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바 '안기부(옛 국가안전기획부) X파일'의 내용을 공개했다가 유죄를 선고 받고 의원직을 상실한 노회찬 진보정의당 공동대표는 갑작스러운 안철수 전 서울대 교수의 '노원병 재보선 출마 선언'에 상당한 유감을 피력했다.
"궁색하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낡은 정치 철학", "연대를 위한 신뢰와 존중의 바탕이 무너졌다"는 등의 거친 언사도 서슴치 않았다. 이런 비판의 가장 큰 이유는 '상식적이지 않은' 과정에 있다고 했다. 안철수 측이 출마를 결정하기 전에 송호창 무소속 의원을 통해 충분히 의사를 전달했음에도, 3.1절이 끝나자마자 대리인을 내세워 긴급하게 출마 의사를 밝힌 '저의'가 뭐냐는 얘기다.
노회찬 대표는 "새 정치를 하겠다고 했으면서 지금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국회의원 한 번 해보려는 것처럼 움직인다"고 비판했다. "납득이 가지 않는다"는 말도 여러 차례 나왔다.
안철수 전 교수의 등장으로 진보정의당의 '서울 의석 탈환'이 어려워졌을 뿐 아니라, 4월 재보선의 의미도 확연히 달라졌다. 안철수 전 교수가 부당한 대법원의 '안기부 X파일' 판결을 비판할 순 있지만, 안철수의 당선이 곧 사법부에 대한 국민의 직접 심판으로 읽히지는 않는다는 그의 말은 설득력이 있다.
게다가 지난해 대선 과정에서도 별다른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한 진보정의당 등 진보정당은 안철수발(發) 야권재편 과정에서도 자리 잡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8개월만에 다시 야인(野人)으로 돌아간 노회찬 대표는, 앞으로 무엇을 하려는 것일까. 안철수의 새 정치 실험은 성공할까.
대법원의 확정판결로부터 20여 일, 안 전 교수의 '서울 노원병 출마선언' 사흘 뒤인 지난 6일, 노회찬 대표를 만났다. 다음은 이날 서울 여의도 진보정의당 당사에서 진행된 인터뷰 전문이다.
▲ 노회찬 진보정의당 대표 ⓒ프레시안(최형락) |
"'안기부 X파일', 전투에서는 졌지만 전쟁은 아직 안 끝났다"
프레시안 : 어렵게 얻은 의석이었는데, 8개월 만에 잃었다. 노 대표 개인에게도 억울한 판결이었지만 사회적으로는 안기부 X파일 사건이 이대로 묻히는 것인가라는 절망도 있다.
노회찬 : 상당히 의미 있는 행동이었고, 용기 있었지만 결국 진 것 아니냐는 지적이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전투에서 졌지만 전쟁은 아직 안 끝났다고 말하고 싶다. 재판 결과는 안 좋게 나왔지만 그 과정을 통해 우리 사회의 문제를 드러내는 데 진척이 있었던 것 아닌가.
문제는 이 사건의 해결이다. 그것은 단일한 사건으로서의 해결보다는 앞으로 이런 성격의 일들을 우리가 어떻게 적발하고, 처벌하고, 반복되지 않도록 할 것인가의 문제다. 해법도 여러 가지 갈래가 있다. 우선, 통신비밀보호법의 부당한 양형 조항을 빨리 고쳐야 한다. 공익적 목적의 활동에 대한 보호 장치 차원이다. 둘째로는 검찰에 대한 민주적 통제의 필요성이다. 검찰더러 '정신 차려라'는 말 만으로는 안 된다. 중앙수사부를 없애고 공직자비리수사처를 신설해야 한다.
그 다음으로는 사법개혁이다. 이번 판결을 통해 사법부가 낡은 판례에 기대 거대 권력을 옹호하는 역할을 아직도 하고 있음이 여실히 드러났다. 선출되지 않은 권력이 스스로 개혁하도록 하는 길은 국민들의 정치적 압력밖에 없다. 마지막으로 재벌의 비자금 조성이나 정경유착에 대해 사회적 통제와 규제를 엄격하게 강화해야 한다.
