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수 앞바다, 신기루 같은 섬 사도 ⓒ여수시 |
신생대의 해변을 산책하다 보면 어느새 도착하게 되는 중생대의 바닷가. 작은 다리와 모래톱으로 연결된 사도, 중도(간데섬), 증도(시루섬) 세 개의 섬을 거닐며 소라와 해삼도 잡아볼 수 있고, 마을 앞 백사장에서 수영도 즐길 수 있고, 공룡발자국을 따라 걸어볼 수도 있는 신기루 같은 섬. 버스커버스커의 노래 <여수 밤바다>를 들으며 가을이 오는 여수 바다로 떠나봅시다.
또 동백은 아직 피지 않았지만 동백나무 열매가 빨갛게 익어가는 오동도의 동백 숲을 소요하는 시간도 준비되어 있습니다. 통영 못지않게 맛깔스런 여수의 해산물 요리들도 여름 무더위와 생의 허기에 지친 속을 따뜻하게 달래줄 것입니다.
섬학교 제19강은 2013년 9월 7(토)∼8(일)일, 1박2일로 여수 앞바다의 아름답고 신비한 섬 사도를 찾아갑니다. 강제윤 교장선생님으로부터 9월 답사지인 사도에 대해서 들어봅니다.
지금은 바야흐로 섬의 시대
바야흐로 섬의 시대다. 신안은 섬이 1,004개라는 천사의 섬을 표방하고 통영은 섬이 526개라 신안 다음으로 섬이 많다고 홍보한다. 여수 역시 '365 생일 섬'을 내세우며 섬 관광자원화에 열을 올리고 있다. 항공사진으로 확인된 신안의 실제 섬 숫자는 1,004개 보다 많은 1,025개다. 하지만 인지하기 쉽게 섬 숫자를 줄여 1,004의 섬을 표방했다. 반면 통영은 본래 섬이 250여개였는데 몇 해 전부터 갑자기 526개의 섬이라 주장하고 있다. 섬으로 포함시키지 않았던 만조시에도 물에 잠기지 않는 암초들까지도 섬 숫자에 포함시켜 두 번째로 섬이 많은 지역이라고 선전한다.
365개의 섬을 가진 여수나 201개의 섬이 있는 완도에서 들으면 섭섭할 소리지만 홍보가 먹혀들어 많은 언론이나 여행기에 통영은 신안에 이어 두 번째로 섬이 많은 기초자치단체로 등장한다. 317개의 섬을 가졌던 여수 역시 새로운 섬을 더 찾아냈다며 1년 365일과 같은 365개 생일 섬으로 홍보하고 있다. 인지시키기 쉬운 까닭이며 섬을 찾는 관광객들이 증가하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섬들이 전례 없이 관심을 받는 것은 반가운 일이지만 섬에 대한 관심이 진정으로 섬 주민들과 섬을 위한 일이 될 것인지는 회의적이다. 뭍에서 더 이상 개발거리를 찾지 못한 개발 업자들이 섬을 새로운 먹잇감으로 노리고 있기 때문이다. '명품 섬'이니 '가보고 싶은 섬'이니 하는 따위의 섬 개발 프로젝트를 보면 대체로 섬주민이 아니라 개발업자들만 배불리는 막가파식 개발이 대부분이다. 삼천포 신도 명품섬 개발처럼 자동차 한 대 없는 섬에 포장도로를 만드는데 예산을 다 써버리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여수의 사도 역시 그 경이로운 자연경관과 백악기(1억 3,500만 년∼6,500만 년 전) 공룡 발자국 화석 발견 등으로 관광객들의 관심을 끌면서 개발이 추진되고 있는 섬 중의 하나다. 아직은 사도에 난개발의 기미는 보이지 않지만 개발 세력이 언제까지 이 맛있는 먹잇감을 그대로 두고 보고만 있지 않을 거란 불안감이 엄습해 온다. 사도는 아직도 시원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훼손되기 전에 서둘러 가봐야 할 이유가 그것이다. 또 가본 뒤에는 막개발의 바람으로부터 지켜내는데 힘을 보태야 할 섬이기도 하다.
