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은 거대한 모자이크다. 서로 다른 조각들이 다닥다닥 붙어서 지금과 같은 모양이 됐다. 하지만 강남구 압구정동이라는 조각에서 평생 살아온 이들은 바로 옆의 판자촌 구룡마을을 이해하지 못한다. 반대 경우 역시 마찬가지다. 시장 선거를 앞둔 지금, <프레시안>이 서울에 현미경을 들이댄 이유다. 서울을 제대로 바꾸려면, 먼저 서울을 제대로 알아야 하지 않을까. <프레시안>은 '서울 사람'도 잘 모르는 서울의 속살을 살피는 기획을 준비했다. <편집자>
60~70대 노인들 30여 명이 모여 "박원순은 '빨갱이'"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새마을 모자를 쓴 노인 한 명이 쉼 없이 박원순 서울시장 후보를 폄하하는 발언을 이어가자, 주변 노인들은 맞장구를 치며 호응했다. 몇 명은 자신도 말을 하고 싶으나 쉽게 끼어들지 못하는 모양새였다.
중절모를 쓰고 지팡이를 든 이국적인 노신사 할아버지에서 해병대 모자와 빨간 티셔츠를 고집하는 할아버지, 바지 주머니에 '솔' 담배 하나 넣고 얼굴엔 굵은 주름이 가득한 할아버지까지, 다양한 노인이 종묘공원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몇몇은 서로 아는지 인사를 나누고 친구도 소개시켜줬다. 노인으로 가득 찬, 평일 오후 종묘공원 풍경이다.
지금은 '열 명 중 한 명'이 노인, 15년 뒤엔 '다섯 명 중 한 명'이 노인
한국이 빠른 속도로 '초고령화 사회'에 들어선다는 뉴스는 이제 새로운 소식이 아니다. 통계청이 발표한 2010년 고령자 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 인구 중 65세 이상 인구 비율이 11%(535만여 명)에 이르렀다. 2026년에는 20.8%로 초고령 사회에 도달할 것으로 예측된다. 인구 다섯 명 가운데 한 명이 65세 이상 노인이 된다는 게다.
그러나 여전히 노인은 갈 곳이 없다. 모일 곳도 없다. 그나마 유일한 해방구가 서울시 종로 4가에 위치한 종묘공원이다. 이곳은 하루에만 2000~3000명의 노인이 방문한다. 대부분 노인은 이곳에서 바둑판 등을 대여해주는 사람에게 1000원을 내고 바둑이나 장기를 둔다. 그렇지 않으면 아니면 삼삼오오 모여 다양한 주제로 이야기를 나눈다. 도심 한복판 공원은 노인들만의 커뮤니티가 됐다. 그게 정확히 언제부터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 종묘공원에서 바둑을 두고 있는 노인들. ⓒ프레시안(허환주) |
"왜 나왔냐고? 우리 같은 사람이 어디 갈 곳이 있나"
이곳에서 만난 이만복(75) 씨는 일주일에 4~5번은 이곳에 나온다고 했다. 이 씨는 10여 년 전 부인이 죽은 뒤, 아들부부와 함께 살고 있다. 이 씨는 그때부터 이곳을 찾기 시작했다. 전업주부인 며느리와 낮 시간동안 집에 함께 있으려니 눈치가 보였다. 아침밥을 먹으면 곧바로 무료지하철을 타고 이곳에 와서 이사람, 저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는 게 그의 낙이다. 이 씨는 경기도 광주가 집이다.
이 씨는 종묘공원에서 만난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바둑도 둔다. 자판기에서 차 한잔 뽑아 나눠먹고 그러다 점심이 되면 무료급식소에서 점심 먹고, 또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 오후 3시쯤 되면 종묘공원을 나온다. 그러면 인근 음식점에서 대포 한 잔을 하고 저녁 6시쯤 집으로 들어간다. 이 씨의 하루 일과다.
이 씨는 "여기 나오는 사람들이 다들 가지각색"이라며 "정치 이야기를 하다가 싸움을 하기도 하고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춤을 추는 사람도 있다"고 설명했다. 이 씨는 "그런 모습을 보면서 나름 스트레스도 풀고, 또래 노인을 만나 이야기도 나누는 게 즐거워 이곳을 찾는다"고 설명했다.
"동네 노인정보다는 낫잖아"
중절모를 쓰고, 등에는 조그마한 배낭을 메고 있는 박기수(68) 씨는 동네 노인정보다 여기가 낫기에 이곳에 온다고 했다.
