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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옥정과 숙종의 로맨스, 이래도 아름답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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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장옥정과 숙종의 로맨스, 이래도 아름답니?

[오항녕의 '응답하라, 1689!'] 알고도 가는 길, 그 네 번째

(☞바로 가기 : 알고도 가는 길 ③ 여색에 빠진 왕, 하늘은 홍수로 답했다!)

알고도 가는 길, 그 네 번째

숙종은 타당한 명분도 없이 후궁 장 씨를 숙원(淑媛)으로 삼고 숙원방(淑媛房)에 사패 노비(賜牌奴婢) 100명을 나누어 주었다.

그것도 모자라 가을이 되면 농지 150결(結)을 떼어주기로 했다. 결(結)이란, 농지의 수확량을 기준으로 한 토지 단위이다. 그러므로 토지의 비옥도에 따라 실제 면적이 달라진다. 1결은 대략 3만 평(약 9헥타르)에서 15만 평(약 45헥타르) 정도이다. 3만 평 기준으로 볼 때, 1마지기가 150~200평이니, 대략 1결은 150~200마지기 정도이다. 150결이면, 어림잡아도 2만 마지기가 넘는다.

150결에서 나는 전세(田稅)를 떼어준 것일 수도 있다. 호조로 들어올 전세를 숙원방에 주는 경우이다. 조선 시대에는 통상 결당 전세가 4두(斗)로 고정되었으니까 모두 600두, 즉 30섬을 준 것이 되는데 이건 아닌 듯하다. 하긴 숙원방에 노비 100명을 주는 판국에 2만 마지기가 대수겠는가? 이런 이유로 사관은 1687년(숙종 13년) 강원도를 비롯하여 전국에 홍수가 났다고 해석했던 것이다.

김만중의 <사씨남정기>

조 대비와 장 씨의 후원을 입은 조사석이 정승에 임명되었을 때, 김만중(金萬重, 1637~1692년)이 경연 석상에서 "조사석의 임명은 궁중의 연줄을 댄 것이라고 온 나라 사람들이 말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숙종은 크게 화를 내며 "연줄을 대어 정승을 얻었다고 했으니, 이는 광해군 때 값을 바치고 벼슬을 얻은 것과 같다는 말이다. 금을 받았다고 생각하느냐, 은을 받았다고 생각하느냐?"며 다그쳤다. 그리고 곧 남해(南海)로 귀양을 보냈다(<숙종 실록> 권18 13년 9월 11일, 14일).

김만중은 <서포만필(西浦漫筆)>, <사씨남정기(謝氏南征記)>의 저자로 알려진 그 분으로, 호가 서포이다. 특히 <사씨남정기>는 인현왕후와 장희빈, 숙종을 비유한 소설로 알려져 있다. 주인공인 유연수는 15세에 장원 급제하여 한림에 제수되고 여승 묘혜를 통하여 어질고 덕이 많은 사(史) 소저를 부인으로 맞이했다. 그런데 사 부인은 아이를 낳지 못하였고, 사 부인은 유연수에게 첩을 얻으라고 권유했다. 유연수가 사양했지만, 사 부인이 교(喬) 씨를 불려 들여 첩으로 삼는다. 교 씨가 아들을 낳고 점점 욕심이 많아지고 사악해져, 동청이란 자와 결탁하여 사 부인을 모해한다.

교 씨는 자기가 부리는 여종으로 하여금 자기가 낳은 아들 장주를 죽이게 하고 이를 사 부인 소행이라고 유연수에게 일러바친다. 유연수가 노하여 사 부인을 쫓아내고 교 씨를 정실로 들였다. 또 유연수도 교 씨와 동청의 모함을 받아 엄승상에 의해 행주로 유배 간다. 동청은 자객을 보내 유연수를 죽이게 했는데, 유연수는 자객을 피하여 강물에 몸을 던졌다가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지게 되고 사 부인을 만난다. 유연수는 사 부인에게 잘못을 뉘우치고 사죄하며, 후에 좌승상에 오르고 교 씨는 붙들려 저자 거리에서 매를 맞아 죽는다는 줄거리이다.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숙종 당시 상황과 흡사함을 알 수 있다.

