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교육>은 격월간 교육 전문지로 '공교육 중심, 교사 중심의 교육 담론에서 벗어나 다양한 교육 주체들이 참여할 수 있는 교육 전문지'를 지향하고 있다. '교욱공동체 벗'은 협동조합을 모델로 삼고 있는 비영리단체로 올해 1월 창립했으며 <오늘의 교육>은 '교육공동체 벗'에 조합으로 참여하면 받아볼 수 있다.
2호 특집 '대학의 교육불가능'은 창간호에 실린 '2011년 한국 교육, 야만의 지형도를 그리다'의 두번째 기획이다. 총 6회에 걸쳐 연재될 이들 글에서는 대학생, 대학원생들이 자신으 체험을 중심으로 대학의 문제를 생생하게 드러내고 있다.
박복선 편집위원장은 "이제 대학은 신자유주의적 모순이 전면적으로 가장 첨예하게 드러나는 공간이 됐다"며 "창간호에서 주로 초·중등교육을 통해 '오늘의 교육'을 조망했다면 이번 호에서는 '고등 교육'을 통해 야만적 현실을 드러내고자 했다"고 기획의 취지를 소개했다. (편집자)
'대학의 교육 불가능' ☞ ① "학부생 인질 잡힌 대학원생 등록금,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 ② 공부할수록 가난해지는 가난할수록 공부할 수 없는 |
1학년 시절, 나는 보는 이의 시각에 따라서 자유인 혹은 망나니였다. 수업이 듣기 싫으면 수업에 안 가고 숙제가 하기 싫으면 안 하고 시험이 보기 싫으면 안 봤다. '대학에 와서도 고등학생처럼 할 일에 쫓기면서 살긴 싫어.' 물론 대학 새내기라면 누구나 어느 정도 이런 마음은 다 있기 마련이라지만 난 좀 심했다. TV 시트콤 <논스톱>을 많이 본 탓도 있고, 고등학교 시절 동안 억눌린 게 너무 많기도 했다. 그리고 여기엔 친하게 지낸 선배들의 도움도 컸다.
"은정아. 선생님이 꿈이랬지? 그럼 모범생 생활 접고 이렇게 막 밤새도록 놀아도 보고 성적도 지지리 못 받아 보고 그래야 해. 그래야 아이들을 진심으로 이해할 수 있지 않겠어?" 술에 반쯤 취해서 떠드는 선배의 얘기는 묘하게 설득력이 있었다. 아, 좋은 교사가 되기 위해서 필요한 과정이라는군. 다음에 왜 수업에 안 들어왔냐고 친구들이 물으면 선배가 말한 대로 답해야지. 나는 선배의 말을 가슴에 새겨 넣으며 다짐했다. 그 학기 내 학점은 3점을 간신히 넘겼다.
아름다운 순간 혹은 후회스런 순간
내 1학년 시절을 너무 폐인처럼 묘사해 버렸지만 그 시절은 해야 할 일을 안 하는 대신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하기도 한 때였다. 고등학교 때는 소심한 마음에 시도도 못했던 재즈댄스 동아리에 가입해서 혼신의 몸부림도 쳐 보고, 대학에 가면 꼭 해야지 하고 벼르고 있었던 공부방 자원 교사 활동도 입학하자마자 시작했다. 나에게 "선생님, 어른이에요?"라고 묻는 눈이 맑은 초등학생 아이들과 농장에 가서 고추도 키우고 방울토마토도 키우고 나중엔 우리가 키운 배추로 지역의 다른 공부방이랑 연합해서 김장도 담그며 재미나게 1년을 보냈다.
