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서로가 서로를 품었기에 드러낼 수 있는 아름다움"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서로가 서로를 품었기에 드러낼 수 있는 아름다움"

[인문학습원] 서산·당진 일대의 사찰과 폐사지들

폐사지학교(교장 이지누. 폐사지 전문가·전 <불교신문> 논설위원) 제4강은 오는 9월 14일 (토요일), 아름다운 원융(圓融)과 화합(和合)의 땅 충남 서산·당진의 보원사지, 마애삼존불입상, 문수사, 개심사, 안국사지 등을 둘러봅니다.

▲ 서산 보원사지 전경 Ⓒ이지누

폐허로부터 받는...뜻밖의 힐링-.
폐사지(廢寺址)는 본디 절이 있었지만 지금은 향화가 끊어지고 독경소리가 사라진 곳을 말합니다. 전각들은 허물어졌으며, 남아 있는 것이라곤 빈 터에 박힌 주춧돌과 석조유물이 대부분입니다. 나무로 만들어진 것들은 불탔거나 삭아버렸으며, 쇠로 만든 것들은 불에 녹았거나 박물관으로 옮겨갔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폐사지는 천 년 전의 주춧돌을 차지하고 앉아 선정에 드는 독특한 경험으로 스스로를 들여다 볼 수 있습니다. 주춧돌 하나하나가 독락(獨樂)의 선방(禪房)이 되는 곳, 그 작은 선방에서 스스로를 꿰뚫어보게 됩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혜안을 얻는 길, 폐사지로 가는 길입니다. 아울러 폐사지 답사는 불교 인문학의 정수입니다. 미술사로 다다를 수 없고, 사상사로서 모두 헤아릴 수 없어 둘을 아울러야만 하는 곳입니다.

이지누 교장선생님은 1980년대 후반, 구산선문 답사를 시작으로 불교를 익혔으며 폐사지와 처음 만났습니다. 90년대 초반에는 분단 상황과 사회 현실에 대하여, 중반부터는 민속과 휴전선 그리고 한강에 대하여 작업했습니다. 90년대 후반부터 2002년 초반까지는 계간지인 <디새집>을 창간하여 편집인으로 있었으며, 2005년부터 2006년까지는 <불교신문> 논설위원으로 나라 안의 폐사지와 마애불에 대한 작업을, 2007년부터 2008년까지는 한강에 대한 인문학적인 탐사 작업을 했습니다. 2009년부터는 동아시아의 불교문화와 일본의 마애불을 기록하는 작업을 하고 있고, 2012년부터 폐사지 답사기를 출간하기 시작하여 지금까지 전라남도와 전라북도, 충청도의 폐사지 답사기인 <마음과 짝하지 마라, 자칫 그에게 속으리니> <돌들이 끄덕였는가, 꽃들이 흔들렸다네>, 그리고 <나와 같다고 옳고, 다르면 그른 것인가>를 출간했으며, 다른 지역들도 바로 출간될 예정입니다.

▲ 보원사지 5층석탑 Ⓒ이지누

교장선생님은 <폐사지학교를 열며> 이렇게 말합니다.

전각은 무너지고 법등조차 꺼진 폐사지(廢寺址)는 쓸쓸하다. 그러나 쓸쓸함이 적요(寂寥)의 아름다움을 덮을 수 없다. 더러 푸른 기운 가시지 않은 새벽, 폐사지를 향해 걷곤 했다. 아직 바람조차 깨어나지 않은 시간, 고요한 골짜기의 계곡물은 미동도 없이 흘렀다. 홀로 말을 그친 채 걷다가 숨이라도 고르려 잠시 멈추면 적요의 무게가 엄습하듯 들이닥치곤 했다. 그때마다 아름다움에 몸을 떨었다. 엉겁결에 맞닥뜨린 그 순간마다 오히려 마음이 환하게 열려 황홀한 법열(法悅)을 느꼈기 때문이다.

비록 폐허일지언정 이른 새벽이면 뭇 새들의 지저귐이 독경소리를 대신하고, 철따라 피어나는 온갖 방초(芳草)와 들꽃들이 자연스레 헌화공양을 올리는 곳. 더러 거친 비바람이 부처가 앉았던 대좌에서 쉬었다 가기도 하고, 곤두박질치던 눈보라는 석탑 추녀 끝에 고드름으로 매달려 있기도 했다. 그곳에는 오직 자연의 섭리와 전설처럼 전해지는 선사(禪師)의 이야기, 그리고 말하지 못하는 석조유물 몇 밖에 남아 있지 않다. 그래서 또 아름답다. 텅 비어 있어 다른 무엇에 물들지 않은 깨끗한 화선지 같으니까 말이다.