▲ 사도 입구에서 처음으로 방문객을 맞이하는 것은 티라노사우루스다. ⓒ여수시 |
신기루 같은 섬
여수시 화정면 낭도리 사도. 사도 해안은 그대로 자연사박물관이다. 곳곳이 용암의 흔적과 공룡발자국 투성이다. 면적 0.36㎢, 해안선 길이 6,4km에 불과한 작은 섬 사도가 한때는 인구가 500여 명에 이를 정도로 융성하던 시절도 있었다. 한 때의 화려함은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리고 지금은 불과 40여 명이 살아가는 한적한 섬이다.
공룡발자국 화석과 함께 사람들이 사도에 부쩍 관심을 갖게 된 또 하나의 이유는 바닷물이 갈라지는 자연 현상 때문이다. 정월이나 2월, 4·5월 보름 썰물 때면 사도와 인근 섬들 사이에 바닷길이 활짝 열린다. 사도에서는 한해에도 몇 번씩 '모세의 기적' 같은 일이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난다. 특히 가장 넓은 바닷길이 열리 때는 음력 2월 영등사리 때다. 이때는 사도 주변의 여러 섬들 7개가 하나로 연결된다. 사도를 중심으로 추도, 중도(간데섬), 장사도, 나끝, 연목, 증도(시루섬)까지 7개의 섬들이 ㄷ자 모양으로 이어져지는 신비를 연출한다. 물이 빠지면 사람들은 바다 사이로 난 길을 따라가며 갯것들을 주어 담는다.
사도는 주변의 섬들 사이 바다를 에워싸고 있어 호수 안의 섬 같다. 그래서 옛적에는 사호라 했다. 진도의 관매도 앞바다가 조도로 둘려 쌓여 관매도가 관호라 불렸던 것과 같은 이치로 생긴 이름이다. 사도는 한때 돈섬이라고 불릴 정도로 부유했다. 어로 기술이 주변 어느 섬보다 발달해 고깃배가 많았다. 그 시절에는 커다란 조기잡이 중선배가 여섯 척이나 있었고 작은 거룻배도 30척이나 됐다. 또 상고선을 부리는 주민들도 많았다. 상고선은 바다에서 조업하는 어선들로부터 생선을 사서 항아리에 소금을 넣고 저린 뒤 여수, 마산 등지로 내다 팔아 큰 이익을 얻었다. 사도의 융성은 어업 덕분이었던 것이다. 이때 번 돈으로 사도 주민들은 근처의 큰 섬 낭도에 8천여 평 산비탈을 구입했다. 그 산비탈을 개간해서 밭곡식을 길러 먹었고 땔감을 베어다 땠다.
▲ 공룡 발자국들은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전문가들은 이 일대가 공룡들의 한반도 최후의 피난처였던 것으로 보고 있다. ⓒ섬학교 |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사도는 더 이상 어업을 하지 않게 됐다. 고깃배들이 아주 사라져버렸다. 1959년 9월, 추석날 한반도를 강타한 태풍 '사라' 때문이었다. 이때 30여 척의 어선들이 전부 부서져 침몰하고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빼앗겼다. 학교 옆에 있던 오래된 마을 숲도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이후 많은 주민들이 바다가 무서워 섬을 떠나버렸고 섬은 한적해졌다. 섬에 남은 사람들도 더 이상 어선을 부릴 엄두를 내지 못했다. 트라우마는 섬 전체를 덮쳤다. 오랫동안 섬은 어선 없는 섬이었다. 그렇게 5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섬사람들은 그저 농사를 짓거나 물이 빠지면 갯가에 나가 미역, 톳 같은 해초류를 뜯어다 팔며 생계를 이어갔다.
근래 들어서는 인근의 추도, 낭도 등과 함께 공룡발자국 화석이 발견되면서 관광객이 늘어나 관광업도 생계의 한 방편이 됐다. 지금은 조업을 겸하는 낚시 어선이 몇 척 생겼다. 사도는 2002년 1월 유네스코 세계유산 잠정 목록에 등재된 남해안 공룡 화석지 5곳 중 한 곳이다. 사도뿐만 아니라 인근의 낭도 등 7곳의 섬에서 3,800여 개의 공룡발자국이 발견됐다. 공룡이 84m를 걸어간 흔적(발자국 43개)도 있다. 그래서 사도 입구 선착장에서 육지 사람들을 먼저 반기는 것이 두 개의 공룡 모형이다.