불우한 학점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그 시절은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아 있다. 어른들의 칭찬이 아니라 나의 바람이 동력이 되어 움직인다는 게 얼마나 가슴 설레는 일인지 배울 수 있었던 시간이었고, 잠시 이렇게 좀 놀다 가도 안 죽는다는 걸 배우기도 한 시간이었다. 그러나 1학년이 지나고 한 학년, 한 학년 나이를 먹으면서 고등학교 시절과 같은 압박감이 조금씩 다시 내 일상을 침범해 오기 시작했다. 사실 1학년 때도 어느 정도 짐작은 하고 있었다. 학년이 올라가면 지금처럼 지내진 못하리라는 것을. 나와 친구들은 마치 시한부 인생이라도 사는 듯 "지금 아니면 평생 못 논다"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고, 학기 초에 우리와 놀아 주던 선배들은 어느 순간부터 과 행사에 나타나지 않기 시작했다. 모두가 미래를 위해 바쁘게 살고 있다는 것을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러는 동안 나는 사범대 부속학교에 참관 실습도 다녀오고 청소년 학습 멘토링도 하면서 내가 학교라는 공간, 그리고 교사라는 일과 잘 안 맞는다는 사실을 뒤늦게야 깨닫고 혼란에 빠졌다. 1학년 겨울방학부터 학내 자치언론 활동을 하면서 글을 쓰고 책을 만드는 일에 재미를 붙이기 시작한 점도 혼란에 한몫을 보탰다. 잠시 언론사 취업에 관심을 가졌던 적도 있다. 그러나 난 내 자신이 하루 8시간 이상의 숙면을 취하지 못하면 불행해지는 사람이란 걸 잘 알고 있었고, 잠도 포기하고 평범한 주말을 보내는 것도 포기하고 살 만큼 내가 그 일을 하고 싶은 건지 판단이 안 섰다. 무엇보다도 주요 신문사 몇 곳에서 인턴을 하고 글 잘 쓰기로 소문이 나 있던 선배가 계속해서 언론사 공채에서 줄줄이 고배를 마시는 걸 보니 겁이 났다. 아, 저런 분이 떨어지는데 내가 되겠는가. 아, 대체 난 뭘 해 먹고 살아야 하나.
교사가 될 거라던 굳건한 믿음은 깨졌고, 뒤늦게 찾아온 다른 꿈은 내가 가지기엔 너무 멀어 보였다. 이런 혼란들 속에서 난 자꾸만 불안해졌다. 목표가 분명치 않으니 무엇을 해야 할지도 몰랐다. 일단은 1학년 때 망한 학점부터 살려 볼까. 머릿속에 제일 먼저 떠오른 건 학점이었다. 어딜 가든 다 기본적으로 보는 것이 학점이니까. 그러나 재수강할 과목을 보려고 성적을 확인하다 보니 한숨이 나왔다. 1학년 때 하고 싶은 거 좀만 참았어도 안 해도 됐을 고생을 지금 하고 있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내가 그때 엄청나게 대단한 일들을 한 것도 아니고 왜 그랬던 걸까, 이런 후회들. 문득문득 나는 자꾸만 과거의 행복했던 나마저 부정하려 들었다. 마치 그 시절이 아무런 성장도, 아무런 배움도 일어나지 않았던 무의미한 시간처럼 여겨졌다. 학점이라는 객관적 지표를 충족시키지 못했다는 이유 하나로 말이다.
오랜만에 다시 만난 괴물
하루하루를 나와 싸우면서 보냈던 것 같다. 지난 시간을 부정하다가 다시 긍정하다가, 내 자신에게 '이 자기관리도 못하는 멍청이'라고 쏘아붙이다가 그래도 그 빈틈들 때문에 네 삶이 더 풍족해지지 않았냐고 스스로를 다독이다가. 어쨌든 1학년 때와 달리 난 아무리 듣기 싫은 수업이라도 가서 딴짓을 하면 했지 되도록 결석은 하지 않으려 노력했고, 과제도 기한이 좀 늦더라도 꼭 제출하고자 했다. 일명 '학년빨'이 붙으면서 예전보다 힘을 덜 들여도 시험 점수도, 보고서 점수도 더 잘 나오는 기이한 현상도 벌어졌고, 그에 따라 자연히 학점이 예전보다 잘 나오기 시작했다.