꽃잎 한 장 떨어져 내리는 깊이가 끝이 없는 봄날, 주춧돌 위에 앉아 눈을 감으면 그곳이 곧 선방이다. 반드시 가부좌를 하지 않아도 좋다. 모든 것이 자유롭되 말을 그치고 눈을 감으면 그곳이 바로 열락(悅樂)의 선방(禪房)이다. 폐허로부터 받는 뜻밖의 힐링,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혜안을 얻는 길, 폐사지로 가는 길은 파수공행(把手共行)으로 더욱 즐거우리라.

▲ 보원사지 당간지주 Ⓒ이지누

이지누 교장선생님으로부터 9월 답사지에 대한 설명을 들어봅니다.

보원사의 법등이 활활 타 올랐을 시기는 고려시대일 것이며, 그 시기 중에서도 이곳에 부도탑과 탑비를 남긴 법인국사(法印國師) 탄문(900~975)의 시대였다고 가정한다면 통일신라가 저물고 고려 초에 해당하는 시기이다. 당시는 교종과 선종이 서로의 입장을 내세우며 사상적 축을 형성하고 있던 시기였으며, 탄문은 선종이 아니라 화엄종을 계승했다.

그러나 탄문은 화엄종, 곧 교종만을 내세운 것만은 아니다. 왕실이 필요로 했던 화엄과 신진세력인 호족세력들이 받들었던 구산선문을 중심으로 한 선종사상은 왕실의 당시 정치적 입장에 따라 그때그때 호불호(好不好)가 갈렸다. 왕실이 호족세력들과의 관계가 밀접할 때에는 탄문이 우대를 받았지만 호족을 견제하고 왕권강화를 꾀하던 시기인 제4대 왕인 광종 중기에는 환영을 받지 못했던 경우도 있었으니까 말이다. 이는 탄문이 화엄의 입장에서 선을 받아들이려 했기 때문이다.

그러한 융합의 시도는 호족세력을 견제해야 하는 왕실의 입장과는 다른 것이어서 그에게 절대적인 지지를 보내던 광종마저 그를 멀리 하기에 이른 것이다. 하지만 그로부터 시작된 이런 노력은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1055~1101)에게로 이어져 교종과 선종, 양종 대립의 구도를 없애고 고려 불교의 융합을 실현하는 성과를 내기도 했던 것이다.

그 이후, 여러 많은 스님들에 의해 선종의 입장에서든 교종의 입장에서든 서로가 서로를 융합하려는 노력으로 이어졌으니 한국 불교가 새로운 양태로 발전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보원사지의 오층석탑에서 그 모습을 볼 수 있다. 통일신라의 양식을 고스란히 따랐다고 할 수도 없으며, 고려시대의 양식대로 조성했다고도 말 할 수 없는, 각 시대의 양식이 서로를 해치지 않으면서 녹아있는 새로운 모습을 보인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통일신라를 버리려 했지만 채 못다 버렸으며, 고려를 품으려고 했지만 미처 고려의 모습이 완성되지 않은 것이다. 더불어 백제 석탑의 보무당당한 모습까지 아울렀으니 어느 곳에서도 만날 수 없는 기묘한 선과 오묘한 비례를 만들어 보는 이로 하여금 찬탄을 금치 못하게 하는 것이다. 이는 서로가 서로를 품었기에 나타날 수 있는 아름다움이다.

▲ 보원사지 법인국사 탄문 승탑 Ⓒ이지누

2013년 9월 14일 토요일, 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07:00 서울 출발 (6시 50분까지 서울 강남 압구정동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폐사지학교> 버스에 탑승바랍니다. 아침식사로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 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제4강 여는 모임
09:00 서산 보원사지 도착
가야산 기슭에 자리 잡은 보원사지는 화엄십찰 중 한 곳으로 삼국시대 창건설과 나말여초 창건설이 엇갈리는 곳이다. 지금 절터에 암아 있는 석조유물들은 대개 나말여초의 것으로 절의 창건이 그때였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절터에서 백제시대의 금동불이 출토된 적이 있어 백제시대 창건으로 주장하기도 한다. 여하튼, 현재 폐사지로 남은 곳들 중 상당수가 선종사찰인 반면 보원사는 화엄사찰 이었으며, 보원사 주석했던 법인국사 탄문은 화엄과 선을 넘나들며 화엄의 입장에서 선을 융합하려는 시도도 게을리 하지 않았던 스님이었다. 그의 이러한 시도는 후에 대각국사 의천에게 이어져 선교 양종을 따로 구분하지 않으며 서로가 서로를 포함하는 원융의 기틀의 마련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절터에는 많은 석조유물이 남아 있는데, 그중 돋보이는 것은 단연 5층석탑이다. 보물 제104호로 지정된 석탑은 고려시대 전기에 세운 것이지만 통일신라의 양식을 머금고 있다. 2단의 기단(基壇) 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형태인데 아래기단 옆면에는 사자상을 새기고 상층기단 옆면에는 팔부중상(八部衆像)이 2구씩 새겨진 화려한 장식미가 돋보인다. 그 외에도 보물 제105호인 법인국사 승탑과 보물 제106호인 탑비 그리고 보물 제102호인 석조, 보물 제103호인 당간지주가 황량한 절터를 지키고 있다.

