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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이 악마와 거래한 이후, 나는 내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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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이 악마와 거래한 이후, 나는 내몰렸다

[대학의 교육 불가능⑤]두산그룹의 중앙대 인수 그 이후

'교육공동체 벗'이 발간하는 <오늘의 교육> 2호(2011년 5·6월)의 특집 기획 '대학의 교육 불가능'을 '교육공동체 벗'의 동의를 얻어 전재한다.

<오늘의교육>은 격월간 교육 전문지로 '공교육 중심, 교사 중심의 교육 담론에서 벗어나 다양한 교육 주체들이 참여할 수 있는 교육 전문지'를 지향하고 있다. '교욱공동체 벗'은 협동조합 형태의 비영리단체로 올해 1월 창립했으며 <오늘의 교육>은 '교육공동체 벗'에 조합원으로 참여하면 받아볼 수 있다.

2호 특집 '대학의 교육불가능'은 창간호에 실린 '2011년 한국 교육, 야만의 지형도를 그리다'의 두 번째 기획이다. 총 6회에 걸쳐 연재될 이들 글에서는 대학생, 대학원생들이 자신의 체험을 중심으로 대학의 문제를 생생하게 드러내고 있다.

박복선 편집위원장은 "이제 대학은 신자유주의적 모순이 전면적으로 가장 첨예하게 드러나는 공간이 됐다"며 "창간호에서 주로 초·중등교육을 통해 '오늘의 교육'을 조망했다면 이번 호에서는 '고등 교육'을 통해 야만적 현실을 드러내고자 했다"고 기획의 취지를 소개했다. (편집자)

'대학의 교육 불가능'
☞ ①
"학부생 인질 잡힌 대학원생 등록금,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 ② 공부할수록 가난해지는 가난할수록 공부할 수 없는
☞ ③ '스펙 괴물'이 된 대학생의 시한부 인생
☞ ④ "접대 자리엔 인문학 전공자 노래 한 곡이 효과적"


2008 5월 두산그룹은 학교법인 중앙대학교를 인수했다. 두산그룹은 대학 인수의 첫 번째 조건으로 총장 임명제를 내걸었고 박범훈 총장은 이를 받아들였다. 기존의 총장 선출 구조는 제한적으로나마 구성원들의 의사가 반영될 수 있었고 따라서 최소한의 민주적 통제 기능을 수행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선출직 총장은 재단으로부터도 어느 정도 자율성과 독립성을 보장받을 수 있었지만, 임명직 총장은 임명권자인 재단 이사장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박범훈이라는 '걸출한' 총장이 등장했다. 그는 학생들과 상의도 없이 새터(새내기새로배움터) 행사를 불허하더니 총장과 학교 본부를 비판한 교지를 전량 회수하고 교지 예산을 전액 삭감했다. 더 나아가 박 총장은 자신과 재단을 비판한 진중권 교수를 해임시키고 학교의 기업식 구조조정에 반대 목소리를 낸 학생들에게 퇴학 등의 중징계와 거액의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이 모든 것이 두산그룹이 학교를 인수한 후 박 총장이 쌓아 올린 업적들이다. 박용성 이사장의 공세도 매서웠다. 그는 2009년 8월 〈중앙일보〉에 쓴 글에서 교수와 학생들을 향해 "주인 의식을 갖는다고 해서 실제 주인이 되는 것은 아니"라며 대학에 "과도한 '주인 의식'이 퍼져 있는 게 아닌"지를 걱정했다. 자본주의는 어디에서나 통한다는 그의 지론답게 그는 교수 사회에 성과급형 연봉제를 시행했고 전공에 관계없이 모든 학생들에게 회계학 수업을 의무화했다. 그리고 이후 기초 학문의 통폐합을 밀어붙여 살벌한 분위기는 극에 달했고 계열별 부총장제의 시행으로 재벌 총수 1인을 정점으로 한 위계적 지배 구조를 대학 사회에서 완성시켰다.

2009년 8월 - 계획된 우연, 진중권 교수 해임 사태

진중권 겸임교수는 내가 중앙대에 입학한 2003년부터 독문과에서 강의를 시작했다. 그의 강의는 기존 한국 대학에서 찾기 힘들었던 최신 미디어 미학을 소개했다는 점에서 독보적인 위상을 가지고 있었다. 매 학기 강의실에 앉을 자리가 없을 만큼 강의는 인기가 많았고, 그의 강의는 독문과를 넘어 중앙대학교로서도 소중한 자산이었다.