▲ 호젓한 사도 해변 ⓒ여수시 |
찾아와 줘서 고맙소
"죽어야제. 부르면 가야제. 한 번씩은 간게로. 아이가, 아이가. 멜세 헛궁리만 하고, 몹쓸 궁리만 하고 사요."
할머니는 마루에 앉아 멍하니 하늘을 보고 계신다.
"사는 게 힘드요. 자석들 있다 해도 못 가고. 즈그나 살어야제. 우리 집에 엎졌다가 가야제. 아들 서이 여수 사요. 오라 그래 쌓지만 안가요. 여가 펜치요."
자식들은 모두 도시로 떠나고 노인은 혼자 섬 마을 낡은 집에 남아 생의 마지막 시간을 보낸다.
"큰 동네서 시집 와갖고 이리 사요."
노인은 열일곱에 큰 섬 낭도에서 사도로 시집와서 지금껏 살았다.
"사는 것이 고생이다우. 영감하고 살다가 영감 가빌고. 갯것이나 뜯어 묵고 그락저락 살았소."
할아버지는 배타고 고기잡이 다니고 그러다 63세에 가뭇없이 이승을 떠버렸다.
"젊었을 때 부지런히 잡수고, 댕길 때 다 댕기고 그라소. 늙으니까 아무데도 못 가겄소."
"연세가 어찌 되세요 할머니?"
"겁나게 묵었응게 간다하제. 아이가, 아이가."
92살, 할머니는 말씀하기도 힘겨운지 한마디 하실 때마다 신음소리를 토해낸다.
"늙어지면 사는 게 인생이 아니고 딱 가부러야 할텐디. 가지도 못하고."
"한번 가면 못 돌아오실 길을 무얼 그리 서둘러 가려고 하세요?"
"그질(길) 같이 먼 질이 없소마는. 사는 게 어디 사는 거라 말이요. 갈 디도 못 가고. 고맙소. 이 구덕으로 찾아와서."
사도 골목길을 돌아 보다 우연히 들어선 낡은 집 마당. 할머니는 낯선 길손이 찾아와 말상대라도 해주는 것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외로우셨던 것이겠지. 고단한 세월의 풍파를 견디고 살아남은 노인의 가장 친한 벗은 외로움뿐이다.
"놀러온 사람들이 그렇게 좋소. 말 한자리도 잘 해주고. 안아주고."
노인에게는 가끔씩 사도에 놀러온 사람들이 말이라도 붙여주는 것이 가장 큰 낙이다.
"워치케 고마운가. 뭘 좀 부친다고 끌고 가는디 배까지 태워주고. 후제, 여름에 찾아오소 그랬소."
노인에게 인사를 드리고 돌아서려는데 좀처럼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 용돈하시라고 만원 짜리 한 장을 쥐어드리고 돌아나가는 나그네의 등 뒤로 노인의 말씀이 와서 박힌다.
"아이고 고마워요."
아무 것도 해드린 것 없는데 잠깐의 말상대만으로도 나는 고마운 사람이 되고 말았다. 작은 섬에서는 누구나 존재 자체만으로도 소중한 사람이 된다.
▲ 증도(시루섬) 입구에 들어서면 거대한 바위정원이 펼쳐진다. ⓒ섬학교 |
공룡의 시대, 시간의 발자국
시간은 실체가 없으나 흔적을 남긴다. 발이 없으나 발자국을 남기고 손이 없으나 지문을 남긴다. 사도와 중도, 증도로 이어지는 해변은 실체 없는 공룡의 시대가 남긴 시간의 흔적들로 가득하다. 공룡들이 저 아득한 시간 속으로 건너가면서 남기고 간 발자국들이 선명하게 박혀있다. 공룡의 시대는 갔으나 공룡의 살던 시간은 화석이 되어 남았다. 심연보다 깊은 시간의 해변, 공룡의 발자국은 공룡들의 것이 아니다. 시간이 남긴 시간의 발자국이다.