▲ 보원사지 법인국사 탄문 탑비 Ⓒ이지누

10:00 출발(버스로 이동합니다)
10:10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 도착
국보 제84호인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은 백제뿐만 아니라 한국을 대표하는 마애삼존불로 조각 솜씨가 뛰어나면서 구도 측면에서 독특한 불상이다. 본존이 입상임에도 불구하고 좌 협시로 앉아 있는 미륵보살을 배치한 것은 다른 불상에서 볼 수 없는 특이한 양식이다. 서산과 태안은 공주와 부여에서 서해안을 통해 중국과 교류할 때 중요한 지역으로서,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은 중국의 발달된 불교문화와 백제의 법화 신앙의 전통을 이은 불상이다. 백제의 예술성과 창조성이 잘 드러나 있다. 마애여래삼존상은 10m가 넘는 거대한 암벽의 동면을 깎아 만들었다. 본존과 우 협시보살은 입상이고 좌 협시보살은 반가사유상으로 특이한 구도를 갖고 있다. 본존의 여래입상은 얼굴에 해맑고 온화한 모습을 띠고 있다. 좌 협시의 반가사유상은 한 손을 얼굴에 대고 생각하면서 입술과 볼에 웃음을 띠고 있다. 우 협시는 보배로운 구슬인 보주(寶珠)를 양손으로 감싸고 있는 보살입상으로 좋은 일이 있는 듯 수수한 웃음을 띠고 있다.

본존의 손 모양, 즉 수인(手印)은 왼손을 아래로 하여 손바닥을 보이는 여원인으로 중생의 소원을 들어주는 모습이다. 손바닥을 자세히 보면 엄지와 검지, 중지를 펴고 약지와 새끼손가락을 구부린 형태로 삼국 시대에만 보이는 형태이다. 오른손은 선서하는 모습으로 들어 올인 시무외인(施無畏印)으로 중생의 두려움을 없애 주는 손 모양이다.

우 협시는 의자에 앉아 오른쪽 다리를 접어 올리고 생각에 잠겨 있는 반가사유상 이다. 반가사유상은 보통 출가하기 전의 싯다르타나 도솔천의 미륵보살을 나타낸다고 한다. 본 삼존불의 반가사유상은 부처의 협시 역할을 하고 있으므로 미륵보살반 가사유상으로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좌 협시는 보관을 쓰고 있는 보살상으로 두손으로 보주를 받들고 있어 봉보주보살이라고 불린다.

삼존불은 보통 가운데 부처를 중심으로 양쪽에 보살상이 배치되는 형식인데, 부처와 보살은 서로 긴밀한 관계를 갖고 배치된다. 예를 들어 아미타 삼존불의 경우 아미타 부처를 중심으로 양쪽에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배치된다.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의 경우 가운데 부처의 이름을 확인할 수 없으므로 어떤 구도에 의한 삼존불인지 알기가 어렵다.

다만 좌 협시보살이 미륵보살 반가사유상이란 점을 매개로 하여 유추할 수는 있다. 미륵보살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부처는 석가불이다. 석가가 죽을 때 미륵보살에게 미래에 부처가 될 수기(授記)를 주면서 미래의 중생을 제도하기를 부탁한 일이 있다. 그렇다면 삼존불의 가운데 부처는 석가불일 가능성이 높다.

본존이 현세를 상징하는 석가불이고, 좌 협시가 미래를 상징하는 미륵보살이라면 우 협시인 봉보주보살은 과거를 상징하는 제화갈라보살로 볼 수 있다. 제화갈라보살은 과거불인 연등불의 전신(前身)으로 석가의 전신인 선혜보살이 머리카락을 땅에 펼쳐서 연등불에 공경을 표한 바가 있다. 이 일로 연등불은 선혜보살에게 장차 부처가 되리란 수기를 준 적이 있다.

