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정무역, 달콤한 기적 ① 열살짜리 꼬마가 맨발로 하루종일 일해야 하는 까닭 |
필리핀 네그로스 바콜로드에서 차로 1시간 30분간 비포장도로를 달리면 '트리니오'라는 마을이 보인다. 하카트리파오-엠피씨 생산자협동조합이 있는 마을이다.
이 지역은 1975년까지 칼리무난이라는 대주주의 소유하에 있었다. 지주가 죽은 뒤 그의 가족에 의해 사탕수수 농장이 운영됐다. 이때부터 농장 경영 상황은 점점 악화했다. 농민들은 일하고도 일당을 받지 못하는 상황이 반복됐다. 1980년대 네그로스 전체가 설탕 가격 폭락으로 기아 상태에 빠졌을 때, 이 지역 생산자들은 다른 지역보다 더 극심한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다 2004년께, 정부의 토지개혁 수혜자가 돼 20명의 농민이 38ha(11만4950평)를 소유하게 됐다. 하지만 농사를 짓기는 어려웠다. 지주가 빠진 농장에는 아무런 농사 시설이 없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식수시설이 문제였다. 생활하려면 무엇보다 필요한 게 식수다. 하지만 지주는 토지를 포기하면서 식수시설을 철거해버렸다. 게다가 사탕수수를 수확해도 이를 이동할 수 있는 장치가 없었다. 트럭을 이용하려면 높은 이용료를 내야 했다. 정부에 지원을 요청했으나 '모르쇠'로 일관했다.
▲ 사탕수수 수확일을 마치고 집으로 가고 있는 농민. ⓒ프레시안(허환주) |
이런 문제점을 해결해준 게 '네그로스 프로젝트'였다. 두레생활협동조합은 2년 동안 모은 기금을 통해 2006년부터 네그로스 지역 농민에게 그들이 필요한 부분을 지원했다. 관개시설, 건강센터 내 의약품, 트럭, 유기농 비료 등을 살 자금을 빌려줬다. 무상지원이 아니다. 연 7%의 이자를 받았다. 원조가 아닌 그들이 자립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기 위해서였다.
트리니오 마을도 그 혜택을 받았다. 트리니오 마을 농민들은 두레생협에서 빌린 돈으로 마을 중간에 우물을 파고 수동식 펌프와 수도관을 샀다. 이 우물은 지역에 사는 주민 누구나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이전까지는 생활에 필요한 모든 물을 마을 외곽까지 가서 가져와야 했다. 여성들에겐 위험한 일이었다. 또한, 아이들이 비위생적인 물을 마시고 병에 걸리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났다.
네그로스 프로젝트의 혜택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재배한 사탕수수를 운반하고 밭갈이에 유용한 물소 3마리를 이 기금으로 마련했다. 물소는 사탕수수 작업을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필요한 동물이다. 물소가 없으면, 이웃 마을에서 일정 돈을 내고 빌려 와야 했다.
제리까바 트리니오 주민은 "우물로 마을 주민 건강도 매우 좋아졌다"며 "특히 여성과 아이들에게 큰 도움을 주고 있다"고 밝혔다. 제리까바 씨는 "또한 물소를 사면서 물소 대여비만큼의 생산비용을 줄일 수 있게 됐다"고 설명했다.
네그로스 프로젝트 이후, 달라진 그들의 삶
네그로스 북부 지역에 있는 바고시 지역도 마찬가지다. 이 지역 주민도 네그로스 프로젝트의 혜택을 받았다. '스탈파-엠파씨'라는 사탕수수 생산자 모임이 조직돼 있는 이곳 땅 지주는 호세 구안손이었다. 399ha의 땅을 소유하고 있었다.
대지주는 농지 대부분을 대규모 사탕수수 플랜테이션 농장으로 운영했다. 하지만 1980년대 당시 설탕 산업 위기로 사탕수수 사업이 망했다. 지주는 이후 3년 동안 땅을 버려두었다. 농장에서 일하던 농민은 약간의 경작지에서 옥수수나 뿌리채소를 심어 끼니를 해결해야만 했다.
그러다 농민들은 1992년 스탈파-엠파씨 모임을 만들고 공동행동에 나섰다. 지주가 버려둔 20ha 땅에 사탕수수를 심기 시작했다. 지주는 가만히 있지 않았다. 농사를 짓지 못하도록 법원에 농민을 고소했다. 그러자 농민은 지주가 최저임금도 주지 않았다고 맞고소를 했다. 그렇게 갈등은 계속됐다.
하지만 갈등은 오래가지 못했다. 벌금으로 생계 위협에 직면한 농민들은 지주로부터 땅을 빌리기 위해 협상을 시작했다. 1년에 1ha당 500페소(지금은 1만 페소, 약 25만 원)를 임대료로 냈다. 2000년대 들어 토지개혁이 실행됐지만, 지주는 완고하게 버텼다. 농민들은 강하게 토지 분할을 요구했지만 아직 이곳 농민은 지주에게 토지를 대여해 사탕수수 농사를 짓고 있다.