중도, 시간의 해변 얕은 바다에는 해삼과 소라와 게를 잡는 여행객들의 환호성이 이어진다. 공룡의 땅에서 작은 해삼을 잡으며 기뻐하는 이들. 저들은 어째서 공룡들을 뒤쫓을 생각을 않는 걸까. 공룡들을 따라 수천만 년, 수억 년 전의 세계로 시간여행을 떠나볼 생각을 하지 않는 걸까. 게나 해삼, 성게 따위는 신생대의 바닷가 어느 곳에서도 잡아 볼 수 있는 것들이 아닌가. 어째서 저 영원처럼 머나먼 중생대의 바다를 헤엄칠 생각을 않는 걸까. 중생대 해안을 지나면 시루섬, 증도다. 사도와 중도는 다리로 연결되어 있고 중도와 시루섬은 모래톱으로 연결되어 있어 무시로 드나들 수 있다.
시루섬은 초입부터 거대한 바위 무더기들이 공룡처럼 무리지어 웅성거리는 듯하다. 혹시 저 바위들은 공룡들의 화석이 아닐까. 공룡의 혼들이 갇힌 것이 아닐까. 공룡들은 생멸의 과정을 따라 사라져 저 바위로 환생한 것은 아닐까. 멸종의 시대를 맞이한 공룡들은 화급히 몸 바꾸어 바위가 되었으니 비로소 영원을 얻었다. 삶도 없고 죽음도 없는 불생불멸의 경지에 들었으니, 저 공룡바위들은 모두가 그 자체로 석불들이다.
▲ 타임터널처럼 바위틈을 지나면 중생대의 바다가 펼쳐진다. ⓒ섬학교 |
신들의 정원
시루섬 뒤편 해안 절벽은 장대하다. 놀라울 정도로 거대한 바위들이 해안을 장식하고 있다. 이 바위들은 시루섬의 얼굴이다. 절벽과 바위와 해안을 따라 놓여진 돌들. 만약 신들의 정원이 있다면 이곳이 분명하리라. 불사의 존재인 신들이 피었다 시드는 꽃들 따위로 정원을 가꾸었을 리 없지 않겠는가. 신들은 분명 저 견고한 바위들로 정원을 가꾸었으리라. 이 불가사의한 바위 정원은 압도적으로 아름답다. 웅장하고 장엄하다. 어찌 경배 드리지 않으리. 신들의 정원 앞에서면 누구나 저절로 고개가 숙어지리라.
거북바위, 얼굴바위, 고래바위, 온갖 이야기와 전설들을 간직한 바위들. 바위들은 말 없는 말씀으로 자신의 내력을 들려준다. 용미암은 중생대 마그마가 위로 지각을 뚫고 오르다 급격하게 식은 것인데 옛사람들은 저것이 제주 용두암에서 시작된 용의 꼬리라고 믿어왔다. 하지만 바위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다르다. 저 장대하고 팽팽한 근육, 살아 꿈틀대는 꼬리. 제주의 용머리야말로 이 펄펄 살아 움직이는 용꼬리의 한낱 머리일 뿐이다. 머리보다 강력한 꼬리의 힘이여!
신생대의 오후, 이제는 신들도 화석이 된 것일까. 오늘 시루섬 해변에는 신들도 공룡도 자취 없고 나그네만 시름없이 앉아있다. 신들의 시대는 끝이 났다. 신들이 떠나며 버리고 간 정원. 신들의 정원이 이제는 사람들이 바다에서 뜯어온 미역을 말리는 건조장이 되었다.
나그네는 무엇보다 술을 좋아하지만 오늘 이 장엄한 바위 아래서는 단 한 잔의 술도 마시지 않으리리. 취한 정신으로 있다 가기에는 너무도 장엄한 풍경이 아닌가. 차고 맑은 정신으로 돌아가리라. 그리하면 섬들은 공룡들은 신들은 마침내 고양된 내 영혼에 경배하리라.