내가 광해군이란 말이냐!

숙종이 조사석을 우의정으로 임명한 데 대해 김만중이 궁중의 연줄을 이용한 정실 인사라고 비판했다. 숙종은 "이는 광해군 때 값을 바치고 벼슬을 얻은 것과 같다는 말이다"라고 발끈했다고 했는데, 숙종의 말에는 사연이 있다.

광해군은 즉위 이후 내내 자신이 거처할 궁궐 공사에 골몰했다. 서울, 지방을 가리지 않고 석재, 목재, 철, 기와 등을 공물(貢物)로 거두어들였다. 전세(田稅)도 결세(結稅)라는 이름으로 추가 징수했다. 그 결과 민생과 재정은 도탄에 빠졌다. 후금에 대항할 군사력을 키우는 일은 아예 물 건너간 지 오래였다. 이 와중에 궁궐 지을 재원을 마련하는 방법은? 그렇다. 관직을 파는 일이었다. 매관매직(賣官賣職), 역사에서 얼마나 많이 들어보았는가?

▲ 광무(光武) 7년(1903년)에 발행한 공명첩. 홍릉 참봉으로 6품 통훈대부를 주는 공명첩으로, 중추원 의정 김가진 명의로 발행되었다(한국학중앙연구원 소장). 공명첩은 관직을 파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곧 나라를 파는 일이었다. 한참 뒤의 자료지만, 참고로 제시해둔다. ⓒ오항녕
이름을 적지 않고 나누어주는 임명장인 공명첩(空名帖)이 그 방법이었다. 궁궐을 담당하던 영건도감에서는 쌀과 베보다 목재를 가지고 있던 사람에게 더 넉넉하게 공명첩을 발급하였다. 광해군은 한걸음 더 나아가 아예 짓고 있는 궁궐터의 가옥 주인과, 재목, 돌, 돈을 바친 사람들에게 모두 실직을 제수하라고 명했다. 전 별좌 한관(韓瓘)은 집터 630칸을 바쳤고, 전 인의 조숭(趙崇)은 387칸을 바쳤는데 이들에게는 모두 실제 관직을 주었다. 전 감역 황일호(黃一皓)는 집터 400칸이 인경궁을 짓는 데 들어갔고, 수령 자리를 받았다. 이외에도 죄를 짓고 쫓겨나거나 관직에 나오지 못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은(銀)이나 공사 자재를 받고 직첩을 돌려주었다.

다행히 반정이 일어나 나라를 팔아먹는 데까지는 이르지 않았지만, 광해군의 혼란스러운 정치는 안으로 민생과 재정을 파탄 내는 한편, 밖으로 동아시아의 급변하는 정세에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시기를 놓치는 결과를 낳았다. 숙종이 대뜸 '내가 광해군이란 말이냐?'고 예민하게 반응하며 반박했지만, 스스로 비슷하다는 것을 무의식적으로나마 느끼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발언이라고 생각한다.

게다가 김만중은 광성부원군 김만기(金萬基)의 아우였으니, 곧 숙종의 첫 왕후였던 인경왕후의 숙부였다. 김만중은 김수항에 이어 대제학을 지냈다. 그나마 그런 위치에 있었으니 경연에서 숙종의 처사를 비판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숙종은 김만중조차도 의금부에 하옥시켰다. 김만중은 당시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였는데, 자신이 근무하던 관청에 하옥된 셈이었다. 수차례의 국문(鞫問)에도 별도의 증거를 찾아내지 못하자 숙종은 김만중을 선천(宣川)으로 귀양 보냈다. 승정원과 옥당(玉堂, 홍문관)에서 구원하려 했지만 숙종이 화를 내며 물리쳤으므로 신하들이 두려워하여 감히 말을 다하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장 씨가 경종을 낳을 무렵

이후 후궁인 장 씨는 소의(昭儀, 정2품)로 올랐고, 1688년(숙종 14년) 10월 27일 아들을 낳았다. 그리고 두 달 뒤인 이듬해 정월 장 씨는 희빈이 되었다. 이날 사관은, "이항(李杭, 동평군(東平君))과 장희재(張希載, 장희빈의 오빠)가 민암(閔黯), 민종도(閔宗道), 이의징(李義徵) 등과 결탁하여 모의하였는데 못하는 바가 없었으니, 나라의 재앙이 장차 아침저녁에 닥쳐 사람들이 모두 무서워서 떨었다"라고 적었다.

