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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인류는 야만 상태로 돌아가는가? 프랑크푸르트학파와 계몽의 변증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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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인류는 야만 상태로 돌아가는가? 프랑크푸르트학파와 계몽의 변증법

[우리 눈으로 보는 서양현대철학 : 마르크스주의 사상사]<8>프랑크푸르트학파

1. 호르크하이머(1895-1973)와 아도르노

-계몽의 변증법: 왜 인류는 야만의 상태로 되돌아가는가?

1) 계몽의 자기모순에 대한 비판적 분석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계몽을 통해 인류가 새로운 종류의 야만 상태에 빠졌다고 진단한다. 『계몽의 변증법1944 』의 서두에서 그들은 "왜 인류가 진정으로 인간적인 상태에 진입하는 대신에 새로운 종류의 야만성에 빠져버렸는가?"(DA, 11)라는 의문을 제기한다. 그리고 소위 신화로부터 빠져나왔다고 간주되었던 계몽이 실제로는 신화론적 계기들에 여전히 얽매여 있다는 진단을 제시한다. 그들은 계몽의 현신을 비판적인 눈으로 반성함으로써 계몽의 자기모순성 즉 계몽이 본래적 이념으로부터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를 분석하고자 했던 것이다. 여기서 신화론적인 계기는 특히 폐쇄적인 불가피성으로서의 필연성, 적나라한 지배법칙이라는 부정적인 의미를 갖는다.(노성숙) 그들에 따르면 계몽은 신화에 내재된 운명적 필연성과 지배의 원리의 근대적 양상을 결과하게 된다는 것이다.

2) 폐쇄적 필연성에 갇힌 이성

여기서 새로운 양상의 운명적인 필연성은 "형식 논리의 엄밀성으로 정제된"(28) 계몽의 필연성을 의미한다. 신화에서 인간이 신탁에 의해 확정된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여야하듯이 근대적 계몽에서 인간은 이제 "논리적 엄밀성"에 따른 필연성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근대적 계몽의 필연성은 형식논리에 따르는 폐쇄적이고 운명적인 필연성의 계기이다.

3) 자연과 사회의 지배(억압)

새로운 양상의 지배 원리는 자연과 사회에 대한 지배이다. 근대 계몽주의는 주체와 객체, 문화와 자연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고 전자에 의해서 후자가 지배될 수밖에 없다고 본다. 그들에 따르면 "계몽의 본질은 양자택일인데, 이 양자택일이 불가피하다는 것은 지배가 불가피하다는 것과 같다. 인간은 그 자신이 자연 아래 종속될 것인지 아니면 그 자신 아래 자연을 종속시킬 것인지를 항상 선택해야만 한다."(49) 따라서 선택은 항상 인간의 자연지배일 수밖에 없다. 자기보존의 원리에 따라 인간은 지배의 원리를 거역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지배의 원리는 외적/내적 자연의 지배, 그리고 사회적 관계에서의 지배를 의미한다.

오딧세우스는 자신의 외적 자연뿐 아니라 내적 자연을 억압함으로써 자신을 주인으로 삼을 수 있었으며, 노동의 기능적 분화(정신/육체 노동)를 통한 사회적 지배를 통해 주인이 될 수 있었다. 사이렌의 유혹을 이겨내기 위해 자신의 몸을 돛에 묶고 눈을 가리며 밀랍으로 귀를 막았던 오디세우스는 자연 지배와 타자지배가 이미 자기 자신에 대한 지배와 억압을 전제하고 있다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에 다르면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한 진정한 길은 인간과 자연의 지배관계를 역전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지배관계를 청산하는 것이다. 인간은 자연의 지배자로 군림하는 것을 그만두고 사물로 추락하기 이전의 근원적 자연을 기억해야한다.(DA, 76) 자연을 기억하는 것은 이질적 타자성을 가진 비동일자를 기억하는 것이다.

4) 자연과 인간의 사물화와 도구적 이성화

계몽의 기획 속에서 인간은 자연을 사물과 동일화시킨 후 이를 인과율의 법칙에 따라 파악하고 이용하는 법을 배운다. 여기서 사실성과 유용성, 계산 가능성과 교환가능성이 없는 자연은 의심스러운 것으로 감금되고 배제된다. 이 과정에서 인간도 사물화된 자연의 범주로 귀속된다. 계몽은 자연에 의한 인간 지배를 인간에 의한 자연 지배로 역전시킴으로써 인간을 자연의 노예에서 주인으로 만들었지만 이것은 곧 인간에 의한 인간 지배로 귀결되었다. 계몽의 기획에 따라 인간은 이제 스스로를 자연 사물처럼 다루고 통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인간은 사물처럼 사실성과 유용성의 범주로 환원되어 이해된다. 자연의 지배자로서 인간은 자기 자신의 지배자가 된다. 자신을 철저하게 사물처럼 지배하는 사람이 그렇지 못한 사람을 지배하는 것이다.

