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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치는 한민족의 자존심? 먹은 지 고작 100년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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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치는 한민족의 자존심? 먹은 지 고작 100년인데!

[판다곰의 음식 여행·3] 배추김치는 옛날 김치가 아니다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적어도 김치, 고추장, 된장찌개 먹는 것을 너무도 당연하게 생각한다. 그중에서도 김치를 우리나라의 대표 음식으로 꼽는 데 주저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김치에 대한 자긍심은 한없이 드높아, 김치는 조상 대대로 먹던 우리 고유의 것이며, 건강에도 좋은 독창적인 발효 식품으로 좋은 음식이라 생각한다.

중국에서 만든 김치를 수입해 먹는 것은 자존심 상하는 일이어서 중국에서 생산된 김치에 무슨 하자가 있으면 김치 전쟁까지 치를 태세가 갖춰진 듯하다. 올림픽이나 월드컵에 출전한 선수에게는 김치 공수가 시작되며, 만일 김치가 없으면 성적도 좋지 않을 것 같다. 우리네 식탁에서 김치 없는 밥상은 생각할 수 없으며, 자장면과 돈가스를 먹을 때도 김치를 찾는다. 외국인이 보기에는 한국인은 김치 중독에 걸린 듯이 보일는지도 모른다.

그뿐인가, "일본과 중국을 점령한 김치의 맛", "세계에 진출하는 김치", "기무치가 아닌 김치", "김치의 우수성을 세계에 알려" 등의 구호들을 보면, 김치가 세계적으로 보급되고 다른 나라 사람들이 김치를 맛있게 먹는 것이 마치 우리 한국의 위대함을 전파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어쩌면 "김치는 우리의 가장 뛰어난 전통 음식이고 자랑이어서 민족의 우수성을 표현하는 것"으로 보는 민족주의적 실체에 이르기까지 한다.

김치가 빨갛게 물든 까닭은?

우리가 김치라고 해서 떠올리는 생각은 보통은 젓갈과 고춧가루가 풍성하게 들어간 배추김치를 뜻한다. 특히 김치의 정수는 늦가을에 담그는 김장김치다. 하지만 김치가 과연 그렇게 오래된 것이며 지금과 같은 모양을 하고 있었을까?

우선 지금은 김치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고춧가루는 신대륙의 산물이다. 우리나라에는 임진왜란 이후에 일본으로부터 도입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하기야 고춧가루를 쓰지 않는 백김치도 있고, 동치미도 있으니 고추가 김치의 필수품은 아니다. 고추가 없었던 때의 김치는 백김치만 있었을까?

그런 것은 아닌 것 같다. 우리는 원래부터 매운맛을 즐겼다. 고춧가루 이전의 시대에는 산초가루나 초피가루와 같은 다른 매운맛을 내는 재료를 찾아 쓴 것이다. 물론 고려시대의 귀족 계층에서는 중국을 통해 들어오는 후추를 쓰기도 했다. 하지만 이 비싼 수입품을 서민들 음식에까지 쓰기에는 너무 귀한 재료였을 것이다.

이 매운맛은 우리에게는 무척 중요했다. 남쪽에서 담그는 김치는 지금도 소금 간이 북쪽보다 훨씬 강하다. 기후 때문에 금세 쉬고 보존이 어렵기에 재료를 훨씬 짜게 절이는 것이다. 소금만으로 이렇게 짜게 한다면 김치는 거의 쓴맛이 날지도 모른다. 이 단점을 메우기 위해서 18세기 후반부터는 김치에 젓갈을 넣게 된다.

