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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원의 식민지가 된 사학분쟁조정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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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대법원의 식민지가 된 사학분쟁조정위원회"

[기고] 상지대 사태와 법치라는 환상-사분위 해체를 향해

환각지 혹은 팬텀 림(phantom limb)이라는 것이 있다. 사고나 수술로 팔, 다리를 잘라내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그것이 여전히 나의 몸뚱이에 달려 있는 것처럼 느끼게 되는 증상을 말한다. 팔과 다리의 느낌은 분명히 나의 것이었는데 문득 바라본 내 몸뚱이는 그것을 잃은 채 허공을 겉돈다. 있다고 느끼는 것이 실제로는 없는 것이라는 자각, 감각과 인식의 어긋남, 그것이 나의 존재를 규정하는 현실임을 깨닫게 될 때 우리는 무엇을 생각하게 될까?

2010년 대한민국의 백주 대낮에 이런 유령이 배회한다. 이 유령의 못된 장난이 만들어내는 환각과 자각, 실망으로 이어지는 자기 부정의 과정은 이 시대의 암울한 길바닥에서도 재현된다. 그것도 법의 이름을 내걸고 말이다.

20년 이상에 걸친 민주화의 과정은 한국사회에 설익은 믿음을 만들어 놓았다. 적어도 절차적인 민주주의는 완성되었다는 믿음, 혹은 세계적 표준에는 이르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최소한의 인권 정도는 누구나 존중하는 사회가 되었다는 믿음, 폭력과 자본이 아니라 인간과 사회가 삶과 생활을 구성하게 되었다는 믿음, 법과 정의는 약자까지도 감싸는 세상이 되고 있다는 믿음….

하지만 이 수많은 믿음들은 잃어버린 10년의 아쉬움을 20년 전의 군사정권 식 억압으로 앙갚음하기에 여념이 없는 현 정권에 의해 여지없이 무너져 버린다. 분명 내 것으로 이루어놓았던 그 민주화의 성과들이 언제부터인지 일거에 사라져 버리고 실체를 상실한 환각통만이 우리의 현존재를 규정하고 있을 뿐이다.

여름이 막바지로 치닫는 7월 26일, 50여명에 이르는 교수와 학생들이 삭발까지 하며 저항하고 있는 상지대학교 '정상화' 과정은 이런 환각의 유령을 드러낸다. 구재단의 부정과 비리, 억압과 폭력으로 점철되었던 상지대의 과거는 YS정권의 사학비리척결작업과 그에 이은 대학구성원들의 피땀 어린 노력에 의해 제대로 청산되었다.

임시이사 체제에서 재단의 전입금마저도 여의치 않은 상황에서 그들은 대학다운 대학을 만들겠다는 일념 하나로 상처투성이의 대학을 지금 현재의 모습으로 일구어놓았다. 그것은 "사학 비리 척결과 대학 민주화의 모범 사례"라는 김선수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회장의 말처럼 우리 대학 사회가 나아가야 할 뚜렷한 방향을 제시한 귀한 경험이 된다.

ⓒ프레시안(허환주)

하지만 이런 상지대의 현재가 현 정권 하에서 교과부와 사립학교분쟁조정위원회(이하 사분위)라는 이상한 기구에 의해 그 뿌리부터 흔들리고 있다. 2003년 상지대의 임시이사들은 과도체제를 마감하고 정규적인 대학 운영체제를 확보하기 위해 정이사를 선임하였다. 그러나 2007년 대법원은 납득하기 어려운 논거를 대며 임시이사에 의한 정이사 선임은 무효라고 판단하였다.

사립학교를 지역과 공공의 이익에 봉사하는 교육기관으로 규정하고 있는 교육관계법의 취지는 아랑곳 않고 대학을 민사법의 틀 속에서만 파악하는 그릇된 판단을 내린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비리와 부정으로 점철된 구재단측의 손을 들어준 것은 결코 아니다. 단지 임시이사는 정이사를 선임할 수 없다고만 하였을 뿐, 상지대를 구재단에 넘겨주라는 판단은 회피하였다. 오히려 대법원은 어중간한 태도로 이 상황을 피해 나가면서 그 해결을 교육과학기술부에 떠 넘겼다고 보는 것이 보다 정확한 해석이다.

문제는 이런 상황에서 정권이 바뀌고 그 정권이 겉으로는 보수라는 이념을 내세우면서 실질적으로는 수구의 정책으로 뒷걸음질 하면서부터 시작한다. 패악과 타락을 일삼다 민주화과정에서 단죄되었던 세력들이 이 정권의 지지기반임을 자처하면서 이 반동의 국면을 타고 다시금 거리를 활보하고 나선 것이다.

지난 날 그들이 저질렀던 비리나 부정부패는 이제 정권의 힘을 빌어 정당화하거나 은폐·엄폐해 버린다. 분식회계나 횡령 등의 방법으로 경영권의 세습을 도모했던 한 재벌총수가 그 무른 유죄판결에도 불구하고 지체 없는 사면의 덕을 입어 당당하게 경영일선에 나선 사건은 그 한 예일 따름이다. 국무총리실에서부터 국정원, 기무사에 이르기까지 약간의 빌미라도 얻은 기관이라면 하나같이 민간인사찰에 개인정보·통신의 검색까지 권위주의적인 권력의 맛을 되새기느라 여념이 없다. 그리고 그 퇴행의 끝자락에서 상지대 사건이 터지고 있다.