"사람들 구경하는 거지. 집에 가면 내가 밥해놓은 거 내가 차려 먹거든. 딸이 있지만 직장을 다녀. 늦게 들어와. 아침에도 7시면 집을 나가거든. 집에 있다 보면 갈 곳이 없어. 고작 노인정에 가는데, 거기서도 딱히 대화 상대가 없어. 대부분 80대 어르신이고, 동네분이라 마음 놓고 뭔 이야기를 할 수 없어. 그냥 고스톱 치고 TV 보는 게 전부야. 그리고 노인정은 답답해."
박 씨는 "여기 사람들 중 오랫동안 아는 사람은 없다"며 "그냥 그날그날 만나는 사람들과 모여 이야기하고 만다"고 설명했다. 박 씨는 "그러다 말이 잘 맞으면 인근 음식점에 가서 대포 한 잔을 한다"며 "결국 이곳에 오는 건 말벗을 찾아오는 셈이다"고 고백했다.
이길복(72) 씨는 "수십 년 간 공무원 생활을 하고 은퇴했다"며 "부인은 이런 곳에 나오지 않고 집에서 지내기 좋아해 혼자 이곳에 온다"고 말했다. 이 씨는 "수십 년간 아침에 일어나면 밖으로 나가고 저녁이면 들어오는 생활을 반복했다"며 "은퇴를 했다고 이런 습관이 사라지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이발은 3500원, 순대국은 3000원…종묘공원 일대는 '노인의 거리'
노인들만 모이다 보니 종묘공원에는 서울 도심 다른 곳에선 볼 수 없는 독특한 문화가 형성돼 있다. 공원 인근에서 제공하는 무료급식과, 주변에 형성돼 있는 저렴한 식당 및 이발소 등도 이곳 문화를 대변해주는 요소다.
이곳 상업시설을 이용하는 노인은 대부분 하루 1만 원으로 점심과 저녁, 그리고 술을 마실 수 있다. 잔치국수가 1500원, 순대국이 3000원, 삼계탕이 3500원 등 대부분 음식이 4000원을 넘지 않는다. 이발소에서 이발하는 데 드는 비용도 3500원이다.
노인들이 좋아할 만한 물건도 곳곳에서 판다. 중고 시계, 구두, 지갑, 돋보기, 관절염약, 모시 속옷 등이 그것. 새 상품은 거의 없다. 대개는 오래된 것들이다. 닳은 구두 굽을 갈아주는 곳, 찢어진 우산을 꿰매주는 곳 등도 성업 중이다.
▲ 종묘공원 및 탑골공원 인근 음식점 골목. 이곳 음식들은 대부분 3000원대로 저렴하다. ⓒ프레시안(허환주) |
박기석(73) 씨는 "종묘공원에 갔다가 공원 주변은 꼭 들르고 집에 간다"며 "다른 곳에서는 이렇게 싸게 파는 곳이 없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종묘공원 근처에서 순대국밥 집을 운영하고 있는 박영심(가명) 씨는 "노인을 상대로 장사를 하다 보니 이렇게 음식값을 싸게 받는다"며 "마진이 안 남는다면 거짓말이지만, 최소한의 마진으로 많은 노인에게 음식을 파는 걸 목적으로 하고 있다"고 밝혔다.
'박카스 아줌마', 다들 알지만 방치된 문제
반면, 그늘도 짙다. 대표적인 게 '박카스 아줌마'다. 종묘공원을 찾는 노인 중 90% 이상이 남성이다. 이들을 상대로 피로회복제나 자양강장제를 팔며 성매매를 유도하는 50~60대 여성들이 있다. 5000원~5만 원대를 받고 노인과 성매매를 한다고 한다. 언론에도 여러 번 보도된, 공공연한 사실이다.
종묘공원에서 만난 이근식(71) 씨는 "이곳에 오는 여성 중에는 음료수를 들고 다니며 술 취한 할아버지를 상대로 매춘(성매매)을 하는 이도 있다"며 "할아버지를 꼬셔서 그들을 어디론가 끌고 간다"고 말했다.
이 씨는 "매춘을 하는 여성도 문제지만 그보단 그것을 바라는 할아버지들도 문제"라며 "이곳 종묘공원을 찾는 노인들 중 일부는 그것을 바라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이 씨는 일례로 "노인 중에는 돈을 손에 들고 박카스 아주머니들에게 흔들기도 한다"며 "성욕을 해결하기 위해 이곳을 찾는 할아버지도 있는 건 사실이다"고 덧붙였다.
