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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상륙한 '분노' 열풍, 등록금 '폭탄'에 불 붙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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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상륙한 '분노' 열풍, 등록금 '폭탄'에 불 붙이나!

[94세 할아버지의 피 끓는 절규] 20대여 "분노하라, 봉기하라!"

스테판 에셀의 <분노하라>(임희근 옮김, 돌베개 펴냄)는 그 내용이 아니라 독특한 형식으로 인해 일찍이 출판계와 독자들의 이목을 끌었다. 나치 독일의 점령기 당시 프랑스 레지스탕스 운동에 참여했던, 올해 94세의 역전의 용사가 특히 젊은 세대를 상대로 '분노하라'는 메시지를 담아 쓴 한 권의 얇은 팸플릿. 그리고 그 책자가 불러온 엄청난 폭풍.

국내 번역본을 낸 출판사 돌베개에 따르면, 이 책은 프랑스에서 출간 후 7개월간 200만 부 이상 팔렸다. 이 책의 원문은 광고 문구와 표지 등을 빼면 13쪽에 불과하다. 책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분량의 작은 책자가 프랑스 사회에 큰 충격을 안겨준 것이다. 그리고 문제의 작품은 한국어로 번역되어 지금 우리 곁에서 같은 구호를 외치고 있다. "분노하라!".

▲ <분노하라>(스테판 에셀 지음, 임희근 옮김, 돌베개 펴냄). ⓒ돌베개
한국어판으로도 이 책의 본문은 고작 31쪽에 지나지 않으므로, 잠시 그 내용을 요약해 보자.

에셀은 나치로부터 레지스탕스가 프랑스를 해방시키던 그때의 정신을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레지스탕스를 움직이게 했던 동기, 즉 분노를 되찾는 것이 가장 급선무이다.

"나는 여러분 모두가, 한 사람 한 사람이, 자기 나름대로 분노의 동기를 찾기 바란다." (15쪽)

그 분노를 가로막는 장애물인 무관심을 떨쳐내며, 그것을 팔레스타인의 평화주의자들처럼 비폭력이라는 더 나은 수단을 통해 표현하고 세상을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다.

프랑스에서뿐 아니라 한국에서도 '사회적 부조리 앞에서 무관심하지 마라, 분노하라'고 외치는 책이 파장을 불러일으키며 베스트셀러가 되는 것은 특정한 위치에 있는 사람과 집단에게 그리 달가운 일이 아닐 것이다. 비록 에셀이 비폭력 저항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지만, 사람들이 분노를 회복한다는 것 자체가 기존의 질서를 유지하고자 하는 이들에게는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닐 테니 말이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과 미국 독립 혁명 당시 뿌려졌던 숱한 팸플릿과 달리, 이 책은 총과 칼을 차고 거리로 뛰쳐나와 왕의 군대를 쏘아죽일 것을 요구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그와는 정반대다. 팔레스타인 분리 장벽을 따라 평화롭게 걸으며 매주 (이스라엘의 표현을 따르자면) '비폭력 테러리즘'을 수행하는 빌린의 시민들처럼, "폭력을 멈추게 하는 좀 더 확실한 수단"(33쪽)인 비폭력을 통해 세상에 대한 분노를 표현하고 그것을 바꿔나가야 한다는 것이 에셀의 확실한 입장이기 때문이다.

이 단호한 비폭력주의는 이 책이 보편적 설득력을 지닐 수 있게 해주는 원동력 중 하나이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 '좌파'라고 믿는 특정한 집단에게는 반감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을 것이다.

비폭력을 통한 세상에의 개입은 물론 '정답'이지만, 모든 정답들이 그러하듯이 너무도 옳다. 지적으로건 정서적으로건 좀 더 자극적인 책을 원하는, 심장이 뛰고 두뇌가 달아오르며 팔다리에 힘이 들어가 읽던 책을 던져버리고 거리로 뛰쳐나가게 만들어줄 무언가를 바라던 일부 열혈 청춘들 혹은 근본주의자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 책의 결론은 싱겁거나 심심하거나 고리타분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말하자면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은 슬라보예 지젝으로 대변되는 이른바 '혁명적 좌파 지식인'들이 레닌을 복권시키고 스탈린주의를 재평가하고 있는 곳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이 문제의 책 <분노하라>를 조금 더 섬세하게 읽고 평가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지젝이 레닌을 재평가하고 알랭 바디우가 민주주의를 "오늘날 실로 궁극의 적"이라고까지 말하는 이 시대에, 민주주의의 가치와 투표를 통한 참여와 비폭력 투쟁을 이야기하는 이 책 <분노하라>는 왜 이토록 뜨거운 반응을 얻고 있으며, 우리는 이 책에서 무엇을 어떻게 얻어낼 수 있을까?

