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년 전 실종된 자식 걱정에 단 하루도 두 다리를 뻗고 자지 못한 백옥심(71) 씨는 인터뷰 도중에도 하염없이 눈물을 쏟아냈다. 장례식을 앞두고 서울 종로구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사무실에서 만난 백 씨는 "아직도 눈만 감으면 (아들이) 아른거린다"며 답답함을 호소했다.

"요즘은 바나나가 '한 다발'에 몇 천 원 안 하죠? 근데 우리 치웅이가 실종됐던 때에는 바나나 '한 개'에 몇 천 원씩 했어요. 치웅이 어렸을 때 바나나 엄청 먹고 싶어 했는데, 그걸 하나 제대로 사주지 못해서 안타까워요. 길거리에서 바나나 파는 사람만 봐도 자꾸 죽은 치웅이가 생각나서 눈물이 나요."

1988년 5월 26일 새벽 백 씨의 아들 안치웅 씨는(당시 25살) 집 근처 교회 목사를 만나러 간다며 나간 뒤 행방불명됐다. 전라도 광주에서 고등학교까지 보낸 안 씨는 1982년 서울대에 입학 한 뒤 1985년 구로공단 대우어패럴 파업 사건으로 구속돼 1년간 감옥생활을 할 정도로 강성 운동권이었다.

그런 안 씨가 어느 날 행방불명이 되자 백옥심 씨는 지방에 위장취업이라도 하러 갔을까 싶어 실종 신고도 내지 못했다. 그런데 함께 활동해온 아들의 친구들에게 행방을 물었지만 아무도 아는 이가 없었다.

얼마를 찾았을까. 용하다는 점집에 가서 점도 봤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만이라도 알고 싶었다. 길흉화복을 잘 맞춘다는 중을 찾아가 아이의 생사를 묻기도 했다. 중은 아들이 반드시 돌아올 테니 걱정 말라고 했다. 하지만 아들은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렇게 말한 중은 나중에 뉴스를 보니 사기혐의로 구속이 됐다.

매일 밤 12시에 교회에 가서 기도도 드렸다. 뭐라도 하지 않으면 미칠 거 같았기 때문이었다. 백 씨는 "사람이 안 들어오니, 사람이 미칠 수밖에 없었다"며 당시를 회고했다.

▲ 1985년 농성 당시 대우어패럴 공장 모습. 기자들이 정문 앞에서 노조원들과 인터뷰를 하기 위해 모여 있다. ⓒ연합뉴스

"사람이 안 들어오니, 사람이 미칠 수밖에"

대학에 처음 들어갔을 때만 해도 백 씨는 아들 안치웅 씨가 남들이 말하는 '운동권'인줄도 몰랐다. 1년간 옥살이를 하고 난 뒤 국가기관원들이 아들을 감시하고 미행하기 전까지만 해도 백 씨는 자신의 아들이 평범한 대학생인 줄만 알았다. 늘 부모 말을 잘 듣는 착실한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안치웅 씨는 서울대 학생운동 지도조직 '민주화추진위원회' 핵심 구성원으로 활동했었다. 민주화추진위원회는 서울대학교 학생운동의 비공개 지도조직으로, 약칭은 '민추위'이다. 산하에 노동문제투쟁위원회, 민주화투쟁위원회, 홍보위원회, 대학 간 연락책 등 4개 기구를 두고 1985년 3월 삼민투쟁위원회(삼민투)를 결성, 5월의 서울 미국문화원 점거농성사건 등을 주도하였다.

또 청계피복노조 합법성 쟁취대회, 대우어패럴 동조 시위 등 민중 지원투쟁을 전개하는 한편, 1984년에는 민추위의 활동에 대한 평가, 올바른 운동방법, 정치 상황에 대한 분석 등을 내용으로 하는 정치적 성향의 신문 <깃발>을 두 차례에 걸쳐 발행하기도 하였다.

이로 인해 전두환 군사정권은 '깃발 전담반'을 설치했고, 미국 문화원 점거농성 사건 이후에는 서울 용산에 있는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전담케 했다. 이어 1985년 10월 29일 검찰은 민추위를 국가보안법상의 이적단체로 규정한 뒤, 관련자 26명은 구속, 3명은 불구속입건하고, 17명은 지명 수배했다.

