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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희빈과 장길산, '눈 먼 사랑'의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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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장희빈과 장길산, '눈 먼 사랑'의 결과!

[오항녕의 '응답하라, 1689!'] 알고도 가는 길, 그 여섯 번째

(☞전회 바로 가기 : 알고도 가는 길 ⑤ 장희빈 택한 숙종, 조선의 앞길을 바꿨다!)

알고도 가는 길⑥ 눈 먼 사랑에 멍 드는 민생 : 장길산이 등장한 이유

여양부원군 민유중(閔維重). 우리에겐 인현왕후의 친정아버지로만 알려져 있지 그가 숙종 초반 군사와 경제 분야의 전문가로 활약했다는 사실은 거의 알지 못한다. 그는 병조판서로 있다가 임금의 장인이 되면서 그 자리를 사직하였지만, 군사 조직인 금위영, 경제 관청인 선혜청과 진휼청의 제조(提調)를 겸직하였다.

공물(貢物), 수탈과 예물의 언저리

지난 연재에서 알아본 대로, 그는 장희빈이 왕비가 되고 인현왕후가 폐비되는 1689년의 기사환국 이태 전에 세상을 떴기 때문에 다행히 험한 꼴을 보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행적이 기사환국과 직접 연관이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다음 기록에 주목해보자.

지난해 공물(貢物)을 줄일 때 상의원 정(尙衣院 正)과 군기시 정(軍器寺 正)·부정(副正)을 아울러 감원하고, 공물을 회복시킬 적에 다시 두기로 하였습니다. 이제 공물을 회복시켰으니 감원했던 관원도 다시 두어야 합니다.

이조판서 심재(沈梓)가 한 말이다. 때는 숙종 15년 윤3월. 2월에 문곡 김수항이 귀양을 갔고 5월 2일에 인현왕후가 폐해지니까, 한창 정국 변동이 일어나던 무렵이다. 대개 흉년이 들면 공물, 그러니까 지역 특산물을 줄여 백성들의 고통을 덜어준다. 아마 심재의 말에 나오는 공물 회복이란, 그렇게 줄였던 공물을 다시 원상 회복시켰던 조치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좀 더 길게, 그리고 구조적으로 보면 심상치 않은 징후가 엿보인다.

이 주제를 이해하려면 약간의 상식이 필요하다. 조선에서 민력 수취는 세 가지로 나뉜다. 군대 가는 것과 같은 신역(身役, 말 그대로 몸으로 하는 부역), 농사짓는 만큼 내는 전세(田稅, 요즘의 소득세), 그리고 특산물을 내는 공물이다. 이 세 번째 공물이 문제였다. 연산군 때부터 늘어난 공물도 부담이었고, 세월이 지남에 따라 생산되지 않는 공물, 조선판 브로커인 방납배들이 대신 공물을 내며 중간 수수료를 떼어먹는 일이 늘어나 백성들이 고통을 겪었다.

이를 개혁하려는 것이 대동법(大同法)이었다. 대동법은 공물의 전세화와 공물 양을 줄이는 두 가지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숙종 15년경에는 이미 삼남(三南) 지방에 대동법이 실시되고 있었고, 평안도, 함경도로 확대될 시점이었다. 그런데 대동법 시행에도 불구하고 손을 못 댄 공물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진상(進上) 공물이었다. 각종 제사 및 왕실에 바치던 공물, 각 관청의 몇몇 공물이 여기에 포함되었다.

날아가는 기러기의 추억

진상은 '어공(御供)', '진공(進供)'이란 말에서 알 수 있듯이, 국왕이나 왕실에서 사용할 물품들을 바치는 것이었다. 원래 공물이 중앙 정부의 수요에 충당하는 공납의 개념이라면, 진상은 지방 직에 있는 신하가 국왕에게 예물로 바치는 '예헌(禮獻. 예의로 바치는 선물이라는 관념)'에 기초해 있다. 이때 과일이나 생선 등의 식품(物膳), 활이나 환도(環刀), 꿀이나 인삼 따위의 약재가 그 예물이 되었다. 대략 품목은 320종 정도였고, 그 양을 공물가로 치면 2만 석 정도였다. 전세가 8~9만 석이었으니, 진상 공물가가 전세의 4분의 1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여기에 운반비 등 잡역 비용도 부가되었다. 게다가 진상 공물은 품질이 우수해야 했으므로 품질 검사(點退)가 엄격했고, 그에 따라 비리가 횡행해 백성들의 고역이 되었다. 당연히 방납도 가장 많을 수밖에 없었다.

