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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는 일진회인가 아닌가?"

[기자의 눈] 처벌과 감시 중심의 학교폭력 대책, 안타깝다

한달 반 전 대구 중학생 자살 사건이 벌어졌을 때, 언론 보도를 비롯한 대부분의 반응은 분노와 경악이었다. 대체로 '요즘 아이들이 이렇게 잔인하고 뻔뻔하다'는 고발과 '이런 나쁜 아이들로부터 착한 아이들을 지킬 방법이 없다'는 이분법적인 분석이 주를 이뤘다. 분노에 찬 고함에 가려 대한민국의 학교가 어쩌다 서로를 잡아먹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상태로 전락했는지를 반성하는 목소리는 잘 들리지 않았다.

지난 6일 정부가 내놓은 학교폭력 근절 종합 대책을 비롯해 경찰이 의욕적으로 내놓고 있는 학교 폭력 개입 방침 등은 이러한 분노에 대한 '단답형 해법'들이다. 경찰청은 학교 폭력을 방치했다는 혐의로 담임 교사를 형사 입건하는가 하면 일선 경찰에 '학교별 일진회 현황에 대한 첩보 수집을 강화하라'는 지시를 하달했다. 학교 별로 담당 형사를 지정하고, 일진회가 학교 폭력에 연루됐는지 매주 1회 이상 확인하며, 학생들로부터 '자진탈퇴서'나 '재발 방지 다짐서' 등을 받아 일진회의 와해를 유도한다는 것이다.

'일진회'를 '조폭'으로 바꾼다면 과거 노태우 정권 시절 '범죄와의 전쟁' 당시 경찰의 지침이 이와 비슷하지 않았을까 싶다. 이러한 지침이 내려지자마자 경찰이 몇몇 중학교에 찾아가 "문제학생 명단을 넘겨달라", "일진회 관리 명단을 달라"고 요구하는 어처구니 없는 풍경도 벌어졌다. 학생들을 '예비 범죄자'로, 선생님들은 '정보원'으로 보는 경찰의 시각이 그대로 드러났을 뿐 아니라, '감시와 처벌'과 교육 사이의 거리가 얼마나 먼 것인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감시와 처벌'이 교육보다 앞서는 곳은 학교가 아니라 교도소다.

교육 현장에 사법의 칼날을 먼저 들이대는 것은 위험할 뿐 아니라 무모하기도 하다. 가령, 영화 <써니>에서 주인공들의 학창 시절 서클 '써니'는 일진회인가, 아닌가? 이들은 다른 무리의 학생들과 몸싸움도 벌이고, 욕을 입에 달고 다닐 뿐 아니라 욕을 더 잘하기 위해 공부도 하고, 본드를 흡입하는 친구를 어쨌거나 따돌리기도 한다. 오늘의 경찰청 지침에 따르면, 이들은 감시해야 할 소위 문제 학생들인가, 아닌가. 이들이 벌을 받아야 하느냐에도 의문이 있지만, '벌'을 받아야 하는 학생과 '감시'를 받아야 할 학생 사이에는 엄청나게 큰 거리가 있다.

문제는 간단하다. 이들을 사법적 감시의 대상이 아닌 말그대로 교육 받아야 하는 학생으로 생각한다면 이들의 '행동'에 대해 자유롭게 이야기하고 변화를 유도할 수 있다. 실제로도 학교 현장에서 줄곧 지적하는 것처럼 환경에 따라 피해자가 가해자로, 가해자가 피해자로 바뀌곤 하는 것이 학교 폭력의 특징이다. 또 '왕따'처럼 가해자가 누군지, 누가 주범이거나 종범인지 특정하기 어려운 경우도 많다. 단편적인 현상만 두고 일률적인 사법적 잣대를 적용해서는 안된다는 이야기다. 피해 학생에게 심각한 정신적, 물리적 피해를 입힌 아이들은 그에 따른 벌을 받아야 하지만, 학교 현장에서 교육보다 사법이 앞서서는 안되는 이유다.

