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쪽이 맞는지를 단정하는 것은 부질없어 보입니다. 어떤 사람은 나이 들면서 보수적으로 바뀌고, 다른 어떤 사람은 반대겠지요. 다만 분명한 것은 나이 먹어가면서 쌓이는 인생 경험이 정치 성향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다는 점입니다. 세대마다 달리 겪은 역사적 경험이 정치적으로 중요한 변수가 되는 건 그래서입니다.
12월 대선을 앞두고 주목받는 세대가 이른바 '베이비부머' 세대입니다. 한국전쟁 이후 1955년부터 1963년까지 9년에 걸쳐 태어난 약 688만 명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40대 후반에서 50대 후반까지지요. 과거 군사정부 시절 이뤄진 고도성장을 생생하게 목격한 세대입니다. 대선 후보 가운데 1962년 생인 안철수 후보가 이 세대의 끝자락입니다. 1952년 생인 박근혜 후보, 1953년 생인 문재인 후보 역시 '베이비부머' 세대로부터 멀지 않습니다.
이들은 비약적으로 성장하는 경제를 보며 철이 들었고, 다른 한편으론 독재와 인권 탄압에 대한 기억도 생생합니다. 이들보다 윗세대는 정치적으로 여당 지지 성향이 강하고, 아랫세대는 야당 지지 성향이 강한 편입니다. 반면, '베이비부머' 세대의 정치 성향은 상당히 복합적입니다. '베이비부머' 세대가 대선 승리의 열쇠를 쥐고 있다는 말이 나오는 것은 그래서입니다.
고도성장기에 청년기를 보낸 이들 세대가 공유하는 역사적 경험으로 대표적인 게 '부동산 불패 신화'입니다. 한국의 고도성장기는 동시에 극심한 인플레이션의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군사정부가 줄곧 내걸었던 '물가안정' 구호는 이 시기의 인플레이션이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있는 게 부동산이었습니다. 집, 특히 아파트를 사두면 결코 손해 보지 않는다는 믿음은 이런 역사 속에서 잉태됐습니다.
'내 집 마련'은 이들 세대의 집단적 염원이었습니다. 실제로 사회 생활을 하는 세대 중 자가 보유 비율이 가장 높은 세대 역시 베이비부머 세대입니다. 이들에게 '내 집 마련'은 중산층 진입의 첫 관문이었습니다. 동시에 부동산은 일종의 사회안전망이기도 했습니다. '은퇴 이후'를 각자 알아서 해결해야 하는 한국에선 부동산이 대표적인 노후 대책이었습니다. '월세 받아서 생활하는 노인'은 사회복지의 불모지대인 한국에서 베이비부머 세대가 기대하는 가장 흔한 미래상으로 통했습니다.
그래서 이들 세대에겐 요즘 언론에서 떠드는 '하우스 푸어' 현상이 몹시 충격적입니다. 일단 명문대학에 입학하기만 하면 실컷 놀아도 대기업 취업이 보장됐던 것과 마찬가지로, 집을 사기만 하면 이후 뛰어오르는 집값이 그간 치른 비용을 넘치도록 보상해줬던 게 이들 세대의 경험입니다. 그런데 지난 40~50년 동안의 경험을 뒤엎는 일들이 요즘 벌어집니다. 아파트 값이 떨어집니다. 집 사고 손해 봤다는 이들이 속출합니다. 대부분의 자산이 부동산에 묶여 있고, 자녀 사교육비 대느라 노후자금 마련에는 실패한 이들에겐 심각한 상황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미 거품이 잔뜩 끼어있는 부동산 가격을 인위적으로 지탱하는 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무리한 부동산 부양책이 경제에 미칠 해악은 누구나 예상합니다. 그럼에도, 정치권에선 부동산 부양책에 대한 논의가 끊이지 않습니다. '베이비부머' 세대가 지닌 영향력, 그리고 이들 세대가 갖고 있는 부동산에 대한 각별한 애착 등이 이유일 것입니다. 실제로 그간 치러진 선거에서 부동산 부양책은 필승을 보장하는 카드였습니다. 진보, 개혁을 내건 세력 역시 부동산 문제 만큼은 '보수 진영 흉내내기'의 유혹에서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이번 대선 역시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대선 후보들은 다양한 지역 개발 정책을 쏟아낼 조짐입니다. 그리고 이런 공약은 여전히 힘을 발휘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전만큼 강한 힘을 발휘할지는 의문입니다. '부동산 거품 붕괴'가 피할 수 없는 대세라는 건 이제 상식이 됐습니다. 부동산 관련 뉴스의 강력한 소비 집단인 '베이비부머' 세대는 부동산 정책에 민감한 만큼 이런 상식에도 밝습니다.