대동법이 자리를 잡아가던 무렵, 김육에 이어 대동법 및 공안(거둘 공물의 종류와 양을 정한 장부) 개혁 논의를 주도했던 송시열(宋時烈, 1607~1689년)은 현종 원년에 공안 개정을 요구하였다. 그는, 성리학 경세론에 입각해, '많은 데(왕실, 중앙 정부의 지출)를 덜어내어, 적은 곳(백성의 일용)에 보태준다'는 '손상익하(損上益下)'라는 원칙을 상기시키며 '어공(御供)'의 삭감을 주장하였다. 그러니까 송시열은 대동법 실시 및 확대를 주장하면서도, 대동법에 포섭되지 않은 어공과 진상 부분 때문에 공안 개정론을 계속 견지한 것이다.

이런 송시열의 주장은 허적(許積, 1610~1680년) 등 진상 공물에 이해를 걸고 있는 세력들과 정면으로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정점에는 왕실이 있었다. 훗날 정조는 한양을 떠나면서 하늘 나는 기러기를 보고 송시열이 공물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던 것을 떠올리며 안타까워했다. 기러기가 공물이었기 때문에 나타난 연상 효과였다. 그러나 다른 영역과 달리 왕실과 관련된 사안은 국왕의 결심이 없이는 어찌해볼 도리가 없는 노릇이었다.

▲ 하늘을 나는 기러기. 기러기는 공물이었다. 기러기를 보면서 정조는 송시열이 진상 공물을 개혁하지 못하고 한양을 떠날 때의 안타까움을 시로 남겼다.

계속 예물을 바치시오

<서경>의 '우공(禹貢)' 편에 "회수(淮水)와 바다 사이에 양주가 있다. (…) 그곳의 공물은 금(金), 은(銀), 동(銅)과 요(瑤), 곤(琨), 소(篠), 탕(簜)과 치(齒), 혁(革), 우(羽), 모(毛)와 나무(木)이다"라고 하여, 그 유래가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앞서 연산군 때 공물이 늘어났다고 했는데, 나라 재정을 흥청망청 써댔던 연산군은 통상의 공물에 더하여 엄청난 별공(別貢)을 거두었다. 그런데 중종 반정 이후에도 이 늘어난 별공은 줄어들지 않았다. 혹자는 이걸 왜 줄이지 못했느냐고 묻는다. 여기에는 인류학적 비밀이 숨어 있다. 마르크 블로흐는 <봉건 사회>(한정숙 옮김, 한길사 펴냄)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9세기 왕실 포도주 저장실에 포도가 부족한 사태가 일어났을 때, 생드니 수도사들은 200통을 제공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그 후로 왕실에서 이 기부를 당연한 것으로 매년 권리처럼 요구하게 되었다. 그 기부를 끝내기 위해서는 왕의 선언까지 필요했다.

앙드레에는 그 지방 영주의 소유였던 곰이 한 마리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그곳 주민들은 그 곰이 개들과 싸우는 장면을 즐겼던 까닭에 곰 먹이는 일을 떠맡았다. 그 곰이 죽은 뒤에도 영주는 곰을 먹이던 빵을 계속 요구했다.

인류학자 그레이버에 따르면, 봉토의 상급자에게 주는 선물이면 어떤 것이든, '특히 서너 번 반복되었다면' 전례로 여겨지고 관습으로 자리 잡을 가능성이 컸다는 것이다. 선물로 주었던 일이 이렇게 공식화하는 것이 이상하게 여겨질 수도 있지만, 처음부터 평등하지 않은 사회적 관계는 비슷한 논리로 돌아가게 되는 경우가 많다.

▲ 선물 : 이 반지를 만든 회사 제품을 큰 맘 먹고 아내에게 선물했던 적이 있다. 국어사전에는 선물을 '남에게 인사나 정을 나타내는 뜻으로 물건을 줌'이라고 정의했지만, 나는 선물의 반복은 곧 강제적 공물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결코 '반복'하지 않았다.