2005년 드러난 '안기부 X파일' 사건의 처리 문제도 여전히 필요하고, 280여 개의 도청 녹음 테이프의 공개도 필요하지만, 그것만 공개해서 처벌한다고 될 문제가 아니다. 여전히 진행되고 있을지 모르는 유사 범죄와 비리를 제대로 막는, 사회 전반의 총체적 노력이 필요하다.
프레시안 : 18대 총선에서는 낙선해 '야인'으로 지내다가 다시 국회에 입성했는데 8개월 만에 잃었다. 개인적으로도 억울함이 꽤 컸을 것 같은데.
노회찬 : 그 자체로는 매우 부당하고 억울하지만, 새롭게 열린 조건에서 내가 할 일을 찾으려 한다. 다만 한 가지, 진보정당이 수도권, 특히 서울에서 의석을 얻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어렵게 얻은 의석이고, 나 혼자의 힘으로 얻은 것도 아니다. 그런 점에서 미안하고 안타깝다. 그러나 우리는 또 새로운 도전을 해야 하지 않을까.
"안철수도 말할 수 있지만, 安의 당선이 사법부에 대한 국민적 심판은 아냐"
프레시안 : 당장 눈앞의 새로운 도전은 노원병 재보궐 선거일 수밖에 없다. 노원병 재보선의 정치적 의미를 '안기부 X파일' 사건에 대한 심판이라고 보나?
노회찬 : 이번 노원병 재보선은 사법부의 부당한 판결에 대해 국민적 심판이 이뤄질 좋은 기회다. 그런데 안철수 전 서울대 교수의 등장으로 원래의 취지는 빛이 바랬다. 마치 안철수 전 교수의 정계입문에 대해 동의 여부를 묻는 선거처럼 변질되는 상황이어서 매우 유감이다.
프레시안 : 안철수 전 교수는 '안기부 X파일' 사건에 대한 사법부의 판단을 심판하는 주역이 될 수 없다는 말인가?
노회찬 : 누구든, 어떤 후보가 나오든 그 주장은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후보의 당선 혹은 낙선이 그 심판의 바로미터로 읽혀지지는 않는다는 얘기다. 아무래도 그건 나와 관계된 당이나 나와 관계된 후보가 나가야 되는 문제다.
프레시안 : 당의 후보는 어느 정도 준비가 됐나?
노회찬 : 대법원의 판결이 2월 14일 나왔고, 그 이후 약 보름 정도는 잘못된 판결을 시정하는 사면조치를 요구했다. 그 요구가 끝내 수용되지 않은 2월 말부터 사실상 후보 선출 작업에 들어갔고 지금 막바지에 있다. 곧 확정될 것이다. 진보정의당에게는 노원병 의석의 탈환 자체가 중차대한 과제일 수밖에 없다. 또 그를 위해 가장 경쟁력 있는 후보를 내놓아야 좋은 성과를 얻을 수 있다고 본다.
프레시안 : 부인 김지선 씨가 유력하게 거론되고 있는 것으로 안다. 정당의 입장에서는 경쟁력 있는 후보지만 밖에서 보기에는 부인이 출마하는 것이다. 그동안 진보정당이 비판해 온 지역구 물려주기처럼 비춰져 오해를 받을 소지가 있다.
노회찬 : 당연히 있다. 그래서 참 어렵다. 나도, 내 부인도 입장은 같다. 직전까지 내가 의원직을 가지고 있었다는 이유로 자동적으로 내 부인이 대리인으로 출마하는 것은 올바른 선택이 아니라는 것이다. 현재 상황에서 가장 많은 표를 얻을 수 있는 사람이 나가는 것이 마땅하다. 결국 그 지역 주민들이 어떤 후보를 가장 적합하다고 보는지가 가장 중요한 척도다.
그 사람이 내 부인이면 일정한 오해나 경계심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차피 다른 사람이 출마한다면 또 그대로 '낙하산'이라는 문제제기가 있을 수 있다. 그런 오해는 원래의 출마 취지와 성격을 분명히 알려내면서 씻어야 할 과제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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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철수, 출마선언 '대리'로 할 만큼 서두른 이유는?"