그래서 보다 큰 차원의 방향 전환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나옵니다. 부동산과 자식에게 저당잡힌 삶에서 탈출하자는 것입니다. '월세 받아서 사는 집주인'이 되지 않더라도, 존엄한 노년을 보낼 수 있는 사회로 바뀌어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또 결혼 앞둔 자식에게 집을 사주지 않아도 불안하지 않은 사회가 돼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 집 마련' 외의 노후 준비를 불가능하게 하는 지나친 교육비 지출 역시 구조적 해법이 필요합니다. 이는 복지, 노동, 교육 등이 맞물린 문제입니다. 다행히 이번 대선에선 이런 문제가 조금씩 부각되고 있습니다.
부동산 폭락 시대를 겪는 '베이비부머'의 정치적 선택에 눈길이 쏠리는 것은 그래서입니다. <프레시안>이 '베이비부머' 세대의 부동산 고민을 짚어보는 짧은 기획을 마련했습니다. <편집자>
이영란(가명·55) 씨는 24살에 맞선을 봤다. 건설회사에 다니는 사람이었다. 서울에서 대학을 나왔다고 했다. 키는 좀 작았지만, 성실해보였다. 처자식을 굶겨죽이지는 않겠거니 생각했다. 두 번 더 본 뒤, 결혼을 결정했다.
신혼집은 서울에 부엌달린 단칸방에서 시작했다. 생활은 쉽지 않았다. 남편 한 달 월급으론 월세 내고 시골에 계시는 남편 부모님 생활비를 부치고 나면 저축할 돈은 거의 남지 않았다. 그 와중에 첫째를 낳았다. 그리고 둘째를 임신했다. 답이 없었다. 때마침 중동 건설 붐이 일어났다.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남편은 사우디아라비아 현장에 자원했다.
남편은 그곳에서 번 돈을 고스란히 한국으로 부쳤다. 이 씨 역시 그 돈을 한 푼도 쓰지 않았다. 모두 은행에 저금했다. 부업으로 인형 눈을 붙이는 일을 했다. 그 돈으로 돌이 갓 지난 첫째 아이와 자신의 생활비를 충당했다. 그렇게 악착같이 돈을 모아 지하 방 두 칸짜리 집을 샀다. 4년 만에 집에 돌아온 남편이 '무슨 돈으로 집을 샀느냐'고 했을 정도였다. 당시 은행 이자율은 연 20%대였다.
ⓒ연합뉴스 |
절대 배신하는 않는 부동산, 하지만…
살면서 형편이 나아졌다. 적금으로 모은 돈으로 집을 조금씩 넓혀갔다. 셀 수 없이 이사했다. 조금이라도 가격대비 좋은 집이 나오면 저금해놓은 돈으로 이사했다. 돈의 가치는 떨어져도 집의 가치만은 하루가 다르게 올라갔기 때문이었다. 이 씨에게 집은 절대 배신하지 않는, 일종의 불패신화였다.