▲ 또 선물 : 이 글을 쓰고 있는 동안 제주 답사를 다녀온 연구원, 대학원생들이 선물이라면서 놓고 간 초콜릿. 반복되면 예물이 되고, 그 예물이 오지 않을 때 내가 화를 내리라는 것을 알고 있을까? ⓒ오항녕

전례(前例)의 논리

애초 교환은 형식적 평등을 암시한다. 적어도 평등의 잠재력을 암시한다. 그래서 왕들이 교환을 싫어하고 어려워했는지도 모른다. 왕들은 공물도 교환이 아니라 예물로 받고 싶어 했다. 얼핏 농민은 식량과 군대를 제공하고, 군주는 보호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교환이 이루어지는 듯하지만, 현실을 보면 계급적 관계는 '전례의 논리'가 작동하는 것 같다고 그레이버는 지적한다.

말하자면 '반복'이 전례가 되면서 수탈이 공물이 되는 것이다. 약탈적 관계가 도덕적 관계로 바뀌는 것이다. 이러면서 당사자들은 어떤 공통의 도덕적 규범에 의해 움직이고, 왕마저도 자기 마음대로 하지 못하고 그 규범에 의해 움직여야 한다. 그러므로 농민들이 왕에게 바쳐야할 수확물의 양, 공물의 양을 놓고 따질 수는 있어도, 그 근거를 '약탈' '수탈'의 본질적 성격에서 찾을 수는 없게 된다. '얼마만 내면 될까' 고민하면서 관습이나 전례에 둘 가능성이 커진다.

이 말이 어려웠다면 반대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일방적으로 관대함을 베푸는 행위는 훗날에도 기대하게 될 전례가 될 것이다. 어른이 아이에게 사탕을 준다면, 거기에도 이런 전례가 확실히 자리 잡게 된다. 내 연구실로, 집으로 오는 전화가 그렇다. 모모 복지 재단에서 전화를 받고 물품을 구입했을 때, 그 전화는 대개 매년 걸려온다. 나는 안 사도 되는 게 당연한 것 같은데, 거절하기가 늘 미안하다. 전례가 나를 규정하는 것이다.

선물이 계급 관계, 또는 어떤 힘의 우열 관계를 배경으로 이루어질 때 상호성, 평등성은 수정되거나 폐기된다. 그런 관계에서는 공정한 거래의 기준이 적용되지 않는다. 앙드레 주민이 곰 먹이를 영주에게 계속 바쳐야 했던 이유, 조선 농민이 국왕에게 공물을 계속 바쳐야 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어떤 사회가 진정 얼마나 평등한 사회인지 판단할 때 적용할 수 있는 기준이 있다. 겉으로 보기에 권력을 잡고 있는 사람들이 재분배의 기능을 수행하는지, 아니면 지위를 이용해 부를 축적하는지 확인하면 된다. 우리가 살펴보는 공물 개혁에서 누가 어떤 입장에 서는지를 보면 그 지향을 알 수 있다.

다시 늘어나는 공물

이 기준을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시대에 적용해서 살펴보자. 앞서 이조판서 심재가 말한 공물의 회복은 우연히 있던 조치가 아니었다. 같은 시기 불길한 조치가 이어졌다.

한양은 나라의 근본이므로 백성들에게 은택을 넉넉하게 베풀어 보존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야 하는데, 임술년(1682년, 숙종 8년) 이후 흉년으로 각종 공물을 상당수 임시로 줄인 뒤 지금까지 8, 9년 동안 변통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공물주인(貢物主人)들의 원망이 오래되었습니다. 흉년이 들면 줄이고 형편이 나아지면 복구하여 백성들의 여망에 부응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승정원 일기>, 숙종 15년 3월 3일)