프레시안 : 안철수 전 교수의 출마에 대해 부정적 의견을 피력했다. 노 대표는 '가난한 집의 가장' 역할을 하라고 비유했지만 안 전 교수는 가난한 집의 가장이 될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인다.
노회찬 : 대단히 유감이다. 사실 납득이 잘 안 된다. 일단 오해를 피하기 위해 분명히 하자면, 내가 억울하게 의원직을 상실했다고 노원병 선거구가 내 사유지는 아니다. 우리 당만 의석을 가질 권리가 있는 것도 아니다. 누구든 출마할 자격이 있다. 그런 점에서는 안철수 전 교수도 마찬가지다. 또 안철수 전 교수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국회의원을 한 번 해보는 것이 최종 목표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 그러나 본인이 새 정치, 정치 전반을 혁신하겠다는 포부를 강하게 내세운 것 아닌가. 오늘의 행동이 그 연장이라면 납득이 안 간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여기(노원병)에는 새누리당 뿐만 아니라 다른 당도 있다. 진보정의당은 서울에서 유일하게 의석을 가지고 있다 빼앗긴 곳이다. 또 본인이 나갈 다른 곳이 없는 것도 아니다. 4월 선거가 아니어도 10월 재보선도 있다. 그때 모든 당의 응원을 받으면서 전체 선거를 이끌어가는 기폭제 역할도 가능하다. 그런데도 여기서 이런 식으로 나오는 것이 올바르냐는 근본적 의문이 있는 것이다.
실제로 안철수 전 교수의 최근 행태를 보면 더 납득하기 어렵다. 대통령이든 국회의원이든, 어떤 선거에 나가겠다는 사람이 본인은 미국에 있으면서 대리인을 내세워 갑작스럽게 출마선언을 한 사례가 있나? 마치 하루라도 늦으면 큰일 난다는 듯이? 그 자체가 본인이 굉장히 궁색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안 교수 측의 출마선언 회견이 있기 며칠 전이었던 2월 27일, 송호창 의원을 만나서 나는 사실상 통보를 한 상태였다. 송 의원 측에서 먼저 만나자고 해서 만났었다. 노원병 재보선 얘기를 묻길래 우리는 2월 28일 전국위원회를 열어 후보를 내기로 결정할 것이고 3월 4일부터는 후보 선출에 들어갈 것이다, 내 부인이 거론되고 있다, 우리는 이미 여론조사도 마쳤다, 우리가 나갈 것이니 그쪽에서는 자제했으면 하는 뜻을 충분히 전달했다.
그때는 송 의원이 '출마할지 말지도 아직 결정하지 않았고, 출마하더라도 안철수 전 교수가 나올지 다른 사람이 나올지도 정한 바 없다'고 하더라. 그래서 내가 부산 영도를 검토해보라고 했다. 송 의원이 '부산은 매우 어렵다'고 하기에, 내가 부산 출신인데 그렇게 어렵지 않다고, 안철수 전 교수면 충분히 돌파할 수 있다고 얘기해줬었다.
"안철수 출마선언 과정, '힘이 곧 정의'라는 낡은 정치 보여줘"
프레시안 : 안 전 교수의 출마 발표 전에 노원병 문제를 놓고 안 교수 측과 교감이 있었다는 얘기인가?
노회찬 : 다른 교감이 아니다. 여기는 우리가 나가려고 준비를 하고 있고, 나갈 수밖에 없으니 내 생각에는 (안 전 교수는) 영도에 나가는 것이 낫겠다는 의사까지 전달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 그날 (송호창 의원의) 기자회견도 갑자기 잡혔다고 하고, 귀국도 갑자기 추진해 티켓팅도 안 돼 있던 상황이었던 것 아닌가.
또 본인이 들어와서 말해도 될 일을 그렇게 한 것은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다. 당사자인 진보정의당이 후보를 정하면 자신의 출마 정당성이 떨어진다는 우려 때문에 서둘러 한 것이다. 그렇다 보니 나한테도 갑자기 전화하게 된 것이고. 그 전화로 마치 양해가 이뤄진 것처럼 얘기하는 것 자체가 (우리의) 양해 없이 출마하기가 힘들다는 것을 스스로 시인한 것이다. 우리가 양해를 얻어야 한다고 요구하기도 힘들고 그런 요구를 한 적도 없다. 다만 양해를 얻지도 않았으면서 얻었다고 하니까 왜 거짓말 하냐고 묻는 것일 뿐이다.