숙종이 장 씨에게서 후사를 볼 무렵, 김수항은 병으로 양주 시골집에 내려가 있었다. 김창협의 상소에 따른 불편함, 조사석을 정승으로 임명하는 과정에서 숙종이 보여준 억지가 겹쳤을 것이다. 숙종은 아들을 낳은 한 달 뒤인 11월 19일에도 승지를 보내 김수항을 불렀다. 고명대신(顧命大臣)인 김수항에게 의지하여 정치를 하고 싶다는 초청이었다.

▲ 두 전직 대통령인 전 아무개와 노 아무개 집이 근처에 있는 연희동 108-3번지 한 귀퉁이에 장희빈 우물이 있다. 우물 앞 표지판에 따르면 여기가 장희빈 우물이라는 사실에 대한 기록의 고증이나 검증된 바는 없고, 마을 주민들 사이에 전해오는 이야기라고 한다. ⓒ오항녕
고명대신이란 선왕(先王)이 세상을 뜨면서 유언을 남겨 나라를 부탁받은 신하를 말한다. 1629년(인조 7년)생인 김수항은 이미 환갑을 맞은 노인이었다. 평균 수명이 40세를 갓 넘는 시대에 노인도 상노인이었다. 김수항은 그다지 건강하지도 않았고 그래서인지 술도 즐기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자주 앓았다. 당시 양주 시골집에 내려가 있던 것도 핑계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 무렵에 그는 현종의 왕비 명성왕후의 시책문(諡冊文)을 지었다. 명성왕후는 조선의 가장 헌신적인 관료의 한 사람이었던 김육(金堉)의 손녀였다. 명성왕후는 몇 해 전인 1683년(숙종 9년)에 세상을 떴다. 특히 명성왕후는 장희빈의 행실을 좋게 보지 않아 궁궐에서 내쫓았고, 숙종은 명성왕후가 세상을 뜬 뒤에나 다시 장 씨를 궁궐로 들려올 수 있었음은 이미 이야기하였다.


"아직 이르옵니다."

1689년(숙종 15년) 1월 11일 장 씨의 소생은 원자(元子)가 되었다. 이어 2월 1일 송시열은 원자로 봉하는 일이 아직 이르다는 상소를 올렸다. 그리고 그 상소는 돌이킬 수 없는 길을 열었다.

지난해 11월 초에 지금의 영의정 신(臣) 김수흥이 급히 신에게 글을 보내어 알리기를, "후궁에서 왕자의 경사가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일전에 늘 같이 근심하던 일이므로 선비나 백성들에게 빨리 알리려고 한 것이었습니다. 신이 쇠약하여 정신이 혼몽하고 귀가 어두운 가운데서도 저절로 기쁨에 넘쳐 입이 벌어졌습니다.

오늘날에 이르러 듣건대, 신하들 중에서 위호(位號, 장 씨 소생을 원자로 정하는 것을 말함)가 너무 이르다는 말이 있다고 합니다. 대개 송나라 철종(哲宗)은 열 살인데도, 번왕(藩王)의 지위에 있다가 신종(神宗)이 병이 들자 비로소 책봉하여 태자로 삼았습니다. 이렇게 천천히 한 것은 제왕의 큰 거조는 항상 여유 있게 천천히 하는 것을 귀하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숙종은 이미 원자로 결정된 뒤에 이런 말을 한다며 격노했다.