환국 뒤 좌의정으로 조정에 들어온 목래선(睦來善)의 말이다. 얼핏 보면 이 말은 과히 틀렸다고 할 수 없다. 그런데 앞뒤의 상황을 놓고 따져보면 얘기가 달라진다. 첫째, '권감(權減)', 즉 공물 품목을 임시로 줄이는 정책은 반드시 복귀를 전제로 하지 않는다. 백성들의 입장에서 보면 '반복된 선물=예물'을 줄였는데, 굳이 과거로 복귀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둘째, 권감으로 불만을 가진 사람들은 공물주인이었다. 즉 대동법 실시 이후 백성들에게 거둔 쌀이나 베를 가지고 관청에서 공물주인에게 물건을 사다 쓰게 되었던 바, 많이 사다 쓰지 않으니까 공물주인들이 불만을 가졌다는 것인데, 사실 일반 백성들의 입장에서는 이 역시 불만이랄 게 없는 것이다. 역관 집안이 상업을 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학계에서 장희빈이 상인 세력과 연결되었다는 연구가 제출되기도 했는데, 적어도 공물주인의 입장을 대변하는 목래선의 말을 보면 그런 견해는 충분히 개연성이 있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문제는 목래선이 말한 '공물 복구'의 추세가 계속되었다는 사실이다. 각 전(殿)의 진상 공물도 회복하였다. 이 해 6월 3일의 일로, 호조판서 오시복(吳始復)은 각 전의 공상(供上, 정규 진상), 탄일(誕日), 명절날 물선(物膳)을 예전대로 회복하자고 건의하여 숙종의 허락을 얻었다. 여기서 말하는 전(殿)이란, 대전, 대비전, 중궁전, 동궁전 등을 말한다. 이때 대비전은 이미 명성왕후가 세상을 떠서 없었고 원자는 아직 어려서 동궁(세자)으로 책봉되지 않았으므로, 이 조치는 결국 숙종 자신과 왕후가 된 장희빈을 위한 진상 공물의 회복이었다.

이에 앞서 윤3월 23일 민종도(閔宗道)의 건의로 왕후의 고비(考妣, 돌아가신 부모님)에 대한 제수(祭需, 제사에 쓸 물품), 소금, 젓갈, 생선 역시 봉상시에서 대도록 하였다. 이때 왕비는 인현왕후였다. 그러면 이 조치가 인현왕후의 친정아버지 민유중의 제수였을까? 삼척동자도 알리라. 아직 왕후로 책봉되지는 못했지만 장희빈의 아버지 장경(張烱)의 제수였다.

이리하여 각 전의 진상과 함께 각사 공물도 하나하나 원래대로 돌아갔다. 추세가 이렇다보니 별로 급하지 않은 관청도 손을 벌리기 시작했다. 군기시는 "비록 재정이 어려운 상황은 아니지만 다른 관청과 형평에 어긋난다"는 점을 들어 공물을 더 받겠다고 나섰다(<승정원 일기>).

대비되는 정책 지향

이러한 추세는 민유중 등이 추진했던 공물 감축 정책과 대비된다. 삼남(충청, 전라, 경상) 지방을 중심으로 대동법의 성공이 확실해질 무렵, 대동법을 추진했던 정책가들은 공안 개정으로 에너지를 집중하기 시작했다. 공안은 곧 공물의 품목과 수량을 기록한 장부이다. 대동법을 통해 공물을 전세화함과 동시에, 공물의 품목과 수량을 줄여 실질적인 백성의 부담을 줄이자는 것이다. 대동법이 세제 개혁의 질적 측면이라면, 공안 개정은 양적 측면이라고도 볼 수 있다.

계해년(1683년, 숙종 9년) 무렵 선신(先臣)이 고 상신 이단하(李端夏)와 공물가를 줄여서 (…) 이전에 비해 줄인 것이 1만여 석이었으므로, 본청 저축이 여유가 있었습니다. 기사년(1689년, 숙종 15년)에 이르러 당시 대신과 담당자가 도성 백성(즉, 공물주인)을 위로한다며 모두 복구하고 그 법을 폐지했습니다. 근년에 연달아 흉년이 들어 세입이 크게 줄었고 계해년 이후 각처 제향 및 응사(鷹師, 매사냥꾼) 등 명목으로 또 매우 많아졌으니, 본청의 형편이 어찌 이렇지 않겠습니까. (…) 계해년 줄였던 대로 시행하면 수요에 보탬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비변사등록>, 숙종 45년 4월 11일)

위 사료는 선혜청 당상을 맡고 있던 민진원(閔鎭遠)의 말이다. 지난 호에 인현왕후 폐위를 반대하는 박태보(朴泰輔)를 사주했다는 숙종의 의심을 받았던 인현왕후의 오빠, 그 사람이다. 기사환국이 숙종 15년에 있었으니까, 위의 기사는 그로부터 30년 뒤의 일이다. 26살이었던 민진원도 56살의 노성한 신하가 되어 있었다. 그의 말에 나오는 '선신'은 바로 아버지 민유중이다.