학점이 어느 정도 오르고 졸업할 때가 가까워지니 공인 영어 시험을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4학년이나 돼서 처음 본 토익 시험의 결과는 부끄러웠고, 이 토익 시험에 내 서류 통과가 달려 있다는 생각이 드니 기분이 한없이 우울해졌다. 결국 여름방학에 강남의 유명 어학원 수강권을 끊었다. 그해 여름, 거의 200명이 한꺼번에 수업을 듣는 대형 강의실에서 난 강사가 별표를 치라면 별표를 치고 형광펜으로 줄을 그으라고 하면 형광펜으로 줄을 그으며 시간을 보냈다. 고등학교 때도 이렇게 공부하지 않았는데, 200명이 강사 말을 따라 별표를 치려고 일제히 고개를 숙이는 모습이 가끔은 웃기기도, 씁쓸하기도 했다.
그때 난 KBS에서 시행하는 한국어능력시험도 봤다. 방황하는 와중에도 자치언론 활동은 내 마지막 보루인 것처럼 놓지 않고 활동했는데 거기서 활동할수록 잡지나 책을 만드는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커졌다. 그래서 이 시험을 봐 두면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해서 공부를 시작했다. 그런데 '그래도 한국어인데' 하고 풀어 본 기출문제집은 절반이 틀렸다. 충격을 받은 난 곧장 유명한 국어 기본서를 사서 공부를 시작했다.
그리고 본 시험. 등급은 생각보다 잘 나왔다. 그래도 노력한 게 결실을 본 것 같아 혼자 좋아하고 있는데 왠지 묘한 기시감이 느껴졌다. 고등학교 시절 모의고사 성적표를 받고 좋아하던 내 모습. 고등학교 시절, 사실 100점과 94점이나 같은 등급으로 묶이는 등급에는 큰 감흥이 안 들었다. 전체에서 내가 어떤 위치에 있는가를 보여 주는 백분위, 늘 그게 더 중요했다. 그런데 한국어능력시험 성적표를 들고 있는 나 역시 그랬다. '백분위가 95구나. 그럼 100명이 있다 치면 나보다 못 본 사람이 95명이라는 거네.' 예전에 한 선배가 취업 준비를 하며 자기 안의 괴물을 보았다고 했는데 그게 어떤 건지 알 것 같았다. 나도 내 안에서 괴물을 봤다. 나보다 뒤떨어진 95%의 존재로부터 얻어진 자신감을 먹으며 무럭무럭 커 가는 괴물을.
스펙이 문제다, 라고 말하고 싶지 않은 이유
한 친구와 '스펙'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 보니 친구가 그런다. 스펙 열풍이 대학생만의 문제인 것 같진 않다고, 취업이라는 시급한 문제가 코앞에 있다 보니 더 두드러져 보일 뿐이지, 우린 사실 초·중·고 시절부터 그렇게 살아왔다고. 그리고 대학 졸업하고도 아마 다르지 않을 거라고. 내가 취업 준비를 위해 이런저런 시험을 보면서 만난 괴물도 갑자기 난데없이 등장한 손님이 아니라 어린 시절부터 내 안에서 함께 자라 온 녀석이었다. 대학에서 아무리 상대평가를 한다고 해도 그건 고등학교 시절 모의고사 성적표에 매겨지던 백분위만큼 노골적인 줄 세우기는 아니었기 때문에, 다만 내가 인식을 잘 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뿐이었다. 내가 사는 세상은 여전히 고등학교 시절의 모의고사 성적표가 갖추고 있던 모양새에서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가지 않은 채 멈춰 있었다. 내가 얼마나 낭만적으로 현실을 인식하고 있었는지, 취업을 준비하면서 깨달았다.
"요즘 대학생들이 스펙 쌓기에만 너무 열중하는 것을 보면 안타까워요.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했으면 좋겠어요." 여느 때처럼 인터넷에서 이런저런 기사들을 보는데 한 기사가 눈에 들어왔다. 사회적 기업을 만든 한 20대의 인터뷰 기사. 인터뷰의 주인공이 요즘 대학생들에게 보내는 조언에 나는 잠시 친구의 말을 떠올리며 '우리만 그런 것도 아니잖아요' 싶다가, 그녀가 말하는 스펙 쌓기에만 너무 열중하는 대학생이 나인가 싶어 움찔하다가, 이내 아니야 난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기 위해서 이 시험들을 보는 것뿐이라며 자기방어를 하다가, 그런데 이 시험 공부하는 거 너무 재미없어서 사실 안 볼 수만 있다면 안 보고 싶다고 엉엉 대며 그녀 앞에 이실직고했다. 당신에게 '사회적 기업 활동도 스펙으로 보여요'라고 잠시 외쳤지만 사실은 부러워서 그랬다고, 나도 영어 점수가 없고 증명서가 없어도 내 경험들을 인정해 줄 그런 직장에서 일하고 싶다고, 내 딴에는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 사이에서 균형을 맞춰 보며 살려고 노력했는데 그게 갈수록 힘들다고, 당신은 그렇지 않았냐고 다른 얘기들도 덧붙이면서.