이 모든 과정 자체가 참으로 궁색하다. 궁색함을 무릅쓰고라도 한 석을 차지해야 한다는 절박함이라면 모르겠는데, 새 정치와는 안 맞는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힘이 곧 정의'라는 낡은 정치 철학의 발로다. 그냥 힘으로 누를 뿐, 상대에 대한 배려가 없다. 그런 점에서 납득하기 어렵다. 어느 곳에 나가도 충분한 공감대를 얻을 수 있는 분인데 지금 여론조사를 해보면 노원에서 출마하는 것에 대한 노원 주민의 공감대가 50%가 채 안 된다. 왜 이런 식의 정치는 하는지, 그 점에서 유감이다.
프레시안 : 당의 계획을 사전에 전달했다는 건, 뒤집어보면 안철수 전 교수 측과의 파트너십을 전제로 생각한 것 아닌가?
노회찬 : 그런 것은 전혀 아니다. 송호창 의원은 내 1심 변호사였다. 서로 우호적인 관계다. 각자의 입장을 얘기한 것이다. 송호창 의원과 가깝다고 그쪽더러 후보 내지 말라고 할 수는 없다. 다만 우리의 확고한 의지를 보여줘 그쪽에서 판단하도록 만들고자 했을 뿐이다. 내가 송 의원에게 전달한 얘기는 이미 언론에 다 보도된 내용들이었다. 다만 좀 강조해서 얘기한 것이다.
"4월 재보선 야권연대? 安과는 신뢰와 존중이라는 바탕이 무너졌다"
프레시안 : 4월 재보선에 임하는 진보정의당이 여전히 야권연대를 유효한 전략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으로 읽힌다.
ⓒ프레시안(최형락) |
프레시안 : 상황이 달라졌으니 진보정의당도 4월 재보선의 야권 단일화에 대한 입장을 수정한다는 것인가?
노회찬 : 아직 안철수 전 교수의 입으로 직접 출마선언을 한 것은 아니니까, 안 전 교수가 마음을 바꿔먹을 것을 정중하게 권하고 있는 것이다.
프레시안 : 안 전 교수 측에 그런 입장을 직접 전달할 방법은 없나? 전화 통화를 한 번 더 시도해볼 수도 있지 않나.
노회찬 : 필요하다면 할 수 있다. 그렇지만 미국에 있지 않나. 그리고 평소에 (안 전 교수와 내가) 전화 통화하는 사이도 아니다. 게다가 이런 문제를? 그런 식의 '기습 출마선언'까지 할 정도면 그쪽에서도 여러 상황을 다 파악했을 것이다. 혹시라도 정말 양해를 구하고자 했다면 만나서 얘기해야지, 생전 처음 보는 사람에게 멀리서 전화로 양해를 구하려 했다는 시도 자체가 잘못이다. 실제로는 그 얘기는 하지도 않았지만.
통화하고 한 시간 후에 기자에게 전화가 왔고, 안철수 캠프 관계자에게 통화 사실을 들었다고 하더라. 내 항의에 송호창 의원은 '그 기자가 넘겨짚은 것'이라고 했는데, 30분 뒤 기자회견에서는 본인 입으로 다시 통화 얘기를 했다. 이 모든 과정을 보면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 안철수가 그야말로 '안하무인'이다.
프레시안 : 지금까지 안철수 전 교수 측에서 나온 얘기를 보면 반대를 위한 연합은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노회찬 : 기본적으로 당을 달리한다는 것은 정치 노선의 차이가 있다는 점을 서로 인정하는 것이다. 연대와 단일화는 그 차이에도 불구하고 신뢰와 존중, 협력의 관계라는 의미 부여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신뢰와 존중의 바탕이 무너졌다. 누구에 의해서든 무너져 버렸다. 얘기를 더 진척시키기도 어렵다. 물론 연대에 대한 안 교수 측의 입장도 별로 납득이 가지는 않는다.