그런데 2009년 여름방학이 끝나 갈 무렵 진 교수가 더 이상 우리 학교에서 강의를 하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단 얘기들이 흘러 나왔다. 그가 박범훈 총장과 두산재단을 향해 던진 거침없는 비판들 때문이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우려는 현실이 되었다. 교무처는 진 교수의 해임을 겸임교수의 임용 요건 강화에 따른 불가피한 조치라고 설명했지만 우리를 납득시킬 순 없었다. 대학 본부가 원칙을 그렇게 강조하던 같은 시기, 이재오 전 한나라당 최고위원은 초빙 교수직에 이어 명예박사 학위까지 학교로부터 수여받았다. 우리는 진 교수의 해임을 사적 보복이자 교수 사회 길들이기라고 볼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학생들은 반발했다. 독문과 학생회는 방학 중 학생총회를 소집해 정치적 이유로 진 교수의 재임용을 거부하고 학생들의 수업권을 침해한 대학 본부의 결정을 비판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기자회견을 마친 학생들은 항의 서한을 전달하기 위해 총장실로 향했다. 총학생회장을 필두로 일부 학생들이 따라 들어가 총장실 구석구석에 레드카드를 붙였다. 레드카드는 퇴장을 의미했다. 나갈 사람은 진 교수가 아니라, 여 제자에게 "이렇게 생긴 토종이 애도 잘 낳고 살림도 잘한다"며 "감칠맛 난다"고 발언한 당사자임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얼마 후 레드카드는 고스란히 학생들에게 되돌아 왔다. 총장실을 무단 침입했다는 이유로 징계위원회로부터 소환 통보를 받은 것이다. 나를 포함해 총 7명의 학생들에게 핸드폰 문자로 소환 통보 메시지가 왔다. 재밌는 점은 그날 기자회견에 참여하지 않았던 휴학생들에게도 문자가 갔다는 것이다. 사정을 알아보니 학생처 직원들이 현장에서 직접 채증하거나 언론 기사에서 확보한 사진을 가지고 독문과 조교들을 불러다 앉힌 뒤 일일이 대조 작업을 하는 과정에서 비슷하게 생긴 학생들을 혼돈한 것이었다. 경찰도 아니고 교육기관이 직원들을 동원해서 평화롭게 진행된 학생들의 기자회견을 징계 목적으로 채증한 것도 모자라, 학생들의 선배 격인 조교들을 불러 놓고 취조나 다름없는 짓을 할 생각을 하다니…. 학교 인수 이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던 일이었다.

어느덧 2학기가 시작됐고 진중권 교수 재임용을 위한 싸움은 학생 징계를 철회시키기 위한 싸움으로 국면이 전환됐다. 개강 후 우리는 학우들에게 이번 사태의 부당성을 알리기 위해 서명 받을 준비도 하고 이틀 밤을 새 현수막 100여 장을 써 교내에 게시하기도 했다. 부당하게 수업권을 침해당한 상황에서 부당한 징계까지 당할 수 없다는 일념으로 모두가 총력전을 벌였다. 그리고 2차 기자회견을 진행했다. 학생들은 학교 측의 무작위 채증과 징계 시도에 대한 항의로 마스크를 썼다. 항의도 항의지만 두려운 마음도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학생처 직원들은 또다시 학생들에게 카메라를 들이밀었다.

학생들은 계획한 퍼포먼스를 뒤로하고 교무처장, 학생처장과 면담을 한 뒤 징계위원회에 출석해 항변했다. 면담에서 나는 직원들을 동원해 학생들을 불법적으로 채증하고 징계권을 발동한 대학 당국을 비판했다. 대학 본부로서도 무리한 학생 징계 시도로 인해 안팎의 여론이 안 좋은 상황에서 애초에 표적이 아니었던 학생들을 굳이 징계할 필요가 없었다. 결국 학생들이 박범훈 총장에게 유감을 표하는 걸로 일을 마무리하자는 중재로 총장과의 면담이 성사됐다. 그러나 우리의 유감 표명은 서로에게 궁색한 절충안일 뿐이었다.