바쁘다 너무 바쁘다
걸으면서는 문자도 못 써서 친구들에게 '하등 동물'이라고 놀림당하던, 도저히 멀티플레이가 안 되던 나도 상황이 급하니 멀티플레이가 됐다. 지난 학기 수강 신청 가능 최대 학점인 21학점을 복수 전공할 과목들로 꽉 채워서 듣는 동시에, 초과 학기자라 기초생활수급자임에도 불구하고 장학금을 한 푼도 받을 수 없는 탓에 근로장학생 일과 아르바이트를 했다. 과제가 거의 매일같이 있었고 일도 거의 매일같이 있었다. 하나가 끝나면 하나가 또 시작되고, 그 일이 끝나면 또 다른 할 일이 시작되는 피곤한 나날이 계속됐다. 이렇다 보니 토익 점수를 더 올려야 한다는 생각은 늘 하면서도 토익 책을 붙들고 앉아 있을 여유가 도저히 없었다. 그런데 주변에선 '어떤 선배가 토익 시험 두 번 만에 900점을 거뜬히 넘기더라', '누구는 토익이 만점이라더라' 하는 이야기가 자꾸만 들려왔다. 나는 자꾸만 나 혼자 멈춰 서 있는 것 같아 불안했다.
교육학 공부가 재밌어서 시작한 복수 전공은 복수 전공이다 보니 안 듣고 싶은 과목까지 들어야만 하는 경우가 생겼다. '세상에 하고 싶은 일만 하고 어떻게 사니.' 내가 별로 좋아하지 않던 말들을 자꾸만 자신에게 위로랍시고 들이밀었다. 때때로 안 듣고 싶은 과목 수업 시간에 다른 책을 읽거나 수업과 전혀 상관없는 글을 쓰기도 했는데, 이럴 거면 대체 왜 이 수업을 듣나 하는 회의가 들기도 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이런 생각들이 올라왔다. 그냥 듣고 싶은 과목만 듣고 복수 전공을 하지 않으면 내가 교육에 얼마나 관심이 많고, 얼마나 고민을 많이 했는지 상관없이 난 교육에 전문성이 없는 사람으로 여겨질 거라는 생각. 언론사나 출판사나 들어가는 길이 좁으니 안 되면 교육학 복수 전공한 거 가지고 기업 인사부나 교육부라도 지원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 그것도 될 보장이라고는 없지만 본래 '보험'이란 게 다 그런 거 아니겠는가. 아, 어느 순간 내가 좋아해서 시작했던 공부는 보험으로 변질돼 있었다.
주변의 친구들도 보험이란 말을 자주 썼다. 특히나 크게 하고 싶은 마음은 없는데 왠지 해야만 할 거 같을 때 자기 자신, 혹은 타인을 설득시키는 차원에서 보험이란 말이 자주 사용됐다. "내가 하고 싶은 일에 꼭 필요한 건 아닌데 혹시 모르니까", "그래도 나중에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지금 힘들어도 일단은 참고 해. 해 둬서 나쁠 건 없잖아". 우리의 대화를 곱씹다 보면 대한민국 보험 업계의 미래는 세계 어느 곳보다 밝을 거라는 생각이 들곤 했다.