계몽은 자연의 지배와 공포에 점령당할 수 있다는 불안과 두려움 때문에 더욱 철저하게 내/외적 자연 모두를 지배하려고 든다. 그러면 그럴수록 계몽은 살아 있는 자연뿐만 아니라 인간까지도 죽은 자연 사물 혹은 객체로 취급하는 과학과 시장 지상주의에 빠져든다. 여기서 인간의 몸은 사물이 되고 이성은 과학과 시장의 도구가 된다. 여기서 모든 질적인 차이는 교환 가치라는 양적 차이로 전락하게 된다. 따라서 모든 형태의 이질성은 동일성의 이름으로 소환되고 억압된다.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자연지배를 본질로 하는 주체는 모든 자연에서 생명을 빼앗았다고 본다. 남은 것은 객관적, 수량화된 사실뿐이다. 사실지향적인 실증주의는 또 다시 사실을 절대적 신화로 만듦으로 해서 계몽을 추구하는 이성 역시 도구적 이성으로 전락하게 된다고 본다. 실증주의의 승리는 결과적으로 진정한 주관성의 상실이다. 여기서 이성은 사실적 무비판적 이성으로 나타나게 되며 양화에 이바지하는 노예로 전락하게 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이성은 비판적 이성이 아니라 도구적 이성의 모습을 띠게 된다. 이성은 사회적 경제적 생산에 이바지하는 기술적 이성을 자신이 수행해야할 최대의 역할로 여기게 된다. 이성은 더욱 더 많은 부와 더욱 효과적인 사회억제 체제를 산출할 수 있도록 사회구조를 생산적으로 만드는 데 기여한다. 결국 실증주의적 사고방식은 과학에 선포된 사실성의 법칙에 집착하게 된다.

자연지배를 본질로 하는 주체성, 기술적 이성은 결국 자유를 목적으로 하였던 계몽의 원래적 목적으로부터 멀어지게 된다. 계몽의 위기는 이성의 위기이다. 자연의 지배는 계몽의 역사이며, 이 계몽의 역사는 이성의 자기동일성을 유지하는 것인데, 이것은 결국 이성이 자기지배적 이성(자신을 억압하는 이성)으로 나타나는 위기로 나아간다. 인간은 자연을 지배하는 신의 권한을 갖게 되었지만 그 신의 자리마저 과학으로 대치하면서 마침내 과학을 신의 자리에 올려놓게 된다. 여기서 인간의 이성은 자연을 어떻게 도구적으로 잘 활용할 수 있느냐에 이바지하는 도구적 이성으로 자신의 본분을 수행하게 되며 이는 자본주의 경제체제와 맞물리게 된다. 이제 더 이상 자연은 살아있는 자연이 아니며, 모든 것은 수량화 된다.

2. 테오도어 아도르노(1903-1969)

-부정의 변증법: 전면적 부정과 끝없는 부정

프랑크푸르트 학파 제 1세대 '사회조사연구소'의 구성원으로서 사회와 문화 이데올로기 비판 1938 나치의 유대인 탄압을 피해 미국으로 망명. 이쪽과 저쪽 중 하나를 선택하도록 하는 전체주의 비판. "자유란 흑백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규정된 선택으로부터 빠져나오는 것이다."

그에게 진정한 사유란 대상과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는 것. 그러나 미국에서 사유하기는 어려움. 실증주의, 과학주의, 실용주의 사상이 지배하는 미국에서 사유는 사실을 입증하고 현실을 긍정하는 것으로만 허용됨. 모든 것은 교환가치라는 하나의 양적 기준으로 환원되며, 이에 질적 차이를 무시하거나 배제하는 문화가 전면화됨.
현대 사회에서 도구적 이성은 욕망과 쾌락의 내밀한 공간조차 지배한다. 우리의 의식과 욕망이 도구적 이성에 의해 총체적으로 관리되는 것.

1) 실증주의 비판: 실증주의자와 과학주의자들이 요구하는 연구 방법은 논리적이고 과학적인 증명이 가능한 절차, 이는 동시에 수량화 가능성을 의미. 아도르노는 실증주의에 맞서기 위해 변증법 선택.

