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하게 태어나 가난하게 살고 가난하게 죽는다."
<한겨레21>이 최근 한국 빈곤계층의 투표행위를 분석하고, 이들의 둥지를 방문하면서 썼던 기획기사의 제목입니다.
"정치로부터 소외된 계급, 이들은 '얼굴 없는 시민'이다. 어떤 제도권 정당도 이들을 대표하지 않는다. 이들 또한 어떤 정당에도 기대를 걸지 않는다. 부유층과 빈곤층의 경제·사회적 양극화가 가속화될수록 '정치적 양극화'도 덩달아 심해지고 있다."
마찬가지입니다. 3월 31일 지역소외계층의 따뜻한 보금자리였던 대구적십자병원 폐원을 바라보며 <한겨레21> 기사를 다시 찾게 되었습니다. 얼굴 없는 시민, 가난한 자들의 소외는 정치, 주거뿐만 아니라 의료계에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고, 'MEDI CITY'를 꿈꾸는 대구시의 정책이 지나치게 가진 자들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습니다.
의료 문제에 문외한인 제가 이 글을 쓴 데는 나름대로 목적이 있었습니다. 적십자병원 폐원 논란으로 지역사회가 들썩이던 시점에 함께하지 못했던 데 대한 아쉬움과 언론이 외면했던 이 문제를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는 의무감, 그리고 시민단체에서 주장했던 '병원 존치'를 조금 다른 시각에서 재구성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현재 시점에서 대구적십자병원은 폐원되었지만, '소외되고 가난한 이들에 대한 진료'를 담론과 주장만으로 허공에 외칠 것이 아니라 '시스템으로 정착하는 방법'을 찾아보기 위함이었습니다.
적십자병원 문제는 대한적십자사,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의 보건의료서비스 정책, 지역사회의 책임 있는 오피니언 리더들의 외면, 시민들의 무관심 등이 복합적으로 엮여 있는 문제였습니다. 한때 150여개 병상, 9개 진료과목을 운영하며 이주노동자 및 도시 영세민 등 의료취약계층에 대한 진료서비스를 충실히 제공해 온 대구적십자병원이 지난 3월 31일로 폐원되었습니다. 대한적십자사가 외부기관에 의뢰한 경영컨설팅에 따르면 대구적십자병원은 적십자 미션에는 부합하지만, 지역공공의료와 자립가능성은 불필요, 불가능하다는 판정을 받았습니다.
대한적십자사는 병원사업에 회비 모금액 1%도 투자하지 않았으며, 폐원을 앞두고 국유지였던 대구적십자병원 터를 사들여 땅장사를 했다는 의혹도 일고 있습니다. 대구적십자병원 폐원을 이야기하기에 앞서 대한적십자사의 정체성 문제를 먼저 이야기하는 이유는 이 둘 간의 관계를 따로 떼어놓고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대한적십자사 위상 떨어진 이유…탈세, 투기, 부실한 헌혈관리
"인류가 있는 곳에 고난이 있고, 고난이 있는 곳에 적십자사가 있다"는 표어 앞에 2010년 대한적십자사는 한 점 부끄러움이 없을까요? 아니 부끄러웠던 과거의 오류의 원인을 냉철하게 평가하고 재발방지책을 마련하고 있을까요? 몇 가지 사실을 찾아봤습니다.
대한적십자사의 위상 하락은 외부요인과 내부요인으로 나눠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오랜 기간 보건의료운동을 했던 지역의 한 인사는 외부요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습니다. 적십자운동의 주요 활동분야였던 인도주의 차원의 대북지원사업 및 구호활동과 자원봉사활동 등이 법제도 속으로 포함되기도 했고, 문화도 확대되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적십자사를 통해야만 가능했던 대북교류사업이 민간 차원으로 확대되고 정부 차원에서도 담당부서가 생겼습니다. 또한 굿네이버스, 월드비전 등 민간 차원의 구호활동기구가 왕성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으며, 적십자사의 자원봉사활동을 지원했던 기업이 이제는 자체 내 봉사팀을 꾸리고 보다 다양한 형태로 자원봉사활동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내부적 요인은 대한적십자사에 대한 국민적 신뢰도 하락입니다. 대한적십자사의 존재 이유는 1948년 4월 30일 법률 제25호 '대한적십자사 조직법'에 제시되어 있습니다. 1조(목적)에 따르면 "적십자의 이상인 인도주의를 실현하고 세계평화와 인류의 복지에 공헌함을 목적으로 한다."고 규정하고 있으며, 공공보건의료에 관한 법률시행령 2조에 의거 공공기관으로 규정되어 있습니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국가로부터 혈액사업 위탁을 받는 등 사회봉사, 구호단체로 역할을 부여받고 있지만, 이와 같은 적십자사의 정신과 가치관이 우리가 발 딛고 서 있는 2010년까지 이어지고 있는지 되묻는다면 회의적입니다.
