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에 가보니 새끼들이 알에서 깨어나고 있었다. 수초 사이로 이미 깨어난 새끼들이 부산스레 움직이는 모습이 보였다. 새끼들은 수초 사이로 머리를 내밀며 바깥 세상을 잔뜩 기대하고 있었다. 어미는 새로 깨어나는 새끼가 알에서 무사히 나오도록 도와주고 있었다.
이튿날 아침 일찍 학교에 갔다. 이미 새끼 8마리가 어미를 따라 연못에서 놀고 있었다. 새끼들은 어미가 하는 짓은 무엇이든 따라하고 배우려 하고 있었다. 부리를 좌우로 휘저으면 새끼들도 흉내내고 있었고, 어미가 물속에 들어갔다 쏙 나오면 그대로 따라하고 있었다.
1시간쯤 지났을까 어미가 연못가로 올라간다. 새끼들이 깃털을 말리고 체온을 따뜻하게 하라는 배려였다. 어미가 앉자, 새끼들도 모두 어미 둘레에 앉아 햇볕을 쬐기 시작했다. 나는 그때 사진을 찍고 캠코더 촬영을 하고 있었다. 한 10분쯤 지났을까, 어미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물로 들어간다. 새끼들도 따라들어가기 시작했다. 분명 내가 느끼지 못한 무슨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 흰뺨검둥오리. 텃새지만 겨울에 북쪽에서 우리나라로 날아와 월동하는 겨울철새도 있다. ⓒ권오준 |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일곱 마리째 연못으로 들어가려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후다닥-' 하는 소리와 함께 비명이 터져나왔다. 들고양이였다. 들고양이가 풀숲에서 튀어나오는데 그야말로 전광석화였다. 얼른 새끼들 숫자를 세어보았다. 아뿔싸! 일곱 마리였다. 고양이가 한 마리를 물어가버린 것이었다.
어미는 초긴장 상태였다. 새끼들을 더 잃지 않으려는 듯 부리를 벌리고 몸을 세워 날갯짓을 하며 힘을 과시해본다. 새끼들은 어미 꽁무니에 바싹 달라붙어 다녔다.
고무보트를 타고 둥지에 가보았다. 수초를 벌려보니 놀랍게도 부화되지 않은 알이 세 개나 있었다. 어미는 더 이상 품지 않기 때문에 알을 가지고 나왔다. 마침 학교에 인공부화기가 있어서 알 세 개를 넣어두자고 했다.
일주일 뒤였다. 이번엔 강원도에서 촬영하는데 학교에서 또 연락이 왔다. 놀랍게도 알 한 개가 부화했다는 소식이었다. 학교 과학실에 가보니 인공부화기에서 나온 새끼 한 마리가 어미를 찾는 듯 보였다. 연못에 넣으면 적으로 오해받을 수 있서 작은 상자에 넣어 어미소리만 들려주자고 했다. 상자를 연못가에 두자, 멀리 있던 어미가 꽥꽥거리며 소리를 질러댄다. 인공부화 새끼는 그 소리에 즉각 반응하며 흥분하는 듯 삑삑거리기 시작했다. 잠시 후 새끼가 난리를 치니까 상자가 쓰러졌고, 인공부화 새끼는 앞뒤 안가리고 연못에 뛰어들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새끼가 헤엄치며 엄마에게 달려가는데, 어미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어미는 새끼 일곱 마리에게 자신의 꽁무니에 바싹 붙으라고 명령했다. 그리고는 자신의 영역에 적이 침범했을 때 어떤 대가를 치르는지 보여주겠노라는 듯 날개를 활짝 펴보인다. 일종의 선전포고인 셈이었다.
그 사이 인공부화 새끼는 어미에게 다가갔다. '삑삑 삑삑-' 거리면서. 그 순간이었다. 어미가 분노한 표정으로 달려들었다. 성큼성큼 물 위로 달려들더니 새끼에게 부리공격을 시작했다. 그 작은 새끼를 부리로 찍고 물속에 처넣는다. 새끼는 속수무책이었다. 촬영하던 내가 소리를 질렀다. 어미가 멈칫했다. 잠시 공격이 멈추자 새끼는 잠수를 해서 물가로 빠져나왔다. 어미는 의기양양하게 날갯짓을 하고, 일곱 마리 새끼들도 졸졸졸 따라다니며 엄마의 용맹성에 감탄하는 눈치였다.
물가에 나온 새끼는 머리에 피멍이 나 있었다. 다행히 죽지 않았다. 이제 어미가 버렸으니 누군가는 보살펴주어야 했다. 내가 입양하기로 했다. 학교에서도 흔쾌히 찬성하며, 닭사료까지 사서 차에 실어주었다.