2) 주관적/객관적 변증법에서 부정의 변증법으로: 형식논리학이 주체의 올바른 사유와 추론의 법칙에 관한 학문이라면 변증법은 객체의 변화와 형성과정을 서술하는 학문. 그렇다면 객체를 우선시하는 것인가? 헤겔에게 객체는 이미 주체를 통해 개념화된 것, 따라서 정신적인 것, 이에 반해 맑스에게 정신은 객체 즉 존재로부터 이끌어내어진 것. 그러나 아도르노에 따르면 존재 역시 정신과 무관하게 독립적으로 있을 수 없다. 아도르로는 유물 변증법이 어떤 것을 통해서도 매개되지 않은 대상 세계를 가정함으로써 의식과 사상을 사물의 반영과 모상으로 환원시킬 위험을 갖고 있다고 비판. 나아가 이는 주체의 자발성을 부인하는 결과를 낳고, 객관적임을 자칭하는 공산당이 파시즘적 독재 세력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져올 수밖에 없다. 따라서 아도르노는 정신이냐 존재냐의 경쟁을 넘어서 긍정에 머물지 않고 끝없이 부정으로 나아갈 수 있는 변증법을 세우는 데 관심을 갖는다. 다시 말해서 그에게 변증법의 진정한 물음은 어떤 것이 선차성을 갖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끊임없이 부정으로 나아갈 수 있는가이다. 이것이 바로 그의 부정의 변증법이다.

3) 긍정의 변증법에 나타난 비동일성의 배제 비판: 헤겔이 말하는 주체와 주체를 통해 매개된 객체의 모순은 주체를 통해 매개된 객체가 주체의 의식이나 사유와 동일하지 않은 경우를 가리킨다. 이런 점에서 주체와 객체의 현실적 모순이라기보다는 주체와 주체의 가상적 모순. 모순이 주체 내부에서 이루어짐. 이런 점에서 정신은 그것이 화해하는 운동의 총괄 개념. 다시 말해 여기서 모순은 동일성을 지향하는 사유의 관점에서 본 비동일자일 뿐이다. 헤겔에게 모순과 비동일성은 총체적 동일성의 체계로 흡수 통일되는 과정 중에 등장하는 일시적이고 부분적인 일면적 진리일 뿐.

아도르노는 "외부에 어떠한 것도 남겨 놓지 않는 총체성의 서술형식인 체계"는 비동일자를 배제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 주목한다(ND, 82). 체계 안팎 어디에서도 더 이상 비동일성의 자리가 없다. 이런 점에서 아도르노는 헤겔의 관념 변증법이 긍정 변증법으로 전락한다고 평가.

4) 부정의 변증법과 비동일적 객체: 이에 반하여 아도느로는 객체의 우선성을 주장하지만 이것은 주체의 권좌를 객체가 대신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아도르노가 말하는 "객체는 순수한 사실성faktizitaet이상의 것"이기 때문이다(ND, 269) 그에게 객체는 주체를 통해 매개되어 있지만 이와 동시에 그는 주체의 동일성 체계에 동화되지 않는 비동일적 객체를 인정한다. 객체는 주체의 안과 밖에서 다양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주체는 객체가 주체 바깥에서 맺고 있는 관계의 그물망을 그대로 인식하려고 해야한다. 이럴 때 동일화되지 않은 객체의 비동일성이 드러난다. 아도르노가 객체의 우선성 논제를 통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동일성에서 비동일성으로 방향을 전환하는 변증법이다. 즉 그는 동일성 체계의 타자로서 비동일성을 표현하는 철학을 기획. 동일성 사유의 밖으로 나갈 수 있는 변증법은 부정적 현실을 끝없이 부정하는 부정 변증법. 따라서 부정 변증법은 동일성의 체계로 포섭되지 않는 객체의 비동일성을 사유하고 표현하는 주체를 요구한다.

이것은 부정의 부정은 긍정이라고 보는 긍정의 변증법과의 작별, 아도르노의 부정 변증법은 교환 가치가 없는 것을 악으로 규정하는 사회에서 교환될 수 없는 비동일자, 사물의 사용 가치 등에 주목한다.

3. 위르겐 하버마스(1929-)

-생활세계의 식민화와 의사소통적 이성

1세대와 달리 사회적 행위를 목적 합리적 행위로만 국한시켜 보는 것이 아니라 포괄적 의사소통의 행위로 넓혀 보고자 했던 2세대. 주체가 대상과의 관계 속에서 갖는 이성뿐 아니라 주체가 주체와의 관계 속에서 갖는 이성에 주목함. 이것은 의식철학적 패러다임에서 언어철학적 패러다임으로, 주-객 패러다임에서 상호주관성으로의 전회를 의미.

1) 근대적 이성 비판

-주체의 물화현상(Verdinglichung): 교환형태와 생활양식의 물화됨으로써 주체는 객관화된 자기이해를 갖게 됨. 즉 주체는 다른 사물들처럼 객관화되어 이해됨. 따라서 주체는 근원적 자기관계나 반성이 불가능함.