▲ 네그로스 중부 라까스틸리아나시. 이곳 농민들은 네그로스 프로젝트를 통해 마을에 우물을 만들었다. 처음엔 우물 운영비를 위해 가구당 10페소의 이용비를 받았으나 지금은 사탕수수 이익금으로 충당하고 있다. ⓒ프레시안(허환주) |
▲ 네그로스 농민들에게 물소는 필수 동물이다. 수확한 사탕수수를 운반하는 데 이용하고 있다. ⓒ프레시안(허환주) |
사탕수수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관개시설이 필요하다. 하지만 관개시설 설치비용은 감당하기 어려웠다. 지주나 정부로부터 관개시설을 빌려야 했지만 비싼 임대료가 문제였다. 게다가 사탕수수를 생산하기 위해선 비료가 필수다. 더구나 이 지역은 유기농 사탕수수를 생산하는 지역. 유기농 비료는 더욱 비싸다.
이들은 네그로스 프로젝트 기금으로 2대의 펌프와 수원지까지의 파이프를 샀다. 자연히 생산량은 늘어났다. 2006년 관개시설 설치 전에는 1ha당 수확량이 평균 48톤이었던 게 2007년 51.77톤으로 향상됐다. 수익금 일부를 모아 1개의 펌프를 더 샀다. 자연히 생산성은 더욱 늘어났다.
2011년의 경우, 순수익 120만 페소(3000만 원 정도)를 달성했다. 장학재단을 만들어 마을 어린이 9명에게 장학금을 지급했다. 필리핀은 고등학교까지 무상교육이지만 학용품, 급식비, 교과서비 등이 없어 학교에 가지 못하는 아이들이 태반이다.
유기농 비료도 프로젝트 기금으로 해결했다. 이는 생산성을 늘렸을 뿐만 아니라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이 없는 농민에게 일자리도 제공했다. 유기농 비료 생산에는 재료를 섞는 일, 만드는 일, 운반, 판매를 위해 20명 정도의 인력이 필요하다. 이 수익은 사탕수수 수확 후 두 달 이상 수입이 없는 구성원들의 생활에 실질적인 도움을 줬다.
▲ 네그로스 중부에 위치한 라까를로따시에 살고 있는 꼬마 아이. 네그로스 프로젝트는 이 마을에 유기농 비료를 지원했다. 꼬마 아이의 엄마(오른쪽)는 네그로스 프로젝트 이후, 자신과는 달리 아이의 삶은 달라질 수 있을거라는 희망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프레시안(허환주) |
소비자가 아닌 생산자가 필요한 부분을 찾아
두레생활협동조합이 네그로스 소규모 농민들에게 지원한 네그로스 프로젝트는 '민중교역'의 목적으로 진행됐다. 민중교역이나 '공정무역'은 큰 틀에선 비슷한 의미를 지닌다.
공정무역은 원조나 기부가 아니라 공정한 거래를 뜻한다. 소비자가 필요한 물품을 구매할 때 개발도상국의 생산자와 노동자들이 환경에 부담을 덜 주고 생산한 믿을 수 있는 제품에 대해 정당한 대가를 내는 걸 말한다.
그런 점에서 민중교역과 공정무역의 기본개념은 같으나 민중교역은 공정무역보다 사람과의 연대에 더 중점을 두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네그로스 프로젝트는 민중교역에 중점을 두고 2004년부터 시작됐다. 2004년부터 2년간 축적된 교류기금으로 '네그로스 유기농 사탕수수 소생산자 공동체의 생산성 및 여성 참여 증진(네그로스 프로젝트)'를 만들고 2006년 6월부터 사탕수수 소생산자에게 기금을 지원했다.
하지만 기금 지원이 무상은 아니다. '정해진 기간 내 원금 상환'과 '연 7%의 이자 지급'이라는 조건이 붙어 있다. 7% 이자는 두레생협에서 가져가는 게 아니라 다시 농민들에게로 돌아간다. 무상 지원이 아닌 융자 방식을 채택하는 이유는 생산자들의 자립을 격려하고 자발적 참여를 통해 일방적인 원조가 아니라 대등한 관계에서 교역을 꾀하기 위해서다.
공정무역을 담당하고 있는 두레생협연합 APNET 채은아 대표이사는 "소비자가 원하는 게 아니라 생산자인 마을 주민이 원하는 부분을 도울 수 있는 방향으로 네그로스 프로젝트가 진행됐다"며 "그게 민중교역의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앞으로도 그런 방향으로 프로젝트는 계속 이어질 것"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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