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화감
8일 오후 성미산에 직접 찾아가 봤다. 성서초등학교 후문 쪽 숲길로 접어들어 북쪽으로 올라 20분도 채 안 걸려 정상을 밟은 뒤 동쪽으로 내려오다 보니 녹색 쇠그물과 날카로운 발톱이 선 은빛 윤형 철조망이 길을 막았다.
▲ 철망 펜스와 철조망으로 둘러쳐진 공사 현장. ⓒ프레시안(김하영) |
철망을 따라 한 바퀴를 돌았다. 홍익학원이 홍익대학교 사범대학 부설 초등학교, 여중학교, 여고등학교 이전을 위해 2006년 매입한 뒤 최근 공사를 시작한 곳으로 일부 나무들이 벌목돼 있었다. 주민들이 이용하던 배드민턴장을 돌아 숲의 경계 끝에 다다르니 성서초등학교 정문에 도착했다. 홍익학원이 지으려는 '홍익대학교 사범대학 부설 초등학교'가 공립인 성서초등학교 바로 옆에 붙어 있는 것이었다.
산 정상에서 만난 40대 주부가 "학교 짓는 거 좋죠. 그런데 비싼 등록금 내고 다니는 사립 초등학교를 이렇게 공립학교 바로 옆에다 지으면 어떤 학부모가 좋아하겠어요"라고 말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이런 감정은 성미산 인근 주민들이 꾸린 대책위 소식지 1호에 담긴 '성서초등학교 학부모들의 입장'이라는 성명에 그대로 드러난다.
"먼저 공립학교와 사립학교 학생간의 위화감 조성이 우려된다. 현재 설계대로 홍익학원이 이전한다면 담벼락 하나를 두고 공립초교와 사립초교가 붙어있게 된다. 이때 위화감을 느끼고 극복해야 하는 주체는 결국 우리 아이들이 될 것이라는 생각에 성서초 학부모들은 가슴이 아프고 분노가 차오른다."
▲ 공사장 입구에 걸려 있는 홍익 부속학교 위치 조감도. 홍익 부속학교 바로 옆에 성서초등학교가 위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프레시안(김하영) |
민감한 문제다. 한 주간지의 소개 기사를 보면 홍대 사범대 부속 초등학교는 한 학년에 3학급(학급당 32명) 96명으로 전교생은 600명 정도인데, 급식비와 통학비를 포함해 분기당 등록금만 180만 원 가량이다. 특히 미국 초등학교 교과서로 주당 14시간의 영어몰입교육을 실시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학교 안에는 상당한 수준의 오케스트라와 아이스하키팀도 꾸려져 있다. 학교에서는 목동 2개 노선을 비롯해 강서, 마포, 영등포를 운행하는 6개 노선의 스쿨버스를 운행하고 있다.
한 성서초등학교 학부모는 "듣기로는 홍대 초등학교 아이들 절반은 부모가 자가용을 몰고 등하교 시킨다고 하더라"면서 "성서초등학교 다니는 애들은 대부분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데, 아침 등교 때마다 학교 가는 길에 스쿨버스는 물론이고 자가용에서 교복 입은 아이들이 우루루 내리면 길 막히는 건 둘째 치고 아이들이 상처를 받지 않을까 걱정"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이는 나중 일이고, 당장 아이들의 등하굣길 안전 문제가 가장 큰 쟁점이다. 홍익학원의 학원 개발 현장 입구가 성서초등학교 등하굣길과 겹치는데, 이 지역은 도로 폭이 좁고 자전거도로가 설치된 곳으로 공사 차량이 자전거도로와 인도를 타고 공사장으로 들어가는 과정에서 아이들이 무방비로 사고 위험에 노출된다는 것이다. 게다가 이 지역은 우측으로 굽은 도로여서 시야 확보에도 제한이 있다. 1년 반의 공사 기간 동안 6600대의 덤프트럭과 300대의 중장비가 출입하는 상당한 규모의 공사임을 감안할 때 학부모들이 불안해 하고 있다. 이에 마포구청은 성서초등학교 학부모들의 의견을 반영해 일단 도로점유허가를 유보 시켜 놓은 상태다.
경찰청 자료에 따르면 '스쿨존'에서 2009년 한 해에만 2113건의 교통사고가 발생해 43명이 사망하고 2975명이 다친 것으로 나타났다.
이런 탓에 성서초등학교 학부모들이 홍익학원의 학교 개발에 가장 적극적으로 반대하고 있다고 한다. 성서초등학교 학부모들은 성명을 통해 "공사로 인해 아이들은 소음과 먼지에 무방비로 노출될 것이며 특히 아토피나 천식, 비염이 있는 아이들은 매우 심각한 악영향을 받게 될 것"이라며 "공사 기간 중에 학생들의 학습에 미칠 영향과 통학로 안전 역시 문제"라고 반발했다.