-방법화된 합리성(Verfahrensrationalitaet): 경험적으로 주어진 것만을 과학적인 것이라고 간주하는 현대경험과학에서 이성을 주어진 문제해결의 수단으로만 다루는 것. 이는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가 도구적 이성화라는 개념으로 파악한 바. 이들은 이성이 인간을 해방시키고 자유롭게 하기보다는 오히려 인간을 억압하고 예속하는 도구로 전락하는 과정을 바로 이성의 주관화, 형식화라고 규정했다. 이는 이성이 보편성과 총체성을 상실한 채 계산능력으로 축소되었다는 의미. 도구적 이성은 모든 것을 자기이해의 관점에서만 바라보게 되므로 모든 것은 이득여부에 따라서만 판단되지 보편성에 입각하여 총체적으로 파악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하버마스는 방법화된 합리성의 개념을 통해 주관이 총체성과 전체성을 잃고 단지 편협된 이성만을 갖게 되었다고 본다. 이는 자신을 비판할 수 있는 척도가 제시될 수 없는 상태. 비판의 기능 상실.

-이성의 상황화: 이성을 상황적인 것으로 파악하고 주어진 제약의 한계를 갖는 것으로 파악, 이것을 상황을 벗어나는, 제약을 벗어나는 이성의 가능성 차단.

-실천과 분리된 이론지: 언어분석적으로 이성을 진리성에 의해서만 규정되는 사실확인적인 언술로만 국한시켰다. 따라서 규범, 실천, 미적판단과 같은 차원들은 합리성의 영역에서 배제되게 됨. 따라서 이론지의 실천적 비판 자체가 불가능하게 됨. 이와 달리 하버마스는 "인식주도적 관심"을 주장한 바 있음, 실천적, 규범적 관심과 인식이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것.

2) 생활세계의 식민화

하버마스는 사회를 물질적 차원/상징적 차원의 재생산으로 구분. 그리고 전자를 체계로 후자를 생활세계로 이해함. 생활세계의 질서는 오직 상호이해를 지향하는 의사소통적 행위를 통해서만 유지되고 재생산될 수 있다. 문화해석의 틀, 그는 문화, 사회, 인격을 생활세계의 구성요소로 제시. 해석의 틀 혹은 이해의 지평으로만 다루어지던 생활세계 개념을 사회학적 차원으로 확대. 이에 반해 체계는 화폐나 권력 등과 같은 매체에 의해 조직되는 경제적, 행정적 하위체계. 물질적 재생산을 위한 경제적 질서와 권력과 관련된 정치적 질서는 체계. 체계는 점차 그 복잡성이 증대되는 방향으로 진행.

사회 진화의 초기에 체계와 생활세계는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가 근대화 과정을 통해 분화 나아가 체계는 자립적인 성격을 갖게 되었다. 권력을 매개로 하는 공공 행정 영역의 자립화, 자본주의 경제 체제의 성립.

그런데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이루어지는 사회 진화는 체계의 자립화를 넘어서 체계의 명령이 생활세계에 침투하는 '생활세계의 식민화'를 야기. 생활세계의 질서 파괴. 가령 하버마스는 가족, 학교, 문화 영역 등에 화폐나 권력과 같은 매체들이 침투하는 과정을 통해 생활세계의 식민화 현상들이 발생한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식민화에 대한 저항은 단순히 화폐나 권력을 통한 체계의 보상책을 통해서 해결할 수 있는 성격의 문제가 아니다. 다시 말해서 식민화에 대한 저항은 재분배의 문제가 아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위협받고 있는 생활방식을 방어하고 회복하는 일, 또는 변혁된 생활방식을 관철하는 일. 즉 중요한 것은 재분배가 아니라 생활형태의 문법. 하버마스가 생각하는 실천의 궁극적 지향점은 생활세계의 자율성 회복.

하버마스는 새로운 사회운동, 즉 신정치를 생활세계의 식민화에 대한 저항의 표출로 설명. 신정치는 새로운 삶의 질과 평등권, 개인적 자기실현, 참여와 인권의 문제 등과 관련된다.