'박카스 아줌마' 문제는 다들 알고 있지만, 도무지 사라지지가 않는다. 종묘광장관리사무소는 2007년 240여 명, 2009년 170여 명, 2011년 9월까지 120여 명을 단속했다. 하지만 '박카스 아줌마'는 여전히 성업 중이다. 노인 문제 전문가들은 노인의 성(性) 문제를 양지에서 이야기해야 할 때가 됐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들 역시 구체적인 해법은 없다. 이야기의 물꼬를 트는 게 먼저라는 게다.
'성역화 사업'으로 탑골공원에서 내몰린 노인들, 종묘공원에 자리 잡아
ⓒ프레시안(허환주) |
하지만 2001년 3월, 서울시의 '탑골공원 성역화 사업'을 발표한 이후 탑골공원은 노인이 잘 찾지 않는 장소가 됐다. 현재 탑골공원 노인 방문자수는 하루 30~60명 정도에 불과하다.
서울시는 성역화 사업의 일환으로 새로운 공원을 조성했다. 나무 심는 범위를 넓혀 여유 공간을 축소했고 조형물을 대거 늘렸다. 또한 노인들이 즐겨 앉았던 의자 등은 없애거나 그 자리에 돌 등을 가져다 놓았다. 독립운동의 상징적 의미를 고취시킨다며 공원 내에 음식물을 가지고 오거나 돗자리, 신문지 등을 깔지 못하게 했다.
이름은 '성역화 사업'이지만, 실상은 탑골공원에서 '죽치는' 노인들이 보기 싫어서 그들을 내쫓기 위한 목적이었다는 뒷말이 많았다. 종묘공원에서 만난 노인들이 대부분 이런 생각이었다. 그래서 도심 한복판에서 '죽치는' 노인들이 사라졌을까. 아니다. 노인들은 탑골공원 대신 근처의 종묘공원으로 몰렸다. 행정 당국자들에겐 일종의 '풍선 효과'로 비칠 게다.
노인들이 도심 한복판 공원을 찾는 가장 큰 이유는 '딱히 할 일이 없어서'였다. 직장에선 은퇴했는데, 용돈은 얼마 없고, 시간은 많다. 이들에겐 탑골공원, 종묘공원이 최선의 선택이다.
결국 행정 당국자들이 진짜 고민해야 할 문제는 노인들이 모일 수 있는 공간 마련이다. 노인은 계속 늘어나는데, 그들이 마음 붙일만한 곳을 찾지 못하는 문제. 여기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누구나 결국 노인이 된다.
왜 할아버지들은 노인복지센터를 싫어할까?
물론, 이런 문제를 서울시 관료들이 전혀 모르는 것은 아니다. 서울시는 탑골공원 성역화 작업을 하면서 노인들이 여가를 즐길 수 있는 노인복지센터를 탑골공원 인근 15분 거리에 세웠다. 복지센터에는 탁구, 당구, 노래방 시설 등이 있다. 이발, 목욕 등도 무료다. 점심때는 무료로 급식도 한다. 하지만 노인들에게 별 인기가 없다. 특히 남성들에게 그렇다. 이곳은 주로 할머니들이 이용한다. 할아버지들은 식사가 무료로 제공되는 점심 때만 반짝 몰려든다.
할아버지들은 왜 새로 생긴 노인복지센터를 싫어할까. 우선 할머니들이 많아서 불편하다는 답변이 있었다. 종묘공원에서 만난 이경섭(65)씨는 "(노인복지센터가) 여자들만 가는 곳이라 잘 가지 않는다"고 짧게 답했다. 이어 그는 "집에 있기 답답해서 나오는데 왜 또 답답한 실내로 가려 하겠냐"고 종묘공원을 찾는 이유를 설명했다. 이 씨는 "여자들이야 따뜻한 곳에서 뭔가 배우고 그러는 게 좋을지 모르지만 우리 같은 할아버지들은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걸 좋아한다"고 덧붙였다.
이런 정서를 고려한 정책 마련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그냥 건물 몇 개 더 세우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 이런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후보라면, '여자'라서, '빨갱이'라서 시장 후보들이 못마땅하다는 노인들도 마음을 바꾸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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