땀으로 일군 자연 생태 숲
▲ 7~8일 열린 '성미산 생태캠프' 포스터. 전래놀이, 공방, 생태장터, 인권영화제, 주민 동아리와 인디밴드들의 음악회, 캠핑 등의 일정 등으로 짜여져 있다. ⓒ프레시안(김하영) |
1994년 젊은 맞벌이 부부 20여 가구가 '공동육아'를 매개로 공동체를 꾸리기 시작한 이후, 발전과 확장을 거듭해 공동육아를 하는 어린이집만 이 일대에 4개로 늘어났고, '성미산 학교'라는 초-중-고 과정의 대안학교도 생겨 학생수가 130명으로 불어났다. 이 뿐만 아니라 생활협동조합과 재활용가게, 카페, 유기농 식당까지 공동 운영하며 공동체 인프라를 다져가는 등 공중파 다큐멘터리에 방영될 정도로 명실상부한 도심 공동체 마을이 됐다.
또한 성미산 인근에는 '환경정의', '함께하는시민행동' 등 8개 시민단체가 옮겨왔고, 주변에는 '민중의 집'을 중심으로 진보신당 등 진보정당 당원들의 활동이 활발하다. 특히 최근에는 집세가 천정부지로 뛰는 홍대 인근에서 밀려난 젊은 예술가들이 늘어나고 있다. 성미산 공사현장 인근에 쳐 놓은 천막을 주민들이 3시간씩 돌아가며 지키는데, 얼추 500여 가구가 참여하고 있다고 한다. '성미산 지키기'에 참여하는 주민만 최소 1000~1500명에 이르는 셈이다.
이들에게 성미산은 공동체의 매개체와 같은 곳이다. 도심에서 쉬 상상할 수 없는 '아이들에게 흙을 만지며 놀게 해주겠다'는 이상을 실현할 수 있게 해줬다. 그렇다고 아이들만을 위한 산인 것만도 아니다. 숲 속에서는 실력파 인디밴드들은 물론이고 '엄마, 아빠'들이 만든 동아리 밴드의 공연이 열리고 주민들끼리 모여 환경·인권 영화제도 연다. 그림을 그리거나 사진을 찍는 사람들의 전시회는 물론.
▲ 성미산 인근 아이들이 나무를 심은 뒤 걸어 놓은 이름표. 아이들은 자신이 심은 나무를 꾸준히 관찰하며 생태 일지를 쓴다. ⓒ프레시안(김하영) |
성미산 산책로를 걷다 보면 무릎 높이의 작은 나무들이 제법 많이 심어져 있는데, 나무 마다 이름과 날짜가 적힌 이름표가 걸려 있다. 최근에 걸린 이름표는 대부분 2010년 4월 4일. 식목일을 앞두고 심은 것들이고, 그 이전에 건 이름표들은 비와 바람에 글씨가 지워진 것도 제법 된다. 과거 2003년 배수지 개발 갈등 당시 "산이 아카시아 천지여서 쓸모없는 숲이다"는 서울시 측의 '성미산 비하'도 주민들이 직접 나서 숲을 가꾸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2009년에는 산림청장으로부터 상을 탈 정도였다. 2003년에 심은 잣나무가 지금은 허리 높이까지 자라 있었다.
성미산은 억척스런 공동체 사람들만의 것도 아니다. 예전부터 구청에서 토사 유출을 막는다는 이유로 주민들에게 권장해 성미산 주변에 텃밭을 일궜고, 오래 전부터 살던 노인들은 산을 산책하다 병든 나무가 있으면 사비로 영양제 링거를 사다 꽂아주며 보살핀다고 한다. 이 덕분인지 성미산 일대는 생태환경 평가 최상급인 '비오톱(biotop) 1등급지'로 선정됐다.
▲ "아카시아 천지의 버려진 산"이라 불리던 성미산. 지금은 소나무, 잣나무, 전나무 등의 군락이 제법 형성되고 있다. ⓒ프레시안(김하영) |
2300명 학교 생기는데 철저히 배제당한 주민들
이처럼 공동체 문화가 발달한 곳에 아파트나 사무실도 아니고 주민들의 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학교, 그것도 2300명 규모의 초중고교가 들어서는데 주민들과 아무런 대화가 없었는지 의문이 든다. 초등학교와 달리 여중고는 학군에 의해 학생들을 배정받는 일반 학교다.
성미산주민대책위 문치웅 위원장은 "주민설명회나 공청회 같은 것이 한 번도 없었다"고 말했다. 2006년 홍익학원에서 한양학원으로부터 부지를 매입하고 2008년 해당 부지를 '체육시설'에서 '교육시설'로 도시계획 변경을 한다는 마포구청의 의견 청취 공람이 뜰 때까지 누구 하나 공식적으로 의견을 묻거나 설명하는 이가 없었다.
2009년 서울시 도시계획위원회가 '용도 변경' 최종 승인을 하기 전 오세훈 시장과 면담하기도 했으나 도시계획위원회는 2009년 8월과 9월 단 두 차례의 회의만으로 도시계획변경을 인가해줬고, 서울시교육청은 2010년 5월 건축승인까지 내줬다.