3) 생활세계의 식민화와 토의 민주주의

이제 진보 정치의 실천적 과제는 체계 논리의 침식을 제어할 수 있도록 생활세계의 저항을 강화하고 이를 제도화하는 것. 국가가 경제 행위의 주체가 되고 복지 제공자가 되면서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갈등은 이제 국가와 시민사회 사이의 갈등으로 전환, 시민사회 공론의 장 역할 증대, 그는 사회주의적 계급혁명의 가능성을 부정하고(복지 국가의 출현을 통해 계급 갈등의 제도화) 민주주의의 급진화를 대안으로 제시, 체계 논리가 생활세계를 침식함으로써 발생하는 사회 병리 현상들은 민주주의의 활성화를 통해서 해소 가능하다고 봄. 즉 민주주의의 심화를 통해 생활세계의 식민화를 제어하고 생활세계와 체계 사이의 균형을 회복하고자 하는 기획. 그는 생활세계의 논리를 통해 체계 논리를 대체하는 것에는 반대, 입법부를 중심으로 사회를 하나의 단일한 통일체로 파악하는 것에도 반대, 단지 자본주의 경제 체계나 국가 영역으로부터 자율성을 갖는 시민사회의 회복을 기획.

4)의사소통 행위이론

하버마스에 따르면 시민사회, 공론의 장, 토의 민주주의의 핵심적 원리가 되는 것은 의사소통적 행위이다.

근대의식철학은 주체와 객체라는 근본구도 속에서 세계 이해, 이렇게 되면 타인을 포함한 세계 전체, 나아가서는 자기 자신 역시 주체의 대상으로 규정될 수밖에 없게 된다. 따라서 그는 도구적 행위로 환원할 수 없는 의사소통행위영역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입증하고자 했다. 도구적 행위모델에 따르면 인간은 자기 보존을 위해 객체나 타자를 도구로 규정하고 이용할 수밖에 없다. 이는 생활세계의 식민화 결과.

따라서 하버마스는 도구적 행위를 비판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기 위하여 생활세계에서 수행되고 있는 다양한 행위모델을 검토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 사회학에서 제시되고 있는다양한 행위모델에 주목한다. 그에 따르면 첫 번째로는 목적론적(인지-도구적) 행위가 존재한다. 이것은 행위자와 현존하는 사태로서의 세계를 전제로 한다. 여기서 행위자와 세계 간의 관계는 진리와 효율성이라는 기준에 따라 판단된다. 그러나 하버마스에 따르면 행위는 인지-도구적 행위 이외에도 도덕-실천적 행위, 미적-표현적 행위 등의 측면을 가진다. 도덕-실천적 행위는 올바름을 기준으로 하는 상호주관적 규범의 세계를 전제로 하며 미적-표현적 행위는 진정성을 중시하는 주관적 세계를 전제로 한다. 따라서 행위를 전자로만 이해하는 것은 편협한 것.

나아가 하버마스는 의사소통적 행위 속에 이 세 가지의 행위 양식이 포괄 될 수 있다고 본다. 의사소통행위에서 일차적으로 중요한 것은 자신의 목적을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의 행위계획에 대한 합의를 성취하고 이를 통해 각자의 행위를 조정하는 것. 인간의 언어에는 상호이해라는 본래적 목적이 내재되어 있음. 이것은 전략적 도구적으로 이성을 사용하는 것과는 구분된다. 의사소통 행위 속에서 주체는 타자를 나와 동등한 주체로 인정하는 데서 출발한다. 화자의 주장에 대해 청자는 일반적으로 세 가지 타당성 요구를 제기할 수 있다. 객관세계에 대해서 행위자는 진리를, 상호주관적 세계에 대해서는 규범적 올바름을, 주관적 세계에 대해서는 진실성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화자와 청자는 이같이 다양한 타당성 요구를 제기하면서 상호 이해를 추구한다. 따라서 의사소통적 행위자들은 다양한 합리성의 요구들에 비추어 자신을 반성하고 비판하게 된다. 비판과 논거를 통한 토론 및 정당화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의사소통적 행위의 영역들 전체는 합리적 논의가 가능한 영역이다.

5) 한계: 생활세계의 침식만을 병리현상으로 보면 다양한 사회영역에서 발생하는 고유한 갈등구조를 무시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동성애자의 인정투쟁, 이민자의 인정투쟁, 소수문화 집단의 인정투쟁은 단지 효율성 논리의 침투에 대한 거부가 아니라 생활세계 내부에 존재하는 배제와 무시에 대한 거부와 저항이다.