결국 학생 징계 시도는 철회됐지만 우리는 진중권 교수를 마지막 공개 강의를 끝으로 떠나보내야 했다. 그날 강의실은 몰려든 학생들로 꽉 찼다. 한상준 교무처장은 말했다. "진 교수 정도의 강의를 할 사람은 쌔고 쌨다." 망언을 할수록 학내에서 등급이 올라가기라도 하는 걸까. 자신의 전공 학문도 아닌 분야의 정상급 권위자를 근거 없이 모독하고, 학생들의 수업권을 침해하고도 꼬박꼬박 월급을 받을 수 있는 게 교무처장 자리라면, 그런 자리야말로 할 사람 쌔고 쌨다.

진중권 교수의 재임용을 두고 벌어진 일련의 사태는 교수 사회를 이전보다도 경직시켰다. 대학 본부와 재단의 방침에 맞서 반대의 목소리를 내면 어떤 대가를 치를 수 있는지, 그들은 진 교수를 통해 확실히 보여 줬다.

2009년 11월 - 시국 선언과 독일연구소의 시련

진중권 교수를 떠나 보낸 슬픔이 채 아물기도 전에 독문과에는 또 한 건의 비보가 날아들었다. 인문한국HK 사업에 지원한 독일연구소가 전문가 집단의 심사에서 압도적인 1위를 차지하고도 4위까지 지원 자격이 주어진 대상자 선정 과정에서 탈락한 것이다. 이는 유례가 없는 사건이었다. 지난여름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정국 때 독문과 교수 전원이 시국 선언에 동참하고, 진중권 교수의 부당한 해임에 강력히 반발한 것에 대해 정치적 보복을 한 것이라고밖에 볼 수 없었다. 가장 엄정하고 객관적이어야 할 학문 영역에마저 정치권력이 작동한 것이다.

독문과 학생회는 즉각 성명을 내고 "교과부가 자의적 판단으로 학계 전문가 집단이 장기간 합숙하며 산출해 낸 최종 심사 결과를 뒤집은 것은 학문의 영역에 정권이 가치 조정적 개입을 한 것"이라고 규정했다. 이후 학생들은 교내에서 유인물을 배포하는 것을 시작으로 교과부 앞에서 집회를 열고 항의 서한을 제출했으며, 헌법 소원 및 인권위 진정 등 모든 방법을 동원해 정부의 '지식인 집단 길들이기'를 규탄했다. 그러나 같은 시기 정작 연구 중심 대학을 강조해 온 총장과 대학 본부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겨울비 맞아 가며 기자 한 명 찾아오지 않은 초라한 기자회견을 이어 간 학생들의 간절한 외침을 총장과 대학 본부는 끝내 외면한 것이다

그로부터 반년이 지난 뒤, 한상준 교무처장으로부터 당시 박범훈 총장도 인문한국 사업 관계자들과 같이 식사를 하며 독일연구소를 위해 노력했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독일연구소가 교과부를 상대로 행정소송을 준비할 때 박범훈 총장이 나서서 이를 만류했다는 소식을 이미 접한 터라 그 '노력'이라는 것이 참 괘씸했다. 그의 모습은 2008년 2월 로스쿨 정원 배정 문제에 대해 "정치적 편향으로 이뤄진 자의적이고 작위적인 결정"이라며, 이에 항의하기 위해 머리띠를 싸매고 교과부 앞에서 시위할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1년여에 걸쳐 한국연구재단을 상대로 독일연구소가 한 법정 싸움은 결국 패소하고 말았다. 형식 요건 심사 단계에서 소송을 제기한 독일연구소의 당사자 능력이 인정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소송은 총장이 제기해야만 성립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사정을 잘 알았던 총장은 보란 듯이 이를 외면했다. 그런 총장의 모습을 보며 그가 말한 '연구 중심 대학'이란 과연 어떤 대학을 말하는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2010년 4월 - 60m 타워크레인에 오르다

2009년 2학기를 휩쓸고 지나간 두 번의 사태는 재단과 대학 본부가 인문학을 육성할 의지가 없음을 보여 줬다. 그리고 얼마 후 숨 돌릴 여유도 없이 본부는 기업식 구조조정 계획안을 발표했다. 본부가 내세운 초기 계획안은 기존의 18개 단과대, 77개 과를 10개 단과대, 40개 과·부로 줄이겠다는 것(후에 46개로 조정). 박범훈 총장이 말한 구조조정의 이유는 대학의 학과가 너무 백화점식으로 세분화돼 있어 미래지향적인 학문간 통섭이 쉽지 않다는 것이었다. 물론 시대의 변화에 따라 학과를 없애거나 축소할 수도, 확대할 수도 있다. 그러나 본부 측이 학문의 가치를 평가하는 기준이 무엇인가 하는 게 문제였다. 경영대의 정원 확대와 기초학문의 축소. 그들이 말하는 학문의 가치란 무엇일까.