▲ 증도(시루섬)의 얼굴바위 ⓒ여수시 |
섬학교 2013년 9월, 제19강 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배시간의 변경으로 일부 조절될 수 있습니다).
<9월7일(토)>
06:30 서울 출발(6시 20분까지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섬 학교> 버스에 탑승바랍니다.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 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제19강 여는 모임
11:20-12:00 점심식사(여수 사람들이 즐겨찾는 맛집에서 서대회와 장어탕요리)
12:10-13:30 오동도 산책
14:50 백야도항 출항
15:50 사도 도착
16:00-18:00 사도 걷기(3km)
사도포구-둘레길-중도다리-중도 양면해수욕장-증도 거북바위-얼굴바위-용미암-사도 마을
18:30-20:30 저녁식사 겸 뒤풀이(생선회와 매운탕. 원하는 분은 식사 후 언제든 자유시간)
20:30 자유시간 및 취침(모래섬민박, 한옥 다인실)
<9월8일(일)>
06:00 기상
07:00-08:00 아침 식사(모래섬민박)
08:00-12:00 물놀이, 산책, 낮잠 자기 등의 휴식
12:00-12:50 점심식사(모래섬민박)
13:20 사도 출항
14:20 백야도 도착. 서울 향발. 제19강 마무리모임
▲ 사도 답사로 ⓒ섬학교 |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걷기 편한 차림, 스틱, 식수, 윈드재킷, 우의(+접이식 우산), 따뜻한 여벌옷, 간식, 자외선 차단제, 헤드랜턴(또는 손전등), 세면도구, 세수수건, 멀미약,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승선용 신분증을 꼭 지참하세요.
섬 여행을 떠나기 전에 강제윤 교장선생님이 쓴, 다음의 섬 답사기를 참고하면 섬 여행의 의미가 더욱 깊어질 것입니다.
☞<섬을 걷다>
☞<그 별이 나에게 길을 물었다>
☞<어머니전>
섬학교 제19강 답사 참가비는 23만원입니다(왕복 교통비, 숙박비, 5회 식사와 뒤풀이, 강의비, 운영비 등 포함). 이 답사는 현지 사정에 의해 일부 변경될 수 있으며, 기상 악화로 섬 체류가 연장되는 경우 추가비용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버스 좌석은 참가 접수순으로 지정해드립니다. 참가 신청과 문의는 인문학습원 섬학교 www.huschool.com 문의는 전화 050-5609-5609 이메일 master@huschool.com으로 해주세요.
☞참가신청 바로가기
▲ 중도(간데섬) 해변에서 해삼 등 갯것을 줍는 관광객들 ⓒ섬학교 |
<학습자료>
[오동도] 한국의 대표적인 동백섬, 오동도를 모르는 사람은 드물다. 면적 0.12㎢, 해안선길이 14㎞. 방파제로 여수 본토와 연결되었으니 더 이상 섬이라 할 수 없지만 이름은 섬으로 남았다. 멀리서 보면 섬의 모양이 오동잎처럼 보여서 오동도라 했다고도 하고 옛날에는 오동나무가 유난히 많아 오동도란 이름을 얻었다고도 한다. 현재는 동백나무와 신이대, 참식나무·후박나무·팽나무·쥐똥나무 등 193종의 희귀 수목이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다. '동백섬' 또는 '바다의 꽃섬' 등의 별칭으로 불리기도 한다. 임진왜란 때는 이순신 장군이 이곳에 최초로 수군 연병장을 만들었고 오동도의 신이대로 화살을 만들기도 했다고도 한다. 1933년에 길이 768m의 서방파제가 준공되어 육지와 연결되었다. 한려해상국립공원 지역이다. 소라바위·병풍바위·지붕바위·코끼리바위·용굴 등 기암절벽이 절경을 이룬다.
[섬학교] 강제윤 교장선생님은 1988년 계간 <문학과 비평> 겨울호로 등단했습니다. 서남해의 아름다운 섬 보길도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뭍으로 이주해 살다 성인이 된 뒤 다시 고향 섬으로 돌아가 10여 년을 살았습니다. 보길도 시절에는 보길도의 숲과 하천, 고산 윤선도 유적지를 파괴하고 대형 댐을 건설하려는 토목세력에 맞서 33일간 단식으로 섬을 지켜내기도 했습니다.
