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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의 '노무현'을 꿈꾸는가? 그럼, 삼성과 싸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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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제2의 '노무현'을 꿈꾸는가? 그럼, 삼성과 싸워라!"

[삼성을 생각한다] 삼성을 어떻게? 정치인이 답해야!

노무현을 추억하며

다시 5월이다. 올해는 5·18이 일어난 지 30년이 된 해이다. 또한 5월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세상을 떠난 달이기도 하다. 그가 고향 마을 뒷산의 부엉이 바위에서 세상을 등져버린 날이 5월 23일이었는데, 이 날은 광주 시민들이 계엄군들을 몰아내고 기적과도 같은 대동세상을 열어가고 있던 날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이후로 우리는 5월 18일에서 27일까지 이어지는 광주항쟁을 기념하면서 그 한 가운데 자리한 노 대통령의 서거일을 늘 같이 기억하게 될 것이다.

어찌 우연이겠는가? 노무현은 5·18이 불러낸 사람, 광주가 선택한 사람이었다. 5·18이 그를 역사로 불러냈으니 그가 마지막에 5·18의 품 안으로 돌아간 것도 너무나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렇다고 그가 5·18이란 역사에 단지 무동을 탄 채 살다 간 사람은 결코 아니었다. 그는 5·18이 피워낸 꽃이요, 5·18이 맺은 열매였으니, 역사에 큰 흔적을 남긴 모든 위인이 그렇듯이 그도 단순히 자기 시대의 부름에 응답했을 뿐만 아니라 시대를 앞에서 이끌었던 사람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그가 떠난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그가 남긴 유산 위에서 다시 우리 시대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

하지만 그는 무엇으로 자기 시대를 넘어 갔으며 무엇을 우리에게 남기고 갔는가? 사랑이다! 그는 정치에 사랑이라는 낱말을 처음으로 퍼뜨린 사람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는 사람들로 하여금 정치를 말하면서 사랑이라는 낱말을 같이 쓰도록 만들었던 사람이다. 이것은 그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었다. 왜냐하면 오랫동안 이 땅에서 정치란 사랑의 대상이 되기엔 너무도 추잡하고 비열한 권력욕으로 오염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가 등장한 시대는 적에 대한 광기어린 분노와 증오가 여전히 우리의 영혼을 지배하던 시대, 한 마디로 말해 사랑이 사치였던 시대였다. 그런 의미에서 '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출현은 어떤 제도적 혁명보다 더 근본적인 혁명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오로지 분노와 적개심만이 넘실대던 정치판에 그가 한번 사랑의 씨앗을 뿌린 뒤에 모든 정치인들이 앞 다투어 대중들에게 사랑을 구하기 시작했으며, 대중들 역시 사랑하고 싶은 정치인을 갈구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사랑을 정치의 근본적 운동 원리로 만든 사람, 그가 바로 노무현이다.

노사모 이후 창사랑(얼마나 어울리지 않는, 기괴한 이름인가?)에서 시작해 온갖 종류의 정치인 팬클럽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것은 노무현이 우리에게 남긴 유산이다. 노무현의 아류가 되기를 원치 않는 진보신당의 노회찬, 심상정 같은 정치인들은 팬클럽 대신 연구소를 만들었지만, 노회찬 대표가 트위터에 알뜰한 정성을 쏟는 것을 보면 현실 정치판에서 100개의 연구소가 하나의 팬클럽을 대신하지 못한다는 것을 그도 잘 알고 있음이 분명하다.

우리 시대는 사랑받지 못하면 정치에서 성공할 수 없는 시대이다. 어쩌면 사람들은 이명박 대통령을 보고 예외도 있다 할 것이다. 그는 전혀 사랑받지 못하고 대통령이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까닭 없는 예외가 아니다. 뜨거워지기도 하고 식기도 하는 것이 사랑이다. 상스럽게 비유하자면 '이명박'은 '노무현'에게 실연당한 대중이 홧김에 서방질한 상대였다. 그러니까 그것 역시 사랑의 한 표현이었던 것이다. 다만 그 사랑이 자기 몫이 아니었던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을 뿐. 이명박 씨가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하고 대통령으로 선택된 것은 나라를 위해서도 비극적인 일이지만, 특히 그 자신에게 너무 큰 불행이다. 그가 권력자의 자리에서 내려오는 순간, 아무도 그의 파멸을 동정하지 않을 것이니, 그는 결코 운명의 심판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 그 때가 오면 그는 사랑이 아니라 욕망을 부추겨 대중을 유혹했던 것을 땅을 치며 후회하겠지만, 자기가 뿌린 것을 거두는 것이니 누구를 원망하겠는가.

