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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금융맨? 월 130만 원 받다 잘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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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금융맨? 월 130만 원 받다 잘렸습니다"

[한국의 워킹푸어] 돈 만지지만 돈과 거리 먼 금융권 비정규직①

김현석(30, 가명) 씨는 아내가 걱정이다. 요즘 들어 아내는 30분을 채 서있지 못한다. 얼마 전에는 한의원에 갔더니 맥이 잡히지 않았다. 출산 후 제대로 산후 조리를 못해 건강이 많이 나빠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내는 일을 해야 한다. 김 씨는 얼마 전 계약이 만료돼 다니던 은행에서 해고당했다.

김 씨는 대학 재학시절부터 멋진 금융인이 되는 게 꿈이었다. 그는 지난 2006년 12월, 농협의 고객지원센터 서울지점에 입사했다. 흔히 말하는 '콜센터'다. 계약직이었다.

예비군훈련일은 공포의 날, 여름휴가도 사치

"대학 다닐 때는 토목공학을 전공했어요. 학교 다니면서 경제에 관심이 생겨 경영학을 부전공했고요. 자연스럽게 금융인이 되는 꿈을 꿨습니다. 당시는 계약직이고 정규직이고, 그런 것들은 잘 몰랐죠."

김 씨는 이 일이 좋은 경력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쌓아둔 경력으로 정규직원이 될 수 있으리라 여겼다. 주변에서는 다들 "은행 정규직원은 좋은 대학 나와야 가능하다"고들 했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실력으로 돌파할 수 있으리라 여겼다. 정치인들이 그렇게들 부족하다고 질타하는 '도전 정신'을 그는 갖고 있었다.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회사의 권고로 야간상담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근무 시간은 저녁 7시부터 다음날 아침 8시. 하루 쉬고 하루 일하는 2교대 근무였다. 그는 이렇게 일하고 월 평균 130-140만 원을 받았다. 2009년 농협의 대졸 정규직 남성의 초임은 3200만 원이었다.

힘든 일이 많았다. 예비군훈련일은 그에게 공포의 날이었다. 법정휴일로 나라가 정했지만, 계약직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그는 연이틀을 쉬지 않고 일해야 했다. 예비군훈련으로 빠지는 하루를 보충해야 했기 때문이다.

여름 휴가기간도 그에게는 사치였다. 계약직은 여름 휴가가 보장되지 않았다. 남들 가는 것처럼 4박5일의 휴가를 가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기간을 연달아 일해야 했다. 무리해서 일을 하고, 무리해서 쉬었다.

김 씨는 지금도 아내의 출산 당시를 생각하면 분통이 터진다. 하필이면 퇴근 시간을 서너 시간 남겨둔 새벽에 진통이 찾아왔다. 회사 규정상 배우자가 출산할 경우 사흘 이내의 휴가를 얻는 게 가능했다. 아내에겐 너무나 미안하지만 순간 머리를 굴려보았다. 어차피 세 시간만 지나면 퇴근이다. 그러나 지금 당장 휴가를 신청하면 당일부터 휴가로 환산돼 하루가 날아갈 수밖에 없다. 김 씨는 아내에게 힘든 말을 꺼냈다. 비정규직 노동자로 맞은 냉혹한 사회는, 그에게도 냉혹함을 요구했다.

"부끄럽지만 그 때 아내에게 한 말이 '조금만 참자, 이제 곧 퇴근이야'라는 거였어요. 하루 일하고 하루 쉬니까 산후 아내를 돌보려면 당장 몇 시간이 중요한 판이었거든요. 다행히 아내가 잘 버텨줘서 출산을 지켜봤어요. 그리고 회사에 전화해서 휴가를 신청했죠. 그런데 이 사람들이 제 근무 특성을 무시해버리고 출산 당일부터 휴가를 잡더라고요. 그날 전 새벽에 일을 다 했는데. 딱 하루 쉬고 다시 출근한 셈이 됐죠."

잔인한 말 "기다려 보자"

도저히 야간업무를 지속할 수 없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김 씨는 근무시간을 조정해달라고 회사에 부탁했다. 회사는 "앞으로 콜센터를 아웃소싱할 계획"이라고 답변했다. 당장 수익을 내지 못하는 조직은 외주로 돌려버리는 게 비용절감이요, 조직 효율화다. 대신 회사가 김 씨에게 제안한 보직은 신설한 '헬프데스크팀'이었다. 지점에서 일하는 정규직원들의 업무 상담이 주된 일이다. 비정규직 노동자인 김 씨에게 정규직원들의 전문 업무를 가르쳐주라는 말이다. 말이 되지 않는 것 같지만, 현실은 코미디였다.

일을 하다보면 과장이나 부장에게서도 전화가 걸려왔다. 김 씨는 "계약직이 정규직을 가르치는 게 말이 안 된다"고 회사에 어려움을 호소했다. 회사는 당근을 내밀었다. "이후 헬프데스크팀원들은 별정직(무기계약직) 전환의 1순위로 고려하겠다. 열심히 해 달라"고 말이다.

드디어 고생한 보람이 생기는구나 싶었다. 김 씨는 별정직 전환의 꿈을 갖고 업무 시간 외에도 스터디팀을 꾸려 상담 지침서를 만들기 시작했다. 공부하다보니 자기만 알고 있기 아까운 업무 지식이 많았다. 사내 인트라넷을 이용해 스터디로 쌓은 업무 노하우를 공유했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평소 자신을 그렇게 업신여기던 정규직원들에게서 감사 인사를 한 아름 받았다. 정규직 전환이 눈앞에 다가온 듯했다.

