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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 영어 강의는 '개그쇼'?…교수도, 학생도 '영어 공포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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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 영어 강의는 '개그쇼'?…교수도, 학생도 '영어 공포증'

"이 영어 강의는 세종대왕 최신 버전 탑재! 점수도 olleh!"

"이건 안 되겠어요. 음… 한국말로 해야 할 거 같아요. all right?"

이른바 '명문'으로 꼽히는 서울 소재 A대학교. 사회복지학과 수업을 진행하던 교수는 결국 몇 마디 영어도 하지 못하고 한국어로 강의를 진행했다. 그러자 몇몇 학생은 박수를 쳤다.

이날 수업은 사회복지 프로그램을 어떻게 개발하는가를 공부하는 자리였다. 여타 수업과 다른 점이 있다면 수업 내내 교수, 학생이 모두 영어로 강의를 진행한다는 것. 하지만 3시간 연강으로 진행되는 영어 수업에서 영어가 사용된 적은 거의 없었다.

이날 수업에서 교수는 새로 수업에 참가한 교환 학생을 소개할 때만 영어를 사용했다. 교수는 "새로 들어온 학생을 위해서 한국어를 사용할 때는 쉬운 표현만 쓰도록 하겠다"며 "영어를 잘하는 학생이 와서 개인적으로 반갑다"고 말했다.

영어 수업은 시종 한국어로만 진행됐다. 교환 학생은 수업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학생도 교수에게 질문을 할 때, 대놓고 한국어를 사용했다. 조별 토론을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교수가 과제를 내주며, 우스갯소리로 "really?"라고 말한 게 전부였다.

서울 소재 B대학교.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마케팅 수업을 진행하던 교수는 그날 발행된 신문 기사를 예로 들며 영어로 마케팅의 기본 개념을 설명했다. 하지만 학생은 도통 알아듣지 못하는 분위기였다. 농담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고 '멍'하니 교수만 바라보았다.

교수는 "농담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해 학생들이 웃지를 않는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솔직히 한국말로 강의를 하면 학생들을 이해시키기 훨씬 편하다"며 "영어로 강의를 하려니 교과서 수준에 강의가 머물러 있다"고 고백했다.

교수는 "나 역시 영어가 서툴기 때문에 영어 수업 준비에 시간이 오래 걸린다"며 "그렇기에 준비한 것 외에는 강의를 할 수 없다"고 전했다. 그는 이어서 "그렇다 보니 내가 가진 경험과 고민을 녹여 수업을 진행하긴 어려움이 있다"고 영어 강의의 한계를 지적했다.

결국 교수는 3시간 강의 중 2시간은 한국어로, 나머지 1시간은 영어로 수업을 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날 영어 수업은 이뤄지지 못했다.

▲ 이 사진은 기사 내용과 무관합니다. ⓒ연합뉴스(자료사진)

학생도, 교수도 답답한 대학 영어 강의

2008년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이 외국인 학생이 단 한 명이라도 듣는 수업은 영어로 진행한다고 밝히고 나서, 우후죽순 대학교에서 영어 수업을 확대하고 있다. 하지만 그에 따라 부작용이 속출하고 있다. 수업을 하는 교수도, 수업을 듣는 학생도 '영어 공포증'에 시달린다.

대부분의 영어 강의는 다른 강의를 미처 신청하지 못한 학생들이 어쩔 수 없이 듣는 강의로 전락했다. A대학교 사회복지학과를 다니고 있는 박성수(가명·21) 씨는 "한글로 수업을 들어도 잘 이해가 가지 않는 복지조직론을 영어로 배우니 학생들이 제대로 이해하기란 불가능하다"며 "결국 생색내기 행위로 전락된 게 영어 강의"라고 꼬집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일선 대학에서는 전공 필수 강의는 영어 강의를 하지 않고 전공 선택 강의와 교양 강의 중 일부 강의만 영어 수강을 할 수 있도록 했다. 영어 강의 수강을 독려하고자 일부 학과에서는 성적 장학금 신청 시 가산점 부과, 영어 강의 성적 우수자에겐 추가 장학금 지급, 교수 재량으로 학점을 줄 수 있는 절대 평가 등을 도입했다. 하지만 학생들의 외면은 여전하다.

영어에 익숙하지 않은 교수도 영어 수업이 곤욕스럽긴 마찬가지다. 서울 소재 C대학교 공대에 다니는 조은정(가명·22) 씨는 "1시간 강의 동안 '유노(you know)'만 백 번 가까이 하는 교수도 있다"며 "어떤 교수는 영어로 말하는 게 익숙하지 않아 한국어와 영어를 번갈아 쓰기도 한다"고 밝혔다.

아예 대놓고 첫 시간부터 영어가 어려우니 한국말로 수업을 진행하겠다고 공공연히 말하는 교수도 있다. 개강 초에는 영어 강의였는데, 나중에 일반 강의로 바뀌는 일도 있다. 조 씨는 "교수가 영어 강의로 개설은 일단 했는데 버거우니깐 일반 강의로 돌리는 경우도 많다"고 설명했다.

"한국어로도 이해가 안 되는데 영어로 수업이라니…"

이렇다보니 개강 초 학교 게시판에는 영어 강의에 대한 글들이 하나 둘씩 올라온다.

"OOO 교수님, 영어 수업 세종대왕 패치(한국어로 수업하는 것) 깔렸나요?", "한국 교수님들 영어 수업 발음 '안습', 한국 교수 영어 강의 듣지 마세요", "OOO 교수님은 세종대왕 최신 버전 탑재, 성적도 잘 줍니다"

대부분 영어 수업을 한국어로 진행하는지 묻는 글이다. 하지만 이런 부작용에도 대학교에서는 지속적으로 영어 수업 비중을 늘려가는 추세다. 몇몇 대학은 신규 임용 교원에게 영어 강의를 의무화하고 있다. 또 영어 강의를 진행하는 교원에게는 평가업적 가점 등 인센티브를 주며 영어 강의를 독려하고 있다.

이런 대학의 정책으로 웃지 못할 일도 발생한다. 서울 소재 D대학교 사회대학의 한 과는 최근 신규 교수를 임용했다. 프랑스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이 교수는 채용 조건 중 하나로 '영어 강의'를 의무 배당받았다. 프랑스에서 공부한 교수가 영어 강의를 해야 하는 상황이 우습지만,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온갖 부작용에도 대학의 밀어붙이기 탓에, 2010년 1학기 현재 영어 강의 비율은 전체 강의에서 10~20퍼센트를 차지했던 2007년 2학기와 비교해 보면 곱절은 늘었다. 고려대 경영대학교의 경우, 영어 강의 비율이 60퍼센트에 달한다.

특히 대학교는 영어 강의가 '대학의 글로벌화'와 '세계적 대학으로의 급성장'의 상징처럼 여긴다. 그러나 이런 영어 강의가 교육에 얼마나 효과적인지는 미지수다. A대학교를 다니는 박성수 씨는 이런 상황을 이렇게 꼬집었다.

"지금 대학에서는 <개그콘서트>보다 더 재미있는 '개그쇼'가 진행 중이다. 현재 영어 수업 문제가 속출하는데, 아무런 대책도 없이 대학교에서는 수업을 강행하고 있다. 전공을 갑자기 영어로 수업하면 학생이나 교수는 어떻게 하라는 건지 도무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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