그의 운명이 나와 무슨 상관이랴! 다만 중요한 것은 이제 사랑이 한국 정치의 운동 원리가 되었다는 사실뿐이다. 하지만 새로운 것은 낯선 것이므로 늘 오해받을 수밖에 없는 운명 속에 있다. 여러 번의 오해와 시행착오를 거쳐 새로운 것과 친해진 뒤에야 비로소 사람들은 그것에 제대로 적응하게 되는 것이다. 노무현이 우리에게 남기고 간 사랑이라는 선물도 마찬가지이다.

그가 등장한 이후 수많은 정치인들이 그를 흉내 내었으나 제대로 뜻을 알고 흉내 낸 사람은 거의 아무도 없었다. 아니 도리어 그를 모방했던 정치인들은 대부분 노무현 현상을 오해했는데, 그 가운데서도 가장 심각한 것은 노무현의 등장 이후 정치인들이 대중들에게 사랑받는 것을 연예인들이 대중들에게 사랑받는 것과 같은 것이라 생각하고 너나 할 것 없이 연예인 흉내를 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정치인이 목에 두른 스카프로 정책의 빈곤을 감추거나, 앞 다투어 팬클럽을 만들어 사람들을 몰고 다니며, 티브이 화면에서 눈물을 찍어내는 연기를 하기 시작한 것은 모두 노무현을 오해했기 때문에 생긴 일이다.

하지만 노무현은 패션 같은 것은 모르는 사람이었고, 스스로 팬클럽을 만들 생각도 한 적 없으며, 국회의원 명패를 집어 던지며 거친 분노를 보일지언정 가식적인 눈물을 찍어내는 종류의 인간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그런 노무현이 그토록 애틋하게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던 까닭이 무엇인가? 이유는 딱 하나다. 그것은 그가 싸우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무대 위에서 연기를 하는 사람이 아니라 현실의 악과 싸우는 사람이었으니 사랑받은 만큼 미움 받았던 사람이다. 그가 자기를 모방하는 모든 아류들과 구별되는 지점이 바로 여기이다.

연예인에게 '안티'는 백해무익한 독일 뿐이다. 하지만 정치인에게 '안티'는 자신의 존재이유이다. 왜냐하면 정치, 특히 진보정치란 현실의 악과 싸우는 일이기 때문이다. 세상의 악과 싸우는 사람은 반드시 세상의 미움을 사게 마련이다. 그러나 정치인이 시대의 불의와 싸우는 것은 또한 사람을 사랑하기 때문이니, 그가 크게 미움 받을수록 더 큰 사랑으로 보답받게 된다. 오늘날 정치인들이 다만 미움 받는 것을 두려워하여 싸우려 하지 않고 연예인들처럼 오로지 대중의 환심만을 얻으려 애쓴다면, 어떻게 그들이 대중의 사랑을 얻을 수 있겠는가?

▲ 노무현 전 대통령의 눈물. <조선일보>에 먹이를 주는 자가 삼성인데, 노 전 대통령은 <조선일보>에 대해서는 그리도 비타협적으로 싸울 줄 알았으면서, 그 배후에 웅크리고 있는 삼성에 대해서는 아무런 문제의식도 없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그의 한계였으며, 우리의 불행이었다.

노무현의 한계

하지만 우리가 노무현 이후의 정치인들이 대중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것을 염려하는 까닭은 그들 개인의 정치적 성공과 실패에 대한 관심 때문이 아니라 한국 정치의 객관적 위기상황에 대한 염려 때문이다. 생각하면 반드시 노무현과 같은 의미에서 사랑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정치인이 싸움을 통해 대중의 지지를 넓혀 나가는 것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일반적 현상이다.