2004년 창립 백년 만에 처음으로 국세청의 세무조사를 받은 대한적십자사는 접대비사용내역과 임대 수입을 축소 신고하는 등의 수법으로 세금을 탈루한 사실이 적발되어 14억 7400만 원의 세금을 추징당하게 됩니다.
2009년에는 헌혈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적십자사의 직원 헌혈율이 30%도 안 되는 것으로 드러나 다시 여론의 도마에 올랐습니다. 국회 보건복지위 안홍준(한나라당)의원이 9월 29일 대한적십자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의하면 적십자 직원의 헌혈율은 2006년 32.2%, 2007년 32.1%, 2008년 29.4%로 계속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매년 혈액부족 사태가 되풀이 되고 있지만 혈액사업을 담당하는 적십자 직원의 낮은 헌혈율은 '헌혈 캠페인'을 무색하게 했고, 그 외에도 등록헌혈제 부실 운영으로 2008년 10억 원의 예산을 낭비하고, 부실한 혈액관리로 수혈 감염을 일으키는 등 사회봉사단체로서 적십자사에 대한 정체성 논란이 끊이질 않았습니다.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대구적십자병원 부지에 대한 땅장사 논란도 같은 맥락입니다. <한겨레> 보도(3월 3일자)에 따르면 "대한적십자사가 65억여 원을 들여 폐원이 예정된 대구적십자병원 터에 포함돼 있는 국유지를 사들였"으며 "중구 남산동에 위치한 이 병원 터 가운데 기획재정부 소유였던 땅 917.2㎥을 약 65억 212만 원에 사들였고, 20년 넘게 무상임대로 써오던 이 땅은 전체 병원 터의 25%를 차지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적십자병원 대책위원회(대구적십자병원 공공성 확대를 위한 시민대책위원회) 최성택 집행위원장은 "취약계층이 이용하는 병원 문을 닫으면서 시민들이 낸 회비로 국유지를 사들여 땅값을 높여 팔겠다는 계획이 적십자사의 목적에 맞는지"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정권이 바뀜에 따라 인도적 차원의 대북협력활동도 점차 축소되고, 급기야 남북적십자사 간에 맺은 합의사항도 제대로 이행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2010년 창립 105주년을 맞는 대한적십자사는 회원 수 감소(9년 새 30% 축소)와 민간구호단체의 약진으로 누적적자가 1000억 원 대에 달하고 있는 것입니다.
"'건전한 적자'도 있다"
4월 19일 만났던 최창규 대구적십자병원 전 노조지부장(현재는 대구적십자병원이 3월 31일 폐원됨에 따라 노동조합도 자연스럽게 해소되었다.)의 말에 따르면 2006년 병원 리모델링 공사 전에 병원외벽 간판은 '대구적십자병원'(현재는 대한적십자사 대구병원)이었다고 합니다. "간판내부조명 중 일부가 수명을 다했는데 하필이면 글자 '십'자 쪽에 전구가 꺼져, 밤에 간판을 보면 '대구적자병원'으로 보여서 이것이 우리의 미래인가" 하고 허탈해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수백억대에 이르는 누적 적자라고 한다면 자연스럽게 '퇴출'이라는 단어가 떠오르지만 적십자병원의 적자는 '건전한 적자'이기 때문에 다르게 생각해야 한다는 주장이 꽤나 설득력을 얻습니다.
첫 번째는 적십자병원의 경영적자는 취약계층 진료 및 무료진료, 공익적·포괄적 서비스를 통한 적십자사의 인도주의와 박애라는 자신의 기본이념을 충실히 실현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건전한 적자이기 때문에 시장논리와 수익성을 잣대로 평가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2009년 10월 14일 보건의료노조, 곽정숙(민주노동당), 전혜숙(민주당) 국회의원과 함께 진행했던 '적십자병원 공공성 확대를 위한 토론회'에서 2008년 당기순이익에서 35억여 원 적자를 기록한 적십자병원이 일반병원과 비슷한 경영을 한다면 오히려 흑자를 기록할 수 있다는 주장이 제기됐습니다.