▲ 흰뺨검둥오리 새끼 ⓒ권오준 |
▲ 지렁이를 잡아먹는 흰뺨검둥오리 ⓒ권오준 |
우리집에 온 새끼는 사흘 동안 별로 먹지도 않았다. 어미에게 공격당한 충격이 너무나도 컸던 모양이었다. 밤새 품어주고 안아주며 따뜻한 기운을 불어넣어 주었다. 차츰 기운을 차리기 시작했다. 나흘째부터는 제법 잘 돌아다니며 나를 졸졸졸 따라다닌다. 저녁이 되면 내 배에 올라와 부리를 내 목에 끼운 채 잠이 들었다. 낮에도 일부러 거실에 누워 있으면 어느새 내 겨드랑이를 파고든다. 내가 어미가 된 것이다.
오늘이 인공부화한지 어느덧 23일째가 되었다. 그 사이 새끼에겐 많은 일이 생겼다. 늘 삑삑거리고 다녀 아이들이 '삑삑이'라고 이름붙여 주었다. 이젠 삑삑이가 우리 가족의 중심에 있었다. 베란다에 임시 거처를 마련해주었다.
아침마다 뒷산 둠벙에 데려가 야생을 맛보게 했다. 계단을 뛰어올라가면 두 발로 죽어라 쫓아온다. 죽어도 어미를 놓칠 수 없다는 본능이 작용하는 듯싶었다. 산에서는 소금쟁이와 쥐며느리를 잡아먹고 물풀이나 씨앗을 주로 훑어먹는다. 최근엔 생태공원 할아버지가 잡아준 지렁이 맛에 흠뻑 빠졌다.
삑삑이를 기르면서 두 가지 점에 놀랐다. 우선, 녀석의 부리에 신기한 장치가 내장되어 있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히터 기능이다. 녀석이 웅크리고 앉아 있으면 부리가 놀라울만큼 뜨거워진다. 물에서 놀고 깃털을 다듬을 때 그 뜨거운 부리가 마치 헤어 드라이어처럼 작동해서 금방 깃털을 말릴 수 있었던 것이다.
부리 위쪽은 딱딱하고 특별한 기능을 못하는데, 아랫부리는 전혀 다르다. 삑삑이의 아랫부리는 모터가 내장된 것처럼 자동 바이브레이션(진동)된다. 그 진동으로 먹을 수 있는 것인지, 없는지를 판단하고 있었다. 또한 작은 톱니장치도 있어서 이빨이 없는 단점을 보완해준다. 삑삑이는 부리로 흙속을 뒤지다가 지렁이나 벌레가 있으면 냉큼 낚아채는 재주를 보여준다. 그야말로 부리에 첨단 감지기능이 내장되어 있는 셈이다.
하지만 각인된 기억이 계속 삑삑이를 억누르고 있다는 점이 안타깝다. 부화한 날 어미에게 혹독하게 공격당한 기억 때문인지 여전히 시퍼런 물에는 들어가지 않는다. 물갈퀴가 있고 물에 살아야 하는 운명이건만, 가슴에 물이 차면 곧바로 뛰쳐나온다. 결국 물 적응을 시키느라 며칠 전부터 미꾸라지를 사서 욕조에 풀어놓았다. 미꾸라지를 맛보더니 차츰 물에서도 오래 머물었다. 이쯤이면 물에도 들어가지 않을까 기대했다. 하지만 웬걸! 오늘 아침 산에 갔을 때 시퍼런 웅덩이를 보자 다시 기겁을 하며 뛰쳐나온다.
오늘로 체중 317g. 부화 첫날보다 무려 10배 이상 무게가 늘었다. 이제 여름이 지나면 날개도 자라 날아다녀야 하고 내년이면 짝도 찾아야 하는데 이래저래 걱정이 많다. 흰뺨검둥오리끼리 서로 의사소통해본 적이 없는 것도 걱정이다. 먹이찾기야 어떻게 훈련시킨다고 하지만, 물에 안들어가려는 건 그 가운데 가장 큰 걱정이 아닐 수 없다.
사람이든, 새든 가슴 아픈 기억은 여간해선 사라지지 않는 듯싶다.
덧붙이기: 이 이야기는 <YTN> 뉴스에서 특종 방영됐고, 삑삑이의 슬픈 이야기는 트위터에서도 큰 화제를 모아, 필자는 거의 매일 삑삑이가 살아가는 이야기를 사진과 함께 트위터(@hansyokwon)에 올리고 있다.
권오준은...
새 다큐멘터리를 촬영하며 그를 바탕으로 생태동화를 쓰고 있다. 보리출판사 잡지 <개똥이네 놀이터>에 '둠벙마을 되지빠귀 아이들', '탑마을 언덕의 호랑지빠귀 부부', '용감한 꼬마물떼새, 마노', '홀로 남은 호랑지빠귀', '곡릉천에는 백로가 살아요' 등을 발표했다. 현재 성남 아름방송(ABN)에서 새 생태뉴스를 보도하고 있고, 2010년 5월에는 꼬마물떼새가 멧비둘기를 공격하는 희귀 장면 촬영한 것이 MBC 뉴스데스크에 특종 방영되기도 했다. 우리 새 생태동화 시리즈 중 첫 권인 <둠벙마을 되지빠귀 아이들>이 6월 초 단행본으로 출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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