다른 누구보다 한국의 민주화 운동의 역사와 함께 성장했던 김영삼과 김대중 대통령은 독재 권력과 비타협적으로 싸우면서 지지자들을 모으고 다시 그 힘으로 역사를 바꾼 사람들이었다. 정치인이 반드시 싸워야 할 시대의 악과 자기의 모든 것을 걸고 싸우는 모습을 보이면, 처음엔 구경꾼들이 모여들고 마침내 그들이 같이 싸우기 시작한다. 그러면 역사가 바뀌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 이 땅의 정치인들이 마치 투쟁의 시대는 끝났다는 듯이, 무엇과도 싸우려 하지 않고 연예인들처럼 대중의 환심만 사려 하는 것은 그들의 불행이기 이전에 시대의 불행이다. 왜냐하면 역사는 새로운 싸움을 통해 쇄신되고 진보하는 법인데, 정치의 광장에서 싸움다운 싸움이 일어나지 않으니 여기저기 분산된 싸움들 속에서 우리의 힘도 분산되어, 역사가 하나의 흐름을 이루지 못하고 우왕좌왕 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 시대의 정치인들을 무턱대고 비난할 수도 없으니, 온갖 시대의 질병들이 하나로 만나는 어떤 근원을 찾아내는 것이 언제나 쉬운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김영삼과 김대중은 행복한 정치인들이었다. 그들의 시대에는 우리 모두가 하나 되어 싸워야 할 대상이 너무도 분명했으므로, 정치인들이 시대의 근본 모순이 무엇인지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생각보다는 결단할 수 있는 용기였다. 김영삼처럼 생각이 모자라고 어눌한 정치인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도 그에게 결단해야 할 순간에 결단할 용기가 있었고 뛰쳐나가야 할 때 나갈 줄 알았던 저돌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볼 때 노무현은 그의 선배들보다는 불행한 사람이었다. 그는 아직 반독재 투쟁이 채 끝나지 않은 시대에 정치를 시작했지만, 그가 대통령이 되었을 때는 더 이상 반독재 투쟁이 시대적 과제가 아니었다. 1987년 6월항쟁으로 적어도 절차적 측면에서 민주화가 이루어진 뒤 김대중 대통령과 함께 실질적 의미에서도 정권 교체가 실현되었으니, 더는 독재 타도라는 구호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노무현은 변화된 시대에 걸맞게 새로운 싸움을 시작해야만 했는데, 그가 온몸으로 부딪쳤던 새로운 싸움의 대상이 한편에서는 지역 문제였고 다른 한편에서는 언론 문제였다. 지역 감정의 문제라고 하든 아니면 보다 정확하게 호남 차별의 문제라고 하든 지역 문제는 한국 정치의 고질병이니, 노무현이 이것을 반드시 해결되어야 할 문제로 제기한 것은 조금도 비난받을 일이 아니다.

언론 문제도 마찬가지다. 민주주의의 본질은 주먹이 아니라 말이 지배하는 데 있으므로, 민주화된 사회에서 말을 지배하는 자가 나라를 지배하게 마련이다. 현대 사회에서 말을 지배하는 자는 언론이다. 그런데 한국 사회에서 그 언론이 썩을 대로 썩어 있으니, 노무현이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민주주의를 결코 확고한 지반 위에 올려놓을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은 정확한 현실 인식이었다. 그가 이런 문제들을 시대적 과제로 제시하고 임기 내내 그와 싸우기를 마다하지 않은 것은 그가 자신이 선 자리가 어디인지를 모르는 사람이 아니었음을 증명해준다. 그는 자신이 새로운 시대의 문턱에 서 있음을 자각하고, 그에 걸맞게 새로운 시대적 과제를 제시하고 그와 맞서 싸웠던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노무현이 불행했다고 말한 까닭은 그가 새로이 설정한 싸움의 대상이 결코 새로운 시대를 근본에서 규정할 만큼 본질적이고 보편적인 모순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설령 지역 문제가 해소되고, 언론이 제정신을 차린다 하더라도, 신자유주의가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한, 이 땅에서 인간의 불행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노무현은 그것을 알기엔 너무도 순진한 사람이었다.

