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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례없는 고공농성 200일…김진숙 "대중과 역사 믿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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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례없는 고공농성 200일…김진숙 "대중과 역사 믿어"

24일 영도 조선소에서 시국선언 발표, 자전거로 부산 출발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이 고공농성을 시작한지 24일로 200일이 됐다. 한국 노동역사에서 노동자가 200일 넘게 고공농성을 벌인 사례는 찾아보기 힘들다. 이전까지 한진중공업에 관심을 보이지 않던 정당 및 시민단체들도 '희망버스' 등을 통해 한진중 사태 해결을 촉구하고 있다.

최근 하루가 멀다 하고 한진중공업 문제 해결을 위한 각종 기자회견 및 집회 등이 열리고 있다. 200일을 맞아 24일, 한진중공업 해고 노동자 10여 명은 서울 대한문 앞에서 '희망자전거'를 발족했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자전거로 이동, 30일에 김진숙 지도위원이 농성 중인 영도 조선소에 도착한다는 계획이다.

이들은 "우리와 비슷한 자본의 탄압에 투쟁하고 있는 평택의 쌍용자동차, 아산의 유성기업을 거쳐 대전, 김천, 구미를 지나, 김해 부산으로 향할 것"이라며 "매일 80km를 달려 30일에는 전국 각지에서 모여드는 희망버스 승객들과 함께 부산에 도착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 금속노조 조합원 700여명은 29일 오후 부산 영도구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 앞에서 한진중공업 사측이 정리해고를 철회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들은 부산역 광장에서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철회, 공권력 투입 중단' 집회를 연 뒤 김진숙 지도위원이 농성 중인 영도조선소 85호 크레인까지 거리행진을 했다. ⓒ연합뉴스

줄 잇는 부산 러시

백낙청, 함세웅 등 재야 인사 및 종교인과 정치인들은 이날 부산 영도 조선소 앞에서 '희망 시국회의 200' 선언문을 발표한다. 이들은 제안문에서 "24일로 고공농성 200일째를 맞는 김진숙 위원의 목숨을 건 투쟁은 단지 노동자 한 명의 절규가 아니라 이 땅의 부당한 해고자, 차별받는 비정규직 노동자 모두의 절규"라며 "우리의 선언은 정리해고자, 그리고 김진숙 위원의 생명을 지키기 위한 실천"이라고 설명했다.

현재 서울 대한문 앞에서는 노회찬, 심상정 전 진보신당 대표가 단식 농성을 진행 중이다. 또 1000인 릴레이 동조 희망단식이 대한문과 부산역, 한진중공업 영도 조선소 앞에서 진행되고 있다. 서울에 위치한 한진중공업 본사 앞에서는 30일까지 24시간 연속 릴레이 1인 시위가 진행 중이다.

민주노총은 23일 3000명이 모인 가운데 한진중공업 문제 해결을 촉구하며 서울광장에서 집회를 열었다. 이들은 집회 이후 한진중공업 본사까지 가두행진을 진행했다.

30일에는 3차 희망버스가 부산으로 출발한다. 송경동 시인은 "김진숙 지도위원이 고공농성을 통해 한진중공업이 벌인 대규모 구조조정 문제를 이슈화시켰다"며 "그를 위해, 아니 구조조정이라는 우리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모든 시민·사회단체들이 나서고 있다"고 설명했다.

한편 김진숙 지도위원은 자신을 영웅으로 추켜세우는 노동계와 언론을 두고 쓴 소리를 던졌다. 김 위원은 21일 자신의 트위터를 통해 "난 영웅이 싫다"며 "30여 년간 활동해오면서 수많은 영웅들이 제조되었다 폐기되는 걸 봐왔기에 가장 경계했던 게 영웅이었다"고 밝혔다.

김 위원은 "90년대 잠시 영웅노릇하면서 망가졌던 아픈 기억 때문에 영웅은 불행한 놀이라는 걸 이미 경험했다"며 난 대중과 역사를 믿을 뿐이다"고 자신의 심경을 밝혔다.