분개한 성미산주민대책위는 정보공개청구, 감사청구, 민원제기 등 발품을 팔면서 홍익학원의 학교 이전 계획 및 공사의 문제점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앞서 지적한 공사 중 안전 문제, 자연 숲 훼손 문제 외에도 홍익학원의 설계가 한강유역환경청이 요구한 조건에 미달된다는 의혹을 찾아냈다. 석연찮은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서울시가 조례 제정을 통해 '비오톱 1등급지 절대 보존'에 나섰는데 공교롭게도 시행일이 6월 1일이었다. 성미산은 80% 이상이 비오톱 1등급지이지만, 서울교육청은 조례 시행 전인 5월 26일 건축승인을 내줘 성미산은 '해당 사항 없음'이 돼버렸다.
▲ 성미산 전망대에서 바라본 북쪽 풍경. 가장 가까이 보이는 산이 서대문구 연희동 일대의 궁동산. 오른쪽이 안산, 뒷편의 희미하게 보이는 능선이 북한산이다. ⓒ프레시안(김하영) |
게다가 2300명 규모의 초중고가 들어서는데 교통영향평가 등이 제대로 이뤄졌는지 의문이다. 하교 시간이 되면 학교 근처에는 학원 버스와 승합차 수십 대에 학부모들 자가용까지 몰린다. 또한 학교가 들어서면 이주 수요는 물론 주변에 각종 상점과 학원이 들어서며 부동산 가격이 오르는 등 마을 공동체에 끼치는 영향이 적지 않다. 그런데 이에 대한 논의가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는 것이 성미산주민대책위 측의 주장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홍익학원 측이 주민 설명회를 열어 설득에 나서거나 관청 주도의 공청회 한 번 열리지 않았다. 성미산주민대책위에 따르면 교육청이 6월 2일 주민과 학교 측 당사자를 불러 간담회를 열었지만 이 역시 5월 28일 건축승인이 떨어진 뒤였다.
성미산주민대책위는 최근 서울시의회 도시관리위원회에 보낸 청원서를 통해 "이러한 어려움들이 서울시와 교육청의 결정과정 이전부터 배태돼 있었음에도, 서울시의 무책임한 정책결정 및 집행으로 이제 주민과 홍익학원, 주민과 건설회사, 찬성하는 주민과 반대하는 주민의 갈등으로 비화돼 성미산 주민공동체 전체를 위협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단지 성서초등학교 학부모들이 아이들의 안전문제에 대해 구청에 민원을 제기하자 구청이 학부모와 시행사를 모아 놓고 의견을 청취할 뿐, 학부모가 아닌 주민들의 의견을 철저히 무시되고 있는 셈이다.
성미산주민대책위 법률행정팀 서복경 씨는 "도시계획위원회 회의록 공개를 신청했는데, 공개하지 않고 나중에 열람만 시켜줬다"며 "회의록을 보니 홍익대 교수가 위원으로 참여해 '저희 홍익대는…'이라는 식으로 이해 당사자인 것처럼 발언하고 있었다"고 분개했다.
서 씨는 또 "홍익학원 측에 수차례 공문을 통해 면담을 요청했으나 학원 측에서는 '민원이 있으면 홍익여고 교무부장에게 얘기하면 들어줄 수 있다'는 식으로 답변해왔다"며 "대화 파트너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제부터라도 대화와 대안을
ⓒ프레시안(김하영) |
한 학부모는 "아무리 사립학교가 사유지에 학교를 짓는 것이라 하더라도, 학교는 공익적 목적에 부합해야 하는 것 아니냐"면서 "결국 학교를 짓는다면 마을 공동체와 관계를 맺는 것인데 이런 식으로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는 학교가 아이들에게는 무엇을 가르칠 것인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성서초등학교 학부모들은 성명을 통해 "이 땅의 모든 학생들에게 보다 좋은 환경에서 학습할 권리가 보장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서도 "그러나 서로의 이익이 상충할 때 서로 어느 정도의 희생을 감수하고 최대한 합의에 이르고자 하는 성의 있는 태도와 절차의 정당성을 가져야 한다고 본다"고 꼬집었다. 이들은 "홍익학원은 서로의 희생을 최소화하고 공공의 복리를 증진시킬 수 있는 합리적인 대안이 마련될 때까지 공사를 중지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홍익학원 측에서도 이번 사업은 절박하다. 과거부터 홍익대학교와 사범대 부속 초등학교, 여중학교, 고등학교가 모두 한 곳에 몰려 있어 공간 부족에 시달려왔고, 최근에는 홍대 인근이 점점 유흥가화 되면서 주변 환경에 대한 학부모들의 불만도 높아지고 있다. 따라서 이번 이전 사업은 숙원 사업 성취인 셈이다.
이런 갈등 속에서 공사를 강행하면 더 큰 불상사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주민들도 찬반으로 나뉘어 다투는 등 갈등만 확대될 가능성이 크다. 또한 학교를 완공한다 하더라도, 주민들의 따가운 눈총 속에 아이들이 학교를 다녀야 하는 상황도 배제할 수 없다. 지금이라도 주민과 학보모, 학교 측, 서울시, 교육청, 마포구가 충분한 협의를 통해 합리적인 대안을 마련에 나서야 할 때다. 기본 전제는 대화와 중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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