그는 지역 문제와 언론 문제의 이면에 더 크고 본질적인 문제가 있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지 못하고 오로지 자기가 설정한 그 두 문제하고만 부딪치고 또 부딪쳤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더라도 그가 신자유주의에 그렇게 속절없이 투항하지만 않았더라면, 그의 싸움은 민주화된 시대에 싸움의 전선을 새로이 넓힌 것으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표면의 적과 싸우면서 정말로 싸워야 할 본질적인 적에게 투항해버렸으니, 그것이야말로 그의 불행이며 시대의 비극이었다.

노무현과 삼성의 개인적 관계가 어떠했는지, 그가 부산상고 선배였던 삼성 구조본의 이학수 사장으로부터 언제부터 어떤 후원을 받았는지 그리고 대선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정치자금을 삼성으로부터 받았는지, 그런 것에 대해 우리는 알지 못하고 또 알고 싶은 생각도 없다. 그것은 중요한 일일 수도 있지만 사소한 일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내막이 어떻든 그가 삼성전자 진대제 사장을 정보통신부 장관에 임명하고 중앙일보 홍석현 회장을 주미대사에 임명했던 것은 우리가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 사실은 노무현이 <조선일보>와는 달리 삼성에 대해서는 아무런 문제의식도 없었다는 것을 모자람 없이 증명해준다. <조선일보>에 먹이를 주는 자가 삼성인데, 노무현은 <조선일보>에 대해서는 그리도 비타협적으로 싸울 줄 알았으면서, 그 배후에 웅크리고 있는 삼성에 대해서는 아무런 문제의식도 없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그의 한계였으며, 우리의 불행이었다.

그는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여론의 왜곡과 검찰 같은 권력 기관의 부패와 권력 남용에 대해서는 예민한 감수성을 가지고 있었지만, 자본주의적 경제 체제와 그것이 극단화된 신자유주의적 시장경제에 대해서는 아무런 문제의식도 없었다. 취임 초반부터 한국을 동북아 금융허브로 만들겠다면서 일관되게 신자유주의 정책을 추진했던 그는 마지막에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밀어붙이다 청와대를 떠났다.

그 사이 부자들은 더 부자가 되고 가난한 사람들은 더 가난해졌다. 정상적인 사회였더라면 2000년 삼성 자동차가 천문학적 손실을 내고 파산했을 때, 대우의 김우중 회장처럼 몰락했어야 할 삼성의 이건희는 최고의 부자가 되고 대다수 국민들은 88만 원 짜리 인생으로 전락해갔다. 그 자신이 책임 없다 말할 수 없는 이런 상황 앞에서 그가 한 일은 마치 점령군 앞에 투항한 장수처럼 이제 권력이 청와대에서 시장으로 넘어갔음을 아무런 저항 없이 인정한 것이었다.

기업 국가와 자유민주주의의 위기

하지만 우리 시대의 불행은 그 말처럼 권력이 시장으로 넘어갔다는 사실 자체에 있는 것은 아니다. 더 심각한 불행은 아직도 우리가 저 말의 의미와 심각성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며, 노무현이 그랬듯이 우리 또한 새로운 권력에 속절없이 투항해 버렸다는 사실이다.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국가 위에 당이 있다. 그렇다면 자본주의 국가 위에는 무엇이 있는가? 기업이다. 자본주의 국가는 본질적으로 기업 국가이다. 그것은 기업에 의한, 기업을 위한, 기업의 국가인 것이다. 지금까지 이것이 은폐되어 왔던 까닭은 기업이 아직 충분히 자라지 못한 상태에 있었기 때문이다. 기업이 국가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 채 국가의 후견 아래 있는 동안에는 기업이란 국가를 구성하는 하나의 구성요소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기업을 통한 생산이란 근대에 이르러 출현한 생산양식이다. 그런데 근대국가와 기업의 관계를 비유로 말해 근대국가가 달걀이라 한다면 기업은 노른자의 중심에 있는 배반과도 같다. 달걀 없이 배반이 없듯이, 근대 국가가 없었다면 근대적 기업도 없었을 것이다. 기업화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기능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근대적 국가의 법질서와 군사력 그리고 화폐 제도와 교육 제도 등이 요구되었기 때문이다. 기업은 근대국가 속에서 잉태되었으며, 근대 국가는 기업이라는 새로운 생명을 낳기 위해 형성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기업은 근대국가의 목적이었다. 기업을 위한 국가가 근대국가였던 것이다. 그런데 기업이 국가의 후견을 필요로 하는 단계에서는 근대국가는 기업을 위한 국가일 뿐 아직 기업에 의한 국가는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은 기업이 자랄 대로 자라 마치 병아리가 알을 깨고 나오듯 국가의 테두리를 넘어가는 시대이다. 이 단계가 되면 기업이 국가의 후견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국가가 기업의 후견을 필요로 하게 된다. 후견이란 지배의 다른 표현이니, 이 단계가 되면 국가는 단순히 기업을 위한 국가가 아니라 기업에 의한 국가, 곧 기업이 지배하는 국가가 된다. 이것이 지금 우리 시대 국가와 기업의 관계이다. 기업을 위해 국가가 존재하고 기업에 의해 국가가 작동될 때, 국가는 전면적으로 기업에 동화된 기업 국가가 된다. 다시 말해 국가 자체가 기업화되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유행하는 '민영화'라는 것은 '기업화'의 다른 이름이다.