"송시열은 산림(山林)의 영수(領袖)로서 나라의 형세가 고단하고 약하여 인심이 파도처럼 험난한 때에 감히 송나라 철종을 끌어대어 오늘날의 정호(定號)를 너무 이르다고 하였으니, 이런 것을 그대로 두면 임금을 무시하는 무리들이 연달아 일어날 것이니, 멀리 유배 보내야 할 것이다. 그래도 유신(儒臣, 학문하는 신하)이니 일단 너그러운 법에 따라 삭탈관작(削奪官爵)하고 성문 밖으로 내치게 하라."

이런 때에는 임금의 뜻에 영합하는 무리가 늘 있기 마련이다. 장령(掌令) 이윤수(李允修), 지평(持平) 이제민(李濟民)은 "송시열(宋時烈)은 광해조(光海朝)의 간신(奸臣)의 아들로서 산림(山林)에다 이름을 걸고 평생토록 저지른 죄악(罪惡)은 낱낱이 들기도 어렵습니다"라고 숙종의 결단을 부추겼다. 송시열의 아버지인 송갑조(宋甲祚, 1574~1628년)를 '광해조의 간신'이라고 지칭하였다.

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송갑조는 1617년(광해군 9년) 생원시와 진사시에 모두 합격하였으나 같이 합격한 이영구(李榮久) 등의 반대를 무릅쓰고 서궁(西宮)에 유폐되어 있는 인목대비를 혼자 배알하였다가 유적(儒籍)에서 삭제되자 귀향하여 독서로 소일했던 인물이었다. 그랬던 송갑조가 오히려 이윤수 등에 의해 간신으로 매도당했던 것이다.

원자 책봉이 시기상조라는 송시열의 상소가 노론(老論) 당색의 입장을 대변한 것이라고 지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인현왕후 민 씨 집안이 정파로 보면 노론이기 때문이다. 그 점을 감안하더라도 이제 태어난 지 두 달 된 아기를 원자로 책봉할 때 늦추자는 의견이 그리 지나친 것인지 잘 모르겠다. 오히려 전후 사정을 고려할 때 숙종이 장희빈에게 미혹되어 무리수를 두었다고 보는 편이 타당할 듯하다.

왕후와 영빈을 쫓아내다

송시열의 상소가 올라간 다음날, 숙종은 영의정 김수흥을 파직시켰다. 김수항의 작은 형이다. 이어 권유(權愈)와 목창명(睦昌明)을 승지로 특별히 임명하였고, 목내선(睦來善)을 좌의정에, 예조판서 김덕원(金德遠)을 우의정에, 여성제(呂聖齊)를 영의정에 임명했다. 이를 기사년(1689년)에 일어난 정국의 전환, 기사환국(己巳換局)이라고 부른다.

숙종은 원자의 외가라는 이유로, 장 씨 집안 3대를 증직하였는데, 장형(張炯)에게 영의정을, 장수(張壽)에게 좌의정을, 장응인(張應仁)에게 우의정을 주었다. 전례 없는 파격이었다. 왕비의 아버지에게 의정을 증직하는 적은 있었지만, 3대를 준 적은 없었다. 그래서인지 사관은 "임금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다"고 적었다.

숙종의 뜻은 어디 있었을까? 그건 머지않아 드러난다. 바로 인현왕후의 폐출이었다.

치란(治亂)과 흥폐(興廢)는 모두 왕비에게서 연유되는 것이다. 지금 궁위(宮闈, 왕비)에 마음씨 곱고 정조가 바른 덕은 없고 도리어 여후(呂后)나 곽후(霍后) 같은 패륜의 행실만 있어서 평시의 언동이 모두 분노와 원망에 차 있었기 때문에 세월이 쌓여 갈수록 감화의 기대가 끊겨가고 있다.

(…) 내 나이 서른에 비로소 원자를 두었으니 이것은 종묘사직의 무한한 복이다. 진실로 인간다운 마음이 있는 사람이면, 경사로 여기는 마음과 아끼는 정이 자기가 낳은 자식과 다름이 없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원자가 탄생하였다는 말을 듣고부터 매우 노여운 기색을 드러내며 도리에 어긋난 불평하는 말을 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다. 또 주가(主家, 친정)와 더욱 친밀히 지내는 그 행적이 치밀하여 뒷날의 걱정이 이루 말할 수 없을 것 같아 일찍 국본(國本)을 정한 것이다. (…) 하루인들 이런 사람이 일국(一國)의 국모(國母)로 군림할 수 있겠는가?