경상의대 예방의학과 정백근 교수는 "일반병원(350병상 이하 종합병원)에 비해 '의료급여환자진료'와 '무료진료' 비율이 높은 적십자병원이 일반병원과 비슷한 수준으로 진료했을 경우 오히려 흑자를 기록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정 교수가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적십자사 산하 병원들의 의료급여진료비 비중은 △서울적십자병원 30.6% △대구적십자병원 49.5% △인천적십자병원 28.3% △상주적십자병원 16.4% △통영적십자병원 21.8% △거창적십자병원 15.6% 등으로, 이는 대부분의 적십자병원들이 350병상 이상 종합병원 평균 의료급여 입원환자비율(19.1%, 2007년도 병원경영통계)보다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죠.
적십자병원들이 일반병원들에 비해 의료급여환자를 많이 진료하기 때문에 이로 인한 적자가 크게 발생하고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입니다. 이를 바탕으로 정 교수는 지난해 적십자병원이 기록한 당기순이익 적자 35억 9855만 원 중 의료급여환자 진료로 인한 29억 8048만 원과 무료진료로 인한 10억 5676만 원을 제하면 오히려 4억 3869만 원 흑자를 기록할 수 있었다고 밝혔습니다.
▲ 대한적십자사의 홍보물. 한국전쟁이 진행 중이던 시절 적십자 회비를 모금하기 위한 포스터를 다시 사용해 만든 홍보물이다. 전쟁으로 인해 고아가 된 어린 아이를 적십자사가 안아주고 있는 이 그림은 '인도주의 정신'을 상징한다. 그러나 대구적십자병원이 문을 닫기까지의 과정을 보면, 이런 '인도주의 정신'은 흔적도 찾기 힘들다. ⓒ대한적십자사 |
적십자병원 외면하는 대한적십자사
두 번째는 대한적십자사의 적십자병원에 대한 지원이 거의 전무하다는 점입니다. 보건복지위원회 전혜숙 의원은 대한적십자사는 적십자 회비 중 병원지원액은 1%도 안 돼 적자를 방치하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대한적십자사가 제출한 결산 내역을 보면, 지난 3년 간 적십자 병원에 지원한 금액은 2006년 2억 8천9백만 원, 2007년 4억 2천3백만 원, 2008년 4억 7천만 원으로 국민이 낸 적십자 회비의 1%도 안 되는 규모였습니다. 이와 관련해 김창보 복지국가소사이어티 정책위원은 "적십자병원은 어려운 사람들에게 의료서비스를 제공하는 병원이라는 측면에서 적자가 불가피하며, 대한적십자사는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재정적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세 번째는 대한적십자사와 적십자병원 간에 관계개선입니다. 적십자병원이 자체적으로 자구책을 마련하고자 하지만 관리직에 대한 인사권을 쥐고 있는 대한적십자사로 인해 이마저 번번이 실패하고 있습니다.
2000년대 중반, 대구적십자병원은 원장공모제와 독립채산제를 도입하게 됩니다. 최 노조위원장은 "원장공모제와 책임제라고 하지만, 관리자에 대한 인사권을 대한적십자사가 가지고 있는 상황에서 병원업무와 무관한 인사들이 서울에서 낙하산 식으로 병원에 배치되면서 경영에 대한 책임성을 보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 과정에서 병원 내 작은 사고가 나더라도 관리업무 담당자가 처리하기보다는 해당진료과로 책임을 넘기는 일이 잦았습니다. 또한 공휴일진료, 민변 등과 연계한 상담기구 구성, 노동부의 사회적 일자리제도를 활용한 간병사 시스템을 도입해 생활보호대상자 무료간병 시스템을 구축하는 등의 마련된 자구책은 경영진에서 수용하지 않거나 제대로 운영되지 않았습니다. "원장 공석인 기간 동안 대행시스템으로 병원이 운영되었지만 '선장 없는 배'의 운명이었다."는 것이 최 노조위원장의 주장입니다.