과거에 공기업부터 국립대학까지 국가의 관리 아래 있던 공공적 기관이 민영화되는 것은 국가 자체가 전반적으로 기업화되는 과정에 다름 아닌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왜 문제라는 말인가? 그것은 국가가 기업화되면 될수록 시민의 자유가 억압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당이 국가 위에 있는 것처럼, 이제 자본주의 국가에는 기업이 국가 위에 군림한다. 그렇게 되면 공산당이 국가 기구를 장악하고 프롤레타리아를 위한 독재를 한다면서 인민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처럼, 아니 그보다 훨씬 더 독재적으로 기업 국가는 시민의 자유를 억압하게 된다.

왜냐하면 기업은 공산당 이상으로 독재적인 조직이기 때문이다. 기업이 국가의 한 구성요소에 지나지 않는 단계에서는 기업이 독재적이든 아니든 시민의 정치적 자유는 지켜질 수 있다. 그 단계에서 시민들은 기업을 통해서는 경제적 필요와 욕구를 충족시키면서 국가적 삶의 지평에서 보다 고차적인 정치적 자유를 실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가가 통째로 기업화되어 기업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되면, 더는 시민들이 국가를 통해 정치적 자유를 실현하는 것이 불가능해진다. 왜냐하면 국가 자체가 기업에 의해 도구화되고 노예화 되어버려 국가 자체가 더 이상 시민적 자유의 현실태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시민들은 이전까지 누리고 있던 정치적 권리 역시 제한되거나 빼앗기게 되는데, 지금 한국 사회에서 노동조합 활동이 실질적으로 불법화되고 집회와 표현의 자유가 갈수록 더 심각하게 위축되는 것은 단순히 대통령 한 사람을 잘못 뽑았기 때문이 아니라 이 나라가 본질적으로 기업에 의해 지배되는 기업 국가의 단계로 접어들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사람들은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적 기업 활동의 자유가 마치 동전의 앞뒷면처럼 공속하는 것처럼 생각해왔다. 하지만 이제 이런 고정관념은 수정되어야 한다.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적 기업 활동은 양립불가능한 모순대립의 관계에 있다. 왜냐하면 세상에서 가장 독재적인 조직이 기업이기 때문이다.

기업이 국가의 하부 단위일 때 기업의 독재는 기업 내부의 일로 묵인될 수 있었다. 그러나 기업이 국가의 실질적 지배자로 군림하게 된 지금 기업 독재를 타도하는 것은 우리가 힘들여 이루어 온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가장 절박한 과제이다.

삼성이 문제인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노무현 대통령은 권력이 시장으로 넘어갔다 말했지만, 그렇다고 시장이 나라를 지배한다고 말하는 것은 부정확한 말이다. 레이건 대통령과 함께 초창기 신자유주의 정책의 정력적 추진자였던 영국의 대처 수상은 모든 종류의 사회주의에 반대해 '사회는 없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 말이 옳다면 동일한 전제로부터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시장도 없다.' 다만 개별 기업과 그 기업을 지배하는 자본가가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실체로서 존재하지 않는 시장이 지배한다거나 권력이 시장으로 넘어갔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이다.