4. 악셀 호네트(1949-)

무시의 현상학과 인정투쟁

호르크하이머나 아도르노와 같은 1세대 프랑크푸르트 학파 이론가들이 사회의 병리를 "도구적 이성화"로 진단하고, 2세대의 하버마스가 "생활세계의 식민화"로 진단했다면, 제 3세대 악셀 호네트에게 가장 중요한 사회적 병리는 사회적 "무시". 1세대가 대안으로 부정 변증법을, 2세대가 대안으로 의사소통적 이성을 제시했다면, 3세대 주자 악셀 호네트에게 대안은 사회적 "인정"이다. 앞 세대들이 자본주의 체계, 실증주의적 경향을 비판하면서 비판 이성, 의사소통적 합리성을 통해 이를 극복하고자 했다면, 악셀 호네트는 체계에 의한 생활세계의 식민화뿐 아니라 규범적 혹은 사회 세계 내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정체성 무시까지도 포괄하는 이론을 제시하고자 했던 것이다. 호네트에게 인간의 행복한 삶을 가능하게 하는 사회는 사회적 인정을 통해 성공적인 자아실현이 이루어질 수 있는 사회이다. 따라서 그에게 도덕 발전을 이루기 위해 필수적인 것은 인정투쟁이다.

1) 실천철학에서의 인정 개념의 대두: "인정(Anerkennung)"이라는 개념은 실천철학 내부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해 왔다. 고대 윤리학은 폴리스 안에서 자신의 행동 방식에 대한 사회적 가치를 부여받는 사람만이 좋은 삶을 영유할 수 있다고 생각했으며, 스코틀랜드의 도덕철학은 공적인 인정이나 무시가 개별자들을 바람직한 미덕으로 이끄는 사회적 장치라는 생각에 따르고 있었다. 나아가 칸트의 "존중(Achtung)" 개념은 타인을 목적 그 자체로 대하라는 정언 명법의 핵심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최고의 도덕 원칙으로 기능하고 있다. 그러나 헤겔을 제외한 어떤 고전적 작가들도 인정의 원리를 윤리학의 초석으로 삼지는 않았다.

이런 상황은 인정 이념을 강력히 고려하는 일련의 최근의 정치적 논쟁과 사회 운동 속에서 근본적으로 변화했다. 문화 다원주의에 대한 토론과 여성 운동의 이론적 자기이해 과정에서 이들 공통의 이념으로 대두된 것은 개인이나 사회적 집단들의 "차이"를 인정하고 존중해야 한다는 규범적 생각이었다. (Taylor 1992) 이때부터 사회관계의 도덕적 성질을 단지 재화의 공정한 분배만으로 평가할 수 없다는 일반적 인식으로의 작은 진보가 이루어졌고, 오히려 정의에 대한 표상은 주체들이 서로를 어떻게 그리고 무엇으로 인정하는가 하는 견해와 본질적으로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2) 인정 개념의 다의성: 칸트 이래로 도덕 철학에서 상대적으로 분명한 윤곽을 갖고 있던 "존중" 개념과는 달리 "인정" 개념은 일상 언어에서도 그리고 철학에서도 그 의미가 확정되어 있지 않다. 예를 들어 오늘날 여성주의 윤리를 근거 지우는 맥락에서 인정 개념은 엄마와 아이의 관계에서 그 경험적 본보기를 찾을 수 있는 애정 어린 관심과 배려의 형태를 특징짓는데 사용된다. (Hirschmann 1989) 이와 달리 담론 윤리의 맥락에서 "인정"이 의미하는 것은 다른 모든 개인의 특수성과 동일성을 상호 존중하는 방식이다. 논쟁 참여자의 토론 태도는 이에 대한 전형적인 예가 된다. (Habermas 1993, 3장; Wingert 1993) 마지막으로 오늘날 공동체주의에서 인정 범주는 낯선 생활 방식에 대한 가치 부여 형식을 특징짓는데 사용된다. 여기서 가치 부여는 전형적으로 사회적 연대라는 지평 안에서 형성된다. (Taylor 1992)

3) 인정과 자기실현 간의 관계: 호네트는 인간의 자기의식이 사회적 인정 경험에 의존하고 있다고 보았던 헤겔의 사상을 발전시킨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자기의식은 타자의 인정이 있을 때 비로소 형성되고, 확인되며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초기의 헤겔 저작에서뿐 아니라 후기의 『정신현상학』에서도 잘 드러난다.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을 논하는 부분에서 헤겔은 의식의 발전과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우선 의식은 자신을 즉자적인 동일자로 정립한다. 그러나 자신을 즉자적인 것으로 정립하는 다른 의식들 역시 존재한다. 따라서 자신을 즉자적인 동일자로 정립하고자 하는 의식들은 전면적인 타자부정을 감행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목숨을 건 생존투쟁이다. 그러나 이러한 투쟁에서 승리한 후 얻게 되는 것은 자신을 확인해 줄 타자의 사망이다. 의식은 여기서 자신의 동일성에 생명력이 없다는 것을 발견한다. 따라서 다음 단계에서 의식은 자신을 주인으로 타인을 노예로 삼아, 노예에게 자신의 주권을 확인하는 종속적인 역할을 할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이 단계에서 주인은 노예의 인정행위에 만족하지 못한다. 그것은 자신과 동등한 인간이 아니라 열등한 인간의 인정행위이기 때문이다. 반면 노예는 이 관계 속에서 자신이 열등하지 않은 인간임을 알게 된다. 노예는 오히려 주인이 자신의 노동에 의존하고 있음을 발견한다. 따라서 노예는 이제 인정투쟁을 감행한다. 그러나 헤겔에 따르면 노예가 지향해야할 방향은 역전된 주-노 관계가 아니다. 이제 노예는 자신과 동등한 사람이 자신을 인정할 때 제대로 자아가 확인될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노예가 요구하는 것은 하나가 다른 하나를 이제 노예는 "자신이 타자에 대해 행하는 것을 자기 자신에게도 행하는" "하나의 행위"를 요구하게 되는 것이다.