검찰은 민추위 관련자들을 자생적 사회주의자들로 규정하였는데, 이후 이 사건과 관련해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 김근태 의장이 구속되어 고문기술자 이근안으로부터 물고문·전기고문 등을 받았다.

또 수배자 박종운 씨의 소재지를 파악한다는 이유로 서울대생 박종철 씨가 대공수사관들에 의해 불법 연행되어 조사를 받다가 고문·폭행 등으로 사망한 사건, 즉 박종철 고문치사사건도 민추위사건에서 비롯됐다.

"당시엔 쥐도 새도 모르게 끌려가 고문 받다 죽었다"

당시 민추위 사건 책임자로 구속돼 3년 1개월의 감옥생활을 한 문용식 나우콤 대표는 "당시 정권은 지명수배 된 학생들을 잡기위해 민추위와 관계된 사람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다"며 "나 역시도 1988년에 석방된 뒤 92년 문민정부가 들어설 때까지도 사찰을 받았다"고 설명했다.

문 대표는 안치웅 씨의 실종 사건을 두고 "다만 추정만 할 뿐"이라고 전제한 뒤 "미검거된 사람들을 잡기 위해 사찰을 하다가 사고가 발생했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박종철 씨의 경우는 알려졌지만 안치웅 씨의 경우, 쥐도 새도 모르게 대공분실로 끌려가 고문을 받다 죽었을 수도 있다는 것.

▲ 안치웅 씨. ⓒ유가협

문 대표는 "당시엔 운동을 하다 잘못되면 죽을 수도 있다는 걸 서로가 잘 알고 있었을 때"였다며 "어느 날 함께 활동했던 친구가 갑자기 사라지는 일이 번번이 발생했다"고 말했다. 문 대표는 "그런 와중에서도 안치웅 씨는 최전선에 서서 시대의 과제를 온 몸으로 안고 세상을 바꾸려 했다"고 덧붙였다.

세상 무엇을 줘도 바꿀 수 없는 아들을 잃은 어머니의 심정은 답답하기만 하다. 아들이 사라지자 견디지 못해 정신과 치료도 받아야 했던 백 씨였다. 백 씨는 "겪어보지 않았으면 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며 "한 마디로 미쳐 버린다"고 한 숨을 내쉬었다.

고 이한열 씨의 어머니 배은심 여사는 "자식 잃은 심정은 잃어 본 사람 만이 안다"며 "아마 안치웅 씨 어머니는 23년 동안 집 문을 열어 놓고 살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배 여사는 "분명 죽은 사람이 있는데, 죽인 사람이 없는 게 지금의 의문사, 실종사건"이라며 "죽인 사람은 아직도 세상을 살아가고 있을 텐데, 그런 거 생각하면 세상에 대한 원망이 크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시신도 찾지 못하고 장례식을 치르자니 가슴이 아프다"

안 씨가 사라진지 23년 만에 장례식이 치러진다. 오는 29일 서울대에서 초혼제가 진행된다. 초혼제는 시신이 없이 장례식을 치르는 것을 뜻한다. 안 씨의 묘지는 경기도 마석모란공원에 마련된다.

이제야 장례식이 진행되는 이유는 지난해 7월에서야 비로소 '안치웅을 민주화운동 관련 행방불명자로 인정한다'는 민주화 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 재심의 결정이 나왔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결과를 받기까지도 긴 시간이 걸렸다. 백 씨는 아들의 명예를 회복하고자 2000년 12월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 진상규명 진정서를 제출했다. 하지만 2008년 11월 민주화운동 사실은 인정되나 행방불명이 민주화운동과의 연관성을 밝힐 수 없어 진상규명을 할 수 없다고 결정했다.

2009년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및보상심의위원회에서도 민주화운동을 이유로 행방 불명한 것으로 인정하지 않음을 결정했다. 하지만 2010년 7월, 재심을 청구해서 민주화운동으로 인한 행방불명자로 50% 인정받았다. 이 과정에서 백 씨는 재심을 앞두고 민주화보상심의위에서 2주간 농성을 벌이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아들인 안 씨가 어디에서 어떻게, 누구에 의해 죽었는지 알지 못한다. 백 씨는 "이제라도 아들의 명예가 절반이나마 회복된 점은 다행이라고 생각한다"며 "하지만 시신도 찾지 못하고 이렇게 장례식을 치른다는 게 가슴이 아프다"고 눈물을 흘렸다. 23년 만에 장례식을 치르면서 백 씨가 여전히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