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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박정희, 반성은 없었다…유신은 필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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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박정희, 반성은 없었다…유신은 필연"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6> 친일파, 세 번째 마당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두 번째 이야기 주제는 친일파다. <편집자>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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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 : 친일파 중에도 반성한 사람이 아주 소수 있다. 기억할 만한 반성으로 어떤 게 있나.

서중석 : 기억할 만한 반성이 그렇게 많진 않다. 그러나 일제 때 기술직에 종사했던 하급 관리들, 어쩔 수 없이 일제가 시키는 행위를 했던 사람들은 해방이 되자 '반성하고 새로운 마음으로 새 나라를 세우는 데 기여하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그런 분위기를 전해주는 자료들은 나온다. 악질 친일파만 다시 권력에 빌붙어 자기들 세상을 찾으려 노력한 것이지, 반민족 행위를 했던 이들 중 다수는 '다시는 그런 잘못을 범하지 않겠다'는 생각을 해방 직후엔 상당히 했던 것 같다. 그런데 친일파 세상이 되면서 참회가 흐릿해지고 '친일 행위를 한 게 뭐가 어때. 남들 다 한 것 따라 했는데', 이런 식으로 합리화하는 게 나온다.

친일 행위 반성은 그 당시 사람들 사이에서 조금씩 편린이 보인다. 대표적으로, 우리가 잘 아는 채만식이라든가 (<문장강화>의 저자) 이태준을 거론한다. 채만식은 일제 말에 상당했다. 황국 신민화 운동이나 군국주의 침략 전쟁을 미화하는 글을 꽤 발표했더라. 그러나 해방 후 여러 형태의 글을 통해 반성한다.

프레시안 : 같은 문인인 이광수는 다른 태도를 보였다.

서중석 : 이광수는 반민법 재판에서조차 자기 행위를 변호하고 그게 한국을 위한 것이었다는 파렴치한 주장을 해서 많은 분노를 샀다. 일제 말 '미칠 광(狂)'자 광수라고까지 불릴 정도로 심한 발언을 했던 이 사람은 해방 후 부인하고 한때 이혼 절차를 밟았다. (친일 행위 때문에) 재산 문제가 어떻게 될 지 모르겠으니까, 이혼 절차를 밟아 자식들 문제, 부인 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것 아니겠나. 굉장히 영악한 사람이다. 이렇게까지 하면서 자기 행위를 계속 옹호했다.

반면 채만식이나 최린은 이광수만큼은 아니어도 일제 말에 친일 행위를 심하게 했는데, (해방 후) 상당히 반성했다. (최린은 천도교 지도자로 1919년 3.1운동 당시 민족 대표 33인 중 한 사람이었으나, 변절했다. 1949년 반민특위 법정에서 최린은 참회하며 "민족 앞에 죄지은 나를 광화문 네거리에서 사지를 찢어 죽여라"라고 말했다. <편집자>) 그래서 사람들이 '이광수보다는 그래도 낫다'고들 했다.

프레시안 : 반성하지 않은 친일파 중엔 그 후 승승장구한 경우가 많다.

서중석 : 자유당 정권에서 특히 악질이었던 이들 가운데 친일 행위를 반성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예컨대 (1960년) 3.15 부정 선거 때 자유당 정부통령 선거대책위원장으로서 선거를 총괄했던 한희석도 그렇다. 일제 때 고등문관 시험에 합격해 군수를 했는데, 그것에 대해 아주 좋아하기만 할 뿐 반성하는 대목이 안 나오는 글을 남겼다. 대개는 겉으로라도 반성하고 그러지 않나. 그런데 그런 것도 안 나온다. 그걸 보며 '역시 일제 때 반성 없이 나쁜 짓을 한 사람은 해방 후에도 똑같이 그런 짓을 하는구나'라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사실 박정희 그분도 일제 때 행위에 대해 반성한 적이 있느냐. 많은 사람이, 그 양반은 일제 때 일본 군인 정신이 투철하고 그걸 강렬히 견지할 수 있었던 것을 자기 정체성과 결부해 자부심을 가지면 가졌지, 일본 군인이었다는 것에 대한 반성은 없었다(고 이야기한다). 유신 체제가 나오는 건 그런 면에서 필연성이 있지 않느냐고 판단할 수도 있을 것 같다.