2010년 새 학기를 앞두고 구조조정의 구체적인 윤곽이 드러났다. 통폐합의 대상으로 지목된 학과들은 반발했다. 그중에서도 독문과, 불문과, 일문과 이렇게 3개 학과에서 먼저 행동에 나섰다. 3개 학과는 개강 후 본관 앞에서 천막 농성을 시작했다. 유난히 쌀쌀했던 그해 봄, 세찬 바람에 천막이 휘어지고 날아가고 수북이 쌓인 눈에 무너지고를 반복했다. 하룻밤 자고 일어나면 온몸이 얼음장처럼 굳어 버리는 추위 속에서도 우리는 간절한 호소를 통해 대학의 정책을 바꿔 낼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러나 박용성 이사장은 "나는 눈이 작아 농성장이 안 보인다"며 우리의 투쟁 자체를 부인하고 조롱했다.

우리는 일방적 구조조정 저지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의 출범식을 앞두고 본관 앞 연못 주위의 나무를 온통 검은 천과 빨간 천으로 뒤덮었다. 또 '눈이 작은' 사람들도 잘 보일 수 있게 연못을 가로질러 '기초학문 수호'라는 현수막을 크게 내걸었다. 박용성 이사장을 위한 '배려'였다. 학교 측에선 천과 현수막을 철거하지 않을 시 외부 용역을 통해 철거를 대신 집행하고 비용 200만 원을 청구하겠다고 통보해 왔다. 학교가 금전적 손해를 제시하며 학생들을 협박한 것은 전에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건 두산의 오랜 버릇이기도 했다. 박용성 이사장은 창원 두산중공업 회장 재직 시절, 노조의 합법적 쟁의 행위에 대해서까지 거액의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것을 일삼아 정당한 노조 활동을 탄압했다. 그 때문에 한 노동자가 분신을 시도했고 결국 목숨을 잃었다. 그런데 그는 그 기술들을 교육 현장에서도 재현했다.

농성 기간 중 대학 본부와 몇 차례 접촉이 있긴 했지만 서로 머리를 맞대고 소통하기 위한 자리는 아니었다. 단지 확정된 구조조정안을 통보하기 위한 형식적인 만남에 그쳤다. 학교는 설득을 시도하기보다 학생들과 교수들을 따로 불러다 앉힌 뒤 회유하는 일에만 골몰했다. 그도 그럴 것이 학교도 더 이상 분쟁을 조정해 볼 여지가 없었다. 이미 재단의 구조조정 강행 의지가 확고했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는 보름 넘게 지속된 우리의 요구에 귀를 닫고 묵묵부답하던 대학 본부와 재단을 풍자하기 위해 대학 본관 앞에 '불통의 벽'을 쌓기로 했다. 수시로 상황을 체크하러 오는 직원들의 감시를 피해 천막 안에서 비밀리에 블록을 쌓았다. 어렵사리 견고한 벽체가 완성됐다. 분주했던 주말이 지나가고 공동대책위원회의 출범식 행사가 대학 본관 앞에서 진행됐다. 독문과, 불문과, 일문과를 중심으로 많은 학생들과 선생님들이 자리를 함께했다. 총학생회와 민주화를위한전국교수협의회에서 성명서를 낭독하고 불통의 벽을 허무는 퍼포먼스로 행사를 마무리하려 했다. 그런데 그때 행사장 한편에서 소란이 일었다. 학생들이 돌아가며 불통의 벽을 깨부수고 있는데 학생처 직원들이 몰래 학생들에게 카메라를 들이대다 들킨 것이다. 당시 현장에서 학생처 하관용 계장은 징계 목적이 아니라 했지만 그 말을 믿을 사람은 없었다. 당시 하관용 계장을 계속 추궁하다 실랑이를 벌인 총학생회 교육국장 김주식은 그 사건으로 인해 며칠 뒤 퇴학을 당했다. 김주식 퇴학 사건은 대학 사회를 순식간에 공포로 몰아갔고, 대학 본부 앞에 세웠던 농성 천막도 강제 철거됐다. 퇴학을 당할지도 모르는 두려움에 학생들도 더 이상 저항하지 못했다.