병원 임직원의 노력 여하에 따라 병원의 이미지가 개선되고 시민들로부터 호평을 받은 사례는 대구지역 또 다른 거점병원인 대구의료원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한때 행려병환자 전문병원으로 시민들의 차가운 눈길과 외면 속에서 제 기능을 다하지 못했던 이 병원은 2009년도 운영평가에서 지난 2006년부터 4년 연속 A등급을 받아 최우수의료원에 선정되었습니다. 대구의료원은 1998년 행정자치부 가 시행하고 지금은 보건복지가족부가 시행하는 경영평가에서 12년 연속 최우수의료원에 선정됨으로써 전국 최고의 공공의료기관으로 인정받는 셈이죠.
그뿐만이 아닙니다. 대구의료원은 병원식을 현미채식으로 변경하여 환자와 가족들에게 호평을 받고 있고, 암환자 전문의료기관으로 지정된 호스피스 병동을 모범적으로 운영하고 있으며, 가난한 사람들에게 또 다른 부담인 장례비용을 시중 병원보다 저렴하게 낮춰 서민들의 발길을 재촉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지난 2월 보건복지가족부는 '경영이 부실한 지역거점 공공병원에 대한 전면적인 쇄신작업을 진행하겠다'는 지역거점 공공병원 발전계획안을 발표했습니다. 핵심내용은 △공공병원 병원장 경영성과계약 도입 △병원운영에 대한 평가 강화 △경영개선을 위해 노력하는 병원에 대한 국고지원 강화 및 개선의지가 없는 병원에 대한 지원 중단 방안 강구 등입니다.
현재 시민사회단체와 일부 전문가그룹이 '적십자병원에 대한 국고보조를 늘여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제가 만난 또 다른 관계자들은 적십자사의 병원 인사권이 그대로 유지되는 상황에서 국고지원 확충을 주장하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합니다. 대구의료원의 사례와 보건복지부 정책에서 볼 수 있듯이 경영개선을 위한 노력 여부는 시민들의 평가에 주요지표가 됩니다. 현행 적십자병원과 대한적십자사의 관계로는 이것이 가능할까요?
'가난한 환자 위한 병원'에 무관심한 지역 여론
대구적십자병원이 지역사회 거점병원으로서, 공공의료기관으로서, 가난한 서민들의 안식처로서 충분한 역할을 했다는 자료는 도처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곽정숙 의원실이 2009년 제공한 자료에 따르면 적십자병원의 2009년 8월 현재 의료급여환자 비율이 대구의 경우 전국평균 31%보다 훨씬 높은 61.5%에 달하고 있습니다. 비슷한 규모의 350병상 이하 종합병원의 입원환자 중 의료급여 환자의 비율이 11.9%인 것에 비하면 꽤나 높은 수치인 셈이죠.
이주노동자와 내국인 저소득층에 대한 무료진료도 활발하게 진행 중입니다. 대구적십자병원의 경우 이주노동자와 저소득층 입원 무료진료비용, 외래 진료비용은 전국적으로 꽤나 높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최근 발표된 대한적십자사 경영합리화방안 수립 프로젝트 중 병원사업 재검토결과 대구의 경우 적십자미션에는 부합하지만, 지역공공의료와 자립가능성은 불필요, 불가능하다는 판정을 받았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던 경영개선을 위한 노력 부분이 인정받지 못한 것이며 '적자보전을 위한 지원'만큼이나 적십자사와 병원 간의 인사 관계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해야한다는 메시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한때 대구적십자병원은 정형외과, 신경과, 정신과, 내과 등 8개 진료과목을 갖추고 있었지만, 2009년부터 진료과목이 하나씩 줄어 들더니 2010년에는 내과와 가정의학과만 남게 된 것이죠. 계약직으로 근무했던 의사들은 적십자병원 취지에 공감하며 계약연장 의사를 밝혔지만 인사권을 쥐고 있는 대한적십자에서 이를 수용하지 않았습니다.
150명이던 직원들은 55명으로 줄었고, 남은 직원들은 임금체불도 감수하는 등 눈물겨운 노력이 동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병원을 떠나는 의사 수만큼 환자 수도 감소하고 역으로 적자폭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는데요, '자립 불가능'판정은 어떻게 보면 이미 예정된 수순(?)이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이 시기에 꼭 평가해봐야 할 게 있습니다. 적십자병원 폐원을 반대하는 지역사회 여론 흐름은 그리 크지 않았습니다. 혹자는 이야기합니다. "적십자사에서 의지도 없고, 병원폐원에 반대하는 지역사회의 반대도 뜨겁지 않은데, 무엇을 근거로 공적자금 투입 등 회생 정책을 쓰겠는가?" 냉혹하리만큼 뼈아픈 지적입니다.