상지대 사건의 핵심은 간단하다. 비리와 부정으로 학교를 망쳐 놓은 장본인에게 대학의 '정상화'라는 이름으로 다시금 그 대학의 운영을 맡겨 놓을 것인가이다. 물론 여기에는 구재단 측이 충분히 회개하였다는 증거도 뼈 깎는 반성을 하였다는 징표도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구재단'이라는 것이 1972년 임시이사들에 의해 선출된 이사들로 그 존재조차 무효인 상태이다. 2007년의 대법원판결에 의하면 임시이사는 정이사를 선임할 수 없는 법인데, 이 '구재단'은 임시이사들에 의해 선임된 것인 만큼 그 자체가 무효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교과부는 이 점에 대하여 철저하게 눈을 감아버린다. 오히려 사분위라는, 존재이유조차 흐릿한 예외기구의 심의에 일임한 채 모든 판단을 회피해 버린다. 사립학교의 운영에 대해 공정하고 투명한 감독과 통제의 직무를 수행하여야 할 의무를 저버리고 오직 사분위의 심의결과에만 따르겠다는 직무유기성 발언으로만 일관하고 있다.

사분위는 또 사분위대로 적법성과 타당성을 상실한다. 실제 사립학교에 대한 감독과 통제는 대통령과 총리의 통할 하에 교과부장관이 종국적인 책임을 지고 수행하여야 할 주요한 행정업무중의 하나이다. 하지만, 지난 정권에서 입법과정상의 타협으로 통과된 한나라당의 사립학교법개정법률은 이 행정권을 사법부가 추천한 위원이 주축이 된 사분위에게 일임하는 무리를 범하고 있다. 이 사분위는 총 11명의 위원 중 5명을 대법원장이 추천하는 위원으로 구성되며, 위원장은 대법원장이 추천한 위원이 겸하게끔 되어 있다. 사분위의 운영 자체가 실질적으로 대법원장의 의중에 매달리게 되는 것이다.

ⓒ프레시안(허환주)

이런 구성방식은 우리 헌법이 정하고 있는 권력분립의 원칙을 정면에서 침범한다. 행정부의 업무에 사법부가 직·간접적으로 관여하고 또 간섭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 놓은 것이다. 이에 대해 '사학분쟁을 조정'하는 일은 사법적 성격이 강하니까 그럴 수도 있다고 반박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사분위가 다루는 사건은 분쟁의 '조정'이 아니라 사립학교의 운영에 대한 감시와 감독의 업무다. 재단의 소유권을 둘러싸고 구재단과 임시이사가 싸우는 상황이 아니라 구재단이 저질러 놓은 비리와 부정을 털어내고 도탄에 빠진 사립학교를 제자리에 가져다 놓는 일을 처리하는 것이 이 사분위의 역할이다.

그래서 사립학교법은 재단 이사회의 결원이 장기간 지속되거나 교과부가 이사승인을 취소한 때와 같이 예외적인 상황에만 사분위가 개입하도록 하고 있다. 요컨대, 그것은 '분쟁'이 아니라 '임시운영'이며 '조정'이 아니라 '감독과 통제'이다. 철저하게 행정의 업무이다. 여기에 사법부가 관여할 일은 전혀 없다.

그렇다고 해서 사분위가 법과 정의의 원칙에 충실하게 운영되는 것도 아니다. 상지대 사건만 하더라도 지난 4월 29일 정이사 추천 비율을 5(종전 이사) : 2(교과부) : 2(학교구성원)로 하는 제1차 결정이 내려지기까지 청문이나 당사자소환 등 헌법이 요구하는 적법절차를 거친 흔적이 없다. 그 회의록을 공개하라는 상지대 측의 요구 또한 일언지하에 거절되고 있다. 국민의 말할 권리, 알 권리가 송두리째 무시당하고 있는 것이다. 마치 지하벙커에 숨어든 듯한 이 밀실의 회의는 왜, 어떤 근거에서, 무엇을 참조하여 그러한 결정에 이르게 되었는지 도저히 알 수 없는 상황을 만든다.

특히 "임시이사는 정이사를 선임할 수 없다"라는 대법원의 판결이 어떻게 하여 '종전이사가 정이사의 선임에 관여하여야 하며 그것도 정이사 정수의 과반수를 선임한다'라는 판단으로 비약될 수 있는지에 대한 납득할 수 있는 설명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겉보기로는 법률의 틀 혹은 사법부의 틀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처럼 하고 있으되, 실상은 아무런 설명도, 논거도 없이 자의적, 일방적인 판단으로 일관하고 있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상실되는 것은 법과 정의요, 민주주의에 대한 우리들의 신뢰이다. 흘러나오는 이야기처럼 위원 중 대법원장이 추천한 현직판사 한 명이 법해석을 독점하면서 다른 위원들을 압도하고 나서는 상황에까지 이르게 되면 사분위의 회의 자체도 파행으로 이루어졌다는 의문을 갖기에 충분하다. 회의가 교육적 관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대법원의 판결을 해석하고 집행하는 수준에 머물게 되면서 사분위가 대법원장의 식민지로 전락해 버리는 양상이 벌어지기 때문이다.

