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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지배하는 단 한 가지 '확실한' 원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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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지배하는 단 한 가지 '확실한' 원리는…

[화제의 책] <불확실한 세상>

6550만 년 전 어느 날, 우주에서 날아온 직경 10~15킬로미터의 대형 운석이 초속 20킬로미터의 속도로 멕시코 유카탄 반도에 충돌했다. 원자폭탄의 10억 배에 달하는 엄청난 충돌 에너지로 인해 지진, 쓰나미, 화산 폭발이 일어났고 먼지가 대기를 덮어 기온이 떨어지고 식물들이 광합성을 못하게 됐다. 동굴에 살던 몇몇 포유류들을 제외한 거의 대부분의 동식물이 그 여파로 죽었고, 특히 먹이사슬의 맨 위에 있던 공룡은 더 이상 생존이 불가능해졌다. 지구의 역사에서 수천 만년을 호령하던 거대 공룡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드디어 포유류와 영장류의 새 시대가 활짝 열리는 순간이다.

지난 달, <사이언스>에서는 공룡의 멸종이 운석 충돌에 의한 것이라는 국제 공동 연구 결과가 발표되었다. 이른바 운석 충돌설은 이미 20여 년 전부터 수많은 지질학자, 고생물학자, 천문학자들에 의해 유력하게 받아들여졌던 이론이었기에 전혀 놀라운 사실은 아니었다. 다만, 이번 논문은 전 세계 41명의 과학자들이 참여한 일종의 '확인 사살' 같은 것이다. 이젠 초등학생들도 '공룡 멸종=운석 충돌'이라고 등식화할 정도다.

그런데 솔직히 나는 또 한 번 새롭다. 그리고 다시 전율이 느껴진다. 만일 그 때 운석이 지구를 약간만 비껴갔었더라면 지금의 나는 존재할까? 아니, 우리 호모사피엔스가 지구상에 이토록 번성할 수 있었을까? 몇 년 전에 작고한 하버드 대학교의 진화생물학자 스티븐 제이 굴드 교수의 대답은 '절대 아니오'다. 잘 알려진 대로, 그는 '우발성(contingency)'이 생명 진화의 가장 중요한 요인이라고 주장했다. 공룡의 시대가 간 후 포유류에서 영장류로 이어지는 진화의 고리는, 정말 우연찮게 날아온 운석이 지구와 충돌하면서 빚어진 우발적 사건에서 기인했다는 말이다. 공룡에게는 지독한 불운이었지만, 보잘 것 없던 우리의 조상(최초의 영장류)에게는 말 그대로 '하늘이 준 기회'였다. 그러니 인류의 출현이 지구의 역사에서 기쁜 소식이라면, 그 운석(들)에게 감사하자.

하지만 공룡에게나 포유류에게나 그리고 우리 영장류에게나 이 모든 상황이 불확실했기는 마찬가지다. 우리가 특정 종의 미래를 정확히 예측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이런 불확실성 때문이다. 그 아득한 옛날의 불확실성이 우리 인간을 출현시켰다면, 또 다른 불확실성이 우리를 멸절시킬 수도 있는 것이다. 불확실성은 진화의 배경이고, 불확실성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는 이렇게 뿌리가 깊다.

▲ <불확실한 세상>(박성민·조효제·박종현·최정규·노명우·이창익·박상표·강양구·김재영·김명진 지음, 사이언스북스 펴냄). ⓒ프레시안
다양한 지적 배경을 가진 열 명의 저자가 이 불확실성을 확실히 보여주기 위해 <불확실한 세상>(박성민 외 9인 지음, 사이언스북스 펴냄)으로 뭉쳤다. 우선 이 책은 위에서 언급된 것처럼 인간 심연의 두려움에 대한 이야기라는 측면에서 근본적이다. 동시에 지금 여기에서 벌어지고 있는 불확실성을 진단하고 성찰한다는 측면에서 실용적이다.

먼저 정치에서의 불확실성 문제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한국민의 불행을 불확실성의 정치학으로 풀어낸 정치컨설턴트 박성민이 일갈하듯이, 정치는 원래 불확실성을 없애는 것이 목적이지만, 우리네 정치는 정반대이다. 그는 공정성과 예측가능성이 낮은 우리 정치 시스템의 패러다임을 완전히 바꾸지 않고는 한국민의 행복지수가 올라가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한다. 그렇다면 국제적 정치 상황은 어떤가?