"안철수, 제2의 문국현으로 가고 있다"
프레시안 : 어떤 점에서 납득되지 않는 것인가?
노회찬 : 현재의 궁색한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서 하는 얘기 이상은 아닐 것이다. 지금 민주당에서도 단일화 얘기가 나온다. 민주당은 충남 청양, 부산 영도는 안철수, 노원병은 진보정의당이 나가자는 아이디어다. 이런 얘기들에 대한 (안 교수 측의) 답변일 뿐이다. 현재의 야권 단일화 논의가 자신이 원하는 곳에서 출마하는 것을 어렵게 할 수 있다는 판단에서 거부하는 것이지 단일화라는 대원칙에 대한 거부가 아니다.
프레시안 : 상황논리일 뿐이라는 말인가?
노회찬 : 그렇다.
프레시안 : 안철수 교수가 출마하면서 야권 재편 움직임이 가속화될 것으로 보인다. 진보정당을 포함한 야권 전반의 진로에 대해 생각해온 바가 있다면?
노회찬 : 안철수 현상은 현재의 정치 지형에 대한 국민적 거부감의 표현이다. 민주당과 진보정당들이 제대로 못하는 데 대한 불만이다. 당연히 안철수 현상의 책임은 기성 정치에 있다. 이런 현상이 사실 처음도 아니다. 안철수 현상이 성공하려면 '안철수 현실'이 안철수 현상을 온전하게 담아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안철수 현상도 결국 실패할 것이다. 그런데 지난 대선에서 보여준 공약을 보면, '안철수 현실'이 새 정치의 주요 근간이 될 수 있는지 부정적이다.
새 체제로 가는데 가장 중요한 것이 선거제도 개편이다. 지역 기득권에 기초한 현재의 낡은 체제를 온존시키는 기반이 선거제도기 때문이다. 그런데 선거제도에 대한 안철수의 생각은? 의원 숫자 줄이는 것뿐이다. 안철수가 보여주는 '현실'이 새 체제의 답이 안 되고 있다. 이미 제2의 문국현으로 가고 있다고 본다.
현재의 정치체제를 새롭게 재편하는 방향은 건실한, 생산적인 보수와 진보의 경쟁 구도밖에 없다. 낡은 양대 세력과 별다른 비전이 없는 구태의연한 진보는 더 이상 환영받지 못한다. 이 구도를 바꿔야 한다. 야권재편이 새 질서를 못 만들어내고 혼란만 가져온다면 그것은 현 정부와 새누리당이 가장 원하는 상황이 될 것이다.
프레시안 : 자칫하면 야권재편 논의가 민주당과 안철수 세력의 싸움으로 변질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진보정당은 더욱 곤혹스러울 수밖에 없다.
노회찬 : 그래서 더 분명한 비전이 중요하다. 과거에도 열린우리당과 구민주당이 있었고, 문국현이라는 새로운 흐름도 있었지만 결국 다 좌절했다. 단순히 의원 수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비전이 있느냐, 대안이 있느냐의 문제다. 안철수 전 교수 측이 보여준 비전? 없다. 일부 보여준 것이 전부라면 몹시 실망스럽다.
"정동영보다 진보적인 박근혜, 권영길 같은 문재인…진보정당의 살 길은?"
프레시안 : 진보정당도 혁신을 요구 받고 있다. 진보정당이 갖고 있는 혁신 과제의 요체는?
노회찬 : 2000년 민주노동당 창당 이래 진보정당의 지지율은 계속 높아졌다. 10%를 넘은 것이 대체 언제적의 일인가. 그런데 왜 주저앉았는가? 진보정당이 갖춰야 할 두 가지 가운데, 진보적 정책은 어느 정도 했지만 정치개혁 부분이 문제다. 지난해 통합진보당 사태 때문에 낡은 세력과 다를 바가 없다는 낙인이 찍혔다. 19대 총선에서 지지율 10.3%, 13석을 확보했다. 많지는 않지만 새 정치에 대한 갈망을 담아낼 작은 그릇은 됐다. 민주당에 대한 실망이 커지면 반사적으로 (통합진보당에 대한 기대도) 더 커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낡은 운동방식에, 도덕성마저 의심 받는 상황이 벌어졌다. 진보정당이 대안이 되지 못하면서 안철수 현상은 더 커질 수밖에 없었다.
