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정부 시절이던 2004년 8월. 한나라당 의원들로 구성된 '극단 여의도'가 당 연찬회에서 한 편의 연극을 무대에 올렸다. 제목은 <환생경제>. 이혜훈, 심재철, 나경원, 송영선, 주호영, 주성영, 정병국 등 핵심 의원들이 직접 배우로 출연한 이 연극은 저승사자가 '노가리(노무현 대통령)'의 죽은 아들 '경제'를 살려내고 대신 3년 뒤에 '노가리'를 저승으로 데려간다는 내용이다.
연극은 노무현 대통령을 빗댄 '노가리'를 술주정만 부리는 무능한 가장으로, '노가리'의 부인 '근애'는 아들 '경제'를 살리기 위해서라면 목숨까지 내놓는 헌신적인 어머니로 묘사했다. '근애'는 당시 한나라당 대표이던 박근혜 대통령을 빗댄 배역이었다.
연극엔 입에 담을 수 없는 '망언'이 쏟아졌다. '노가리'에 대해 "육X럴놈", "개잡놈", "죽일놈" 등 욕설이 난무했다. "사내로 태어났으면 불X값을 해야지", "거시기를 달고 다닐 자격도 없는 놈", "이혼하고 위자료로 그거나 떼 달라 그래" 등 직설적인 발언도 이어졌다.
▲ 연극 <환생경제>의 한 장면. ⓒ동영상 캡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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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가리는 "이쯤 가면, 막 가자는 거지요?"라며 노무현 대통령을 연상하는 대사를 내뱉었다. "남북대화만 성사시키면 모든 것을 깽판 쳐도 돼", "난 전두환 때 술 취해서 선거 벽보에 오줌 싸다가 민주 투사가 됐다", "경제 죽고 나서 정신없는데 수도 이사나 가자고 한다" 등 노 대통령을 노골적으로 비난하는 대사도 나왔다.
당시 한나라당 대표였던 박근혜 대통령도 관객석의 가장 앞자리에서 박장대소하며 연극을 지켜봤다. 야당 대표였던 그는 "프로를 방불케 하는 연기"라며 소속 의원들을 격려했다고 한다.
연극 <환생경제>는 노 대통령에 대한 한나라당의 극단적 증오를 보여주는 단면이었다.
#2. 2013년, '귀태' 논란
그로부터 9년 뒤, 정치권이 '귀태(鬼胎·의역하면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사람)' 발언으로 시끄럽다. 발단은 민주당 홍익표 원내대변인이 11일 브리핑에서 <기시 노부스케와 박정희>라는 책 내용을 인용하며 "일본 제국주의가 세운 괴뢰국 만주국의 귀태 박정희와 기시 노부스케의 후손들이 아이러니하게도 한국과 일본의 정상으로 있다"고 박근혜 대통령과 아베 신조 일본 총리를 '귀태의 후손들'이라고 비판한 것이었다.
기시 노부스케는 A급 전범 용의자로, 아베 총리의 외조부이자 생전 박정희 전 대통령과 가까웠다. 홍 대변인은 박 대통령과 아베 총리의 행보가 비슷하다면서 "역사의 진실을 부정하고 있고, 미래로 나가지 않고 구시대로 가려고 한다"며 "아베 총리는 노골적으로 일본 군국주의의 부활을 외치고 있고, 최근 행태를 보면 박 대통령은 유신 공화국을 꿈꾸고 있는 것 같다"고 비판했다.
청와대와 여당은 발칵 뒤집어졌다. 청와대는 이례적으로 홍보수석·대변인 기자회견을 잇따라 열고 "대통령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일이자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정면 도전"(이정현 홍보수석)이라고 강하게 반발했다. 새누리당은 12일 모든 국회 일정을 전면 중단했다. 집권 여당의 '국회 보이콧'이라는 초강수다.
홍익표 대변인의 의원직 사퇴, 김한길 민주당 대표의 사과 및 '응분의 조치'도 요구했다. 요구에 응하지 않을 시 현재 진행 중인 국가정보원 국정조사는 물론 이미 여야가 합의한 2007년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열람 역시 거부하겠다며 으름장을 놨다. 이날 열린 새누리당 긴급 최고위원회의에선 "국가 원수와 국민에 대한 모독", "막말과 저주의 정치", "대선 불복의 구차한 모습"이라는 맹비난이 쏟아졌다. 부친의 문제에 유독 민감한 모습을 보여왔던 박근헤 대통령 역시 '격노'했다는 후문이다.