젓갈을 넣은 김치는 아미노산 때문에 맛이 훨씬 좋아지지만 비릿한 맛도 난다. 물론 젓갈만이 아미노산 맛을 내는 것이 아니니 간장으로 김치를 담글 수도 있다. 그 이전에 간장으로 담근 김치가 있었으니 이것 역시 전통의 한 변형일 뿐이다. 하지만 간장은 소량이라면 몰라도 늘 먹는 많은 김치를 담기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젓갈을 쓴 다음부터 젓갈의 비릿함을 없애려고 산초나 초피의 매운맛을 사용했던 것이고, 고추가 들어온 뒤로는 더 쉽게 재배할 수 있는 고춧가루로 대체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오늘날에도 이 산초가루가 쓰이기는 한다. 추어탕을 먹을 때에는 으레 이 산초가루를 넣어 맛을 내고, 남도에서는 아직도 산초 특유의 향을 좋아하는 집은 고춧가루와 함께 산초를 넣기도 한다. 이 산초로는 고추장 이전에 있던 산초장을 만들었다.

고추장을 담그는 과정을 보면 무척 복잡하다. 우선 고추장용 메주를 띄워 가루를 만든다. 그리고 찹쌀, 쌀, 보리 같은 곡식으로 떡을 만들고 엿기름을 넣어 달게 만든다. 여기에 메줏가루와 고춧가루를 넣고 숙성시킨 것이 바로 고추장이다. 이렇게 보면 고추장은 한순간에 발전한 음식이 아니라 복잡한 과정을 통해 오랜 기간에 걸쳐 발전한 음식이다.

곡식과 소금, 그리고 엿기름으로 당화시킨 음식으로는 식해를 들 수 있다. 주재료가 생선이라는 점이 다르기는 하지만 고추장에는 메주가 들어가 생선의 단백질을 대신한다. 식해는 함경도의 가자미식해를 비롯해 경상남도 지방에서도 전해오는 요리법이다. 고추장은 산초장의 제법에다 산초를 고추로 대체한 것이라 보아도 무방하다. 실제 산초장의 제법은 지금 고추장과 같은 방법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산초장이 약용으로 쓰였는지 음식으로 쓰였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근대 이전에는 식용과 약용의 차이는 아주 미묘하다고 봐야 한다. 대개 귀하고 드문 것이면 약용이라는 딱지가 붙어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귀한 음식이 약이라는 뜻이지 요즘의 한약이나 양약처럼 병에 직접 대응한 약이란 뜻은 아니다.

산초나 초피 모두 대량생산에는 문제가 있는 재료였다. 나무에서 산초 열매를 따고 씻어서 말리고 가루로 빻아야 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러니 채취에서부터 가루로 만들기까지 손도 많이 가거니와 나무라는 한계 때문에 생산이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초피도 나무껍질을 벗겨 말려 빻아야 하니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산초장이 주로 약용으로 쓰인 것은 이 생산력의 한계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고추처럼 왕성한 생산력을 보이는 작물도 드물다. 초여름부터 고추를 맺기 시작해서 그 앙상한 몸에 어떻게 그리 많은 고추가 열릴까 정말 신기할 정도로 가을에는 붉은 고추를 드리운다. 산초나 초피에 비해 재배가 손쉬운 고추가 들어오자 매운 것을 좋아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 귀한 산초와 초피를 대신한다. 매운맛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고추는 정말 값싸고 좋은 향신료였던 것이다. 이 산초를 김치에 넣던 전통 때문에, 고추의 재배가 보편화되자 우리 김치는 빨갛게 물들어갔다.

ⓒ프레시안(손문상)

100년밖에 안 된 배추김치

고추보다 도입이 더욱 늦은 것은 배추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김장김치를 담그는 결구배추다. 우리는 언제부터 배추를 먹기 시작했을까? 고려시대의 이규보가 <동국이상국집>에서 시로 읊은 여섯 가지의 채소(외, 가지, 순무, 파, 아욱, 박)에 배추는 없다. 그러다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의약서인 <향약구급방>에 처음으로 원시형 배추를 뜻하는 송(菘)이란 표현이 나타난다. 이 책은 치료를 위한 처방전들을 엮은 것으로, 고려 시대는 배추가 식용이 아닌 약용으로 쓰였으며 적어도 13세기에는 배추가 국내에서 재배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16세기부터는 국내에서 발간된 농사에 관한 책에 배추가 빠지지 않고 등장하니 이때쯤은 배추가 전국적으로 재배되는 중요한 채소의 하나가 되었음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 배추가 김치의 재료로 쓰였다고는 할 수 없다. 이때의 배추는 결구배추가 아닌 볼품없는 벌어진 배추였기에 겉절이 정도는 할 수 있었겠지만 김치의 재료로는 쓰인 것 같지 않다.