4) 헤겔에 의한 인정의 삼분화: 호네트에 따르면 청년 헤겔은 상호 주관적 인정의 세 가지 형식을 구분하고 각각에 특수한 단계의 개인적 자기관계가 상응한다고 본다. 그 중 하나는 사랑이다. 헤겔에 의하면 사랑을 통해 개인들은 서로의 유일무이한 욕구 본능을 상호 인정하게 되며, 이로써 개인들은 자신들의 본능적 요구가 구체화될 수 있다는 정서적 안정감을 갖게 된다. 둘째가 시민사회에서의 권리의 인정이다. 이를 통해 개인은 자신을 형식적 자주성을 가진 인격체로 확립한다. 그리고 끝으로 국가 영역에서의 인륜성도 인정 형태의 하나이다. 이를 통해 주체들은 사회 질서의 재생산에 기여하는 자신들의 특수한 능력에 상호적으로 가치를 부여하게 된다.

5) 호네트에 의한 인정이론의 현대적 체계화

(1)도덕적 손상에 대한 현상학적 분석

오늘날 도덕 개념을 도입하기 위해 "인정" 개념을 사용할 때 대부분 그 출발점이 되는 것은 도덕적 손상(moralische Verletzung)에 대한 현상학적 분석이다. 도덕적으로 "부당"하다고 체험된 사태가 도덕과 인정간의 내적 관련을 사전에 설명해 줄 수 있는 가장 적절한 실마리가 된다는 것이다. 해당 당사자들 스스로가 한편으로 도덕적 잘못과 다른 한편으로 단순한 불행 또는 강제 등을 구분하는 척도를 볼 때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는 것은, 첫 번째 경우에는 인정이 유보되거나 부인됐다는 점이고, 두 번째 경우에는 이러한 연관틀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신체적 손상이 일어난 경우 해당 당사자가 이것을 자신의 안녕의 본질적인 부분을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행동으로 파악한다면, 여기서 신체적 손상은 도덕적으로 부당한 것이 된다. 다시 말해서 도덕적 손상의 조건을 이루는 것은 단순한 육체적 고통 그 자체가 아니라 자신이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는 의식이다. 사기의 경우도 결코 이와 다르지 않다. 사기 행각이 도덕적으로 부당한 이유는 이를 통해 한 사람의 중요한 자기 관계가 소홀히 되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암시적인 모욕이나 천대 역시 인격적 불가침성을 무시하는 처사로서, 이는 행동이나 말을 통해 도덕적 상처를 입힌 것이다.

(2) 도덕적 손상의 경험과 긍정적 자기관계의 훼손

철학분야에 존재하는 다양한 인격이론은 실천적 자기 관계의 세 가지 층을 구분하는데 일치하고 있다. 여기서 `자기 관계`란 한 개인이 자신의 능력과 권리와 관련해서 자기 자신에 대해 갖고 있는 의식 또는 감정을 말한다. 이 연구들 사이에 이론의 여지가 없는 첫 번째 단계, 즉 최소한 발생학적으로 우선하는 단계는, 주체가 자신의 신체적 욕구와 바람을 구체화 가능한 자신의 한 부분으로 이해함으로써 자기 자신에 대한 관계를 맺게 되는 단계이다. E. H. 에릭손이 정신 분석을 위해 발전시킨 개념에 따르면 이런 식으로 자신의 욕구의 가치에 확신을 갖는 것을 "자신감(Selbstvertrauen)"이라 한다. (Erikson 1980) 실천적 자기 관계의 두 번째 형태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이 도덕적 사려 능력이 있는 존재라는 의식이다. 칸트적 전통으로 소급해 보면 이런 식으로 자신의 판단의 가치에 확신을 갖는 것을 "자기존중(Selbstachtung)" 또는 "자기 존경(Selbstrespekt)"이라 한다. (Dillon 1995) 끝으로 이 연구들이 일치를 보이고 있는 세 번째 형태의 자기 관계는, 자신이 좋은 또는 가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의식 속에서 드러난다. 이런 식으로 자신의 능력의 가치에 확신을 갖는 것을 표현하기 위한 개념으로 "자부심(Selbstwertgefuehl)"이란 것이 있다. (Tugendhat 1993, 57쪽 이하)