여권은 이 발언을 빌미로 국면 전환을 시도하려는 모습이다. 국정원 대선 개입 사건과 정상회담 대화록 '무단 공개' 등 연이은 악재 속에서 정국을 '민주당의 막말과 대선 불복'으로 전환시키겠다는 계산이다. 민주당은 "국정원 국정조사를 피하기 위한 물타기"라며 반발했지만, 청와대까지 발 벗고 나선 범여권의 '국회 보이콧'을 원내 2당의 야당인 민주당이 당해 낼 재간은 없다.
2004년의 노무현, 2013년의 박근혜
2004년 연극 <환생경제>도 당시 논란을 일으켰다. 당시 여당인 열린우리당은 강한 유감을 담은 논평을 냈지만, 청와대는 공식적인 반응을 내지 않았다. 당시 노무현 대통령은 자신에 대한 욕설이 난무했던 이 연극에 대해 "국민들이 알아서 판단하고 평가할 것"이라고만 짧게 말했다고 한다. '귀태' 논란에 청와대와 여당이 일제히 들고 일어나 '국회 보이콧'까지 외치며 반발한 것과 대비되는 모습이다.
논란의 당사자가 사태를 수습하는 태도도 달랐다. 홍익표 대변인은 자신의 발언이 논란이 되자 즉각 "책의 한 구절을 인용한 것인데 확대 해석돼 대통령에 대한 인신공격으로 비춰졌다면 유감스럽게 생각한다"고 해명했다. "'귀태'라는 단어를 인용한 것은 사람이 태어나지 말았어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국가주의 운영시스템이 생겨서는 안 된다는 뜻"이라며 "책에선 박정희 전 대통령의 취임을 계기로 국가주의 운영 시스템이 한국에 자리잡았다고 설명한다. 이 시스템을 비판한 것"이라고도 했다.
2004년, 한나라당은 "연극은 연극으로 이해해주길 바란다"며 열린우리당의 사과 요구를 일축했다. 당시 임태희 한나라당 대변인은 "우리의 연극은 제목이 <환생경제>로 무너져 내리는 경제와 민생을 살리자는 줄거리의 풍자극이었다"면서 "여당이 우리 연극이 의미하는 뜻을 깊이 새겨 경제와 민생 살리기에 전념하는 것이 올바른 태도라고 본다"며 오히려 자신들이 막말을 써가며 비판한 집권 여당에 '훈수'를 뒀다.
'정통성' 운운하는 새누리, 2004년 탄핵 기억한다면…
민주당 정세균 의원은 이날 자신의 페이스북에 연극 <환생경제>를 거론하며 "자기 당 출신 대통령이 귀하면 남의 당 출신 대통령도 귀한 법"이라고 일침을 놨다. 또 "홍 의원의 발언이 적절치 않다하더라도 그걸 가지고 새누리당이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도전 운운하며 국정 파행의 빌미로 삼는 것은 지금 시점에서 큰 웃음거리"라고 일갈했다.
이정현 홍보수석은 홍 대변인의 발언이 "대통령 정통성에 대한 부정이자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도전"이라고 맹비난했다. 국정원 대선 개입 사건도 모자라 박근혜 대선 캠프 인사들의 'NLL 대화록 불법 유출' 의혹 등으로 현 정부의 정통성 논란이 제기되자, 도둑이 제 발 저린 듯 홍 대변인의 발언을 오히려 "정통성에 대한 부정"이라고 반발하는 모양새다. 정작 새누리당은 박근혜 정부의 '정통성' 논란을 정리할 국정원 국정조사조차 파행으로 몰아가고 있다.
새누리당이 "정통성 부정"을 거론하면서 전신인 한나라당이 2004년 노무현 전 대통령을 탄핵한 '과거'까지 연상케 한다. 노 전 대통령의 기자회견 발언을 문제 삼아 가결시킨 헌정사상 최초의 탄핵소추안은 '합법'의 탈을 쓴 명백한 '정통성 부정'이었다.
그 대가는 컸다. 전국 각지에서 탄핵 반대 촛불시위가 잇따랐고, 시민사회는 이를 '3.12 쿠데타'로 규정, 한나라당이 대통령의 정통성을 정면으로 부정했다고 비판했다. 탄핵소추안 가결로 노무현 정부의 정통성을 부정했던 새누리당이 이제 당 원내대변인의 '귀태' 발언 하나로 박근혜 정부의 정통성이 부정당했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역설적 형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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