그러나 보험이 될 수 있는 활동이란, 다시 말해 취업이라는 위급 상황에서 써먹을 수 있는 활동이란 정해져 있었다. 공모전을 준비하는 과정이 아무리 치열했다 하더라도 수상을 하지 못하면 소용이 없었다. 봉사활동과 같이 예전엔 스펙으로 분류되지 않던 활동마저 수료증을 발급받아 이력서에 기재할 수 있는 형태가 되어야 했다. 물론 수상을 하지 못하더라도, 수료증이 없더라도, 기업에서 주최한 국토대장정이 아니라 나 홀로 다녀온 전국 일주라 해도 인정받을 수 있는 방법은 있다. <스토리가 스펙을 이긴다>는 유명한 책도 있지 않은가. 나만의 스토리로 만들어 내면 된다! 하지만 그 스토리와 스펙이라는 것의 차이를 잘 모르겠던 나는 여전히 내게 객관적으로 내 경험을 인정받을 증거가 없다는 사실에 불안을 느꼈다. 스토리든 스펙이든 어쨌든 둘 다 내 경험의 의미를 내가 느끼고 고민한 그대로가 아니라 누군가에게 선택받을 수 있도록 예쁘게 각색해야 한다는 점에선 차이가 없는 것 아닐까. 사실 애초에 인사 담당자들이 듣고 싶은 스토리란 것도 이미 정해져 있지 않을까. 경험의 종류는 각기 다르더라도 우리가 스토리를 통해 보여 줘야 할 메시지는 결국 '나 긍정적이고 사교성도 좋고 도전 정신도 흘러넘치는 사람인데 그 도전 정신이 회사의 명령과 지침 앞에선 발휘되지 않으며, 창의적이긴 한데 그것도 현 체제를 위협할 만한 위험한 수준은 결코 아니야' 아닌가. 그런 걸 원하는 거라면 내가 대학에 와 한 모든 경험들을 끌어모아도 내가 회사에 보여 줄 수 있을 만한 스토리란 없었다.
유일하게 숨 쉴 수 있었던 공간
정신없이 사는 와중에도 자치언론 활동만큼은 손에서 놓질 못했다. 마감 기간에는 내가 이걸 왜 했나 싶고, 머리가 부서질 것 같지만 우리가 만들어 둔 책을 보면 흐뭇했고 언제 그런 고민을 했냐는 듯 또 다음 호를 준비했다. 내게 자치언론이란 공간은 대학에 다니는 동안 내가 유일하게 내 호흡대로 살아도 괜찮았던 공간, 내 상처나 고민이 타인에게 어떻게 비춰질지 고민하지 않고 말할 수 있었던 공간이었다. 이곳에서 난 처음에 그냥 나의 사소한 불편함에서 시작한 고민이 거기에 여러 사람의 고민과 삶이 덧붙여지면서 예상하지 못했던 모양으로 발전해 기획이 되고 특집이 되는 재미난 경험도 많이 했다. 아무와도 공유되지 못한 채 끝날 수 있었던 나의 고민들이 우리 책을 집어 들 3000여 명의 학우들과 함께 나눌 수 있는 이야기가 된 것이다.
"제가 좀 더 일찍 들어왔으면 졸업 앞두고 그렇게 흔들리지 않았겠단 생각이 들더라고요. 날 좀 붙잡아 줄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어요." 이번에 대학원에 진학하게 된 신입 편집위원 언니가 이 말을 하자 앉아 있던 구성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말은 안 했어도 조금씩 이 공간에서 위로받고 있었나 보다. 생각해 보면 나도 해야 할 일들에 대한 강박감에 제대로 놀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해야 할 일들을 제대로 하는 것도 아니던 힘든 때에 '대학생, 놀자'라는 기획을 하면서 힘을 얻은 적이 있었다. 같이 기획에 참여했던 언니들의 모습을 보며 '와, 저렇게 알차게 놀 수도 있구나' 하고 깨달음을 얻기도 하고, 마음껏 놀기 힘든 우리네 현실을 나누며 '나만 그런 게 아니구나' 하는 위로를 받기도 했다. 함께 고민을 나눈다는 건 서로가 혼자 울다 쓰러지지 않도록 지탱해 주는 위대한 일이었다.