학년이 바뀜에 따라 학교 폭력 가해자와 피해자가 뒤바뀌기도 하고, 많은 피해자들이 가해자가 되길 원한다는 것은 오늘날의 학교 폭력 문제가 단순히 아이들 개개인의 성격이나 인품에 의해 벌어지는 사건이 아님을 보여준다. 그것이 단순히 웹툰이나 게임 때문이라는 주장에 동의하기 어렵지만, 학교와 가정, 그리고 사회가 만든 '환경'이 이들을 몰아가고 있음은 분명하다. 이는 다시 말하면 가해자 학생들 역시 '인생 종친 것'이 아니라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는 의미다.
▲ 졸업식에서 벌어지는 폭력적인 뒷풀이를 단속하기 위해 경찰들이 학교 주변을 지키고 있다. ⓒ뉴시스
이에 더해 최근의 사태는 그간 논란이 되어온 '교권'과 '학생인권' 간의 관계에 대해서도 시사점을 던진다. 지난 6일 정부가 내놓은 '학교폭력 근절 종합대책'은 교장과 교사의 지도 권한과 가해 학생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는 내용이 주요 골자였다. 이에 그간 학생인권조례에 대해 '교권이 약화된다'며 반발해온 한국교총은 환영했다. 그러나 대책이 나온 지 하루만에 경찰이 담임 교사를 형사 입건하고 '첩보 수집'에 나서면서 상황은 바뀌었다. 안양옥 교총회장은 9일 경찰청과 서울경찰청을 방문해 일련의 상황에 항의했다.

단순히 학생인권 문제를 보수와 진보의 입씨름의 일환으로, 혹은 교권에 대립하는 것으로 생각해온 이들에게는 뜻밖에도 처벌이 처벌을 낳는 악순환의 고리가 드러난 것이다. 그러나 학교 현장의 인권을 약화시킬수록 학교를 통제하는 물리력이 겹겹이 강해지는 것은 사실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그래서 우습게도, 경찰이 교육 현장의 전면에 나서는 지금이야 말로 교권과 교사의 인권이 본질적으로, 더군다나 학생인권과 한데 묶여 침해당하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그러나 학생인권에 '교권 추락'을 외치던 신문들은 경찰의 전면 감시에는 '교권'을 말하지 않는다.

학교 현장에 대한 교사와 경찰의 권력을 강화한다고 해서, 과연 학교 폭력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까? 재판관도 아닌 교사가 생활기록부에 학생의 일생에 영향을 미칠 '학교폭력 가해' 기록을 남길 수 있을까. 교권 침해를 가장 많이 하는 주체가 학부모라는 교원단체 통계도 있지만, 과연 학교 현장에서 교사들이 학부모들의 항의를 이겨낼 수 있을까. 인성교육· 체육교육 강화도 마찬가지다. 대학 입시가 이들 수업을 밀어낸 것이지, 학생들이 거부한 것이 아니다.

또 정부는 학교폭력을 은폐하려다 적발된 학교장과 교원은 중대 비위 수준으로 처벌한다고 밝혔지만, 그간 학교장과 교사가 학교 폭력 문제에 쉬쉬해온 이유는 학교지원금 액수를 결정하는 학교평가와 교사들의 승진 여부를 가르는 교원 평가 점수가 달려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 정부는 학교폭력 문제를 많이 노출시킨 학교와 교사의 점수는 어떻게 매길 것인가?

학교 폭력의 근본적 원인이 대학 입시로 대표되는 '지나친 경쟁'에 있는 것처럼, 그 해결책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것도 결국 경쟁인 셈이다. 그래서 어렵고 난해하지만 학생들에게 상호 존중을 가르치고 학교 내의 공동체를 복원하는 학생인권 조례의 해법에 주목해야 한다. 조례 제정 만으로 학교의 여러 문제들이 해결되지는 않겠지만, 그 밑바닥에는 학생을 경쟁의 도구로만 생각지 않고 인간으로 대우한다는 철학이 깔려 있다. '폭력' 이전에 '학교'를 돌아봐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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