결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더러 억울한 죄가 있는 사람도 있고, 그 중 연좌된 많은 사람이 다 역모에 참여한 자인 줄도 모르는데 여러 날 동안 가두어 두어 장차 숨이 끊어져 죽으려는 상황이기 때문에 섬 안의 인심이 다 복종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괴이한 기운이 재이를 초래하여 비상한 재앙이 내려진 것인 듯합니다. 그 허물의 소재는 감히 알 수 없으나 앞으로 무휼(撫恤 위로하고 챙겨줌)하는 정책은 조정에서 각별히 진념하여 너그러이 용서하는 은전을 내려야 합니다. 그래야만 살아남은 백성이 남은 목숨을 보전할 수 있고 또한 나라가 남쪽 지방을 돌아보는 근심을 조금은 풀 수 있을 것입니다."
고산으로, 경성으로
제주에서 돌아온 뒤 조정 복귀는 수월하지 못하였다. 청음을 견제하던 북인 당국자는 함경도 고산(高山)의 찰방(察訪)으로 내보냈다. 정인홍(鄭仁弘)은 임진왜란 때 선조를 호종하지 않았다 하여 우계(牛溪) 성혼(成渾)을 탄핵하였는데, 그 당여(黨與)가 김상헌도 함께 연루시켰던 것이다. <선조수정실록>에는, "김상헌은 강직하고 고아하여 세상의 존대를 받았다. 시론(時論)이 그를 꺼려 탐라(耽羅 제주)에서 돌아오자 곧 북쪽 변경의 마관(馬官 찰방)에 제수했으니, 질투하여 배척함이 심하다 하겠다"고 했다.
청음은 3년 뒤 다시 경성 판관(鏡城判官)이 되었다. 계속 함경도 근무였던 셈이다.(<선조수정실록> 권39 38년 8월 1일) 청음이 처음 인사권이 있는 전랑(銓郞)으로 있을 때의 일이다. 이조 참판 기자헌이 같은 소북(小北) 계열인 유영경(柳永慶)을 대사헌으로 의망하려 하자 청음이 이를 힘써 막았다. 이 때문에 영경의 당이 깊이 유감을 품게 되었다. 얼마 있다가 유영경이 국정(國政)의 전권을 잡자 이 때문에 때를 보아 복수하려고 하였다. 그래서 먼저 청음을 배척하여 고산 찰방으로 삼았다가 파직되어 돌아오자마자 바로 경성 판관으로 보임시켰으므로 여러 신하들이 모두 분해하며 탄식하였다고 한다. 그러면서 덧붙인 대목이 재미있다. <선조수정실록>에 나오는 말이다.
"이 대목의 기록은 <실록>(곧 앞서 편찬한 <선조실록>)을 살피건대,
"김상헌이 일찍이 전랑이 되었을 때 일을 임의로 처리하니, 기자헌이 유영경을 끌어들여 응견(鷹犬 사냥할 때 쓰는 매나 개 같은 심복)을 삼으려 하였는데, 김상헌에게 저지당했다."
하였으니, 그 강직하고 방정하여 흔들리지 않았던 것을 여기에서 또한 알 수 있는데 이 때문에 미움을 받은 것이다. <선조실록>에 또,
"좌의정 기자헌은 성품이 너그럽고 일찍부터 덕망을 지니고 있었다."
하였는데, 기자헌이 <실록>을 감수할 때 자기 속셈대로 감행하면서 이토록 조금도 거리낌 없이 하였으니 주벌(誅伐)해도 모자라다 하겠다."
실제로 기록을 찾아보면 청음을 고산 찰방으로 임명할 당시, <선조실록>에는 기자헌이 홍문관 부제학으로 임명된 기록이 함께 기재되어 있다. 거기에는 기자헌과 김상헌에 대한 인물평도 함께 들어 있다.(<선조실록>권147권 35년 윤2월 13일)
기자헌(奇自獻) : 사람됨이 깊고 침착하며 지모가 있었다.
김상헌(金尙憲) : 위인이 교만하고 망령되었다.
기자헌은 방납(防納), 즉 특산물을 대신 납부하는 공물 브로커로 재산을 축적했던 인물이었다. 그러니 당연히 민생 안정과 재정 확보에 도움이 되던 대동법(大同法) 개혁을 반대할 수밖에 없었다. 4년 뒤 광해군은 이런 인물을 좌의정에 앉혔다.
은근히 멋진 사람들
이런 <선조실록>과 <선조수정실록>의 엇갈린 평가는 설명이 필요하다. 광해군 때 편찬된 <선조실록>은 인물 평가의 불공정성 때문에 인조반정 이후 바로 수정 논의가 시작되었다. <선조실록> 편찬에 참여했던 이이첨, 기자헌 등 몇 사람을 빼고는 서인, 남인 할 것 없이 모두 비난, 폄하 일색이었기 때문에 공정성에 의심을 샀다. 또 사료가 부실한 것도 하나의 큰 이유였다.
그러나 재정이 부족하여 효종 때나 완성되었다. 인조 내내 광해군 때 파탄 낸 재정 때문에 고생했다. 그 여파로 북쪽 후금(청)에 대응 또한 제대로 할 수 없었다. 농업생산력 이외에는 기댈 데가 없는 경제구조 아래서 피치 못할 상황이었다. 결국 <광해군일기>도 간행하지 못한 채 초고(중초, 정초)로 보관하기에 이르렀고, 효종 때는 <인조실록> 편찬에 밀려 <선조수정실록>은 효종 8년에야 완성되었다.
그런데 학계 일각에서는 <선조실록>을 서인(西人)이 수정하여 <선조수정실록>을 만들었기 때문에 <선조수정실록>을 믿을 수 없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정확한 논증이라면, '누가' 만들었기 때문에 믿을 수 없다, 가 아니라, '어떤 부분이 어떤 이유로' 믿을 수 없다, 고 말해야 옳다.
우리가 아는 퇴계 이황, 고봉 기대승의 선조 초반 경연 강의, 의병 항쟁, 이순신 장군의 해전 등 많은 기록이 <선조수정실록>에 나온다. <선조수정실록>이 없었으면 이순신 장군의 해전 활약상을 매우 제한적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선조수정실록> 편찬자들이 <선조수정실록>을 완성한 뒤에도 <선조실록>을 그대로 남겨두었다는 것이다. 나 같으면 싹 없애버렸을 텐데…. 이유? 어떤 실록이 더 진실인지는 편찬자 자신들이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후대 사람들이 판단하는 것이라는 것이 이유였다. 이 사람들, 은근히 멋진 데가 있었다.
▲ 광해군 때 편찬된 <선조실록>과 인조~효종 연간에 편찬된 <선조수정실록>. <선조실록>은 인조반정 이후 잘못된 기록이 많다는 여론으로 수정되는 운명을 겪었다. 그것이 <선조수정실록>이다. 그런데 수정한 사람들은 <선조실록>을 없애지 않고 <선조실록>과 <선조수정실록>, 두 실록을 다 남기기로 했다. 어떤 역사기록이 진실인지는 후대 사람들이 판단할 몫이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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