그런데 점점 졸업과 취업 준비로 바빠지면서 난 자연히 해야만 하는 의무라는 게 없었던 이 공간을 가장 먼저 뒷 순위에 놓고 살기 시작했다. 회의도 잘 안 나가고 다른 이들의 글을 거의 읽지도 못했다. 무엇보다도 취업을 하려고 준비하다 보니 자치언론에서 하는 고민들과 내가 하는 일이 자꾸만 공존할 수 없는 일처럼 느껴졌다. 매달 토익 시험을 열심히 치고, 복수 전공 수료에 열을 올리며, 매일 취업 준비 게시판에서 내가 할 만한 인턴십이나 공모전이 없을지를 뒤지고 있으면서, 자치언론에 가선 경쟁 위주의 교육을 비판하고, 빈곤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 없이 '피어라 청춘'을 외치며 가는 해외 봉사 활동을 비판한다는 게 어쩐지 가식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꼭 가식이 아니라 하더라도 두 가지를 동시에 한 마음속에 품고 한다는 건 어려웠다. 자치언론에서 글을 쓰는 행위란 기본적으로 나와 세상이 부딪히는 지점에서 시작되는 것이었는데, 취업 준비란 건 나에게 누군가 그건 옳지 못한 자세라고 하면 당장 뜯어고칠 준비가 돼 있어야 하고, 이 일을 위해선 이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하면 연기를 해서라도 그런 사람처럼 보여야 하는 과정이었다. 다르게 말하자면, '착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 과정이었다. 실제로 그랬다. 앞머리가 귀여웠던 내 친구는 취업 상담 중에 너무 어려 보이면 기업에서 안 좋아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앞머리를 기르기 시작했다. 대기업 임원 면접까지 올라갔던 한 친구는 그랬다. 그 회사가 원하는 인재상이 '글로벌 인재'라면 사람들은 갑자기 미국 영화에 나오는 주인공들처럼 적극적이고 쿨하며 개방적인 마인드를 가진 사람처럼 연기를 시작한다고, 기업마다 각기 다른 인재상에 맞춰 연기를 바꾸기가 힘들다고 말이다. 나 역시 앞머리를 기르는 것까진 아니더라도 사회에서 좋아하지 않을 만한 내 단점이나 부족한 면들을 남에게 노출하면 안 된다는 강박감에 시달렸다. 당시 난 학교에서 진행하는 청소년 멘토링 프로그램 기획팀에 참여하려고 면접을 봤는데 마치 회사 면접 자리에 온 것처럼 바짝 긴장해 일장 연설을 했다. 그런 나를 보며 담당자분께서 웃으며 말씀하셨다. "편하게 말하셔도 돼요." 딱히 그 면접 때문에 긴장했다기보다도 그 당시 내 정신 상태가 누굴 만나든, 어딜 가든 그랬다.
그리고 다시 여기로
"은정아, 요즘 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모르겠어. 너에게 무슨 일이 있긴 한 것 같은데 그게 뭔지 본인조차도 잘 모르는 것 같아." 지난 학기 말, 오랜만에 만난 편집장 언니가 조심스레 건넨 말에 나는 갑자기 내가 왜 우는지도 모른 채 사람들이 북적이는 사범대 식당에서 서럽게 울었다. 언니가 한 말대로 난 안 그래도 그 즈음 지나치게 무덤덤한 내 마음 상태에 불안함을 느끼고 있었다. 예전에는 찾아보지도 않던 기업 연봉 순위를 찾아보고, 취업 준비 카페에 매일 들어가 다른 사람들 스펙을 구경하며 전의를 불태우고, 그러면서도 내 행동에 대해 전혀 문제의식을 가지지 않던 자신이 걱정되면서도, 한편으론 '남들 다 이렇게 사는데 나 혼자 뭐가 잘났다고 그러나. 일단은 취직을 하고 그 다음에 고민하자'며 자신을 다독였다. 그런데 그게 그냥 꾹꾹 참아 온 것뿐이었던가 보다. 잠자다가 수업 못 갈 때도 많았던 허술하기 그지없는 인간이 갑자기 회사에 당장 입성할 준비가 되어 있는 빈틈없는 '사회인' 연기를 하려니 엄청 피곤하기도 했겠지. 울면서 내뱉는 나의 말들에 그냥 "괜찮다"고 말해 주는 언니를 보다 보니 그동안 억지로 쓰고 있던 가면이 홀라당 벗겨지는 기분이었다. 그냥 아직 이 못나고 어린 모습을 남들에게 좀 더 보여 주면서 살아도 되겠다고, 이런 사람도 받아 주는 공간이 있겠지, 안 되면 내가 대출받아서 만들지 엉엉, 그 짧은 순간에 지금 생각하면 웃기기도 한 온갖 생각들이 머릿속을 지나갔다.