이런 형태의 자기 관계들이 정상적 조건하에서 일련의 필연적 전제를 형성하는 제반 단계로 이해된다면, 이 단계 각각의 심리적 훼손의 정도에 상응하는 도덕적 손상의 유형들이 분류될 수 있다. 여기서 쉽게 알 수 있는 것은 이런 식으로 분류된 도덕적 부당성의 유형들은 주체의 어떤 가치가 무시되고 부인되느냐에 따라 그 성격을 달리한다는 점이다.

a) 가장 기본적인 도덕적 손상은 한 개인이 자신의 신체적 안녕에 대해 갖고 있는 확신을 빼앗아 버리는 것이다. 이러한 식의 행위가 파괴하는 것은, 타인들 앞에서도 자신의 욕구를 가치 있게 여기는 자신감이다. 신체적 안녕의 조건을 완전히 무시하는 극단적 예인 살인뿐만 아니라 고문이나 폭행과 같은 물리적 학대 역시 이런 부류의 전형적인 경우들이다.

b) 한 개인의 도덕적 사려 능력을 무시하는 도덕적 손상의 경우는 무수하게 많다. 이런 식의 행위가 해를 입히고 파괴하는 것은, 타인에 의해 자신의 판단 가치가 인정됨으로써 갖게 된 자존감이다. 이에 해당하는 전형적인 사례는 속임수나 사기와 같은 개인적인 경우에서 비롯하여 집단 전체에 대한 권리 상의 차별에 이르기까지 무수히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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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마지막으로 세 번째 유형의 도덕적 손상은 한 사람 또는 다수가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지 못함으로써 천대와 비하감을 표하는 경우이다. 이런 행위는, 자신이 해당 공동체 내에서 사회적으로 중요하다고 느끼는 자부심을 훼손한다. 이에 해당하는 전형적인 사례는 인사를 하지 않는 것(Tugendhat 1993, 305쪽)과 같은 사소한 경우에서부터 명예훼손과 같은 중대한 경우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3) 자기관계 훼손을 보호하는 세 가지 도덕적 관점

이러한 인간학적 가정으로부터 적극적 도덕 개념을 도출한다면 그것의 목적은 이러한 상처의 위험을 막는데 있을 것이다. 여기서 "도덕적 관점"이란 우리가 개인의 자기 정체성을 공동으로 보호하기 위해 서로 가져야 할 의무가 있는 태도들의 총칭이다. 도덕적 태도 자체가 인정 형식의 성격을 지니는 이유는 인정을 통해 손상되지 않은 자기관계의 조건이 형성되는 것과 관련된다. 즉 인간은 자신의 특정한 능력과 권리의 가치가 확인되고 인정받고 있음을 보게 될 때에만 손상되지 않은 자기 관계에 도달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무시 행위를 통해 훼손될 수 있는 실천적 자기 관계의 각 단계들에 상응하는 세 가지 인정 형식을 구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a) 첫 번째 단계의 실천적 자기 관계에서 개별자는 그의 욕구와 바램이 타인에게 유일무이한 가치를 지닌 한 개인으로 인정된다. 무조건적 애정의 특성을 지닌 이러한 인정 방식을 표현하는 개념으로는 도덕 철학 전통 내에서 "배려"나 "사랑" 같은 것이 있다.

b)두 번째 단계의 실천적 자기 관계에서 개별자는 다른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로 도덕적 사려 능력을 갖는 한 인격체로 인정된다. 보편적 동등 대우의 특성을 지닌 이러한 인정 방식을 표현하기 위해 그 동안 칸트적 전통 내에서는 "도덕적 존중" 개념이 사용되고 있다.

c)마지막으로 세 번째 단계의 실천적 자기 관계에서 개별자는 구체적 공동체 내에서 그의 능력이 필수적 가치를 갖는 한 인격체로 인정된다. 특수한 가치 부여의 성격을 지닌 이러한 인정 방식을 표현하는 도덕 개념은 철학 전통 내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연대(Solidaritaet)" 나 "충성(Loyalitaet)" 과 같은 범주를 되새겨 보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일 것이다.

* 오는 5월 10일에는박기순 충북대 교수가 마르크스주의 사상사 10강 - 포스트알튀세주의 편을 진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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