숙종은 인현왕후를 여후와 곽후에 비유했다. 여후는 한 고조(漢高祖)의 황후로 척 부인(戚夫人)을 인체(人彘, 팔다리를 잘라 변소에 두었다)를 만들고 소제(少帝)를 살해하였다. 곽후는 곽광(霍光)의 딸로 효선제(孝宣帝)의 황후였는데 온갖 악행을 자행하다가 폐위되었다가 결국 자살하였던 인물이다. 1694년(숙종 20년) 복위할 때 밝혀지거니와, 인현왕후가 이런 인물은 아니었다. 어떤 사료에서도 인현왕후를 위의 숙종의 비답과 비슷하게나마 묘사하지 않았다. 인현왕후를 쫓아낸 데 이어, 숙종은 4월 24일 김수항의 5촌 종질인 영빈 김 씨를 쫓아내는 비망기를 내렸다.

김 씨(金 氏)는 궁궐에 들어온 뒤로 조금도 공경하고 순종하는 행실이 없었고 해괴하게 질투만을 일삼은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밖으로는 김수항(金壽恒) 및 친정과 결탁, 내응하여 임금의 동정을 살폈으므로 궁중의 모든 일이 누설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또 신하들을 인견(引見)했을 적에 한 말을 적어 놓은 쪽지를 훔쳐 몰래 보고 나서는 소매 속에 감추어 두었다가 누차 힐문을 받은 뒤에야 비로소 도로 바쳤다. 정말 마음이 음흉하여 실로 헤아리기가 어렵다.

안으로는 교사하고 간특한 부인에게 주야로 아첨하여 피로 당색을 맺고 유언비어를 날조하여 못하는 짓이 없었는가 하면, 나라를 교란시키기 위해 임금을 무함했으니 실로 패역부도(悖逆不道)한 죄과를 범한 것이다. 당연히 중법으로 다스려야 하지만 우선 너그러운 법을 따라 작호(爵號)를 환수하고 정상을 참작하여 폐출(廢黜)시킨 것이니, 그대들은 알라.


김수항이 귀양지 진도에서 사사된 직후의 조치였다. 비망기를 내린 뒤 숙종은 거처를 창경궁으로 옮겼다. 같은 날, 현종의 셋째 딸 명안공주(明安公主, 1665~1687년) 남편인 오태주(吳泰周, 1668~1716년)의 아버지인 오두인(吳斗寅, 1624~1689년)과 박태보(朴泰輔, 1654~1689년) 등 86명이 인현왕후의 폐출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아! 궁위(宮闈)의 일은 바깥사람으로서는 알 수가 없어 신들은 이른바 '가탁(假托)하여 무함했다'는 말이 무슨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설령 내전(內殿)께 조그만 잘못이 있다고 하더라도 꿈 얘기를 한 것은 말실수에 불과한 것이요 행적에 드러난 것이 아닌데, 그것이 무슨 큰 허물이라고 갑자기 적발하여 드러내면서 조금도 가차 없이 망극한 명칭을 씌워 헤아릴 수 없는 위엄을 진동시키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더구나 원자의 탄신은 실로 종묘사직의 무한한 경사로 궁벽한 산골짝에 사는 사람들도 모두 기뻐하여 마지않는데 내전의 마음인들 어찌 기쁘지 않을 리가 있겠습니까? 지난해 빈어(嬪御, 후궁)를 선발하라는 명을 내리신 것도 내전께서 권해서 시작했던 일이었으니, 저사(儲嗣, 왕의 후사)가 넓지 않은 것을 민망히 여겨 자신의 사심(私心)을 잊은 조처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제 원자가 탄신한 뒤에 와서 도리어 불평하는 마음을 품고 원망하는 기색을 드러냈다는 것은 인지상정으로 헤아려 보아도 전혀 그럴 리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왕정의 약점이 여기에 있다. 한 번 임금의 마음이 휩쓸리면 쉽게 돌이킬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세자 때는 서연(書筵), 임금이 되어서는 경연을 통해 덕망 있는 신하를 스승으로 삼아 공부를 계속하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했던 것이다.