그러나 대학 본부의 공세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총학생회장과 나에게 징계 절차에 들어가겠다고 통보해 온 것이다. 출석일은 4월 8일. 구조조정 최종안을 통과시키기 위한 이사회가 열리는 날이기도 했다. 그들은 4월 8일부로 비판의 싹을 뽑아 버리고 학생들의 반발이 가라앉길 기대했을 것이다. 교수 사회의 분위기도 학생들과 다르지 않았다. 처음 농성에 돌입할 때 가졌던 자신감은 크게 위축되고 재단의 전방위적 공세 속에 교수들은 하나둘씩 등을 돌렸다. 교수들 간에도 본부에 대한 대응을 두고 언쟁이 잦아졌고 결국 기업식 구조조정에 맞서 보고자 했던 하나의 뜻은 그렇게 허물어져 갔다.

그렇다고 이대로 뒷짐 지고 있을 수만도 없었다. 공동대책위원회의 출범식을 정점으로 대학 본부와 재단의 징계 압박은 점점 강해졌고 학생들의 분위기는 점점 움츠러들었다. 모종의 결단을 내리지 못한다면 구조조정 최종안이 통과되는 가장 상징적인 날을 가장 조용하게 보내게 될 판이었다. 뭔가 분위기를 반전시킬 대책이 필요했다.

며칠을 고민하다가 총학생회와 문과대 학생회 그리고 독문과, 불문과, 일문과 학생회장들을 만나 고공 시위를 제안했다. 대부분이 처음에는 반대했다. 너무 위험하기도 하고, 이사회 당일 최대한 학생들을 모아 일단 항의하고, 유감스럽지만 징계위원회에도 일단 출석해 항변하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내 생각은 달랐다. 김주식의 퇴학 사건에서 보여 줬듯 이미 합리적인 판단이란 걸 잊은 징계위에 굳이 출석할 이유가 없었다. 또 학생들을 모아 항의를 하는 것 역시 여의치 않은 상황이었다. 학생들을 모으려면 교수들의 협조가 관건인데 이미 재단의 회유와 압력 속에 구조조정에 맞서 보고자 한 교수 집단도 와해된 상황이었다. 김주식의 퇴학으로 인해 총학 역시 '그로기' 상태였다.

4월 3일, 이사회를 앞두고 후배들과 상여를 만들었다. 구성원의 의견을 무시한 채 진행한 이사회의 일방적인 의결이 대학의 가치와 민주주의를 죽게 한다는 의미였다. 고공 시위의 경우 학생회장들을 이사회 전날 밤까지도 계속 설득하려 했지만 끝내 실패했다. 침묵할 것인가, 저항할 것인가. 어느 하나 쉽게 결정할 수 없는 상황에서 문과대 옥상 현수막의 페인트는 서서히 굳어 갔다. "대학은 기업이 아니다! 중앙대 기업식 구조조정 반대!" 결국 자정이 지날 무렵 처음 고공 시위를 생각했던 나와 김창인, 표석은 동시에 고공 시위를 진행하기로 마음먹었다.

새벽 다섯 시. 100m 길이의 천으로 만든 대형 현수막을 들쳐 메고 내가 먼저 공사장의 벽을 넘었다. 10여 분을 쉬지 않고 올라가 뚜껑을 열고 상판에 올라섰다. 발 아래로 슬퍼 보이는 교정이 한눈에 들어왔다. 새벽녘부터 도서관에 나와 무한 경쟁에 지쳐 뿌연 담배 연기를 토하듯 내뱉는 청춘들. 영정을 앞세우고 상여를 들고 그 뒤를 쫓으며 학우들에게 참여와 관심을 호소하는 후배들. 어색한 정장 차림을 하고 모여 나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씩씩거리는 사내들. 해가 중천에 다다를 무렵 본관을 빠져 나와 미끄러지듯 노들길로 탈주하는 검은 세단 속의 영감님들. 현수막을 만들고 버려진 페인트 깡통 같은 그들의 텅 빈 교육철학. 모든 게 슬프게 보였다.

