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나리오 작가 최고은 씨의 죽음이 알려진 이후 문화예술인의 '생존'이 화두로 떠올랐다. 특히 최 씨가 속했던 영화계의 경우 제작사에 비해 약자인 영화 스태프, 시나리오 작가에 대한 불합리한 관행이 알려지면서 제도 개선 요구도 높다.
15일 정두언 한나라당 의원이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개최한 '한국 영화예술계 창작환경 개선을 위한 간담회'에서는 "최고은 씨의 죽음 이후 지나친 동정론이나 일회적인 사건으로 지나치지 않고 법, 제도적인 구체적 개선방안이 나왔으면 한다"는 당부가 이어졌다.
"영화 스태프보다 더 열악한 시나리오 작가"
이날 간담회의 발제를 맡은 김정진 영화인 복지재단 대외협력위원장(영화감독)은 영화 스태프와 시나리오 작가를 대표적인 '워킹 푸어'로 꼽았다. 이 중에서도 사전에 작업을 내놓는 시나리오 작가는 영화 스태프보다 더 불리한 처지에 놓여있다는 진단이다. 김 위원장은 "스태프는 임금을 못받으면 요구할 수 있지만 작가는 투자가 되기 전에 노무를 제공하기 때문에 더 열악하다"고 말했다.
그는 "처음 데뷔하는 작가는 통상 3000만 원 정도로 첫 시나리오를 계약하지만 문제는 영화가 다 완성되어야만 완불이 된다는 것"이라며 "영화제작사에서는 처음에 500만 원이나 1000만 원 정도만 주고 작업을 진행시키거나 심지어는 그냥 진행비 명목으로 월 몇 십만 원 정도를 주면서 일을 시키는데 시나리오 개발 기간은 정해져 있지 않아서 그 돈을 받고 6개월에서 1년 정도를 일하게 된다"고 말했다.
그는 "나가고 싶어도 계약 때문에 회사에 묶여 있어서 일은 계속 하지만 돈은 받지 못하는 악순환이 계속된다"면서 "심지어는 1000만 원에 계약하는 경우도 있다. 작가는 많고 제작사는 돈이 없으면 부르는게 값이 된다"고 말했다.
영화산업노조 영화인 신문고에 접수된 2009년 임금체불 총액은 17억 2200만 원에 달한다. 2009년 467명이 42건의 임금체불 피해를 입었고 평균 건별 체불금액은 약 4100만 원이다. 2010년에는 전 해에 비해서는 줄었으나 2010년에도 7월까지 체불 총액은 약 6억 8000만 원에 달한다.
이중 실제로 시나리오 작가들이 신고하는 사례는 매년 5건 정도에 그친다. 김 위원장은 "영화판이 좁아 문제를 삼으면 다른 일을 못할까 걱정하는 경우가 많고 이 때문에 신고를 꺼리거나 신문고의 존재도 모르는 작가가 많다"며 "특히 신인은 돈을 안 준다고 해서 노조에 신고하거나 소송하기도 어려운 것이 현실이라 실제로는 훨씬 더 많은 작가들이 부당한 처우를 받고 있다"고 말했다.
"시나리오 작가들의 저작권은 없다?"
지상학 한국시나리오작가협회 이사장은 "지나친 동정은 사양하겠다"며 최고은 씨의 사망 이후의 언론 보도에 거부감을 드러내면서 "당장 해결되어야 할 시급한 문제가 있다. 시나리오 작가들의 저작권이 확보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같은 시나리오 작가더라도 방송작가들은 자체 방송이나 케이블방송에서 재방송될 때 재방료가 받고, 경우에 따라 해외 판매 수익도 받을 수 있어 지속적인 수익이 생기는 반면 시나리오 작가는 그렇지 못하다는 설명이다. 시나리오 작가는 소위 '대박 작품'을 쓰더라도 이익 분배에서 혜택을 받는 경우는 거의 없고 DVD 판매 등 2차 시장에서의 수익을 두고도 마찬가지라는 것.
지상학 이사장은 "물론 방송작가들이 이같은 권리를 확보하기까지 절필 운동을 벌이는 등 투쟁과 고통을 겪었고 단체 협약을 통해 확보한 것"이라며 "그러나 방송은 당시 3개 지상파 방송 뿐이었던 반면 영화 시나리오의 경우는 회사가 많아 상황이 다르다"고 말했다.
지 이사장은 "이를 위해 시나리오작가 협회에서 한국영화제작사 협회와 논의하기 위해서 노력했지만 무관심, 무성의로 성과를 내지 못했다"며 "제작사 협회의 답은 '제작사들이 따르겠느냐', '투자사가 싫어할 것'이라는 식이다"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주선해서 제작사협회, 투자사 모임 등을 모아 시나리오 작가의 저작권이 보장되도록 주선해달라"고 촉구했다.
김정진 위원장도 "특히 영화의 출발점은 콘텐츠인데 투자를 받을 때는 흥행배우 캐스팅이 관건이 되다보니 시나리오 투자에는 소홀한 모순이 있다"며 "한국의 시나리오 고료는 외국에 비교할 때도 턱없이 낮은 액수다. 영화산업의 열매가 몇몇 흥행배우나 배급사, 투자사에 집중되는 구조가 바뀌어야 한다"고 말했다.
"예술인이 주장하는 것은 '복지'가 아니라 '권리'"
한편 이날 토론회에서는 대기업, 투자사 중심의 영화예술계 창작 환경 바뀌어야 한다는 지적과 함께 문화예술인들을 위한 촘촘한 문화 안전망을 구축해야 한다는 제안이 재차 나왔다. 이와 관련 영화산업노조에서는 프랑스의 예술인을 위한 실업급여 제도인 '엥떼르미땅' 제도를 들어와 한국식 '실업부조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 관련기사 :"굶어죽을 때까지 뭐했냐고? 영화판을 아는가?")
김 위원장은 "문화산업은 다른 산업보다 빈부 격차가 크고 성공 확률이 더 낮다는 차이가 있을 뿐 모든 산업이 적자 생존의 법칙에 따라 지배되고 있는 것 아니냐"며 "문제는 보호장치가 없다는 것이고, 정당한 임금 지급이 이뤄져야 하는데 그에 따른 제도적 뒷받침이 없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현재 국회에 △문화예술인을 근로자로 인정 △고용보험 및 산재보험 가입 △한국예술인복지재단 설립 및 기금 마련 등을 뼈대로 하는 2개의 '예술인 복지 법안'이 계류 중인 것을 들어 신속한 논의를 촉구했다. 그는 "문화예술종사자들이 주장하고 있는 것은 '복지'가 아니라 '권리'다. 배려가 없어서 굶는 게 아니라 당연한 권리를 주장할 수 없게 하는 구조가 문제"라고 꼬집었다.
문화체육관광부 영상컨텐츠과 김정훈 과장은 "대규모 자본을 가진 투자사, 배급사들이 영화제작 현장에 큰 입김을 행사하는 현실에서 어떻게 '상생 구조'로 바꿀 것인가가 관건"이라며 "지난해 대형 유통사와 소수의 열악한 콘텐츠 업계 간의 상생 협의체를 개설해 논의를 진행한 것처럼 영화계도 논의의 장을 마련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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