▲ 박정희 전 대통령. ⓒ연합뉴스

"공과 한꺼번에 봐야 하지만 애매하게 친일 호도해선 안 돼"

프레시안 : 친일파라 하더라도 공(功)과 과(過)를 함께 봐야 하는데 친일 청산을 주장하는 이들이 그렇게 하지 않는 것 아니냐는 의견도 있다. 교학사 교과서가 친일 행적이 뚜렷한 최남선에 대해 '상훈법에 비춰 포상한다면 어떤 상이 적절할까'라는 내용을 담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

서중석 : (당연히) 어떤 경우든 공과 과를 한꺼번에 봐야 한다. (1987년) 6월항쟁 이전에 극우 반공 세력이 친일파 연구는커녕 거론하는 것조차 어렵게 했던 게 큰 문제이지, '친일 행위를 한 모든 사람이 비난 대상이다', 이렇게 얘기할 수는 없다. 악질 친일 행위 또는 고위직으로서 한 친일 행위, 매국 행위, 황국 신민화 운동이나 군국주의에 가담한 것이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이광수나 최남선 같은 경우도, 그 사람들이 사회에 끼친 좋은 점도 있다면 그건 그것대로 써줘야 한다. 다만 그들이 나쁜 짓을 했다면 이것도 그대로 써줘야 하는데, 이번 (교학사) 교과서는 그게 아닌 것 같다. 어떤 부분을 합리화하기 위해 묘한 논리를 주장하는 것 아닌가. (반대로) 친일파였다가 과거를 뉘우치고 독립 운동을 했다는 증거가 뚜렷하게 드러난다면 그건 치하할 일이다. 친일 행위를 했더라도 해방 후 참회하고 올바른 일에 적극 나섰다면 그것도 평가해줘야 한다.

프레시안 : 이 문제와 관련해 더 살펴볼 만한 사례로는 어떤 것이 있나.

서중석 : 난 이 문제를 말할 때 홍난파 얘기를 많이 한다. 홍난파는 민족적 감성이 잘 담긴 곡을 여럿 남겼다. 그런 점에서 기여를 많이 했다. 그러나 일제 말 홍난파가 황국 신민화 운동이나 군국주의 침략 전쟁을 찬양한 건 아주 강도가 심하다. 그런 점을 무시하고 그 이전의 홍난파 중심으로 사고하려 하거나, 일제 말에 한 걸 간단하게 처리하고 그 이전 것만 근사하게 포장하려 해선 안 된다. 공과를 같이 봐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중엔 그런 식으로 처리하려는 이들이 많다. 실제로는 과가 중요한데도 과는 적당히 넘어가고 공이라고 할 대목에 대해선 지나치게 평가함으로써, 자신들의 친일 행위를 합리화하려는 측면이 강하다.

이광수나 최남선은 1910년대부터 1930년대 초까지 공이 부분적으로 있다고 하더라도 그 시기에조차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었다. 그런 점을 분명히 인식하고 중시해야 한다. 우리 역사의 슬픈 측면인데, 신문명 부분에서 이광수의 역할은 컸다. 이광수는 대중소설을 재미나게 썼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팔리는 소설을 썼다. 그런 이광수가 일제 말에 해도 너무한 짓을 했다. 이렇게까지 심하게 민족 말살 행위, 전쟁 찬양 행위를 할 수 있느냐(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프레시안 : 이광수는 여러 가지 의미에서 문제적 인물이다.

서중석 : 사실 이광수는 출발부터 (친일적인) 그런 면이 있다. 그 사람이 사회 활동을 한 건 일진회(1904∼1910, 국권을 일본에 넘기라고 순종에게 요구할 정도로 노골적인 친일 행위를 한 단체. <편집자>)의 전신인 진보회에 가담하면서부터다. 일본에 유학해 신문명을 섭취하는데, 그것도 일진회 유학생으로 간 것이었다. 또 3.1운동이 일어나기 전, 1910년대 무단 통치 아래서 일제를 찬양하는 글들을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에 발표했다. 그래서 사이토 총독의 브레인이 되는 아베 같은 사람이 주목했다. 나중에 '이광수는 아베의 수양아들'이라는 얘기도 들었다.

이광수는 급변을 잘한 사람이다. 세계적인 분위기와 민족 내부의 강력한 분위기를 따라 한때 (1919년) 2.8독립선언서 작성에도 관여하고 독립 운동에도 뛰어들지만, 바로 일제에 포섭됐다. 국내에 들어와선 겉으로는 민족을 위해 싸우는 사람인 것처럼 행세하면서 실은 아베와 긴밀한 관계를 맺으며 친일 행위를 하는 이중적인 면을, 악질적 친일 행위를 하기 전에도 보여줬다. 그러고는 1930년대 들어 파시즘에 경도돼 파시스트가 되는 걸 볼 수 있다.