그런 관점에서 <분노하라>를 다시 한 번 읽어보면, 우리는 에셀에게서 레지스탕스 투사가 아니라 차라리 돈키호테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이른바 포스트모던 월드. 자본의 보편성이 금융의 날개를 달고 국경을 넘어 시세차익을 노리며 식량 투기를 하고 폭탄을 투하하는 시대. 이 난해한 세상과 맞서기 위해, 앞서 언급한 '첨단의 이론가'들은 더욱 난해한 이론과 논리와 문체를 꺼내들었다. 반면 1917년 태어나 90년을 넘게 살아가고 있는 그는 이렇게 외친다.

"세 단어로 줄이면 여전히 이것입니다. '자유, 평등, 박애!'" (62쪽)

앞서 나는 에셀을 '돈키호테'라고 불렀다. 왜냐하면 그가 나치 독일과 싸우던 그 시대와 달리, 21세기가 시작되고 벌써 10년도 넘은 지금은 그저 '자유, 평등, 박애'의 깃발을 높이 치켜드는 것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이 너무도 많기 때문이다. 단적인 예를 들어보자. 프랑스인으로서 살아온 그는 프랑스의 건국 이념인 '자유, 평등, 박애'가 보편적 이념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하지만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알제리에서 태어나 '비(非) 프랑스 인'으로 살아야 했던 프란츠 파농과 그의 후예들의 생각은 결코 그렇지 않을 것이다.

즉, 이 책은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현대적 문제'들에 대해 어떤 뚜렷한 해법을 건네주는 책이 아니다. 하지만 1950년대에서 갑자기 21세기로 건너온 듯한 이 돈키호테가 세상을 향해, 혹은 젊은 세대들을 향해 지르는 함성 속에는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요소가 담겨 있다. 나는 그것이야말로 이 책을 베스트셀러로 만들고 또 지금 여기 이 순간에서 유의미한 책이 되게 한다고 생각한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의 모습을 다시 한 번 바라보자. 우리는 이른바 '감정 노동'의 시대에 살고 있다. 서로가 서로를 향해 어느 순간은 '고객님'이 되고 또 어느 순간에는 '아줌마'가 되는 그런 세상이다. 직장에서 스트레스를 받고 턱없는 등록금을 요구받아 울분이 치솟을 때, 서점의 자기 계발 코너에 꽂힌 책들은 울컥하는 우리들을 '긍정적으로' 꾸짖는다.

제3세계에서 벌어지는, 혹은 당장 한국에서 벌어지는 노동력 착취에 분노하는 이들에게, 냉소적인 사람들은 한 마디 툭 던지고 지나간다. 네 손에 들려있는 아이폰은? 그거 만드는 중국 공장 직원들 자살하는 거 몰라? 너만 깨끗해?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이 다 그런 거 아냐? 이것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고도화되고 있는 자본주의가 보여주고 있는 또 하나의 진화한 모습이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분노하라>가 유의미해지는 지점과 맞닥뜨리게 된다. 앞서 우리가 언급한 첨단의 이론가들은 이런 세상에 대해 더욱 두꺼운 책, 더욱 현란한 인용과 각주와 대중문화 비평과 사도 바울에 대한 재해석과 문헌적 비틀기로 맞서겠다고 나섰다. 그들은 자본주의의 극복과 자유주의의 극복을 동시에 달성할 수 있는 거대한 혁명을 희구하지만, 실천적으로 완성될 가능성이 희박한 그 혁명을 우선 '이론적'으로라도 정당화하기 위해 시도한다.

반면 21세기에 도착한 20세기의 돈키호테는 그저 이렇게 외칠 뿐이다. 감정까지 팔아가며 노동해야 하는 자본주의에 대해 "분노하라!", 긍정을 강요하며 우리에게 일그러진 웃음의 탈을 씌우는 사회를 향해 "분노하라!" , 세상은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의 복합체라면서 그저 냉소할 뿐인 저들을 향해 "분노하라!".

이 소박한 결론의 아래에는 이른바 '현대적 조류'와는 사뭇 동떨어진, 그래서 검토할 만한 가치를 새삼 지니게 된 어떤 철학적 입장이 깔려 있다. 에셀은 자신을 참여로 이끄는 "분노의 이유들은 어떤 감정에서라기보다는 참여의 의지에서 생겨"(18쪽)난다고 말한다. 그런데 대체 뭐가 문제인지 혹은 문제가 아닌지 알기 힘든 이 세상 속에서, 어떻게 무언가에 대해 '참여의 의지'를 가질 수 있단 말인가?