다행히 한강대교 아치에 올라간 두 명도 한 시간 가량을 버티다 안전하게 연행됐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가장 걱정했던 안전사고가 어디에서도 일어나지 않아 천만다행이었다. 예상했던 대로 많은 취재진들이 몰려와 우리의 목소리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물론 이사회는 만장일치로 구조조정안을 통과시켰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행동을 통해 충분히 대학의 기업화에 대해 상징적 파열음을 만들어 냈다.

타워크레인에서 내려오자마자 연행되면서 나는 두산건설로부터 고소를 당했다. 그리고 4일 뒤인 4월 12일, 학교로부터 2,500여만 원의 손해배상 청구를 받았고 그로부터 한 달 뒤 퇴학당했다. 군부독재 시절에도 시위에 나선 학생들이 연행되거나 구금되면 총장이 직접 학생들을 꺼내 오기 위해 팔을 걷어 부치고 나섰다고 한다. 그러나 박범훈 총장은 학생들이 연행도 되기 전에 고소장을 미리 준비했고, 법정형이 더 높은 업무 방해로 기소해 줄 것을 당일 직접 경찰서를 돌며 부탁했다. 독재 정권의 압력에 여러 대학에서 학생들을 징계하던 엄혹한 시절에도 중앙대는 학생들을 징계하지 않고 오히려 총장이 나서서 학생들을 보호했다. 그게 지난 90여 년간 쌓아 온 중앙대의 전통이었다. 그런데 그 아름다운 역사와 전통이 일순간에 뒤엎어졌다.

2010년 5월 - 징계 철회를 위한 싸움

퇴학 징계와 손해배상에 맞선 학생들의 반발도 만만치 않았다. 거액의 손해배상 앞에 학생들은 줄 것은 이것밖에 없다는 의미로 학교 본관 앞에서 집단 삭발식을 갖고 돈 대신 잘린 머리카락을 모아 총장실에 전달했다. 그리고 당일 삭발한 머리를 하고 징계위에 출석해 돈으로 학생들의 입을 틀어막고자 하는 대학 당국의 자성을 촉구했다. 당시 부총장이었던 안국신(현재 총장)은 학생들의 시위로 인해 재단의 투자 의지가 꺾일까 우려된다며 학생들에게 무조건적인 반성과 사과를 요구했고 재단의 이사들, 즉 두산의 직원들도 기업의 이미지가 실추됐다며 우리를 질책했다. 그러나 정작 실추된 것은 학교와 두산의 이미지가 아니라 교육기관으로서 대학이 가지고 있던 도덕적 위상이었다.

퇴학 처분 결정 통지서에 찍혀 있는 직인은 총장의 것이지만 그것은 결국 이사장의 의지라고 봐도 무방했다. 더 이상 대학 본부와의 다툼이 무의미하다는 판단에 우리는 이 모든 분란을 주도한 두산그룹 본사 앞으로 갔다. 두산과 박용성 이사장을 우리 싸움의 대상으로 전면화하기 위한 자리에서 나는 한 손에 "학교는 이사장의 놀이터가 아니다"라는 피켓을 들고 등에 도끼가 꼽힌 채 쓰러져 있는 상황을 연출하는 퍼포먼스를 했다. 그리고 며칠 뒤, 두산그룹의 명의로 중부 경찰서에 고발장이 접수됐다.

여름방학을 앞두고 퇴학 처분을 무효화시키기 위한 소송을 준비했다. 후배들의 안타까운 소식을 듣고 법조계에 있는 선배들이 나서 변호인단을 꾸렸다. 그러나 학교는 이를 가만 놔두지 않았다. 안국신 현 총장이 변호인단 대표들을 접견한 자리에서 퇴학생들의 소송을 도우면 고시반에 대한 지원을 줄일 것이라고 협박을 한 것이다. 학교 측의 회유는 선의로 후배들을 돕겠다고 나선 동문 변호인단마저 돌려 세웠고, 우리는 결국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의 도움을 받아 소송을 진행해야 했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소를 제기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학교 측에서 학생들을 상대로 가처분 소송을 냈다는 소식을 접했다. 이른바 '학교출입금지가처분'이었다. 굳이 알아보지 않아도 학교가 학생들의 교정 출입을 막아 달라고 가처분을 신청한 건 전례가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반대의 목소리를 냈다는 이유만으로 교육기관이 학생들을 대상으로 출입금지가처분을 청구했다는 것은 대학이 최소한의 교육적 양심마저 버렸음을 보여 줬다. 그들은 학생 징계 역사에 새로운 역사를 창조해 내고 있었다.

