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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는 사라졌다. 과연?"

[삼성을 생각한다] "삼성왕국, 포스트민주화 시대의 우울한 초상"

나는, 악한 사람들이 죽어서 무덤에 묻히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사람들은 장지에서 돌아오는 길에 그 악한 사람들을 칭찬한다. 그것도 다른 곳이 아닌, 바로 그 악한 사람들이 평소에 악한 일을 하던 바로 그 성읍에서, 사람들은 그들을 칭찬한다. 이런 것을 보고 듣노라면 허탈한 마음 가눌 수 없다.
―'전도서' 8장 10절


프톨레마이오스 제국 치하(기원전 301~198년)의 유다는 오랜만에 누리는 평화를 만끽합니다. 그런데 바로 이 시기에 '코헬렛'(Qohelet, 전도자)이라고 자칭하는 한 노학자는 '헛되다'는 말을 무려 30여 회나 내뱉으며 독한 냉소주의문학을 저술합니다. 그의 글은 "전도자가 말한다. 헛되고 헛되다. 헛되고 헛되다. 모든 것이 헛되다."(1,2)로 시작하고, 이 글이 저작된 후에 첨가된 12장 9~14절을 제외하면, "전도자가 말한다. 헛되고 헛되다. 모든 것이 헛되다(12,8)"로 끝을 맺습니다. 왜 그는 이 평화의 시대에 그토록 독한 냉소주의에 빠져야 했던 것일까요.

기원전 332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이끄는 무적의 군대가 팔레스티나로 진군하자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은 저항 없이 곧바로 항복을 합니다. 그리고 323년 이 새 제국의 군주가 요절한 뒤, 그의 휘하 장군들 사이의 치열한 전쟁이 벌어집니다. 기원전 301년 이집트에 터잡은 프톨레마이오스 장군의 제국에 병합될 때까지 팔레스티나는 혹독한 전쟁의 참화를 겪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 이후 백 년 남짓의 기간 동안 이곳에는 거의 전쟁이 없었습니다. 식민지이긴 하지만 오랜만에 누리는 평화였습니다.

알렉산드로스의 다른 장군들이 세운 나라들에 비해 프톨레마이오스 제국은 정치적으로 매우 안정되었고 경제적으로 크게 번성했습니다. 전례 없이 안정된 중앙집권적 체제 아래 제국은 각 지방의 농민들에게 개량된 농법, 농기구, 새로 개발된 태양력에 기초한 과학화된 농경주기를 보급했고, 국제무역에서 유리한 작물 경작을 유도했습니다. 그리고 화폐제도를 확산시켜 무역의 효율성을 크게 진작시켰습니다. 그래서 헬레니즘 제국들 여기저기 건설된 폴리스 간 국제무역이 대단히 활발해졌습니다.

한편 프톨레마이오스 제국의 수도 알렉산드리아에는 거대한 도서관이 건립되고 있었습니다. 70만 권이라는 어마어마한 장서로 유명한 이 도서관 건립을 위해 제국은 막대한 기금을 쏟아부었습니다. 특히 책을 필사하여 복사본을 만드는 서기관의 수효가 급증하고, 체계적이고 전문적인 서기관 교육시스템이 제도화됩니다. 문자 능력이 출중한 중산층 엘리트가 대량으로 탄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 중 적지 않은 이들이 경제적 활황으로 부를 축적한 서민 계층에서 배출되게 됩니다.

그리고 이것은 제국 전역에 지식운동을 활성화시키며, 바로 이런 맥락에서 유다에서 이른바 '지혜'라는 장르의 문학이 태동합니다. 과거 왕실 사제나 서기관들이 저술한 문헌인 율법서나 역사서는 왕과 귀족의 나라, 그 뿌리와 비전을 다루었는데, 이들 신흥학자들인 민간서기관들의 지혜 문서들은 대중의 일상적 삶의 질서를 언어적으로 체계화하는 것, 곧 일상적 경험을 성찰하는 가르침을 다룹니다.

그런데 그런 지혜문헌 학자들이 많은 활약을 하고 있는 시기에, 코헬렛이라는 한 노학자는 그 지혜들에 짙은 냉소의 말을 쏟아내고 있는 것입니다. 지배적인 지혜들이 평화로운 세계를 만끽하면서, 이런 세상에서 하느님의 뜻에 따라 올바르게 사는 법을 말하고, 그것이 풍요와 안정, 건강이라는 신의 축복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인과응보의 진리를 설파하고 있는데, 코헬렛은 그 모든 것이 헛될 뿐이라고 말합니다.

제국이 제공해준 안정과 번영의 토대 위에서 많은 야훼의 현자들이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악이 소멸해가는 세상의 가능성에 탐닉하고 있는데, 오늘 읽은 본문처럼, 코헬렛은 악한 자가 죽어도 그 악행이 자행되던 바로 그 곳에서조차 칭송받는 세상을 절망스럽게 냉소합니다. 악마가 사라지고 있다는 바로 그 시대에 악마는 사람들의 공모 속에 칭송받으며 일상과 동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바로 이 시기에 새로 부자가 된 평민들이 많았지만, 막대한 세금을 강탈하는 프톨레마이오스 제국 특유의 조세체제 아래서 더욱 많은 이들이 몰락하고 있었습니다. 많은 이들이 자신의 생각을 글로 남기게 된 시기에 여전히 문맹인 더 많은 이들은 주체의 조건을 더욱 상실해갔던 것입니다.