그리고 지난 겨울방학. 내가 대학 시절 동안 기댔던 자치언론처럼 졸업 후에도 어딘가 부빌 언덕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교육공동체 벗〉에서 하는 일리치 읽기 모임에 참여했다. 졸업 후 어디에서 내가 일하게 되더라도 내가 그동안 옳다고 생각하고 지키고 싶었던 가치들을 서로 지탱해 줄 수 있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공간이 꼭 필요하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기가 힘든 줄도 모르고 한참 잘못된 길로 가도 누구 하나 손 내밀어 잡아 줄 수 사람이 없겠다는 걱정이 들었다. 사범대 식당에서 날 울렸던 편집장 언니처럼 멍 때리며 살고 있을 때 또 한 번 날 울려 줄 그런 동료가 필요했다. 그런데 운 좋게도 학점도, 영어 점수도, 증명서도 요구하지 않고 면접 자리에서 저녁을 차려 주시며 "밥할 줄 알아?"를 묻는 이 공간에서 일을 하게 됐다. 그것도 내가 만들고 싶었던 교육 잡지를 만드는 일. 솔직히 지금도 놀랍다. 나의 취업 과정을 들려주면 친구들이 "엥? 뭐 그리 간결?" 한다.
"요즘 대학생들이 스펙 쌓기에만 너무 열중하는 것을 보면 안타까워요.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했으면 좋겠어요." 다시 사회적 기업에서 활동하던 그녀의 말. 벗에 취직한 걸 부러워하는 친구들이 상당히 많다. 하고 싶은 일 하면서 돈도 벌 수 있는 게 어디 흔한 일이냐고, 돈도 별로 못 벌 텐데 용기 있다며, 자기가 나중에 부자가 돼서 나를 후원해 주겠다는 깜찍한 말을 하는 친구도 있었다. 그간 내 안에 있었던 일들을 잘 모르는 친구들 중에는 내가 좋아하는 일만 하며 묵묵히 걸어오다가 이런 공간에서 일하게 된 것처럼 생각하는 친구들도 있었다. 그러면서 자기는 그렇지 않은데 넌 대단하다며, 괜히 내 앞에서 자기가 하고 있는 취업 준비 이야기를 하길 부끄러워하는 친구도 있었다. 그러나 사회적 기업의 그녀가 말한 것처럼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산다는 건 지금 이 사회에선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리고 이 세상엔 완전히 스펙 쌓기에만 열중하는 대학생도, 완전히 자기가 좋아하는 일만 하며 씩씩하게 사는 대학생도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다만 그 양쪽에서 균형을 잡으며 살아 보려 날마다 싸우며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그렇기에, 어쩌면 오늘도 인터넷에서 '스펙 쌓기만 해도 바쁠 시간에 이런 훈훈한 일을 하는 대학생 A모 군' 따위의 기사를 접하며 괜히 자기가 뭔가 잘못이라도 한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혀 있을 친구들에게 괜찮다고, 아니 안 괜찮아도 괜찮다고 말해 주고 싶다. 네가 살고자 얼마나 열심히 노력하고 있는지 안다고, 그래도 혹시나 너무 힘들면 나도 어디 식당에서 널 한번 울려 주겠다고, 연락하라고 말이다.
최은정. 대학에서 독일어를 전공하지만 독일어를 못하고 교육학을 복수 전공하지만 교육이 뭐냐고 물으면 머릿속이 '청순해지는' 사람입니다. 〈교육공동체 벗〉에서 현재 수습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아직 졸업은 안 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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