민유중이 이단하와 함께 공물가를 줄여서, 즉 쓸데없는 지출을 줄여서 확보한 재정이 1만 석이었다. 호조 1년 전세 규모의 8분의 1. 적은 양이 아니다. 이를 기사환국 이후 도로 환원시켰다는 것이다. 공물가를 줄인다는 것은 곧 백성에게서 거두는 공물의 감축과 연결되어 있었다. 농업 기반 사회에서 지출의 증가는 곧 세금의 증가를 의미하였다. 더구나 진휼 같은 복지 예산도 아닌 경상비는 말할 필요도 없었다. 숙종 15년 목래선, 오시복, 민종도의 말에서 확인했던 공물의 원상복구는 '도성 백성'을 위로한다는 명분으로 그동안 줄인 공물을 다시 늘려놓았다는 것을 의미했다. 장희빈 시대는 정부 지출의 증가, 백성들의 공물 부담 증가와 함께 시작되었던 셈이다. 눈 먼 사랑에는 돈이 드는 법이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민진원이 말했던 아버지 민유중의 계해년 공물 개혁은 <숙종 실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제 경기, 강원도에서 거두어들이는 쌀이 부족하고, 갖가지의 공물가도 삼남에 비하면 적기 때문에 조금 늘였고, 삼남에는 많은 까닭에 줄였으므로, 다섯 도 공물가가 비슷해졌습니다. 이는 거의 선배들이 말한 공안 개정의 뜻과 같으며, 다섯 도 전체로 볼 때 줄어드는 수량이 2만 수백 석이 됩니다. 신이 일찍이 경술년(1670년, 현종 11년), 이후에 여러 번 권감(權減, 물품의 종류를 줄이는 것)한 것과 경신년(1680년, 숙종 6년)에 감분(減分, 물가 자체를 낮추는 것)한 수량을 산출해 보니, 2만7000여 석이 됩니다. 그러므로 이번에 줄이는 것은 오히려 그동안 권감했던 것이나 감분했던 것의 수량에 미치지 못합니다. (<국역 숙종 실록> 권14 9년 3월 13일)

민유중의 말은 민진원의 말과 차이가 있다. 공물을 줄인 것은 맞는데, 그 수량의 차이가 크다. 민유중의 말로는 현종 때부터 숙종 6년까지 여러 차례 줄인 것이 2만7000여 석이었고, 숙종 9년에 다시 줄인 것인 또 2만 수백 석이었다고 했으니, 약 5만 석을 줄인 셈이다. 대체로 전세(田稅)와 공물의 비율이 1:3 정도라고 볼 때 공물은 25만~30만 석 정도이다. 이 중 5만 석을 줄였다면, 백성들에게 끼친 세제 혜택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도 민유중은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아버지 민유중의 공로는 아들 민진원이 기억하고 있던 것보다 훨씬 높이 평가받아야 한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어제 경연에서 판부사 송시열이 비용을 줄이자는 뜻으로 진달하자, 각사의 공물 가운데 두드러지게 지나친 것을 가려내어 품처하라는 분부가 있었으므로 써 왔습니다. 산삼과 도라지 등의 가미(價米)가 860여 석이니, 쓸데없는 비용이 많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국역 현종개수실록> 권20 10년 1월 일. 이 내용은 민정중의 문집인 <노봉집(老峯集)> 권6 '이유능에게 보내는 답장(答李幼能)'에도 실려 있다. 유능은 이단상의 자이다.)