그러다 우연히 자신이 살던 집이 재건축 지역으로 선정됐다. 한마디로 '땡' 잡은 셈이었다. 꿈에도 그리던 아파트에서 살 수 있게 됐다. 욕심이 더 생겼다. 평수도 지금 살고 있는 집보다 더 늘리고 싶었다. 알아보니 원하는 평수에서 살려면 분담금 1억 원이 추가됐다. 고민했다. 대출을 받자니 한 달에 이자만 100만 원을 넘게 내야 했다. 그래도 빚을 지고 평수를 넓히기로 했다. 이자를 내더라도 나중에 아파트값이 오르면 '퉁' 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집값은 절대 떨어지지 않는다는 맹신이 있었다.
막상 이자와 원금을 갚으려니 쉽지 않았다. 아이들 교육비와 생활비를 마련하기도 벅찼다. 남편이 사우디에 갔을 때처럼 부업을 시작했다. 베이비시터로 일했다. 그래도 아직까지 원금과 이자를 갚고 있다. 아파트에 입주한 지 8년 됐다.
빚을 한 번 지면 자꾸 지게 된다고 했던가. 아들만 둘인 이 씨의 첫째가 얼마 전 결혼하면서 빚을 또 지게 됐다. 중소기업에 다니는 첫째는 그간 직장생활을 하면서 3000만 원을 모았다. 하지만 이 돈으론 서울은 고사하고 수도권에도 신혼 전셋집을 구하긴 어려웠다. 남편의 퇴직금이 있지만 이래저래 집안 일로 미리 당겨 써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이 씨는 고민 끝에 1억 원을 아파트 담보로 대출받아 첫째에게 줬다. 달리 방법이 없었다. 다시 빚더미에 앉게 됐다.
문제는 앞으로다. 둘째 아들도 조만간 결혼하기 때문이다. 이 씨는 둘째가 결혼하면 지금 사는 집을 팔려고 한다. 그 돈으로 빚 갚고 둘째 전셋집 해준 뒤, 남은 돈으로 자신과 남편은 수도권 외곽에 조그마한 집을 얻을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그마저도 쉽지가 않다. 부동산 가격 하락으로 집이 팔려도 빚 갚고 둘째 전셋집 해주면 남는 게 거의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중대형인 집을 찾는 사람은 눈 씻고 찾아도 없다. 이래저래 한숨만 늘어나는 이 씨다.
ⓒ연합뉴스 |
집 담보대출과 자녀 결혼비용에 내몰린 베이비부머
이 씨는 베이비부머(babyboomers)다. 한국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베이비부머는 경제 성장을 주도한 세대이자 경제 호황을 이끈 주역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한국전쟁 이후 1955년부터 1963년까지 9년에 걸쳐 태어난 약 688만 명을 말한다. 49~57세 나이다.
전체 인구의 14.1%를 차지하고 있으며 이들 계층이 주요 주택구입연령대(35~55세)에 진입하면서 한국 주택가격 상승세를 견인해온 게 사실이다. 1980년대 중반 베이비부머가 주택시장에 본격적으로 진입하면서 소형주택 수요가 높았으며 2000년대 들어서는 선호주택의 규모가 증가하면서 중대형 주택가격의 상승세가 나타나는 등 베이비부머는 주택가격 결정에 주요 변수로 작용했다.
그렇다 보니 베이비부머에게 부동산 비중은 상당히 높다. KB금융지주 경영연구소가 지난 7월 발표한 '베이비붐 세대 은퇴에 따른 주택시장 변화'를 보면 베이비부머가 세대주인 가구는 전체가구의 약 24.4%를 차지한다. 이들의 자가 비율은 59.6%에 달한다. 사회생활하는 세대 중 가장 높다.
게다가 이들 가구의 평균 총자산은 3.3억 원으로 전체 가구의 평균자산(2.7억 원)을 상회한다. 주목할 점은 총 자산 중 부동산 비중이다. 이들은 2억4678만 원(74.8%)을 부동산 자산으로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머지는 금융자산(7319만 원), 기타자산(996만 원) 순이다. 가지고 있는 재산 대부분이 부동산이라는 이야기다.