이 사람의 악질적인 친일 행위엔 스스로 얘기한 것처럼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측면도 있었다. 정말 파시즘만이 인류를 구원한다는 식의 생각을 했던 거다. 그러니 공과를 따진다고 할 때 엄밀하게 따져야 한다. 애매하게 해서 친일 행위를 호도해선 안 된다.

▲ 이광수는 1940년 <매일신보>에 실린 '창씨와 나'라는 글에서 창씨개명을 옹호했다. 이 글에서 이광수는 조선 민족의 장래를 위해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굳은 신념에 도달했다고 강변했다. ⓒ민족문제연구소

친일·독재 세력 덕분에 오늘의 한국이 있다? 그들이 위태롭게 했다

프레시안 : 친일 청산에 소극적이거나 부정적인 사람들 중엔 '건국 대통령'이라며 이승만을 치켜세우는 이가 적잖다. 그 밑바닥엔 '이승만이 친일파를 중용했다고는 하지만, 어쨌건 그들이 공산화를 막았기에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을 수 있는 것 아닌가'라는 판단이 깔려 있다.

서중석 : 지금까지 보면 극우 반공 세력과 민주화 운동 세력은 영원히 대립하는 관계가 아닌가란 생각이 든다. 특히 '이승만과 친일파가 적화를 막았다', 이런 식의 주장에 어떻게 동의할 수 있겠는가.

1950년대에 야당이 많이 했고, 1960~1970년대에 지식인, 민주화 운동 세력도 박정희 정권을 비판하며 참 많이 한 이야기가 있다. '안보가 위태롭게 되는 건 독재, 부정부패 그리고 박정희 정권 때 특히 재벌 편중이 심해지면서 극단적으로 나타난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다. 그것이 불만 세력을 부추겨 사회를 위험한 데로 이끌어가는 것이다. 안보를 위협하는 최대의 적은 민주주의 세력이 아니라 부정부패, 독재, 빈익빈 부익부를 만든 자들이다.'

해방 직후나 정부 수립 시기를 봐도, 이 얘기는 충분한 근거가 있다. 1946년 10월항쟁이라는 거대한 사건이 일어났다. 가장 큰 계기는 경찰을 중심으로 한 친일파의 악질 행위였다. 제일 먼저 일어난 대구에선 친일파 경찰을 난도질해서 죽였다. 대구 경북 지역에서 경찰(을 비롯한 관리들)이 60명 넘게 죽었다. 경찰이 이렇게 참혹하게 죽은 건 친일 경찰의 횡포, 권력 남용, 일제 때와 똑같이 민중 위에 군림하려는 태도, 이런 것들에 대한 불만이 쌓였기 때문이다. 그런 것들이 '해방이 됐는데 왜 우리 정부가 들어서지 않느냐'란 우려, 하곡(夏穀) 수집(에 대한 반발) 같은 것과 겹치면서 일어난 것이다.

그래서 김규식을 중심으로 한 좌우합작위원회에서 미군정과 함께 대책위를 구성한다. 절반은 미군 간부, 절반은 좌우 합작 대표였다. 가장 큰 의제는 '친일파, 특히 친일 경찰을 뿌리 뽑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김규식 쪽에서 조병옥 경무부장, 장택상 수도경찰청장을 우선 갈아치워야 한다고 했다. '그자들이 친일파를 옹호하는 온상 아니냐' 해서 이름까지 거론하며 갈아치우라는 주장을 했다. 그러나 미군정은 '저들(친일파)이 일본인을 위해 훌륭히 업무를 수행했다면 우리를 위해서도 그럴 수 있으리라고 본다'는 태도로 일관했다.

'친일파 문제만 제대로 처리했으면 이런 일이 일어났겠느냐'라고 얘기할 수 있다. 4.3사건이나 여순사건을 봐도 친일파 문제가 굉장히 중요했다는 걸 수많은 사료가 얘기한다. 여순사건의 경우, 일개 상사가 일으킨 반란에 14연대 병력이 왜 대부분 동조했겠나. 어느 연구에서나 제일 큰 요인 중 하나로 꼽는 게 친일 경찰의 횡포다.