박태보의 직언(直言)

박태보, 오두인 등은 숙종의 어머니 명성왕후가 인현왕후를 아꼈던 일을 상기시키고, "삼년상을 지낸 아내는 내보내지 못한다(與經三年喪, 不去)"는 말까지 동원하여 숙종의 조치를 되돌리려 하였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모진 국문(鞫問)이었다.

▲ 박세당 초상화. 박태보는 박세당의 아들이다. 박세당은 <장자(莊子)>의 해설서, 주석서인 <남화경주해산보(南華經註解刪補)>를 편찬한 학자이다. (☞관련 기사 : <박세당의 장자 남화경주해산보 내편) 남인이 물러나고 서인이 집권하고 있던 1682년 간행된 <남화경주해산보>는 <현종 실록> 활자로 인쇄되었다. 즉 <장자> 해설서를 나라에서 국비로 간행했다는 말이다. 우리가 경직된 성리학의 시대로 오해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조선 사상계는 그리 경직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재미있는 저술이다. ⓒ오항녕
소두(疏頭, 상소 주동자)를 맡았던 박태보는 김수항과 동갑이었던 박세당(朴世堂, 1629~1703년)의 아들이었다. 인현왕후 폐출이 있기 두 달 전, 그러니까 송시열이 원자 책봉이 시기상조라는 상소를 올린 바로 그때 박태보는 송시열과 대립하고 있었다. 송시열이 '윤선거(尹宣擧)가 의리를 잊고 몸을 욕되게 한 것이 애석하다'고 윤선거 비문에 쓴 일 때문에 노론과 소론으로 갈리어 갈등을 겪었던 것이다.

박태보는 윤선거의 외손자였다. 박태보는 송시열의 아버지 송갑조의 이름이 광해군 때 이영구의 흉소(凶疏) 가운데 있다고 비판하였다. 적절한 반박 방식은 아니었지만, 박태보의 뜻은 송시열이 윤선거의 실절(失節)을 비판할 자격이 없다는 말이었다. 흉소란 바로 인목대비를 폐모시키라는 상소를 말한다. 그러나 박태보가 말한 내용은 사실이 아니었다. 박태보의 외증조(外曾祖)인 윤황(尹煌, 윤선거의 아버지)이 쓴 송갑조에 대한 만사(輓詞)에서 그건 사실이 아님을 증언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노론과 소론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상황에서도 송시열과 박태보는 중전 폐위에 대해서 같은 입장을 취하였다. 숙종은 즉각 국문을 명하였다. 친국(親鞫), 숙종이 직접 신문하는 형장을 열었다. 인현왕후의 궁인이 쓴 것으로 보이고, 비교적 정확성을 인정받고 있는 <인현왕후전>(이상보 교주, 을유문화사 펴냄, 1971년)에는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내가 읽기 쉽도록 조금 고쳤다.

군부(君父) 실덕하셨는데 신하가 간언하지 않고, 요염한 자의 참소에 미혹되어 죄 없는 국모를 폐하시니 이는 천고에 없는 큰 변고요 풍속에 관계된 일이옵니다. 신이 비록 보잘것없으나 국록을 먹고 조정 반열에 참예하였는지라, 군부가 실덕하사 만대에 누명을 들으실 줄 아는데 어찌 간언하지 않겠습니까. 성상께서는 국모를 참소한 자를 베고 망극한 전교를 거두시면 종묘사직의 복이고, 만백성의 다행일 것입니다.

하는 말은 신하로서 갸륵하고 충성심이 넘치지만, 실로 칼날 같은 발언이 아닐 수 없다. 숙종은 '실덕, 즉 덕을 잃은 상태'라는 것이고, '요염한 자', 즉 장희빈의 참소로 이런 일이 생겼다는 직언이었다. 이대로 두면 임금이 영원히 불명예를 감수해야할 것이니, 나라도 나서서 간언을 해야겠다는 서릿발 같은 기개가 짧은 말이지만 넘쳐흐른다.