조선시대 최세진의 <훈몽자회>나, <중종실록>, <선조실록>과 같은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보면 중국으로부터 수입하던 무역품 목록 가운데 배추 종자가 포함되어 있는데, 그때까지는 국내의 배추 종자를 생산하는 기술이 미숙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실제로 정조 때의 실학자 박제가는 "배추는 중국 북경에서 종자를 가져다 심어야 좋은 것이 생산되고 농가에서 채종한 종자를 3년만 계속 심으면 순무가 되어버린다"라고 했다.

조선 후기까지 이런 상황은 계속되었으며, 중국에서 수입하는 귀한 종자가 전국적으로 보급되어 김치의 재료로 사용되었다고는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배추는 여전히 귀한 작물이었을 뿐, 서민들이 풍족하게 먹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 후 1906년 지금의 농촌진흥청 전신인 권업모범장이 설립되면서 품질이 우수한 배추 품종을 외국으로부터 도입하여 육종 연구가 시작되었으며, 일본의 종묘 회사를 통해서도 배추 종자가 들어왔다. 바야흐로 배추의 시대가 온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오늘날 주로 먹는 결구배추가 우리나라에 제대로 보급된 역사는 겨우 100년 정도에 불과한 셈이다.

요즈음 우리가 먹는 통배추가 전국에 보급된 것은 20세기로 들어오면서부터다. 그전까지는 김치의 재료는 무나 순무를 가지고 담근 깍두기와 나박김치가 대종이었으며 파, 부추나 갓을 가지고도 김치 재료로 썼을 것이다.

김치의 재료가 다양했다는 것은 요즘도 남아있는 고들빼기김치처럼 식물의 뿌리까지 통째로 쓰는 김치를 보면 짐작할 수 있다. 오랫동안 김치의 주재료였던 무도 사실은 옛날 무와는 다르다. 옛날 조선무는 지금 무보다는 훨씬 작은 것이었다. '왜무'라고 했던 것은 길쭉한 무였고, 지금에서 보통 쓰이는 무는 나중에 개량된 종자다.

나박김치는 무를 얇게 썰어 김치를 담근 것을 이르는 말로 변질했지만 원래 무를 이르는 '나복(蘿卜)'이라는 중국어에서 온 말이다. '나복'이 '나박'이란 말이 된 것이고 그냥 순수하게 무김치를 뜻하는 말이었다. 무김치가 주종일 때에는 이런 구분을 별로 하지 않았겠지만 아마도 배추김치가 김치의 대종을 이루면서 이런 구분을 지을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김치 하나면 고봉밥도 뚝딱

그렇다면 "김장김치를 포함하여 배추김치가 김치의 대종을 이룬 것은 불과 100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가 결론이다. 물론 무와 여러 가지 채소를 가지고 김치를 담그기는 했겠지만 100년 이전의 김치는 지금의 배추김치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정조의 수라상에 올라간 김치를 보아도 무로 만들었지 배추김치는 보이지 않는다.

김치의 제법은 오래되었지만 요즘과 같은 김치를 완성한 것은 100년 남짓 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무와 순무를 가지고 담근 김치는 결국은 먹기 좋은 통배추가 들어오면서 젓국과 고추, 해산물이 어우러지면서 화려한 김치로 꽃을 피운 것이다.