현종 10년(1669년) 호조판서였던 민정중이 현종에게 한 말이다. 송시열은 현종에게 '세화(歲畫, 새해를 축하하는 그림)'도 쓸데없는 비용이라고 지적한 바 있었다. 그리고 효종 때 이미 재가를 받은 사안이라며, 600석이나 되는 공상(供上) 도라지(䓀莄) 값의 혁파를 청하여 허락을 받았다. 이후 현종은 호조판서 민정중에게 더 뽑아 올리라고 명하였고, 이튿날 민정중은 일단 사포서(司圃署)의 도라지와 산삼(山蔘)을 뽑아 올려 반으로 줄였고, 다른 관청도 모두 뽑아 올렸다. 민정중은 이 기쁨을 동생 민유중에게 편지로 썼다.

오늘 사포서(司圃署) 어공(御供)의 쓸데없는 비용 400석의 쌀을 줄이고 장차 각사(各司)마다 이에 준하여 항식으로 삼는 것은 성덕의 사업이니, 일을 맡은 신하도 더불어 영광인 것이네. 역(役)을 계량하는 것은 공공을 위해 출발한 것이지만 자네가 수고로 초췌하여 병이 났으니 우애의 지극한 정으로 또한 스스로 편할 수가 없구려. (<노봉집(老峯集)> 권7, '지숙에게 보내는 답장[答持叔' 지숙은 민유중의 자이다.)

당시 민유중은 충청 감사로 양전(量田)에 힘쓰다가 병을 얻을 정도였다. 편지에서 '역을 계량한다'는 말이 그것이었다. 이렇듯 형제가 모두 호조, 선혜청, 진휼청, 양전사를 담당하며 경제 정책과 민생을 챙겼다. 민정중은 어사로 나간 동생 민유중에게 세세한 민생고와 대안을 조언하기도 했다.

이미 어사(御史)로 나갔으니 소매 속에 얼마간 좋은 견해가 들어있으리라 생각하네. 따로 기특한 계획이 없다면, 진휼 당상을 내보내 한양 관청의 남은 재화를 모아 관동(關東, 강원도)과 관북(關北, 함경도)의 공물을 대신 납부하여 면제해주고 백성들에게는 받지 않는 것이 어떻겠는가? 지난해에 양남(兩南)에서 했던 것처럼 하면 이는 실로 착실한 진휼 정책이 될 것이니,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들 도에서 1년 동안 한양 각 관청에 내야 하는 공물 값을 통틀어 계산하면 베로 수백여 동이고, 인정(人情, 수수료)이 또 그 3분의 1일세. 현재 민간에서는 몇 줌의 베도 거둘 수가 없는데, 어떻게 이를 마련하겠는가. 정말 절박하기 그지없네. (<노봉집(老峯集)> 권7, '지숙에게 보내는 편지(寄持叔)')


영의정이 보는 곳

민정중 형제가 이렇게 실무에서 애쓰는 한편, 큰 비전 속에서 공납제 개혁을 끌고 가는 인물이 영의정 김수항이었다. 현종 대에도 그러했지만, 숙종 대에도 김수항은 공납제 개혁, 특히 진상 공물의 감축을 위한 노력을 늦추지 않았다. 계해년, 즉 숙종 9년(1683년)에 민유중, 이단하가 선혜청 공물가를 약 5만 석 줄였을 때에도, 김수항은 일의 선후를 정리하여 먼저 공안을 개정한 뒤에, 상인인 공물주인들의 어려움을 돌보아야 한다고 건의하였다. 그는 이때의 공물 변통에 만족하지 않고, 숙종 12년(1686년) 공물 개혁의 본령, 진상 공물의 절감을 제기하였다.