정책면에서도 그렇다. 지난해 대선을 돌아보면 박근혜 후보의 공약은 2007년 정동영 후보보다 더 진보적이었다. 문재인 후보의 공약은 2007년 권영길 후보의 공약을 방불케 했다. 그 속에서 진보정당은 무엇을 할 것인가. 과거에는 한 두 개의 돋보이는 정책이 주요했다면, 이제는 종합적인 국가 경영 프로그램을 내놓아야 한다. 그것이 정체성의 확립이다. 그게 없으니 '종북'이나 애국가 같은 부차적이고 비본질적인 논란에 시달리는 것이다. 그와 동시에 패권주의나 밤낮없이 싸우는 운동권 문화 악습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 두 가지 노력이 제대로 되고, 뜻을 함께하는 사람들과 같이 하려는 개방적 자세로 바뀌는 것이 새로운 보수-진보 체제에서 진보의 모습이다.
프레시안 : 현재의 위기는 진보정당만의 문제가 아니다. 노동운동도 총체적인 위기다. 이런 상황에서 아래로부터의 진보정치 재건 전망 자체가 안 보인다.
노회찬 : 과거의 방식으로의 관계 맺기는 어렵게 됐다. 민주노총 자체가 하나의 시스템으로서의 어려움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예전처럼 배타적으로 어느 당을 지지하고 당비를 걷어주고 당에서는 민주노총의 요구라면 무조건 대변해주는 관계는 이미 끝났다. 많은 대가를 치르면서 그 폐해도 경험하지 않았나. 그런 관계는 넘어서야 한다.
두 가지 방향이 필요하다. 민주노총의 주요 산별노조들과 현안과 정책을 놓고 실질적인 관계를 맺는 것이 첫째 방향이다. 두 번째는 민주노총이 감당하지 못했던 영역에 당의 역량을 더 집중해야 한다. 솔직히 양대 노총 포함 조직율은 10%도 안 된다. 이제까지의 노동은 그나마 가장 나은 처지의 조직화된 세력이다. 나머지는 움직이기도 힘들다. 게다가 최근에 사회적 반향을 일으키는 노동 문제는 거의 다 민주노총 밖에서 벌어졌다. 그곳에서 당의 기반을 새롭게 건설해야 한다. 생활 정치가 바로 그런 것이다.
프레시안 : 최근 후마니타스 박상훈 대표는 진보정당을 향해 진보라는 애매한 용어는 그만 쓰고 차라리 사회민주주의 이념을 조금 더 강화하고 전면에 내세우라고 충고하기도 했다. 이에 대한 생각은?
노회찬 : 같은 문제의식이다. 안 그래도 사민주의를 당의 기치로 삼을 것을 검토하자고 제안하기도 했었다. 정체성을 보다 분명히 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우리가 어떤 세력이며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솔직하고 명확하게 얘기해야 한다. 그것이 혁신의 중요한 부분이기도 하다.
사실 '진보'라는 단어는 오염되기도 했고, 너무 낡은 용어다. 민주당이 진보라는 단어를 써도 별로 이상하지 않다. 그 말로 온전히 우리를 표현하기 어려워진 것이다. 국민들에게 우리가 무엇을 할 것인지를 분명하게 표현해야 한다. 우리가 약속했던 복지국가가 임박하고 있다면, 어떤 국가인지를 명확하게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이데올로기로서, 과거의 역사로서의 사민주의에 매몰돼 논쟁을 하자는 것이 아니다. 궁극적 지향이 다 같을 필요도 없다. 최대 강령은 열어놓되, 최소 강령은 사민주의로 가야한다는 얘기다. 당명도 사민당으로 바꿨으면 한다.
프레시안 : 한국 정치에서 진보정당의 역할은 여전히 유효하지만, 지난 몇 번의 선거를 거치면서 우리도 미국식 보수 양당제로 가고 있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있다. 때문에 일각에서는 진보정당이 그 현실을 인정하고 양당제 내부의 진보 블록을 구축하는 게 낫지 않냐는 주장도 있다.