2005년 보길도를 떠난 뒤에는 한국의 모든 유인도(500여 개)를 걸어서 순례하겠다는 서원을 세우고 6년째 섬들을 걷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200여 개의 섬을 걸었고 여전히 섬을 걷고 있습니다. 프레시안에 <섬을 걷다> <통영은 맛있다>, 한겨레에 <섬에서 만나다>를 연재했습니다. <어머니전> <섬을 걷다> <그 별이 나에게 길을 물었다> <보길도에서 온 편지> <숨어사는 즐거움> <올레, 사랑을 만나다> <부처가 있어도 부처가 오지 않는 나라> <자발적 가난의 행복> <여행의 목적지는 여행이다> <통영은 맛있다> 등의 저서가 있습니다.
교장선생님은 <섬학교를 열며> 다음과 같이 얘기합니다.
우리는 모두 바다로부터 왔습니다. 지구 최초의 생명이 바다에서 잉태됐듯이 우리 또한 어머니의 자궁이라는 바다에서 생명활동을 시작합니다. 생명의 원천인 바다. 바다를 보면 막혔던 숨통이 트이고 평온함이 드는 것은 그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어머니 바다, 그래서 프랑스어 '어머니[mère]'에는 '바다[mer]'가 들어 있고 한자의 '바다[海]'에는 '어머니[母]'가 들어있습니다. 원초적 기억이 언어를 통해 우리의 기원을 암시해 줍니다. 어머니의 품처럼 너른 바다. 우리가 섬으로 가고 싶어 하는 것도 실상은 바다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 아닐런지요.
바다나 강, 호수 등의 물로 둘러싸인 육지의 일부를 섬이라 합니다. 한국에는 4,400여 개의 섬이 있습니다. 그중 사람이 사는 유인도는 500여 개, 나머지는 무인도입니다. 한국은 '섬나라'입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섬은 미지의 세계입니다. 방송 매체 등을 통해 섬들이 소개되고 몇몇 섬들이 피서지나 관광지로 유명세를 타면서 섬을 찾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지만 소수에 불과합니다. 여전히 대부분의 섬들은 척박함과 절해고도의 고독과 유배지, 그도 아니면 현실도피적인 낭만의 이미지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섬은 여전히 먼 곳으로만 느껴집니다. 수만 리 먼 나라들을 자유롭게 오가면서도 바로 우리 곁의 섬들을 멀게만 느끼는 것은 왜일까요. 단지 물리적 거리 때문이 아닙니다. 심리적 거리감이 더 큰 요인입니다. 그것은 오랜 세월 이어져온 육지 중심의 사고에 기인한 바 큽니다. 불과 이삼십 년 전까지만 해도 육지 사람들은 섬사람들을 '섬놈'이라 부르면서 멸시하곤 했습니다.
이러한 생각의 뿌리는 조선왕조의 폐쇄적인 해양정책에 잇닿아 있습니다. 본래 우리의 인식은 육지 중심의 편협한 틀에 갇혀 있지 않았습니다. 옛날 이 땅의 사람들은 바다를 이용해 세계와 소통했습니다. 세계로 향하는 통로로 기능했던 바다가 단절의 바다로 전락한 것은 조선시대에 와서입니다. 고려와는 달리 조선은 명나라의 해금(海禁)정책을 추종해 적극적인 '공도(空島)'정책을 폈습니다. 섬과 바다를 포기한 것입니다. 그 이전까지 바다와 섬은 육지보다 더욱 활력 넘치는 삶의 터전인 동시에 문명교류의 중심 공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조선시대 수백 년 동안 섬에 사람이 살지 못하는 비정상적인 상황이 계속되면서 바다와 섬은 점차 잊혀지고 버림받은 공간이 됐습니다. 사람의 거주가 시작된 이후에도 섬은 유배지로 이용되면서 고립이 심화됐습니다.