김치가 이렇게 발전하게 된 것은 배추라는 좋은 재료에 힘입은 점도 크겠지만 당시 식생활의 면모와도 관련이 깊다. 잘사는 양반 계층은 그래도 잘 먹고 살았겠지만 서민들의 음식은 정말 보잘것없었다. 노동을 해야 하는 농부의 주된 에너지원은 곡식으로 된 밥이었다. 밥을 짓는 곡식도 조와 보리가 대부분이었고 소화가 잘되는 쌀밥은 명절이나 제사와 같이 한정된 때 말고는 제대로 먹기 어려웠을 것이다.

농사라는 고된 노동의 어마어마한 에너지를 충당하려면 정말 많은 밥을 먹어야 했다. 19세기에 조선을 여행한 많은 사람은 이 서민들이 많은 밥을 먹는 것을 보고 경탄을 금치 못했다. 이 많은 밥을 넘기는 데 필요한 것이 반찬이다. 하지만 없는 살림에 반찬이 제대로 있을 수 없다.

간장과 된장은 있지만 이것만으로는 밥을 제대로 먹을 수 없다. 짠지와 같은 무김치와 장아찌도 반찬이 되었을 것이나 이것만으로는 반찬이 충분치 않다. 고기나 생선이 있었으면 좋겠지만 이들은 어쩌다 먹는 것이지 늘 먹을 수는 없다. 나물과 고추 같은 푸성귀도 좋은 반찬이 되지만 겨울에는 구할 수 없다. 여기에 등장한 것이 배추였던 것이다.

배추김치는 잎이 안으로 오그라들어 있기에 여러 가지 재료를 담을 수 있다. 무도 썰어 넣고 젓갈도 넣고, 해산물이나 견과류까지지 다 담을 수 있다. 이런 재료들을 풍성하게 담아낸 배추김치는 그 하나만으로도 훌륭한 반찬이 되었을 것이다.

1960~70년대만 하더라도 이렇게 김치 하나로 밥을 비우는 경우가 흔했다. 도시락에도 이유식 병에 담긴 김치 하나를 싸들고 와서 밥을 비웠고, 시장의 가게 주인들도 이렇게 김치 반찬 한 가지를 놓고 밥을 먹는 경우가 흔했다. 배추김치는 반찬의 수요 때문에 발전했고, 더욱이 김장이라는 겨울철을 대비한 반찬으로 가장 요긴했을 것이다.

전통과 창의력이 숙성된 오늘날의 배추김치

ⓒ프레시안(손문상)
배추김치는 보수성과 재료의 혁신이 오랜 세월 숙성되어 요즘과 같은 훌륭한 김치로 탄생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사실 김치와 같이 채소를 소금에 절여 먹는 것은 우리만의 요리법은 아니다. 중국에도 일본에도 있으며 동남아시아에도 있다. 심지어 서구에도 양배추절임 같은 음식은 흔하다.

하지만 그네들은 절임채소에 식초를 첨가하는 것과 같은 단순한 것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한 걸음을 더 나아가는 것이 힘든 법이다. 소금에 절인 채소가 발효 과정을 거치는 것까지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거기에다 다른 재료를 혼합하여 온전한 음식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것이 힘들었을 뿐이다.

현재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배추김치의 역사를 보면 지금은 보편적인 음식이 불과 100년 전만 하더라도 오늘날의 모습과는 많이 달랐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이 음식들의 전통이 깊음을 자랑할 게 아니라, 평범하던 음식을 화려하게 꽃피운 창의력과 변용을 더 높이 평가해야 하지 않나 싶다. 음식은 변하는 것이고 그 변화에는 재료도 재료지만 조합과 창의적인 생각의 숙성이 더 중요한 법이다.

김치를 귀중히 하려면 겉만 보지 말고 그 안에 들어 있는 창의적인 정신을 보아야 한다.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정신은 사상이나 철학처럼 고귀한 곳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부엌에의 도마 위에도, 부뚜막과 항아리 안에도, 음식을 만드는 어머니의 손끝에도 오롯이 새겨져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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