사회학자 조효제는 현대의 국제 정치도 이성과 민주주의를 승인하는 근대성을 숭상하면서도, 여전히 힘의 정치, 현실주의 정치, 국익우선주의에 발목이 잡혀 불확실한 행보를 거듭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대안이 궁금한 독자들에게 두 갈래 길을 제시한다. 이성의 문제를 이성을 통해 해결하려는 방식과 새로운 체계를 상상해보는 길. 하지만 비관적으로 보이는 것은 이 두 길에서도 불확실성은 없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불확실성에 대한 두려움은 경제 분야에서 더 피부에 와 닿는다. 경제학자 박종현의 말처럼, 우리는 최근 몇 년 사이에 대규모 글로벌 금융 위기를 겪으면서 금융시장이 '약간만 불안정한' 공간이 아니라 '대단히 불안정한' 공간임을 뼈저리게 체험했다. 그는 불확실한 세상에서 경제학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묻는다. 그에 따르면, 우선, 모든 불확실성을 리스크로 간주하고 수학적 모형들로 풀 수 있다는 과신은 금물이다. 예컨대 미국발 금융 위기를 통해 확인된 바, 리스크를 관리하려던 시도가 오히려 사회 전체의 리스크를 증폭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형 만들기나 확률 계산 등과 같은 고전적인 경제학적 전통이 완전히 폐기될 필요는 없다. 오히려 리스크를 불확실성과 명확히 구분하고 확률에 대한 해석들을 달리하는 과정을 통해 더 정교하고 확실하게 불확실성을 제거하려는 시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게다가 그는 불확실성이 역동적 사회를 가능케 하는 필요조건이라고까지 말한다. 물론 삶의 근본적인 안전성이 함께 마련된 경우에 한해서 말이다.

한편, 진화경제학자 최정규는 정보화가 가져온 새로운 차원의 불확실성에 관해 이야기한다. 그에 따르면 정보기술 시대로 넘어오면서 거래와 결부된 불확실성은 확실히 많이 줄어들었지만, 정보기술의 발달 과정에서 지식 및 학습의 중요성이 부각되고, 또 그 과정에서 네트워크 외부성이 발생하면서 경제는 점점 '양의 되먹임' 혹은 수확 체증의 특성을 띠게 되었다.

가령, 행위자 간에 벌어지는 작은 사건들이 사회 전체적으로 증폭될 수도 있고, 효율성과 생존이 늘 함께 가는 것도 아니며, 어찌하여 승자가 되었건 그 이후에는 모든 것을 독식하는 사회가 형성되었다. 그러면 이런 종류의 불확실성은 어떻게 소거될 수 있을까? 그는 이런 시대에는 되레 '보이는 손'이 필요할지 모른다고 결론 내린다. 이런 결론은 자유주의적 개입주의(libertarian paternalism)를 표방하는 최근의 '넛지(nudge)' 정책을 지지하는 것으로 보인다. 넛지는 최소한의 개입으로 불확실성을 최대한으로 낮추는 전략이라 할 수 있다.

인간 세계의 불확실성은 되레 확실성을 위한 장치와 테크닉을 진화시켰다. 사회학자 노명우는 인류가 불확실성(더 정확히는 불확실성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디자인한 삶의 양식과 문화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에 따르면, 불확실성에 대한 최초의 해결책은 종교였고, 과학이 그 뒤를 이었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상품의 형태로 제공되는 예측을 구매함으로써 불확실성에 대한 불안을 잠재우려하고 있다는 것이 그의 진단이다.

그러면서 존재론적 불확실성은 근대적 인식론으로도, 금융 자본의 확실성 상품으로도 해결될 수 없으며 오히려 '자기의 테크놀로지'를 통해 삶의 불확실성과 새로운 관계를 맺음으로써 해소된다고 주장한다. 그에게 불확실성은 질서나 안정이 결핍되어 있는 악의 상태가 아니라 단지 결정 내려지지 않은 상태이다. 불안의 근원이라기보다는 인문의 힘으로 지고 가야할 인간의 그림자요 창조의 진원지다.

이런 주장은, 불확실성을 단지 빨리 없애야만 하는 두려움의 배경으로서가 아니라 새로운 창조의 근원으로 해석했다는 면에서 참신하다. 하지만 저자가 제안한 '자기의 테크놀로지'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그것을 증진시키면 어떻게 창조성이 발현되는가에 대한 설명이 미흡해 보인다. 또한 뼛속 깊숙이 박혀 있는 불확실성에 대한 공포를 그렇게 쉽게 제거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한편, 종교학자 이창익 교수는 불확실성의 시대에 종교, 또는 성스러움이 갖는 진짜 의미와 통념적 오해에 대해 쓰고 있다. 일반 독자들은 여기서 먼저 불확실성과 종교의 관계에 관한 논의를 기대했을지 모른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하지만 이 글은 상대적으로 꽤 긴 분량을 차지함에도 불구하고 종교에 대한 이해에 방점이 찍혀 있고 불확실성과 종교의 연결 고리에 관해서는 상대적으로 미진하다.