해양왕국이었던 백제나 장보고의 청해진이 바다와 섬을 기반으로 세계와 소통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1976년 거문도의 장촌마을 해변에서는 한(漢)나라 때의 화폐인 오수전이 다량 출토되었습니다. 외딴 섬처럼 보이는 거문도가 실상은 고대부터 국제해상교류의 중간 기착지였다는 증거입니다. 지난 2000년에는 흑산도의 읍동마을에서 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이어진 국제해양도시의 흔적들이 확인된 바 있습니다. 고려시대 예성강 입구에 있던 벽란도는 개경에 출입하는 외국인들이 통관 절차를 밟던 국제무역항이었습니다. 고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우리는 바다와 섬을 통해 일본과 중국은 물론 동남아, 인도, 아라비아까지 소통했습니다. 이 땅이 세계를 향해 열려 있을 때 언제나 그 중심에는 바다와 섬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땅이 좁은 것은 알면서도 우리의 바다가 얼마나 넓은 줄은 잘 모릅니다. 오랫동안 좁은 땅에 갇혀 살면서 몸도 마음도, 시야도 폐쇄적으로 변해버린 까닭입니다. 섬에서는 우리가 얼마나 넓은 바다의 주인공인가를 금방 깨달을 수 있습니다. 섬에서 바라보면 대륙 또한 바다에 둘려 쌓인 큰 섬에 지나지 않습니다. 육지 중심의 사고를 벗어나는 순간 우리는 충분히 크고 드넓습니다. 섬은 한없이 넓은 바다를 향해 무한히 열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섬이야말로 우리가 잃어버린 개방성과 열린 사고를 되찾기 위한 최적의 사유공간입니다. 물론 섬은 숙명적으로 외롭습니다. 하지만 섬사람들에게는 외로움이나 슬픔마저도 흥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해학과 가락이 있습니다. 섬에서는 슬픔도 가락을 타면 흥이 됩니다.
오랜 세월 섬들은 제각각 고유한 문화와 전통을 이어 왔습니다. 곁에 있는 섬도 같은 섬은 없습니다. 하지만 외래문물의 유입으로 많은 섬들이 원형질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멀지 않은 시간에 이 나라 많은 섬들이 사라질 것을 예감합니다. 이미 많은 섬들이 육지와 연결되었거나 연결되고 있습니다. 다리가 놓이면 섬은 더 이상 섬이 아닙니다. 어쩌면 우리는 배를 타고 섬으로 가는 마지막 세대가 될지도 모릅니다. 끝내는 소멸해 버릴 섬들, 섬의 풍경들. 더 늦기 전에 섬으로 가야 할 이유입니다.
몇 년째 걷기 열풍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움직이는 존재'[動物]인 사람이 걷고자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래서 걷기에 대한 열망은 일시적 유행이 아니라 본능의 회복운동입니다. 걷기는 길에 대한 갈망에서 비롯된 바 큽니다. 길의 본뜻은 무엇일까요. 한자 '길道(도)'자는 辵(착)과 首(수)로 이루어진 회의문자(會意文字)입니다. 그래서 언젠가 신영복 선생님은 "辵(착)은 머리카락 휘날리며 사람이 걸어가는 모양이며 首(수)는 사람의 생각을 의미하니 길(道)이란 곧 사람이 걸어가며 생각하는 것"이라고 풀이한 바 있습니다. 저는 그 뜻을 길이란 통로인 동시에 사유의 길이고, 사유를 통해 자신과 소통하고 세계와 소통하는 길이란 의미로 이해합니다. 그러한 길의 정신을 구현하기에 섬보다 더 좋은 곳은 없을 것입니다.
섬은 어느 곳보다 걷기 좋은 공간입니다. 아직까지 '섬길'의 주인은 사람입니다. 많은 걷기 길들이 만들어지고 있지만 섬은 부러 돈 들여 걷기 길을 만들 필요도 없습니다. 대부분의 섬들은 그 자체로 최상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섬에서는 사람이 안심하고 걸으며 사유할 수 있습니다. 섬길을 걷는 일은 분명 이 시대의 정신을 비옥하게 하는 소중한 토양이 될 것입니다. 섬으로 가야 할 또 하나의 이유입니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