종전에 공물가(貢物價)와 물품의 종류는 많이 줄어들었으나, 대소 용도는 전보다 줄어든 것이 없으니, 한갓 백성의 원망만을 사게 되고 끝내 실효가 없습니다. 반드시 먼저 힘써 절감한 뒤에라야 실제 민력을 줄여주는 정책이 시행될 수 있을 것입니다. 어공(御供, 왕실에 내는 공물)은 전후로 재감하여 다시 여지가 없으나, 신해년(1671년, 현종 12년)에 재감한 것 가운데 만약 다시 옛날로 돌아가 아직까지 도로 감하지 못한 것이 있다면, 해당 관청으로 하여금 조사하여 다시 아뢰게 하는 것이 합당한 듯합니다. (<국역 숙종 실록> 권17, 12년 11월 29일》)

송시열의 발의와 호조판서 민정중의 조사를 통해 현종 10년 각사 공물을 줄인 뒤에 또 현종 12년에 진상 공물을 줄였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1670년과 1671년에는 조선 최대의 기근으로 인구가 100만 명 이상 줄었다는 보고가 있을 정도로 상황이 처참하였다. 그런 상황에서 진상 공물을 줄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김수항의 말대로 시행되었다면 공물의 핵심인 진상 공물을 개혁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이듬해인 숙종 13년부터 숙종은 장 씨에 대한 총애에 눈이 멀어갔다. 전답, 노비를 과도하게 내려주고, 명분 없는 숙원 책봉을 강행한 일, 정승 자리에 장희빈과 연결되어 있던 조사석을 끌어올리려고 인사 관례를 무시하는 한편 김수항을 배제한 일 등은 이미 살펴보았다. 그러니 김수항의 진상 공물 개혁이 제대로 추진될 리 만무하였다. 정치 세력의 변동은 경제 개혁의 방향과 연결되어 있었던 것이다.

장길산이 등장한 시대

▲ 황석영의 소설로 유명한 장길산은 드라마로 제작되기도 했다. 숙종이 장희빈을 왕후로 끼고 있던 시기에 장길산이 등장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민생을 돌보지 않은 정치가 낳은 산물이다. 마치 임꺽정이 등장한 명종 때와 마찬가지로. 임꺽정의 등장에 관한 당시 사관의 논평은 본 연재 프롤로그에 있다. (☞관련 기사 : 장희빈이 죽인 남자, 부활하다)
1689년 장희빈이 왕후가 되면서 일어난 정국의 변동은 대동법 실시에 이은 각사 공물과 진상 개혁을 추진하며 민생과 재정 안정을 도모하던 정책가들을 조정에서 밀어낸 경제적 사건을 낳았다. 그리고 이 시기는 소설로 유명한 장길산이 등장한 때이기도 하다.

<숙종 실록>에는 장길산에 대한 기사가 하나 밖에 나오지 않지만, <승정원 일기>에는 여럿이 보인다. 만만한 도적 사건이 아니었다는 뜻이다. 숙종 18년(1692년) 11월 12일, 목래선은 숙종에게 장길산과 그 도당을 체포하는 자에게 큰 상을 내리라고 건의했다. 장길산은 황해도 지방에서 출몰했는데 철원으로 토포사를 보내 그 무리 4명을 체포하였다. 그러나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장길산이 평안도 양덕(陽德) 땅에 숨어 있었는데, 포도청에서 장교를 보내 덮쳐서 잡도록 했지만 관군이 놓쳐 버렸다. 결국 양덕 현감만 벌을 주어 다른 고을 수령들에게 경계를 삼도록 하는 데 그쳤다. 이듬해 장유수, 장유립 등 장길산의 친척들을 체포하였으나, 장길산의 행방은 묘연하였다.

성호(星湖) 이익(李瀷)은 훗날 "숙종 때에 교활한 도둑 장길산(張吉山)이 해서(海西)를 횡행했는데 길산은 원래 광대 출신으로 곤두박질을 잘하고 용맹이 뛰어났으므로 드디어 괴수가 되었던 것이다. 조정에서 이를 걱정하여 신엽(申燁, 누구인지 모르겠다)을 감사(監司)로 삼아 체포하게 하였으나 잡지 못했다. 그 후에 한 도당을 잡은바, 그가 숨어 있는 곳을 고하였다. 무사 최형기(崔衡基)가 나포할 것을 자원하고 파주(坡州)에 당도하니, 장사꾼 수십 명이 말을 몰고 지나갔다. 한 사람이 고하기를, '저들은 모두 도둑의 무리다'라고 하므로 모두 잡아 가두었는데, 그 말들은 모두 건장한 암컷이었다. 그 사람이 다시 말하기를, '도적들의 말은 모두 암컷이므로 유순하여 날뛰지 않는다'고 하였다. 다시 여러 고을의 군사를 징발하여 각기 요소를 지키다가 밤을 타 쳐들어갔는데, 적들이 이미 염탐해 알고 나와서 욕설을 퍼붓다가 모두 도망쳐 아무 자취도 없어졌다. 그 후 병자년(1696년, 숙종 22년)에 이르러 한 적도의 진술서에 또 그의 이름이 나왔으나 끝내 잡지 못했다"라고 말했다. (<성호사설> 권14, 인사문(人事門) 임거정(林居正))