느헤미야-에스라 이후 유다(예후다)는 명실상부 자치구가 되었습니다. 바야흐로 총독사회가 안착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들이 남겨둔 갈등의 축은 여전히 유다 지방 내부를 휘두르고 있었습니다. 이 싸움은 성전을 장악하기 위한 싸움이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분명해진 것은 유다 지방의 핵심은 성전이라는 점, 그리고 성전의 수장, 곧 대사제는 이 사회의 지배자임을 의미하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군주제가 총독통치를 경유한 뒤 '사제들의 사회'가 된 것입니다. 물론 사제들의 시대에도 군주 혹은 총독 같은 세속통치자가 있었지만, 대중의 정신을 지배하여, 슬프게도 하고 기쁘게도 하며, 절망하게도 하고 희망에 차게도 하는 것은 바로 사제들이 주도하는 신정체제사회가 된 것입니다.

한편 우리사회가 권위주의적 국부독재체제에서 민주정부들을 거친 뒤 포스트민주화를 향한 길을 찾아 나서고 있는 중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지금 어떤 양상으로 가시화되고 있는 것일까요. 나는 군인들의 합리성이 사회 전체의 합리성이 되어야 한다고 강요받던 시대가 반독재 민주화운동 특유의 문화적 성향이 대안적 합리성으로 수용되었던 시대로 이행했으며, 그것은 다시 최근 기업가들의 합리성을 전 국민에게 강요하는 시대로 나아가고 있다고, 우리사회 현재적 변화를 이야기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 출판가를 강타하고 있는 김용철 변호사의 <삼성을 생각한다>를 읽으면서 나는 이 생각을 계속하면서도 약간 다르게 읽는 것이 필요하다는 상념에 빠져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사회의 민주화가 본격 가동된 것은 정권교체를 이룩한 1997년부터라고 할 수 있는데,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라는 두 번의 민주정부들의 실험은 공히 두 가지 목표를 지향하고 있었습니다. 알다시피 그 하나가 '민주화'이고 다른 하나는 '성장'입니다. 민주화는 권위주의적 군부체제를 청산하고 시민적 주권사회를 향한 제도적 실험을 의미했고, 성장은 과거 발전국가 모델을 신자유주의적으로 재구축하는 정치경제적 제도화 과정을 의미했습니다. 그런데 민주화와 성장은 '그 10년' 내내 잘 조화를 이루지 못한 채 줄곧 갈등을 일으켜왔습니다. 하여 시민사회는 그것을 '386적인 합리성'의 한계로 이해했고 그 결과가 MB정부의 탄생으로 귀결되었습니다.

▲ '이건희 원포인트 사면'이 이뤄진 지난해 12월 30일자 '손문상의 그림세상'.

그런데 <삼성을 생각한다>를 읽다 보면 포스트민주화 체제를 추동하는 제도적 헤게모니 세력은 MB 정부라기보다는 삼성의 이건희 체제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미 삼성의 연 매출액은 국가 예산을 압도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들은 정보력에서 국정원을 능가하고 기획력에서 청와대를 압도하는 능력을 소유하고 있으며, 정계, 제계, 법조계, 학계, 언론계 등, 사회 각 영역의 여론 주도집단을 지지층으로 둠으로서 막대한 정책형성능력을 갖춘 세력입니다.

게다가 민주화 이후, 특히 MB식 막가파 정치 이후, 사회적 합의 시스템이 교란된 상황에 있는 정부에 비해, 잘 조직된 중앙집권적 전제군주체제 같은 삼성은 훨씬 효과적으로 민주화 이후 체제의 비전을 더 잘 드러내고 있는 듯이 보입니다.

시민사회는 삼성의 부당내부거래, 불법상속, 노조탄압, 정경유착 등의 부조리함에 대해 잘 알고 있음에도, 글로벌사회에서 민족적 자긍심의 핵심을 이루고 있음을 또한 각인하고 있습니다. 삼성이 없다면 국가의 성장과 시민사회의 행복을 향한 여정은 심각하게 좌초되고 말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부조리함 대 자긍심' 사이의 양자택일의 귀로에 서 있는 한, 시민사회는 대체로 후자를 선택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내가 음울하게 상상하는 포스트민주화 시대의 모습은 기업의 합리성에 추동되는 정치 세력이 아니라 기업 그 자체다 이끄는 사회일지도 모릅니다. 사회세력간의 협상에 기초하는 정치가 아니라, 시장의 이익을 강조하는 기업이 우리의 미래를 이끌고 있다면, 더구나 그 기업이 군주제 모델에 기초하고 있다면, 그런 상상은 한 편의 치명적인 재앙의 시나리오처럼 들립니다.

그런데 시민사회는 꿈을 꾸고 있습니다. 일류국가, 일류시민이 되는 꿈 말입니다. 그것은 지구화 시대 삼성의 성공 모델에 기초한 꿈입니다. 그 과정에서 탈락자들이 무수히 있고, 그러한 탈락의 위기가 우리 자신의 목을 옥죄고 있는 그 순간에도 우리는 삼성의 꿈을 공유하기를 갈망합니다.

군부권위주의 체제는 '빨갱이'라는 악마가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민주화 시대에는 '반민주 세력'이라는 악마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기업의 시대인 포스트민주화 체제에 악마는 사라졌습니다. 낙오자와 성공한 자만 존재하고, 그 성공의 정점에 한 기업의 신화가 있습니다. 코헬렛의 '헛되다'는 주장이 겨냥하는 과녁은 우리 시대에는 바로 이 신화에 있습니다.

(이 글은 김진호 목사가 지난 14일 한백교회에서 발표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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