역사학자 서중석의 진단
▲ "박근혜는 유신의 허깨비가 결코 아니었다"
▲ "박정희 신드롬, 박근혜가 지울 수도 있다"
▲ "<조선> 말대로면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빨갱이"

중시해야 할 것이 4월혁명인가, 이승만인가

프레시안 : 친일파의 횡포 때문에 남쪽에 머물지 못한 이들도 많았다.

서중석 : 그렇다. (예를 들면) 김원봉은 김구와 더불어 항일 독립 운동의 상징적 존재다. 의열단장으로서 참 많이 활약하지 않았나. 그런 김원봉이 어떻게 해서 북한으로 갔느냐에 대해 설명할 구체적 자료가 별로 안 나온다. 다만 여러 추측이 있는데, 가장 많은 추측 중 하나는 1947년 초에 친일 경찰의 대명사 격인 노덕술한테 고문당한 게 한 원인이 아니었겠느냐(는 것이다). 수십 년간 목숨을 걸고 독립 운동을 했는데, (해방 후) 국내에 들어와서는 의열단을 그렇게 괴롭힌 악질 친일 경찰한테 직접 당했다. 있을 수 없는 일 아닌가. 그런 것이 결국 북한으로 가도록 생각을 굳히게 만든 것 아니냐는 얘기를 많이 한다.

프레시안 : 양심을 지키려 한 일부 지식인들에게도 매우 힘든 시기였다.

서중석 : 난 ('향수'를 지은 시인) 정지용을 비롯해 해방 직후를 산 많은 지식인, 문화인의 고민이 뼈에 사무칠 때가 있다. 그분들이 무엇을 선택할 수 있었겠는가. 정지용이 월북했느냐 아니냐는 판단을 못하겠다. 다만 그 양반은 친일파 문제로 굉장히 고민했다. 해방된 사회답게 나아가고 지도자들이 그렇게 이끌어야 하는데 (오히려) 친일파가 발호하는 걸 봤을 때 이 양심 있고 경건한 천주교(도) 시인이 '이런 세상이 있을 수 있겠느냐'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리고 문학 활동을 비롯한 여러 활동이 제약되는 걸 보면서 '이건 안 된다'(고 생각하지 않았겠나).

(상황이) 그렇다보니까 이 양반이 (국민)보도연맹에도 (강제로) 가입하게 된 것 아닌가. 유명한 사람이니까 보도연맹에서 강제로 여기저기 출장 강연도 하게 했다. 그때 정지용이 느꼈을 쓴맛이라고 할까, 친일 경찰이 자신을 움켜쥐고 억지 춘향이 노릇을 하게 했을 때 정지용의 마음을 난 알 것 같다. 그런 분이 많았다. 그러다가 전쟁이 터지니까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고민에 빠졌던 것 아니겠는가.

(이처럼) 이승만 정권의 폭정과 유신 체제 밑에서 고통을 겪어야 했을 때 많은 사람이 그 정부를 어떻게 '내가 믿고 키우고 싶은 우리 정부'라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이 말이다. '존재해선 안 되는 정권이다', 이런 생각을 갖게끔 한 것 아닌가. 그런 생각이 경우에 따라선 대한민국을 사랑하는 마음을 약화시킬 수도 있는 거다. 그런 현상이 상당히 오랫동안, 일부겠지만 있었다고 생각한다.

국민적 정의감이 폭발해 4월혁명이 일어나면서 사회가 새롭게 바뀌는 걸 볼 수 있다. 대한민국에서 정말 중요시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4월혁명인가, (아니면) 3.15 부정 선거(를 한 이승만 정권)인가.

▲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 ⓒ프레시안(최형락)

가치관 전도시킨 친일파, 그로 인해 헤맨 현대사

프레시안 : 친일 경찰은 정치에도 악영향을 끼쳤다.

서중석 : 역대 부정 선거를 보면, '선거는 하나 마나'라며 정치를 혐오하게 하거나 그것에 무관심하게 만드는 데 친일파, 정상배의 역할이 컸다. 예컨대 1952년 치러진 정부통령 선거에서 거의 전 국민이 모르던 함태영이란 사람이 부통령으로 당선되는데, 이건 친일 경찰이 얼마나 개입했는가를 얘기해준다.

