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소식이 알려진 후 피해자 측의 반응은 차가웠다. 피해자들과 오랫동안 함께한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는 "밀실 정치는 더 이상 필요 없다"고 질타했다. "피해자들이 원하는 해결책", "올바른 해결책이 무엇인지도 몰랐던 두 정권"이 피해자와 지원 단체의 참여를 배제하고 적당히 타협하려 한 것 아니냐는 비판이다. 일본 정부는 "국가 책임 인정은 외면한 채 돈으로 입막음하겠다는 속내를 부끄러운 줄 모르고 다시 드러"내고, 한국 정부는 원칙에 따라 당당하게 임하기보다는 밀실 타결을 위해 안간힘 쓴 것 아니냐는 질타다. 정대협이 제시하는 해결책은 국가 차원의 명확한 책임 인정 및 공식 사죄, 법적 배상, 역사 교과서 기록, 재발 방지 약속 등이다.
이를 정대협의 과민 반응으로 여기는 이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분명히 말한다. 그렇지 않다. 피해자 측 주장은 원칙에 부합하는 지극히 당연한 요구다. 여성들을 전쟁터의 성 노예로 만드는 일이 되풀이되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조치다. 정도(正道) 대신 꼼수를 고집한다면, 끔찍한 과거는 언제든 되살아날 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막을 내린 지 70년이 다 돼간다. 많은 이들에게 이 전쟁은 희미한 과거일 뿐이겠지만 '위안부' 피해자들에겐 여전히 진행형이다. 그들의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 오랜 시간 동안 피해자들을 고통 속으로 내몬 주범은 물론 일본 군국주의자와 그 후예들이다.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위안부' 피해자들을 속여 강제 동원했다. 인간 사냥도 서슴지 않았다. 끌려가 목숨을 잃은 이도 많았다. 군이 '위안부'를 관리하는 등 국가 차원의 조직 범죄였다. '위안부'로 끌려간 이들의 상당수는 가난한 집 딸이었다.
피해자들은 1945년 이후에도 일본으로 인해 고통을 당해야 했다. 인도(人道)에 반한 범죄였음을 인정하고 반성하는 대신 사실을 은폐하고 거짓을 강변했다. '위안부'는 공창(公娼)이었다, 그들이 돈을 받고 성 행위를 했을 뿐 강제 동원은 없었다는 궤변이 수십 년간 고장 난 라디오처럼 흘러나왔다. 자국의 전쟁 범죄를 반성하는 양심 세력도 없진 않았지만, 일본 정계의 다수는 오랫동안 그렇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새역모)' 같은 일본 극우는 역사 교과서에서 '위안부' 관련 서술을 빼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위안부' 관련 서술이 일본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을 저해하는 자학 사관의 산물이라는 강변이었다.
▲ 나눔의 집에 있는 소녀상. ⓒ프레시안(최형락) |
피해자들은 왜 귀국 후 40년 넘게 침묵해야 했나
이런 것들이 피해자들의 가슴을 후벼 팠다. 지워지지 않는 상처에 또 칼을 댄 셈이다. 그렇다면 피해자들을 고통스럽게 한 건 일본뿐이었을까? 안타깝게도, 그렇지 않다. 피해자들에게 다시 상처를 입힌 '일본 군국주의자와 그 후예들의 공범'은 한국에도 있었다.
"우리가 강요에 못 이겨 했던 그 일을 역사의 기록으로 남겨둬야 합니다." 고 김학순 할머니가 '위안부' 피해를 최초로 증언하며 한 말이다. "당했던 일이 하도 기가 막히고 끔찍해 평생 가슴속에만 묻어두고 살아왔"던 김 할머니를 증언하게 만든 건 전쟁 범죄를 부인한 일본이었다.
그런데 최초의 피해 증언이 나온 때는 1991년이다. 해방 후 46년이나 지난 시점이었다. 귀국 후 40년이 넘도록 피해를 증언하지 못했다는 말이다. 그만큼 끔찍한 경험이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 때문만은 아니었다. 아픔을 공감하고 피해자를 보듬기보다는 '순결한 민족의 딸이 일본 남성들에게 더럽혀졌다'는 식으로 받아들이며 상처 입은 민족적 자존감을 우선했을 남성 중심적인 사회 분위기가 피해자들에게 침묵을 강제했다고 하면 지나친 말일까. 민족 문제를 빼놓고 '위안부' 문제를 진단할 수는 없지만, 민족 문제만으로 이 문제를 바라봐서는 안 되는 이유다.