우리나라 최초 고공 농성은 언제?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고공 농성을 한 때는 일제강점기 때였다. 1931년 5월 29일 평양에 있는 고무 공장에서였다. 평원고무공장 여성노동자인 강주룡(31) 씨는 을밀대 지붕 위에 올라가 고공농성을 벌였다.

그가 고공농성을 하게 된 계기는 회사에서 일어난 파업과 해고사태 때문이었다. 고무공장 노동자들은 한국인 남성노동자가 일본인 남성노동자의 2분의 1 임금을 받았다. 여성 노동자는 다시 그 절반인 4분의 1 임금을 받고 하루 15시간씩 일을 했다.

하지만 그것도 모자라 31년 5월 16일, 회사는 이들의 임금을 더 깎겠다고 통보했다. 미국발 대공황의 여파가 한국에도 미쳤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턱없이 부족한 임금임에도 더 깎겠다는 건 여성 노동자들에겐 한 마디로 죽으라는 것 밖에 되지 않았다.

여성 노동자들은 임금 인하를 반대하며 파업에 들어갔다. 하지만 싸움을 시작한지 12일이 지나도록 회사는 노동자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다. 결국 여성 노동자들은 굶어죽기로 각오하고 아사동맹을 결의, 49명의 노동자들이 단식투쟁을 벌였다.

그러자 회사는 노동자들을 해고하고 한밤중에 일본 경찰을 동원해 공장 밖으로 쫓아냈다. 분을 참지 못한 강주룡 씨는 목을 매달아 자살을 하기위해 광목을 사서 을밀대 지붕으로 올라갔다. 지붕 위에서 이 생각, 저 생각을 하다 깜박 잠이 들었다. 새벽에 깨어보니 자신의 밑에 새벽 산책을 나온 사람들이 모여들어 웅성거리고 있었다.

이때 강주룡 씨는 모여든 사람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며 자신들이 왜 싸울 수밖에 없는지를 설명했다.

"우리는 49명 우리 파업단의 임금감하를 크게 여기지는 않습니다. 이것이 결국은 평양의 2300명 고무공장 직공의 임금감하의 원인이 될 것이므로 우리는 죽기로서 반대하려는 것입니다. 2300명 우리 동무의 살이 깎이지 않기 위하여 내 한 몸뚱이가 죽는 것은 아깝지 않습니다.

가 배워서 아는 것 중에 대중을 위해서는 ~(중략)~ 명예스러운 일이라는 것이 가장 큰 지식입니다. 이래서 나는 죽음을 각오하고 이 지붕 위에 올라왔습니다. 나는 평원고무 사장이 이 앞에 와서 임금감하 선언을 취소하기까지는 결코 내려가지 않겠습니다. 끝까지 임금감하를 취소치 않으면 나는 자본가의 ~(중략)~ 하는 근로대중을 대표하여 죽음을 명예로 알 뿐입니다.

그러하고 여러분, 구태여 나를 여기서(지붕) 강제로 끌어낼 생각은 마십시오. 누구든지 이 지붕 위에 사다리를 대놓기만 하면 나는 곧 떨어져 죽을 뿐입니다."(<동광> 1931년 7월호)

강주룡은 바로 다음날인 30일 평양서로 끌려갔다. 이후 6월8일, 1개월에 걸친 노동자들의 파업투쟁은 회사 측이 임금을 깎겠다는 주장을 철회하고 종전대로 임금을 지급한다는 성과를 얻고 마무리됐다.

하지만 강주룡 씨는 6월 9일 일제가 '평양 최초 최고의 적색노동조합'이라고 불렀던 평양지역 혁명적 노동조합에 참여했던 것이 드러나 다시 체포된다. 강 씨는 이때 감옥에서 1년 동안 비타협 옥중 투쟁을 벌이다 극심한 신경 쇠약과 소화불량 증세에 시달리다 1932년 6월 7일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두 달 동안 앓아누웠던 강주룡 씨는 그해 8월 13일 평양 빈민굴에서 삶을 마감했다. 강주룡의 삶이 김진숙 지도위원의 삶과 다르지 않은 건 단순히 고공농성을 했다는 것에만 국한되는 건 아닌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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