언제나 누군가가 지배한다. 그렇다면 지금 누가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가? 삼성이 지배한다. 그리고 부당한 방법으로 삼성을 지배하고 있는 이건희가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권력이다. 모든 권력의 정당성은 지배받는 민중들 자신이 그 권력을 정당한 절차를 통해 위임했을 경우에만 인정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삼성의 이건희에게 우리를 지배해달라고 정당한 절차를 거쳐 권력을 위임한 적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오늘날 한국을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권력으로 군림하고 있으며, 우리가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고 이런 상황을 방치한다면, 이제 그의 자식이 대를 이어 우리를 지배하게 될 것이다.

▲ 지난해 말 사면 받은 직후,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CES 2010'에 참석한 이건희 삼성 회장(사진 오른쪽) . 그는 한국 사회의 실질적인 지배자이지만, 사회 구성원 누구도 그에게 권력을 위임한 적이 없다. ⓒ뉴시스

삼성을 어떻게 할 것인가? 이제 정치가 대답하라!

정치가 다른 무엇보다 시민적 자유와 권리 그리고 평등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일이라면, 삼성과 싸우는 것은 바로 지금 가장 절박한 정치적 과제이다. 단순히 무상 급식이나 무상 의료 같은 복지의 확대를 말하는 것만으로는 지금 한국 사회의 위기 상황을 타개할 수는 없다. 보다 근본적으로 기업에 의한 시민적 자유의 억압을 정면으로 문제 삼고 그 기업 독재의 정점에 있는 삼성과의 전면적인 싸움에 나서지 않는 한, 우리는 막힌 하수구를 뚫지 못하고 그 위에 소독약만 뿌리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지금 한국의 정치인들은 이 중요한 과제를 팽개친 채 모두 어디서 누구와 싸우고 있는가? 한나라당은 천안함 침몰을 계기로 늘 그랬듯이 북한과 싸우느라 여념이 없다. 마치 북한의 침략만 막아내면 자유민주주의가 지켜지기라도 한다는 듯이.

하지만 지금까지 이 나라의 우익 세력이 북한을 핑계로 내부에서 독재적 권력을 추구해 온 것은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는 일이니, 지금 그들이 기업 독재를 막아 주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그런 한나라당의 독재와 싸운다는 민주당이나 국민참여당이 삼성의 기업독재를 막아줄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면, 그것 역시 부질없는 희망이다. 그들이 김대중에 기대든 아니면 노무현에 기대고 있든지 간에, 그들은 이른바 신자유주의 정책을 통해 군부독재국가를 기업독재국가로 순조롭게 이행시켜놓은 장본인들이다.

이런 사정은 민주노동당도 마찬가지이다. 투쟁하는 정당, 운동권 정당이라 각인되어 있지만 지금의 민주노동당은 외세와 싸우는 정당일 뿐, 삼성과 싸우겠다는 정당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진보신당의 정치인들이 삼성과 싸우겠다고 나서지도 않으니, 과연 우리는 지금 이 나라의 정치인들 가운데서 누구에게서 다음 시대의 희망을 발견할 수 있겠는가?

모든 시대는 인간에게 새로운 과제를 제시함으로써 새로운 시대의 주인이 될 사람을 부른다. 오늘날 한국의 정치가 필요로 하는 새로운 정치인은 연예인 흉내를 내는 오렌지족도 아니고, 복잡한 정책을 말하면서 아는 척 하는 먹물도 아니며, 다만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하는 용기를 가진 싸움꾼이다.

그런데 김용철 변호사의 책에 얽힌 뉴스가 <뉴욕타임스>의 대문에 걸리고, <프레시안>에서 '삼성을 생각한다'라는 특집 기획이 한 달 이상 계속되도록 단 한 사람의 정치인도 이 문제에 대해 발언하지 않고 있다. 그러고도 당신들이 대한민국의 책임 있는 정치인이라 할 수 있는가? 우리가 당신들의 비겁한 침묵을 모르고 잊어버릴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진정으로 그대들이 이 땅의 책임있는 정치인들이라면, 이제 삼성을 어떻게 할 것인지 당신들이 대답하라. 삼성의 문제야말로 우리 시대의 가장 중요한 정치적 문제이다.

(이 글은 지난달 28일 전남대학교 교수협의회가 마련한 담론의 장에서 발표된 발제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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