에셀은 세계의 문제들이 너무도 복잡하게 꼬여있기 때문에 우리가 그에 대해 참여할 수 있는 지점을 찾을 수 없다는 입장을 단호하게 거부한다. 어떤 복잡하고 현란한 논증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그냥 "제발 좀 찾아보시오, 그러면 찾아질 것이오"(22쪽)라고 부탁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세계를 인식할 수 있다. 인식하고자 하는 의지가 확고하다면. 그런데 그 인식이야말로 세계에 대한 의지를 형성시켜준다. 무관심하게 행동하는 일을 계속한다면 "당신들은 인간을 이루는 기본 요소(분노하고 참여할 수 있는 힘) 하나를 잃어버리게 된다"(22쪽)고 에셀은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세계의 문제를 의지를 통해 찾아야 한다. 하지만 세계의 문제를 모르거나 모르는 채로 살아간다면, 우리는 그 의지마저 잃어버리게 된다. 그렇다면 의지가 먼저인가 인식이 먼저인가?

이것은 명백한 순환논증이지만 저자는 그 모순을 이론적으로 해결하는 일 따위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그저 저자 스스로가 말하듯 헤겔적인 의미에서의 낙관론적 역사철학을 견지하며, "인간의 자유가 한 단계씩 진보한다"(19쪽)는 믿음을 잃지 않고, 이 상호연관적인 복잡한 세상 속에서 명백하게 참여를 요구하는 지점을 발견하고야 말 뿐이다.

이것은 여러모로 1960년대 이후의 '신좌파'적 입장과 불협화음을 내는 입장이다. 에셀 자신이 메를로-퐁티의 강연을 들었지만 그보다는 헤겔에게 더 끌린다고 말하는 모습에서 알 수 있듯이, 탈목적론적 역사철학을 커다란 전제로 깔고 인간의 이성을 통한 역사의 단계적 발전에 대한 이상을 포기하는 것에서 출발하는 현대 좌파 철학은 스테판 에셀이 보여주는 낙관주의 및 그에서 비롯한 분노와는 완전히 다른 맥락을 형성한다.

즉 우리는 이 책을 '현대 철학 이전의 현대 철학'의 복귀로 이해할 수 있다. 직업적 철학자가 쓴 책도 아니고, 반박할 엄두가 나지 않는 분량으로 영화, 문학 등을 인용하며 자신의 현학을 과시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현란한 이론 속에서 실천적 무기력에 빠져 있기보다는 세계를 잘 살펴보고 분노할 수 있는 것을 찾아 분노하라는, 즉 참여하라는 단순한 메시지가 담긴 이 책이 이른바 '현대 좌파 이론'의 본산지인 프랑스를 뒤흔들고 있고 그 여파가 이제 대한민국에까지 미치고 있는 것이다.

세상이 한 권의 책으로 바뀌지 않듯이, 우리의 시대를 규정하고 있는 지적·철학적 분위기 역시 단번에 뒤흔들리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누구도 이 모든 불의에 맞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대답해주지 못하는 세상, 혹은 '나는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을 선호한다'는 말을 하기 위해 수백 쪽에 이르는 책을 써내는 철학자가 '좌파'의 아이콘으로 등극해버린 세상 속에서, 고작 몇 십 쪽도 안 되는 팸플릿이 이토록 뜨거운 반응을 끌어내고 있다는 것은 실로 의미심장한 일이다.

성급한 예견은 자제하는 편이 현명할 것이다. 하지만 이미 분노에 찬 200만 마리의 제비가 날아오르고 있는 중이다.

▲ 지난 10일 광화문 일대에서 개최된 '반값 등록금' 실현을 촉구하는 촛불 집회에서 참가 학생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프레시안(최형락)

<분노하라>, '분노' 신드롬 낳을까?

"'정의'를 고민하고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의 실체를 파악했으니, 이제 할 일은 오직 '분노'뿐인가!"

스테판 에셀의 <분노하라> 출간 소식을 듣고 한 출판계 관계자가 툭 던진 말이다. 실제로 지난 7일부터 서점에 깔린 <분노하라>가 2010년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김영사 펴냄), 장하준의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부키 펴냄)를 잇는 또 다른 신드롬을 낳을지가 관심거리다.

일단 출발은 나쁘지 않다. 초판 1쇄 2만 부를 찍은 <분노하라>는 17일 기준으로 1만6000부가 출고되었다. 출판사 돌베개 관계자는 "현재의 판매 추이라면 다음 주 초에 2쇄에 들어갈 예정"이라며 "일단 5만 부 판매를 기대하고 있는데, 그 이후에 얼마나 폭발력이 있을지는 아무도 장담하지 못하는 상황"이라고 전망했다.

