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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들을 대상으로 강연을 할 때 이런 질문을 던지곤 한다. "세종대왕은 몇 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왕이 되었죠?"
아이들은 잠시 생각하다 저마다 다른 답을 내놓는다. "4 대 1이요!" "3 대 1이요!" "경쟁률 없어요!"
각각의 답이 다 일리가 있다. 4 대 1이란 태종의 네 아들 가운데 뽑혔다는 뜻이고, 3 대 1이란 세자였던 양녕대군이 탈락하는 상황에서 나머지 세 아들 가운데 뽑혔다는 뜻이리라. 경쟁률이 없다는 대답은 워낙 탁월한 인물이라 이미 태종의 마음속에서 확정되어 있었음을 말하려는 것이렸다.
"3 대 1이라고 칩시다. 그러면 박근혜 대통령은 몇 대 1의 경쟁률을 뚫고 대통령이 되었나요?"
아이들이 다소 어려워할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바로 질문의 의도를 눈치채고 답을 던진다. "5000만 대 1이요!" 왕정 국가인 조선과는 달리 민주주의 국가인 대한민국에서는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주권자이고 모두 대통령을 할 수 있는 잠재적 후보자라는 것을 아이들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여러분처럼 어린 친구들은 아직 투표를 할 수 없으니까 한 3000만 대 1이라고 합시다. 그렇다면 박근혜 대통령이 세종대왕보다 1000만 배는 더 훌륭해야 하겠죠? 그럴까요?"
아이들은 주저 없이 고개를 젓는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아이들이나 나나 박근혜 대통령을 폄하할 생각 따윈 전혀 없었다. 그가 현직에 있기 때문에 이름을 거론했을 뿐, 단언컨대 대한민국의 역대 대통령 중에 세종보다 1000만 배는커녕 단순 비교를 해도 더 나았던 분은 없었다. 그래서 지금도 세종은 청와대 앞에 인자한 모습으로 앉아 대통령과 국민의 귀감 노릇을 하고 있는 것이리라.
세종이 사대부 반대를 무릅쓰고 한글을 만든 이유
한글날이 공휴일로 돌아온 것은 참 다행스러운 일이다. 이날따라 많은 사람이 몰리는 세종대로를 보고 있노라면 세종은 조선 시대의 임금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쯤 되는 분 같다. 무엇보다도 대한민국 국민이 사랑하고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독자적인 문화를 가진 수준 높은 독립국이라는 사실을 증명해 주는 한글을 창제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정작 조선 시대에는 세종이 오늘날만큼의 존경과 사랑을 받지 못한 것 같다. 중화 문명을 숭배하는 사대부들이 얼마나 한글 창제를 반대했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런 반대를 예상해서 비밀리에 창제를 진행했을까. 꼼꼼하기로 소문난 <조선왕조실록>에도 구체적인 한글 창제 과정은 물론 정확한 한글 창제 시점조차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국어학계에서는 지금도 한글은 누가 만들었느냐, 한글날은 정말 언제냐 등을 놓고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세종은 왜 사대부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한글을 만들었을까? 그는 이 업적으로 말미암아 주체성에 목마른 한국인의 민족적 영웅으로 역사를 초월해 뜨거운 사랑을 받고 있지만, 그 자신이 중화로부터 벗어난 조선 문화를 꿈꾼 것 같지 않다. 그의 문화적 업적들에는 중화의 주체적 수용이라는 뚜렷한 목적의식이 깃들어 있다.
과학사를 연구하는 문중양 서울대 교수에 따르면 세종대 학자들이 원의 수시력을 완벽하게 파악해 조선의 독자적 역법인 칠정산을 만든 것은 원이 고려에 수시력을 하사한 지 150년 만의 일이라고 한다. 우리 민족이 당대 세계 최고의 과학 수준에 도달하기까지 150년이 걸렸다는 뜻이다.
세종이 세계 최고의 보편 문화라고 여겼던 중화가 우리 시대에는 서구에서 비롯된 과학 기술 중심의 현대 문화에 해당한다고 해 보자. 과연 현대 한국인 중에 세종과 그의 신하들처럼 이 같은 현대 문화의 핵심에 도달하고 이를 주체적으로 재창조할 준비에 이른 사람들이 얼마나 있을까? 2010년대 한국 사회가 1440년대 조선 사회만큼 보편적인 세계 문명의 중심에 능동적으로 다가서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오늘날 미국이나 유럽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석학들이 한글의 도움 없이 세계적인 학문 성과들을 원문으로 읽어 치우는 것처럼 세종도 당대 최첨단의 중국 서적들을 아무 어려움 없이 읽어 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 같은 수동적인 수용에 만족하지 않고 조선 사람의 입장에서 능동적으로 최고 수준의 문화를 재창조하려고 했다. 그의 뜻에 따라 조선이 자기 힘으로 세계 최첨단의 문화 수준에 오르기까지 걸린 시간이 150년이라고 했는데, 그것도 세종이 아니었다면 얼마나 더 걸렸을지 모를 일이다.