여름방학이 되고 시끄러웠던 학교도 잠잠해져 갈 무렵, 학교는 학생들의 국토대장정 행사를 준비하느라 바빴다. 국토대장정은 두산이 학교를 인수한 후 학생들의 자치적 행사인 새터를 폐지시킨 뒤 시작한 행사였다. 두산의 행사답게 16박 17일의 일정 중에 박용성 이사장이 전에 회장으로 재직했던 창원 두산중공업 견학도 포함돼 있었다. 나는 국토대장정 행렬을 삼보일배로 뒤쫓기로 결심하고 두산의 국토대장정에 맞선 삼보일배 대장정을 준비했다. 그러나 전북 익산에서부터 두산중공업 공장이 있는 창원까지, 보름 가까이 되는 일정을 함께할 사람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 이때 흔쾌히 삼보일배에 동참해 준 친구가 철학과의 박효진과 독문과의 조민호였다.

마침내 국토대장정의 첫날. 학생들이 체육관에 모여 기념 촬영도 하고 들뜬 분위기 속에 출정식을 하던 시간, 우리는 5m 크기의 펼침막을 세 명이서 붙잡고 출정을 알리는 조촐한 기자회견을 마친 뒤 익산으로 가는 열차에 몸을 실었다. 우리는 익산에서 창원까지 약 260km의 거리 중 약 100km의 구간을 삼보일배로 갈 계획이었다. 막상 시작된 일정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은 어려움이 따랐다. 에스코트해 줄 차량이 없는 우리는 도로변에서 계속 사고의 위험에 노출됐고 열악한 재정 탓에 삼각김밥과 컵라면으로 허기를 달래며 강행군을 이어가야 했다. 뙤약볕에 프라이팬처럼 달궈진 아스팔트에서 절을 할 때면 낮게 엎드린 온몸으로 복사열이 스며 올라왔고 변덕스런 장대비는 몸을 자꾸 무겁게 했다. 온몸은 파스로 뒤범벅이 됐고 밤마다 허리에 붕대를 감아 통증을 견뎌야 했다. 그렇게 악전고투를 하며 창원에 도착한 우리는 비슷한 처지에 있던 두산중공업 해고 노동자들과 공장 일대에서 삼보일배를 한 뒤 공장 정문 부근에서 기자회견을 갖는 것으로 전체 일정을 마무리했다. 그러나 서울로 돌아오고 며칠이 지나지 않아 두산중공업은 우리의 삼보일배마저 고발했다. 피고발인 명단엔 함께한 박효진도 포함돼 있었다. 친구가 받은 부당한 징계를 철회시키고자 보름 동안 삼보일배의 고행을 감수한 대가는 대기업으로부터 난생처음 받아 본 고발장이었다. 박효진은 담담한 표정이었지만 나는 함께 연대해 준 이들에게까지 고발장을 날리는 그 잔인함에 온몸이 부르르 떨렸다.

삼보일배를 통해 몇몇 두산 계열사 노조와 인연을 맺은 우리는 이후 노동자들과 학생들이 함께하는 자리를 만들었다. 2010년 7월 21일 두산 본사 인근에서 열린 두산자본규탄대회에서 두산 노동자들과 중앙대 학생들은 "노동 탄압 중단, 노동기본권 보장, 해고자 복직, 중앙대 기업식 구조조정 반대, 학생 징계 철회"를 한목소리로 외쳤다. 두산은 노동자와 학생이 함께 집회를 여는 것에 대해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두산과 학교 측은 학생들의 활동을 감시하기 위해 학생처 직원 3명과 두산중공업 소속 직원 2명을 집회 현장에 보내 동태를 파악케 하였다. 그날 두산중공업 소속 오승준 대리는 '노영수 관련 동향 보고'라는 A4 5매 분량의 문건을 소지하고 있다가 발각되기도 했다. 문건에는 나의 최근 행적에 대한 내용들이 기록되어 있었다. 명백히 기업에 의한 학생 사찰이었다. 당시 박범훈 총장도 며칠 후 보도 자료를 통해 학생들에 대한 감시를 지시했다고 시인했다. 덧붙여 이번 일은 재단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음을 강조했다. 스스로 제자 감시를 인정한 총장의 모습에 한 번 놀랐고, 어떠한 경우에도 재단만큼은 비호하겠다는 그 충성심에 두 번 놀랐다.