노회찬 : 정치라는 것이 사람이 하는 일이니 하나의 길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그 길이 아니면 다 가짜라거나 엉터리라고 보지는 않는다. 그런데 아직까지는, 독자적 진보정당을 구축하고 강화시켜나가는 길이 가능하다고 믿고 있고 그 길이 더 나은 길이라 생각한다. 그 길을 포기하고 있지 않으며 다시 도전하려한다. 순탄하고 쉬운 길은 아니다. 민주당 밖에서 진보라는 새 진지를 구축하는 한 부대로 우리의 길을 갈 것이며 그 길이 효과적이었으면 좋겠다. 혹 그 길을 포기하게 되면 아마 다른 길을 다시 검토하게 될지는 모르지만.
프레시안 : 지난 대선 과정에서 문성현 전 대표가 문재인 캠프에 합류하는 것은 충격적이었다. 당시 노회찬-심상정도 곧 가는 것 아니냐는 오해도 많이 받았을 텐데, 지금 얘기에서도 '아직까지는'이라는 표현이 잠정적이라는 느낌을 준다.
노회찬 : 그럼 표현을 바꾸자. 절대로 안 간다. (웃음) 그런데 정치에서는 '절대로'라는 것, '영원히'라는 것은 없지 않나. 만물은 변화하는 것이다.
ⓒ프레시안(최형락) |
"대통령의 권위는 더 많이 품으면서 빛난다"
프레시안 : 박근혜 정부가 출범한 지 보름 정도 흘렀다. 지난 보름 동안 박 대통령을 지켜보면서 든 생각은?
노회찬 : 보름 밖에 안 지났다. 그래서 평가하기가 쉽지는 않다. 여유가 좀 없다는 생각은 든다. 지금이야말로 가장 좋은 시기 아닌가. 경쟁자나 상대방에 대해서도 가장 관용을 가질 수 있고, 우호적인 상황이다. 그런데도 굉장히 수세적이고 방어적이다. 대표적인 것이 정부조직법 개편안이다.
정부조직법이 왜 시행령이 아니라 법안인지를 박 대통령은 생각해봐야 한다. 조직은 행정부지만 그 조직을 짜는 것은 국회와 협의가 아니라 합의를 하라는 의미다. 그렇다면 본인이 더 선호하는 것이 있더라도 국회의 강한 뜻이 있을 때 절반은 받아들일 각오를 해야 한다. 그래서 자신들과 과거에 똑같이 했던 것 아닌가? 사람마다 선호하는 방식이 있지만 상대가 원하는 대로 한다고 일이 망가지는 것도 아니다. 고집하는 쪽에서 스스로의 권위를 망가트리고 있는 것이다. 저렇게 여유가 없으면 점점 뼈와 뼈가 부딪히는 상황이 되고, 누가 이기든 모두가 상당한 손실을 입을 수밖에 없다.
둘째로 인사다. 너무 치우쳐 있다. 특히 이념적으로 그렇다. 과거 정부에서는 계층적으로 치우치거나, 특정한 친소관계, 즉 학교나 교회 인맥으로 치우쳐 있었는데, 박근혜 정부는 특정한 이념에 치우친 사람들로만 짜여 있다. 어떻게 저런 사람을 찾아냈을까 싶을 정도다. 이렇게 되면 정책과 국가운영 방향도 그럴 수밖에 없다. 사실 새누리당만 보더라도 그 안에 다양한 편차가 있지 않나. 어느 한쪽으로만 너무 쏠리면 배는 전복된다.
이명박 정부는 반(反)정치, 반(反)여의도를 내걸고 정치를 통째로 반대하고 격하시켰다. 그런 '탈정치'를 통해 덕을 보여 했겠지만 결과적으로는 정치도 못 풀고 자신도 망가졌다. 박근혜 대통령은 정치를 아는, 정치와 대화하는 대통령이 되기를 기대했는데 너무 여유가 없어 보인다. 대통령의 권위는 고집을 관철시키는 데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많은 것을 품으면서 권위가 빛날 수 있다는 고언을 드리고 싶다.
프레시안 : 긴 시간 얘기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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