그러고 나서 1954년 선거에서 이승만은 영구 집권을 위한 개헌(훗날 사사오입 개헌으로 알려진)에 찬동하는 자들에게 공천을 줬다. 여기서 (정당 입후보자) 공천제가 처음 생겨났다. 그러면서 일제 때 어떤 악행을 했더라도 지금 정부에서 일을 잘하면 애국자이고, 일제 때 행위와 상관없이 '일본과 교역이나 국교 정상화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들이야말로 친일파라는 논리를 펴는 특별 담화를 대통령이 선거를 앞두고 직접 발표한다. 그것(일본과 국교 정상화 등)은 신익희, 조봉암 같은 야당 세력이 한 주장이다. (어쨌건) 이 선거는 대표적인 경찰 선거, 곤봉 선거로 꼽힌다. 그만큼 경찰의 곤봉이 선거를 좌지우지했다.

3.15 부정 선거가 어떻게 치러질 수 있었나. 당시 장차관이나 자유당 고위 간부들이 얼마만큼 친일 행위를 했던 자인가, 이걸 빼놓고는 이해할 수 없다. 선거에서 경찰이 핵심 역할을 했는데, 당시 서울시경국장을 포함해 경찰국장들은 한 명도 예외 없이 친일 행위자들이었다. 맹목적으로 충성을 바치는 자들, 양식이나 양심은 찾을 수 없는 자들에 의해 정권이 전단될 때 그 정권은 어떻게 되는지, (그게) 얼마만큼 사회를 위태롭게 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프레시안 : 친일 청산을 제때 하지 못한 후과가 너무나 컸다.

서중석 : 유신 체제와 (전두환) 신군부 정권에서 악명 높았던 고문도 친일 경찰이 직접 한 것이거나 친일파의 유산이다. 친일파가 얼마나 심하게 고문하는지는 이승만 정권, 박정희 정권 내내 많이 얘기됐다. 친일 경찰은 부정부패에서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1948년 정부 수립 즈음해서 노덕술은 고문치사, 사체 유기 혐의로 구속됐다. 사찰 경찰의 대명사 격인 최운하 같은 사람도 독직 행위, 부정부패 행위로 잡혔다. 밀수에도 친일파가 많이 가담했다.

왜 해방 후 부정부패가 그렇게 심했는가. 난 한국인들이 부정부패를 생리적으로 좋아하고 잘해서가 아니라고 본다. 친일파가 득세하면서 부정부패한 사회로 가게 만든 게 중요한 원인 아니겠는가. 이것도 우리 사회를 위태롭게 한 것 중 하나다.

대한민국을 건강하게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데에는 올바른 가치관이 굉장히 중요하다. 이승만 정부, 박정희 정부조차 그런 얘기를 많이 했다. 그런데 그런 가치관을 갖게끔 했나? 친일파 문제가 단적으로 그 가치관을 훼손하는 역할을 했다. 3.1절이나 광복절에 친일파가 단상에 딱 버티고 앉아 있고, 서민들은 억압당하고, 독립 운동을 한 사람들은 피신해야 하는 상황에서 어떻게 '정의롭게 사는 것이 올바르다'고 말할 수 있는 사회가 만들어질 수 있겠나. 정의롭게 살려는 사람은 이런 사회에서 고문관 취급밖에 못 받는다. 남을 짓밟고 일어서는 자, 기회주의자 같은 자들이야말로 부귀를 누리는 사람으로 얘기되는 거다.

이렇게 가치관을 전도시키고 오랫동안 우리 역사가 헤매게 만드는 데 친일파가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런데 극우 반공 세력은 이중적 논리를 많이 주장했다. 1960년대까지는 우리가 북한보다 못살았다고 많이 얘기하지 않나. 그때 나온 선전물을 보면, '빵보다 자유가 소중하다'는 식이다. 그런데 요새 뉴라이트와 수구 언론은 '독재를 했다지만 빵을 만들어내지 않았느냐', '자유를 억압했다지만 빵을 준 거니 그걸 그렇게 탓할 수 있냐'고 합리화하고 옹호하는 논리를 만들어낸다.

프레시안 : 그런 의미에서도 친일 청산 문제는 여전히 살아 있는 과제다.

서중석 : 친일파, 극우 반공 세력은 분단을 초래하는 데에도 크게 기여했지만 분단을 격화시키고 남북 간 긴장을 고조시키는 데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친일파가 대한민국을 위해 뭔가 한 게 있다'는 식의 논리를 타파하지 않고서는 한반도에 평화가 찾아올 수 없다. 그런 점에서도 친일파 문제가 굉장히 중요하다.

극우 반공 세력, 친일파 세력과 민주화 세력은 바로 이런 현실과 관련된 역사적인 문제를 가지고 영원히 화해할 수 없는 팽팽한 줄다리기를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너무나 자명한 것 아닌가. 벌거벗은 임금보고 벌거벗었다고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일곱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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