세종의 천문학 프로젝트는 조선이 중국과 다른 나라라는 고민에서 비롯되었다. 중국의 역법을 존중하지만 지리적 여건이 다른 조선에서 그것을 100퍼센트 그대로 쓸 수는 없는 법이다. 세종의 한글 창제도 이 같은 맥락에서 중국의 유교 문화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그 '선진 문화'를 조선에 맞게 받아들이고 조선의 모든 백성과 공유하려는 문제의식의 소산이었다.
이런 문제의식에서 보았을 때 확실히 세종은 탁월한 지도자이자 지식인이었다. 그는 단지 한국인에게 자신의 문자를 안겨 준 것뿐 아니라 조선 문화를 당대 보편 문화의 수준으로 끌어올리고자 노력하고 실제로 일정한 성취를 이룩했다. 우리 주변을 아무리 둘러보아도 세종에 버금가는 지도자나 지식인을 찾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 한글 창제 과정을 그려 관심을 모았던 SBS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2011년)의 한 장면. ⓒSBS 화면 갈무리 |
군주제 국가의 리더십, 민주주의 국가의 리더십
여기서 내가 청소년들에게 질문했던 문제가 발생한다. 세종은 아무리 위대해도 왕정 시대의 세습 체제가 탄생시킨 군주였다. 유교적 원칙에 따르면 그는 왕이 될 수 없는 셋째 왕자였으나 우여곡절을 거쳐 태종의 낙점을 받았다. 세종이 비정상적인 방법으로나마 왕이 된 것이 우리 민족에게는 천만다행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우리 시대에는 아무리 세종과 같은 탁월한 인물이 있다 해도 선거의 관문을 통과하지 못하면 민족의 지도자가 될 수 없다.
세종이 만약 우리 시대의 지도자였다면 지식인과 야당 정치인으로부터 독단이니 불통이니 하는 비난을 수도 없이 받았을 것이다. 한글 창제 과정에서 그런 면의 일단이 엿보인다. 또한 세종은 유교적 원리에 입각한 세습이 국가를 위해 최선이라고 생각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아들 가운데 야심만만한 수양대군을 주저앉히고 병약한 문종을 후계자로 임명했다. 이 선택이 조선 왕조를 피로 물들인 계유정난(1453)으로 이어진 사실을 모르는 한국인은 없을 것이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면 우리는 기이한 질문에 부딪힌다. 민주주의가 확실히 군주제보다 우월한가? 군주제 국가인 조선은 건국 30년 만에 세종이라는 위대한 지도자를 탄생시켰는데, 민주주의 국가인 대한민국은 건국 70년을 바라보는 지금까지 과연 세종과 비슷한 지도자라도 맞이한 일이 있는가? 혹시 세종만큼 위대한 일을 할 만한 사람을 찾아서 선출 과정 없이 그를 추대하는 게 나라를 위해 더 나은 일이 아닐까?
물론 우문(愚問)이다. 민주주의와 세종 같은 지도자 사이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그 답은 민주주의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우리 한국인은 세종 앞에서 좀 더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 왕정 시대의 유일한 주권자였던 군주가 그만한 일을 했는데 민주주의 시대의 5000만 주권자가 그를 넘어서 5000만 배 더 훌륭한 나라를 건설하지 못한다면 부끄럽기 짝이 없는 노릇이다.
특히 이 시대의 지도자를 자임하는 사람들이 각성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어떤 지도자는 더러 세종의 진면목은 보려 하지 않고 '세종의 리더십'만 거론하기도 한다. 국민 대다수가 반대하는 정책을 무리하게 밀어붙이면서, 언감생심 세종이 사대부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한글을 창제한 '뚝심'에 견주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이 갖춰야 할 것은 군주제 하에서 발휘된 리더십을 역사적 맥락 없이 견강부회하는 것이 아니라 세종보다 능력은 떨어지더라도 5000만의 힘을 모아 문화 강국의 건설로 나아갈 줄 아는 '민주적 리더십'이다.
나는 앞날이 창창한 청소년들에게 다음과 같은 결론을 제시하고 강연을 끝냈다.
"여러분은 아직 세종대왕을 존경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민주주의 시대의 주역으로서 그보다 5000만 배 더 위대한 업적을 쌓을 때까지 여러분은 세종대왕을 질투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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