그 이유는 베이비부머는 한국 부동산과 함께 성장했기 때문이다. 부동산과 베이비부머는 서로 땔 수 없는 사이처럼 됐다. 하지만 이런 베이비부머에게도 부동산 불패신화 공식이 깨지고 있다. 부동산 침체기와 함께 찾아온 '자식'이 문제다.
한국형 베이비부머가 다른 나라 베이비부머와 차별성이 있는 건 다름 아닌 '자식에 대한 무한책임'이다. 베이비부머 세대는 자산의 상당부분을 자녀 교육비로 지출하거나 자녀 결혼비용으로 지원하고 있다. 스무살만 되면 부모로부터 독립하는 서구와 구별되는 한국적 특징이다. 그러나 심각한 청년 실업, 부실한 사회안전망이 더 큰 이유다. 이 가운데 교육 수준이 높아도 취업이 힘든 청년 실업은 베이비부머 세대가 젊었던 시절에는 경험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런 특성은 베이비부머를 위기로 내모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통계청이 2010년 발표한 '사회조사를 통해 본 베이비부머 특징'을 보면 베이비부머의 90% 이상이 자녀 대학교육비 및 결혼비용을 지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자녀교육비 등이 소득에 비해 '부담이 된다'고 응답한 비율은 83.1%에 달했다.
자녀 교육까지야 생활비 일환으로 충당해왔지만 문제는 결혼비용이다. 정년퇴직과 맞물려 다가오는 자식 결혼은 베이비부머에게 골칫거리다. 베이비부머는 이것을 '빚'으로 해결하는 모양새다. 하지만 주택 등을 구입하느라 진 빚도 아직 다 갚지 못했기에 이중고에 시달리고 있다.
말년에 발목 잡힌 부동산 불패신화
최근 한국은행의 자료를 보면 베이비부머의 채무부담은 상당하다. 2003년에 비해 지난해 50세 이상 가계대출비중은 7.7%포인트 상승한 28.1%까지 올라갔다. 베이비부머의 총 부채규모는 평균 7513만~8806만 원으로 기타 연령대보다 상당히 높다.
특히 상대적으로 대출금리가 높은 비 은행권의 50대 가계대출비중은 전 연령대를 통틀어 가장 많다. 베이비부머가 가장 고(高) 이자에 시달리는 세대라는 뜻이다.
게다가 퇴임과 맞물려 자식결혼 비용에까지 허덕이고 있다. 그나마 베이비부머는 노력하면 자신의 집은 살 수 있었지만 이들 자식 세대인 에코부머(echoboomers)에겐 집을 사는 건 하늘에 별 따기보다 어려운 일이 됐다. 일반 직장인 월급으론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집값이 뛰었기 때문이다. 에코부머의 47.2%는 보증금 있는 월세에서 살고 있다. 베이비부머의 성공방정식은 자식세대에선 통하지 않는다.
그나마 가지고 있는 부동산마저도 흔들리고 있다. 국토해양부가 17일 발표한 8월 주택 거래량은 총 4만7886건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34.6% 감소했다. 2006년 거래량을 조사한 이후 8월 물량으로는 최저 수준이다.
서울과 수도권 일부 지역의 경우 하락폭이 도드라졌다. 서울의 8월 주택거래량은 2074건으로 지난해 4428건의 절반 수준이었다. 3.3㎡당 평균 가격 역시 1693만 원으로 2006년 이후 가장 낮았다.
게다가 중대형 아파트는 제값도 못 받는 실정이다. 국토해양부 실거래가 자료에 보면 지난 6월 용인 수지구 성복동 버들치마을 성복 힐스테이트 3차 167.58㎡형(50.6평)은 8억2732만 원에 매매됐다. 하지만 153.25㎡(45평)는 8억6208억 원에 팔렸다. 작은 집이 큰 집보다 4000만원 이상 비싸게 팔린 것이다.
베이비무버 세대가 평생 믿고 살아온 부동산 불패신화는, 그러나 말년에 그들의 발목을 잡는 꼴이 됐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