떳떳하게 죽는 사람들

숙종은 독이 올랐다. 잘못한 데가 있을수록 독이 오르는 이치는 예외가 없다.

"조그마한 놈이 이렇게까지 간악하냐. 나는 참소나 듣는 혼군(昏君)이라 하고, 저는 직언을 하는 충신이라 하니, 이런 대역부도한 놈을 이 정도 형벌로는 부족하니, 압슬(壓膝) 기구를 들여오라."

압슬, 무릎을 짓이기는 고문이다. 압슬로 빻고 능장(稜杖)으로 치니 좌우가 차마 보지 못하였고, 피육(皮肉, 살갗과 살점)이 떨어지며 골절(骨節, 뼈마디)이 드러나, 튀는 피가 곤룡포 아래 떨어지는데도 박태보는 안색이 씩씩하고 조금도 굴복치 않았다고 한다. 인두로 살을 지지는 낙형(烙刑)에도 박태보의 기개는 꺾이지 않았다(이 사실은 <숙종 실록>이 훨씬 상세하지만 <인현왕후전>과 기조는 차이가 없다.)

결국 오두인은 의주(義州)에 정배(定配)하고 박태보는 진도(珍島)에 정배하게 했는데, 박태보는 국문의 여파로 과천(果川)에 이르러 세상을 떴다. 사관은 이를 두고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저 세 사람(박태보, 오두인, 이세화(李世華))의 억울함은 똑같으나, 박태보는 임금의 노여움이 더욱 격발될수록 응대가 화평하였고, 형장의 위세가 혹독할수록 정신이 의연하였으니, 참으로 절의 있는 선비라고 할 수 있다. 화(禍)를 자초하여 끝내 목숨이 끊어지고 말았으니, 성세(聖世)의 누(累)가 됨을 이루 말할 수 있겠는가? 당시 좌우에서 모시고 있던 신하들이 재보(宰輔, 재상)가 아니면 대간이었는데도 임금의 노여움이 두려워 입을 다문 채 말 한 마디 못하였으니, 이런 사람들을 어디에 쓰겠는가?

앞서 말했듯이 박태보는 송시열의 아버지 송갑조를 무함하였는데, 박태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송시열은 눈물을 흘리고 소식(素食, 생선이나 고기를 쓰지 않은 음식을 먹음)을 하였고, 이어 존경의 뜻으로 자손에게 '박태보'라는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못하도록 경계하였다. 박태보가 죽을 때 나이가 39세였다. 뒤에 증직(贈職), 정려(旌閭)하고 시호(諡號)를 문열(文烈)이라 하였다.

국문 당시, 박태보가 승복하지 않자 몸이 단 숙종은 승지로 하여금 그의 자백을 받으라고 명하였다. 당시 승지는 김해일(金海一)과 이서우(李瑞雨) 등이었다. 승지는 박태보에게 "무슨 일로 상의 뜻을 거슬러 저 모양이 되며, 성상으로 하여금 밤새도록 옥체 피곤하게 하는가?"라고 심문했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박태보는 되받았다.

난신적자가 국록만 허비하고 임금을 어진 일로 보필하지 않으며, 아첨하여 죄 없는 국모를 폐출하되 남의 일인 양 알고 오히려 나를 꾸짖으니, 이는 짐승이고 오랑캐와 같다. 나는 죽어도 용봉(龍逢, 하나라 폭군 걸(桀)을 비판한 신하), 비간(比干, 은나라 폭군 주(紂)를 비판한 신하)이 되려니와, 너희는 살아 있으매 나라의 도적이고, 죽으매 더러운 귀신이 될 것이며, 재앙이 자손에 미치리라.

이렇게 정작 충신은 갔다. 숙종은 총기를 잃은 탓에 충신을 잃고, 덕이 없는 후궁을 곁에 두었다.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항상 판단력이 흐려진 정치의 결과는 백성의 고통으로 나타났다. 가까스로 줄였던 세금이 다시 늘어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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