꿈은 꿈일 뿐이었다.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전환 통보는 받지 못했다. 회사는 그저 "기다려 보자"는 대답뿐이었다. 사방에서 "콜센터 출신들은 (별정직) 전환이 안 될 것"이라는 풍문이 나돌았다. 결국 마지막에 회사에 들은 대답은 "어쩔 수 없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2009년 12월. 계약이 만료됐다. 비정규직법은 예전에 통과됐다. 김 씨는 차가운 거리로 나왔다. 몸이 아픈 아내가 100만 원이 조금 넘는 돈을 벌어와 가족을 부양하고 있다. 4월이면 끝이 날 실업급여까지 포함하면 가구소득이 월 180만 원 가량이다. 서울시가 실시한 여론조사를 보면 근로소득을 올리는 서울 거주 가구의 평균 월 소득은 330만 원이었다. 김 씨가 일할 때 부부합계 소득은 220만 원 정도였다. 그는 가난했다. 수천만 원 연봉을 받는 정규직 은행원들을 가르칠 정도로 금융지식이 많았지만, 그는 재테크는 꿈도 못 꿀 근로빈곤층이었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으면서 은행빚만 6000만 원으로 늘었다.

▲금융권의 계약직 노동자도 화려한 '금융맨' 대접을 받을 수 있을까. ⓒ연합뉴스
대졸 초임, 정규직과 최대 1800만 원까지 차이 나

고임금에 사내복지도 훌륭한 '꿈의 직장' 은행은 정규직에게만 해당되는 얘기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초임은 적게는 수백 만원에서 많게는 2000만 원 가까이 차이가 났다. 비정규직에게는 학자금·의료비 등 복지혜택도 전무하다.

2009년 신한은행의 정규직원 초임은 군필자 4200만 원, 미필자 3400만 원. 반면 비정규직인 창구영업 직원(텔러)의 초임은 2400만 원에 그쳤다. 국민은행은 대졸 초임이 3700만 원이었지만 텔러의 연봉은 2300만~2400만 원 선이었다.

하나은행의 정규직 초임은 2880만 원이지만 비정규직 초임은 1697만 원. 우리은행의 정규직 대졸 초임 3400만 원이었지만 텔러의 초임은 2500만 원이었다. 우리은행은 2007년부터 비정규직을 폐지했지만 급여에서는 일부 차이를 보였다.

또 학자금, 임차보증금, 의료비 등 복지 혜택도 비정규직원에게는 제공되지 않거나 제한적이다. 신한은행은 무주택 직원에게 조건에 따라 7000만~1억 원 한도 내에서 임차보증금을 2년간 지원하는 대여주택 제도를 시행하고 있으며 유치원 3년간 월 10만 원 이내, 중.고.대학교 등록금 100% 이내에서 학자금을 지원하고 있다. 하지만 비정규직원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

외환은행은 유치원 자녀를 둔 정규직원에게 월 15만 원 이내에서 3년간 학자금을 지급하고 고등학생과 대학생 자녀를 둔 정규직원에게 등록금의 100%를 지급하지만, 비정규직원에게는 유치원 자녀 학자금만을 제공하고 있다. 집이 없는 직원에게 8년간 지역별로 7000만~1억 2000만 원까지 지원하는 주택대여도 비정규직원은 적용대상에서 제외된다.

하나은행은 학자금과 경조사비, 의료비는 정규직원과 비정규직원 모두에게 제공하고 있지만 주택지원 자금은 정규직원에게만 제공된다.

다윗 vs 골리앗

냉정한 사회는 김 씨가 오기를 갖게 했다. 그는 작년 10월, 농협을 상대로 소송을 걸었다. 금융권 비정규직자들의 온라인 모임에서 정보를 얻고 소송을 준비했다. 농협은 내규로 비정규직법이 발효된 2007년 8월 이전에도 5년의 고용 연한제를 두고 있었다. 5년 연한의 내규와 비정규직법 중 더 빠른 해고시기를 적용해 계약직 노동자들을 해고해왔다. 김 씨는 비정규직법에 따르면 작년 8월 계약이 만료돼야 했지만 회사 내규에 따라 4개월을 더 일했다. 비정규직법이 만료된 기간에도 일을 했으니 정규직으로 인정받아야 한다고 그는 생각한다.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따로 있었다. 이제는 말하기도 입 아픈, 정부의 '공공기관 효율화'다. 비정규직법 시행 시기, 농협을 비롯한 공공기관은 민간 기업의 앞에서 비정규직 대량 해고 전선에 뛰어들었다. 당시 정부는 공공부문 선진화를 명목으로 10% 이상 정원 감축 방안을 내려놓았다. 정부가 앞장서 휘두른 칼부림에 노동자들은 일자리를 잃게 된 셈이다.

정부의 이중적 태도가 드러난 극단적인 예가 정규직 전환지원금 삭감이다. 비정규직 노동자의 정규직 전환 촉진을 위해 마련된 이 기금이 지난 해는 단 한 푼도 집행되지 않는다.

이명박 대통령은 올해 국정 최우선 과제로 일자리 창출을 거론했다. 그러나 이 대통령의 현실 인식은 여전히 국정 초반과 달라지지 않았다. 지난달 18일 국가고용전략회의에서 이 대통령은 "내가 맘만 먹으면 선택해서 할 수 있다는 걸 정부가 도와주는 것이지, 정부가 하나에서 열까지 다 할 수는 없다"고 강조했다. 일자리 창출을 위해 정부가 개입하는 일은 자제하겠다는 뜻이었다.

개입은 않고 강 건너 불구경하듯 군소리만 늘어놓는 정부, 과연 어떤 기업이 정부의 일자리 창출 요구를 두려워할까. 과연 어떤 비정규 노동자가 해고의 걱정 없이 일을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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