사립학교의 운영에 대한 감시·감독이라는 교과부의 행정업무에 대해 교육의 당사자나 전문가들은 제쳐놓고 대법원장의 그 대리인인 위원이 자의적인 법해석으로 모든 회의를 주도하여 일방적인 결론을 내리고도 그 회의의 결과에 대해서는 누구도 책임을 지지 않는 반 법치, 반민주의 행태가 자행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경과 속에서 상지대의 현재와 우리 교육의 미래는 여지없이 무너져 버린다. 아니, 민주화를 향해 일도 매진하였던 지난 20년의 세월이 그대로 덧없는 허상이 되어 버리고 만다. 과거 권위주의체제가 만들어 놓았던 그 질곡과 억압의 현실들을 피땀 엉긴 대항과 저항으로 극복하고 이제 겨우 인간다운 세상을 열어갈 수 있다고 생각한 것도 잠시, 일순간에 과거의 그 부정한 권력들이 법의 이름으로 되살아나는 억장 무너지는 현실이 닥쳐오는 것이다. 마치 패악질을 일삼던 동네 깡패를 보복의 위험을 무릅쓰고 경찰에 신고하였더니만, 도리어 경찰이 그 깡패를 보호하며 우리를 다그치는 경우와 다름없는 상황이 우리 눈 앞에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사실 이런 유령은 남아시아를 배회한다. 경찰과 법원이 법과 정의의 편일 것이라는 환상, 혹은 법과 정의는 어떻게든 살아 있을 것이라는 환각 그것이 유령처럼 사람들의 일상을 처참한 지경으로 타락시킨다. 이 유령은 민중들로 하여금 부정과 부패에 대한 저항을 체념하게 만들면서 야만의 현실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게끔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경찰마저도 무고한 사람을 체포하여 뇌물을 줄 때까지 구금하고 고문하며, 수가 틀리면 백주에 살해해 버리거나 실종상태로 만들어 버리는 남아시아 국가들에서 이런 유령은 법원이 양산한다.

법치의 이념은 이미 훼손되어 없어져 사라져버린 지 오래지만 그래도 달리 갈 곳이 없는 약자들은 법원만이 실낱같은 희망이 된다. 그러나 어딘가 있을 것처럼 보였던 법과 정의는 역시 부정과 부패로 점철된 법원에 들어서는 순간 단순한 환각이었음이 드러나고, 이 거대한 현실의 기만 앞에 어쩌지 못한 채 체념을 강요당하는 당사자들은 자신의 고통을 운명처럼 받아들일 밖에 없는 상태가 되어 버린다. 그리고 이것이 그들의 국가가 야만적 폭력의 집단으로 전락하게끔 하는 주된 원인이 된다.

상지대 사태는 이런 악몽의 전초를 이룬다. 여기서 이 유령은 대법원장의 식민지가 된 사분위가 만들어낸다. 이명박 대통령이 "보따리를 싸들고 와도 쫓아낼 것"이라는 천박한 표현을 사용하면서까지 규탄하였던 구재단의 불법과 부정을 이제 사분위를 전초기지로 삼아 완전 복권시킬 것을 도모한다. 어렵고 힘겨운 투쟁을 거쳐 겨우 이루어놓았던 그 민주화의 꿈이 이들이 전유하는 법 권력에 의해 일거에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어딘가 있을 것이라 믿었던 정의로운 법은 이들에 의해 완전한 허상으로 전락한다. 혹은 어떻게든 만들어 놓았다고 믿고 싶었던 그 민주주의의 성과들은 이들의 밀실담합 속에서 허무한 꿈으로 무화되어 버린다. 오로지 체념과 굴종을 강요하는 야만적 폭력만이 그 빈자리를 대체할 뿐이다.

그래서 이번의 상지대 사태는 우리 민주주의의 시금석이 된다. 법의 이름으로 정의를 유린하고, 민간위원회라는 명분으로 폭력이 정당화되는 이 사분위의 형태 속에서 우리의 자유민주주의가 여지없이 무너지는 이 억장 무너지는 현실이 더 이상 우리의 운명으로 자리 잡기 전에 그것을 바로 잡아 내어야 한다는 시대적 요청이 우리 앞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물론 때늦은 조치이긴 하지만 사분위를 폐지하는 법률개정안이 국회에 발의되었다는 점은 무척이나 고무적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 모두가 성난 얼굴로 사분위와 교과부, 나아가 현 정권의 행태들을 지켜보는 것이다. 분노야말로 현상의 질곡을 깨는 저항의 출발점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분노가 있을 때 사분위와 이를 매개로 다시금 복권을 도모하는 지난날의 폭력들을 분쇄해 낼 수 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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