2학기 개강을 하고 얼마나 지났을까. 우편물 한 통이 집으로 날아왔다. 노량진경찰서에 사이버 명예훼손으로 고소장을 하나 접수했는데 그게 결과가 나온 것이었다. 예전에 중앙대 학생 커뮤니티 게시판에 파로레라는 필명을 쓰는 누군가가 징계받은 학생들을 비난하는 글을 썼는데(비판의 요지인즉슨, 요즘 학생들이 스펙 쌓느라 얼마나 고생이 많은데 자기들은 데모질이나 하고 있냐는 것이었다) 거기에 우리의 성적 같은 개인 정보를 공개해 고소를 한 것이었다. 그런데 무혐의 처분이라는 결과보다 피고소인란에 있는 낯선 이름에 더 시선이 갔다. 궁금해서 알아본 결과, 그는 우리 학교 국문과 교수였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를 과연 가르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2011년 1월 - 승소, 그러나 돌아갈 수 없는 학교

전쟁 같은 2010년이 지나가고 2011년 1월 14일. 반년 넘게 벌여 온 퇴학처분 등 무효확인 청구 소송은 우리들의 승리로 마무리됐다. 우리는 "학교 측의 과도한 징계권 행사는 무효다"라는 법원의 결정을 듣고 '이제 해결됐다'는 기쁜 마음으로 법원을 나섰다. 나는 오랜만에 수업을 듣는다는 생각에 1학기 등록금을 내고 수강 신청도 하며 설레는 마음으로 복학을 준비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학교 측은 2월 25일자로 징계위원회를 재소집했다. 그리고 한 달 뒤인 3월 24일, 학교는 징계를 받았던 3명의 학생들에게 다시 정학 처분을 내렸다. 나는 1년 2개월의 유기정학, 김창일은 1년 6개월의 유기정학, 김주식은 무기정학을 받았다. 대학 측은 이전의 징계에 대해 어떤 입장 표명이나 반성도 없이 중징계를 되풀이했다.

승소를 하고도 단 한마디의 해명을 듣지 못한 채 다시 학교 밖으로 내쳐진 우리의 억울함은 누구에게 호소해야 할까. 시간은 벌써 한 해를 돌아 새로운 봄이 찾아왔지만 우리의 시간은 여전히 징계를 받았던 작년 그 시간에 그대로 멈춰 서 있었다. 5월을 맞이한 싱그러운 교정에 우리가 설 자리란 없었다. 그러는 동안 학교는 기초학문 통폐합에 대한 우려의 잡음이 말끔히 사라진 듯, 2018년까지 세계 100대 명문대학 안에 들겠다는 각오를 홈페이지 곳곳에 써 붙여 뒀다. 본부의 한 홍보 직원은 학교 홈페이지 자유게시판에 '경중외시'에서 '서성한중'의 시대가 열렸다며 애들도 안 하는 서열 놀이를 통해 학교의 발전(?)을 자축했다. 대학 본부가 앞장서서 입에 담기도 민망한 대학 서열의 은어를 공공연히 선전하는 모습이라니. 그 모습에서 너무나도 가벼운 대학의 무게가 느껴졌다.

"정직과 용기를 보여 주는 사람만큼 미래를 맡겨도 좋은 사람은 없습니다." 두산의 광고 카피다. 그들이 말하는 정직과 용기란 무엇일까. 내가 보여 줬던 용기는 그들에게 무엇이었을까. "사람이 미래다"라던 두산의 광고가 오늘따라 더욱 씁쓸하게 느껴졌다.

노영수. 지난 2010년, 중앙대의 기업식 구조조정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다 학교에서 쫓겨났습니다. 현재는 진보신당 동작구 당원협의회 사무국에서 일을 돕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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