닫혔으되 열린 시간, 1689년

이렇게 숙종은 김수항을 잃은 것을 시작으로, 민정중을 잃고, 송시열을 잃고, 인현왕후를 잃고, 장희빈을 얻고, 장길산을 얻었다. 기사환국으로부터 5년 뒤, 갑술환국으로 장희빈을 빈으로 내리고 인현왕후를 다시 맞아들인 일은 다 아는 일이다. 그러나 한 번 어그러진 인연이 바로잡히는 데는 그만한 시간과 아픔이 필요했다. 취선당(就善堂)에서 인현왕후를 저주하는 푸닥거리를 했다가 발각되어 장희빈이 사사될 때까지 다시 6년의 시간이 지나갔다. 취선당, 선한 곳으로 나아가는 집이란 뜻. 그 집에서 선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기사환국 5년 뒤 숙종의 깨달음은 등을 돌린 민심에서 왔을 수도 있고, 무능하면서 음모에 능한 조정 신하들에 대한 실망 때문에 쟁쟁한 실력에 더하여 헌신적이기까지 했던 옛 신하들이 떠오르면서 갖게 된 회한에서 비롯되었을 수도 있으며, 장희빈에 대한 식어간 사랑의 결과일 수도 있고, 이 모두가 섞인 결과일 수도 있다. 늦었지만 다행이라는 말은 상투어가 아니다. 역사에 돌이키지 못한 일이 얼마나 많은가.

하긴 문곡의 죽음도 돌이키지 못할 일이다. 아들 김창협과 김창흡이 엮은 김수항의 <연보>에 따르면 사사하라는 명을 받은 것이 숙종 15년 윤3월 28일이고, 귀양지에서 세상을 뜬 날은 4월 9일이었다. 기사환국으로 목숨을 잃은 첫 번째 인물이었다. 억울한 일일 수 있다. 그러나 송시열은 김수항의 지문(誌文)에 이렇게 썼다. 두 달 뒤 송시열 자신도 정읍에서 사사되었기에 그로서는 이 글이 절필(絶筆)이었다.

그러나 당시의 용사자(用事者)들이 어떤 사람들이라는 것을 안다면 공의 죽음은 영광이요, 욕이 아닌 것이다. 더구나 지금 선모(宣母, 명성왕후)께서 무함을 받았고, 성사(聖姒, 인현왕후)께서 폐모(廢母)의 욕을 당하였으며, 양현(兩賢, 율곡과 우계)이 문묘에서 출향(黜享) 당한 이러한 때에 공의 죽음은 도리어 영광스러운 것이 아니겠는가?

정말 죽음이, 그것도 사사당하는 것이 영광스러운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떳떳한 죽음은 있는 듯하다. 흉한 세상에는 죽음이 떳떳할 수 있으므로. 나 같은 사람이 흉내 낼 수 있는 바는 아니지만, 기리기는 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저런 죽음이 많은 사회가 건강한 것은 아니다. 아무렴 저런 죽음은 적은 것이 좋다. 식민지 시대 모든 사람이 독립 운동을 하다 산화하지도, 할 수도 없듯이. 다만 그런 분들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사람이 많은 사회, 자칫 어떤 사심에 빠져 일시 그런 죽음을 냉소하는 사람들조차 곧 부끄러워하게 만드는 사회, 그런 사회가 좀 나은 사회가 아닐까 싶다.

김수항이 운명할 즈음의 상황이 녹록치 않아 이야기가 길어졌다. 앞으로 문곡의 아들과 손자 시대도 언급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일단 여기서 멈추고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야겠다. 문곡이 태어나던 시대로. 잠시 문곡의 죽음은 잊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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