이런 분위기를 만드는 데 한국 정부도 한몫했다. 한국 정부는 오랫동안 '위안부' 피해자들을 외면했다. 유령 취급을 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런 태도가 잘 드러난 것이 1965년 맺은 한일기본조약(한일협정)이다. 이 조약 체결 과정에서 '위안부' 문제는 원폭 피해자, 사할린 잔류 한국인 문제와 마찬가지로 논의 대상조차 되지 못했다. 을사조약(1905년)과 한일병합조약(1910년)의 무효 여부를 명확히 하지 못해 '식민 지배는 합법이었다'는 주장을 일본 측이 계속하게 만든 것에 못지않게, '위안부' 사안을 그렇게 넘긴 건 심각한 문제다.
한국 정부가 그 후에도 오랫동안 '위안부' 문제 해결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은 것도 한일기본조약 당시 취한 태도와 무관하지 않다. '위안부' 문제 해결이 지체된 국내 원인이 모두 박정희 정권에 있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렇게 된 중요한 책임을 박정희 정권에 물을 수밖에 없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일본과 다시 수교하도록 만든 국제적 흐름이 있었고 경제 개발 자금을 마련하는 것이 시급했음을 고려한다 해도, 피해자들을 그렇게 저버린 것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
▲ 9월 11일, 주한 일본 대사관 앞에서 열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수요 집회. 이날 참석자들은 역사 왜곡 논란을 불러일으킨 교학사 교과서 검정 철회를 촉구했다. ⓒ연합뉴스 |
'위안부' 피해자가 '역사 왜곡 교과서 철회' 요구해야 하는 사회
한국의 이러한 상황은 피해자들을 더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그 고통의 굴레에서 벗어날 길을 연 것은 한국 정부가 아니다. 1980년대 후반부터 이 문제를 제기한 일부 여성 단체와 1991년 이래 용기 있게 증언한 피해자들이 열었다. 그렇게 20여 년이 흘렀다. 피해자들 및 그들과 함께한 이들의 노력으로 이 끔찍한 전쟁 범죄의 실상은 많이 알려졌다.
그러나 상황은 만만치 않다. 고령의 피해자들은 하나둘씩 세상을 떠나고 있다. 일본 우파는 여전히 피해자들의 피맺힌 요구를 외면하고 있다. 이것만이 아니다. 2000년대 들어 목소리를 높인 뉴라이트는 피해자들을 고통으로 몰아넣은 전쟁 범죄에 적극 협력한 친일파를 은근슬쩍 부활시키려 하고 있다. 일본의 전쟁 범죄를 정면으로 다루기보다는 일제의 지배와 친일파를 미화한다는 비판을 자초한 교과서가 검정을 통과했다. 차기 대권주자를 자임하는 집권 여당의 힘 있는 의원은 그런 위험한 교과서를 적극 옹호하고 있다.
하나같이 피해자들의 가슴에 또 대못을 박는 일이다. 일제 때는 전쟁 범죄에 시달리고, 해방 후엔 정부의 외면에 상처받은 피해자가 노구를 이끌고 '역사 왜곡 교과서 검정 통과 철회'를 위해 거리에 서야 하는 사회는 제대로 된 사회가 아니다. 일본의 독도 관련 강변을 규탄하는 성명을 내면서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대못을 박는 역사 왜곡을 방치한다면, 그건 모순이다.
한국 안의 이런 것들부터 바로잡아야 한다. 그것이 국가 우선 논리에 매몰되지 않고, 상처받은 인간을 보듬고 전쟁 범죄 재발을 방지한다는 원칙의 시작점이 될 수 있다. 그걸 바탕으로 일본 우파의 궤변을 공박하고, 일본 내 양심 세력과 더 굳건히 손잡아야 한다.
박근혜 정부가 그 원칙을 지키며, 아버지 시대에 버림받은 이 피해자들의 눈물을 닦아줄까. 기억하자. 길은 원칙에 있다. 그리고 시간이 많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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