이는 <법화경(法華經)>의 수기 사상을 반영한 것으로, 삼존불은 과거~현재~미래를 상징한다. 시간을 초월하여 중생을 구제하고자 하는 부처의 자비와 중생의 염원이 반영된 것이다. 이와 달리 우 협시의 봉보주보살은 7세기를 전후하여 백제, 중국, 일본에만 보이는 형식으로 보통 관음보살을 나타낸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서산 마애여래삼존불 Ⓒ이지누

11:10 출발(버스로 이동합니다)
11:25 서산 문수사 도착
1974년 12월 24일에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3호로 지정된 문수사 극락보전에는 높이 69㎝의 문수사 금동여래좌상이 있다. 이 좌상은 1974년 8월 31일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34호로 지정되었지만 아쉽게도 1993년에 도난당하였다. 도난당하기전 이 불상에서 발견된 서산 문수사 금동여래좌상 복장유물은 2008년 8월 28일에 보물 제1572호로 지정되었으며, 불상의 제작 연대와 불상 조성에 관계된 300여 명의 이름이 적혀 있는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구역인왕경(舊譯仁王經)> <의천속 장경간기(義天續藏經刊記)> 등이 있다. 그 밖에도 백저포(白苧袍)를 비롯한 많은 유물이 발견되어 불교사, 미술사, 국문학사, 인쇄 기술사, 복식사 등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이 유물들은 현재 수덕사 성보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12:00 출발(버스로 이동합니다)
12:45 점심식사(<소박한 밥상>에서 한정식)
13:45 출발(버스로 이동합니다)
14:30 서산 개심사 도착
보물 제143호인 개심사 대웅전은 주심포식 건물의 법식과 기법을 따라 전형적인 맞배지붕이면서 공포는 다포로 만든 독특한 구조를 보이고 있다. 보물 제1264호인 개심사 영산회괘불탱은 석가가 영축산에서 설명하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보물 제1619호인 서산 개심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은 2004년에 발견된 복장유물에 의해서 1280년 이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졌으며, 조각적인 측면에서도 가장 완성도가 높은 불상으로 평가된다. 개심사 대웅전 서쪽으로 늘어진 충청남도 문화재 자료 제398호 개심사 심검당은 맞배지붕이며 주심포계이다. 충청남도 문화재 자료 제194호인 개심사 명부전은 맞배지붕이며 공포는 익공계이다.
15:30 출발(버스로 이동합니다)

▲ 당진 안국사지 전경 Ⓒ이지누

16:00 당진 안국사지 도착
당진군 수당리에 있는 안국사지는 고려시대에 창건되었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당우는 사라지고 현재는 보물 제100호인 안국사지 석불입상과 보물 제101호인 안국사지 석탑이 남아 있다. 더불어 석불 뒤의 큰 바위인 배바위에는 인근 바닷가에 향을 묻은 두 차례의 매향기록이 새겨져 있다. 거의 5m에 달하는 본존불은 괴체화된 고려시대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으며 방갓을 쓰고 있다. 협시보살들 또한 보관을 쓰고 있으며 섬세하기보다는 덩치감만 남은 모습이다.
16:30 출발(버스로 이동합니다)
16:45 서산 여미리 석불입상 도착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32호인 서산 여미리석불입상은 안국사지의 삼존불입상과 닮은꼴이다. 지금의 위치가 본래 석불이 세워졌던 곳은 아니며 1970년대 후반, 장마에 부근의 용장천(龍獐川) 지역에 떠내려 온 것을 옮겨 놓은 것이다. 전해오는말로 용장천 상류에 두 구의 석불이 세워져 있었다고 하며 그 중 하나일 것으로 추정한다. 전체 높이가 310㎝ 가량이며 세부적인 조각은 생략된 고려시대 불상의 전형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17:30 서울 향발. 제4강 마무리모임

▲ 폐사지학교 제4강 답사로 Ⓒ폐사지학교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걷기 편한 차림(가벼운 등산복/배낭/등산화), 모자, 스틱, 식수, 윈드재킷, 우의, 따뜻한 여벌옷, 충분한 간식(초콜릿, 과일류 등), 자외선차단제,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 여미리 석불입상 Ⓒ이지누

폐사지학교 제4강 참가비는 10만원입니다(왕복 교통비, 식사와 뒤풀이, 강의비, 운영비 등 포함). 버스 좌석은 참가 접수순으로 지정해드립니다. 참가신청과 문의는 사이트 www.huschool.com 전화 050-5609-5609 이메일 master@huschool.com 으로 해주십시오.

☞참가신청 바로가기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