이 책의 성공 여부를 놓고 출판계 안팎의 시선도 엇갈린다. 한 출판사 편집자는 "2010년 10월 출간된 <분노하라>가 프랑스에서 불과 7개월 만에 200만 부가 팔리는 성공을 거뒀고, 더 나아가 스페인을 비롯한 유럽 각국에서 큰 화제가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역사적 경험이 다른 한국에서도 그런 폭발력을 가질 수 있을지 회의적"이라고 지적했다.

이 책의 성공 가능성에 부정적인 의견을 보이는 이들은 하나 같이 역사적 경험의 다름을 강조한다. 한 언론인은 "에셀은 자유로운 프랑스를 만들려고 파시스트와 싸웠던 레지스탕스 정신의 핵심을 '분노'라고 강조하면서 젊은이들에게 참여를 독려하고 있다"며 "그런데 지금 한국의 젊은이에게 그렇게 강조할 만한 역사적 경험이 무엇이 있느냐"고 되물었다.

이 언론인은 "독립 운동의 한 축이었던 좌파가 거세된 상황에서 남은 것은 백범 김구 정도인데, 그 역시 친일 독재 세력에 의해서 축출되고 말았다"며 "사실 책을 읽는 동안 에셀이 레지스탕스 정신을 강조할 때마다 친일을 정당화하는데 급급한 일군의 한국 지식인들이 겹쳐서 참담했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이 책의 성공을 조심스럽게 점치는 이들도 적지 않다. 한 출판 기획자는 "<정의란 무엇인가>,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등의 성공이나 최근 대학생의 등록금 인하 운동 등을 염두에 두면 지금 한국의 시민들이 원하는 책이 바로 <분노하라>일 수도 있다"고 분석했다.

이 출판 기획자는 "프랑스에서 그토록 젊은이들의 열광을 이끌어낸 <분노하라>가 한국에서 외면을 받는다면 그야말로 진지하게 분석해볼 만한 점이라고 생각한다"며 "지금 출판계에서 신경을 써야 할 것은 이 책을 계기로 제2, 3의 한국 판 <분노하라>를 만들어내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정의란 무엇인가>,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의 경우처럼 구매력이 있는 40대 독자로부터 <분노하라> 열풍이 시작되리라는 전망도 있다. 분노해서 쟁취한 경험이 있는, 하지만 지금은 다분히 속물이 된 이른바 '386 세대'가 <분노하라>를 매개로 한 번 더 20대~30대 후배 세대에게 연대의 손을 내미는 모습이 나타날 수도 있다는 것.

<분노하라>, 한국어판 출간되기까지

몇 개월 전부터 세계적으로 화제가 되었던 책이라 한국어판 출간 과정을 둘러싸고도 뒷말이 많다.

우선 이 책의 번역서 판권을 확보하고자 국내 30개 이상의 출판사가 스테판 에셀과 프랑스 출판사에 접촉했다. 그 중에서 몇몇 출판사는 상당히 높은 금액의 선인세를 제시하기도 했다는 후문이다. 그러나 정작 이 책의 판권을 따낸 돌베개는 "터무니없이 높은 선인세와 같은 무리한 계약 조건은 없었다"고 손사래를 쳤다.

돌베개 관계자는 "에셀과 프랑스 출판사 측에 진보적인 사회과학 출판사로서 돌베개의 역사와 그간 출간한 책을 제시하며 설득했고 그것이 계약 성사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구체적인 계약 금액까지 밝힐 수 없지만 가장 높은 선인세를 제시한 출판사의 3분의 2 수준이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고 덧붙였다.

계약이 되고 나서도 고민이 많았다. 원서가 13쪽에 불과한 팸플릿이라서 책의 꼴을 만드는 것도 문제였기 때문이다. 더구나 프랑스 출판사는 계약을 할 때 5유로(약 7600원) 이하로만 가격을 매겨야 한다는 조건까지 제시했다. 3유로에 불과한 프랑스 원서를 염두에 둔 값싼 책값을 강제한 것이다.

돌베개 관계자는 "<분노하라>의 출간 의도를 최대한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한국의 맥락에 맞는 책을 만들고자 노력했다"며 "그래서 한국 독자들이 책이 놓인 프랑스 맥락을 이해할 수 있도록 스테판 에셀과의 인터뷰와 조국 교수의 한국어판 해설을 넣은 것"이라고 덧붙였다.

한국어판 책값으로 6000원을 매긴 데에도 사정이 있다.

돌베개 관계자는 "어차피 7500원 이하로 책값을 매길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출판사의 수익과 독자의 이익을 고려해서 최대한 합리적으로 결정하려고 노력했다"며 "6000원 미만으로 책값을 책정하면 인터넷 서점에서 10퍼센트 할인을 받아 책을 사는 독자는 두 권을 사도 책이 1만 원 이하가 돼 배송비를 부담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강양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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