지역사회 여론이 광범위하게 조성되지 않은 이유는 두 가지로 평가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첫 번째는 적십자병원 이용층이 진짜로 가난한, 그들의 요구를 대변해주는 뚜렷한 계층이 없는, 목소리를 내더라고 귀기울여줄 이 거의 없는 사회 빈곤층이라는 점입니다. 시쳇말로 이들을 위한 정책 집행을 하더라도 '뽀대 나는' 성과가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이죠.
이런 이유일까요? 적십자병원 폐원 논란이 한참인 시점에 대구시나 대구시의회는 그 어떤 행보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대구광역시는 대한적십자사의 대구적십자병원 폐원 추진을 수수방관하다가 사실상 폐원이 결정된 후인 3월 17일에야 대구의료원을 통한 취약계층 진료 서비스 강화, 일반 병원과의 협약 등을 통한 진료기관 확대 등의 대책을 발표했습니다.
이와 관련해 대구경실련 조광현 사무처장은 "대구적십자병원은 대구지역의 의료취약계층을 위한 구호병원의 역할을 수행해왔다. 그리고 구호병원은 '희망의 도시, 일류 대구', 'MEDI CITY Daegu'에 반드시 필요한 시설이다. 의료사각지대에 놓인 시민들이 안심하고 편안하게 치료받을 수 없는 도시가 '희망의 도시, 일류 도시','MEDI CITY'가 될 수는 없기 때문"이라며 대구시의 대책마련을 촉구하고 나섰습니다. 시의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최소한 시의회에서 결의문 또는 성명 등을 채택하여 '대한적십자사의 병원 폐원에 대한 재고 요청' 등의 공식입장을 발표했더라면, 이 싸움이 그리 허망하게 끝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언론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적십자병원 폐원과 관련해 지역 언론 중 <매일신문>, <대구KBS PD리포트 시선>과 <한겨레> 등이 적극적 관심을 보였지만 대구지역 전체 여론을 일으키기엔 역부족이었습니다.
지역 국회의원들은 어떨까요? 대구적십자병원 대책위원회는 이 문제해결을 위해 보건복지위원회 소속 지역 국회의원을 찾았지만, 뚜렷한 대답을 듣지 못했다고 합니다. 결국 지역적 연고도 없는 전혜숙, 곽정숙 의원 등과 밀접한 연계 속에 국회 토론회, 국정감사 등 적십자사의 정책 오류를 진단해내는 선에서 만족해야 했습니다.
지방자치단체, 일부 언론을 제외한 대부분 언론, 국회의원, 시민들의 냉담한 반응 속에 대책위만의 처절한 싸움은 지켜보는 이에게 미안함과 안타까움만 쌓이게 했습니다.
"'잠자는 토끼를 그냥 두고 간 거북이', 과연 옳은가?"
병원은 폐원되었고, 적십자정신을 실현코자 모였던 직원과 의사들도 여기저기로 흩어졌습니다. 적십자병원에서 진료 받았던 가난한 대구시민들도 삼삼오오 흩어져 마음 편하지 않은 진료에 몸을 내맡기고 있는 실정입니다.
우린 토끼와 거북이 동화를 읽으면서, 오만하고 게으른 토끼에 비해 부지런하고 성실한 거북이의 행동이 성공의 지름길임 배워왔습니다. 하지만 신영복 선생님은 <강의>에서 '잠자는 토끼를 그냥 두고 간 거북이'를 꾸짖습니다. 경쟁사회에서 물불 가리지 않은 채 남의 오류를 딛고 오르지 말고, 더불어 함께 잘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선 '토끼를 깨워 함께 손잡고 골인지점에 이르러야 한다'는 메시지였습니다.
목소리가 없는 시민들을 위해서는 관심과 시선주기를 꺼리는 국회의원과 관계 당국, 언행불일치의 최일선에서 자신의 모습을 과도하게 포장하고 있는 대한적십자사. 그리고 소외되고 외로운 이들을 위해 따뜻한 눈길, 마음을 주지 않았던 많은 대구시민들. '대구적십자병원 폐원'이라는 한 줄 속에는 이리도 많은 의미들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 글은 "왜 대구적십자병원은 문을 닫았나"이라는 제목으로 인권잡지 <세상을 두드리는 사람> 5-6월호에 게재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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