수의사 박상표의 광우병 공포와 강양구의 지구 온난화 논쟁에 대한 에세이는 지구의 불확실성과 관련하여 가장 먼저 머리에 떠오르는 쟁점들을 다루고 있다. 사실 이런 논의는 여러 매체들을 통해 다양한 방식으로 비교적 충분하게 다뤄진 것들이기에 특별히 새로울 것은 없다. 하지만 불확실성이라는 주제로 이 문제를 새롭게 재구성했다는 면은 이 책의 기획에 잘 어울리는 지점이다.

불확실성과 과학기술의 만남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 물리철학자 김재영의 글은 불확실성의 과학들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생겨나고 진화해왔는지를 깔끔하게 보여준다. 확실성의 과학에서 확률의 과학으로, 그리고 물리학에서 수학에 이르는 인식론적 전통들을 차례로 검토함으로써 그는 이런 모든 전통들이 확실성을 향한 걸음이 아니겠느냐고 결론 내린다.

한편, 과학기술학자 김명진은 실험실을 벗어난 과학기술이 불확실성을 증가시키는 메커니즘과 사례들을 분석함으로써 과학과 불확실성을 연결시킨다. 그는 구체적으로 유전자 변형 식품과 우주 왕복선 챌린저호 폭발 사고에서 이 불확실성이 어떻게 증폭되었는지를 검토했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이런 불확실성에 맞서기 위한 방안을 제시한다. 그것은 과학기술에 대한 조심스런 태도, 예방의 원칙, 일반 시민의 정책 참여 등이다. 불확실성이 가장 적게 나타날 것 같은 과학기술 시설이나 상품 등에서 심심치 않게 터지는 사고들을 생각해보면, 새겨들어야 할 처방들이다.

이 책은 '불확실성'이라는 핵심 키워드를 중심에 놓고 정치, 경제, 문화, 환경, 과학이라는 다리를 연결해보려는 하나의 고급스런 시도이다. 이런 식의 학제적 주제 탐구는 국내 지식계에서 점점 자기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상황이다. 물론 그간의 성과물들은 대개 대담 형식이나 공동 강연 묶음, 또는 공동 연재물 엮음이나 논문 모음집 형태를 띠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내용이 깊지 못하거나 반대로 너무 전문적이었다.

하지만 <불확실한 세상>은 이 양 극단의 중간쯤에 자리한 매우 흥미로운 기획 작품이다. 각 에세이의 내용은, 정도 차이가 있긴 하지만, 대체로 너무 전문적이지도 그렇다고 너무 가볍지도 않다. 그리고 거의 모든 에세이가 '불확실성과 무엇'이라는 주제를 놓치지 않고 있다. 이것은 앞으로 주제 탐구 방식의 공저(또는 편저)를 위한 좋은 사례가 될 만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아쉬운 점들도 눈에 띤다. 우선 내용상으로 각 글 간의 유기적 관계가 잘 드러나지 않는다. 물론 글의 내용이 여기저기에서 지나치게 겹쳐있음을 지적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 책을 다 읽은 독자가 불확실한 세상의 입체적 전모를 떠올려볼 수 있을 정도의 연결 작업은 해줄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다. 가령, 불확실성의 정치는 경제는 물론이거니와 문화나 환경, 그리고 과학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을 수 있다. 이것은 대표저자나 엮은이의 몫일지 모른다. 물론 그런 작업을 한 서문이 있긴 하지만 (편지 형식의 서문이 참신했다) '따로 또 같이'의 측면에서는 충분하지 못했다.

또 다른 아쉬움은 불확실성과 관련된 중요한 인지과학적 연구들이 거의 언급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가령, 저명한 인지심리학자 대니얼 카너먼의 '불확실한 상황 속에서의 인간의 판단'에 대한 연구라든지, 불확실한 자연 환경과 사회 환경의 문제를 극복하기 위한 장치로 진화한 인간의 마음에 대한 연구 등이 보완된다면 더 풍부한 주제 탐구가 될 것이다.

형식면에서도 옥에 티가 조금 있다. 어떤 글은 뒤에 참고문헌이 달려 있고 다른 글들은 없다. 통일이 필요하다. 그리고 색인이 없어서 활용에 불편함이 있다.

어쨌든 심포지엄이나 학회의 결과물도 아니면서 하나의 주제에 대해 열편의 다양한 에세이를 받아내서 조율하고 엮었다는 사실은 매우 고무적이다. 오히려 이 책을 들고, '불확실한 세상'에서 무엇을 생각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고민하는 일반 독자들을 직접 만나보면 어떨까? 그리고 가능하다면 그 소통의 흔적을 다음 판에 덧붙이는 방식은 어떨까? 이것은 중요한 주제에 대한 흥미로운 성과물을 더 적절히 활용하고 싶은 여느 독자들의 해봄직한 제안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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