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리스틀 사운드'로도 불리는 트립합을 한 마디로 정의하기란 쉽지 않다. 다만 그 정서는 쉽게 설명 가능하다. 우울함, 그것도 극도의 우울함을 차가운 전자음을 이용해 몽환적으로 표현하는 게 트립합이다. 몽롱한 환각제의 기운(Trip)을 흑인 음악적 그루브(Hop)에 실어 청자에게 전달한다는 게 골자다. 편히 들을 성질의 음악은 아니지만, 어느 음악보다 중독성이 강하다(영국 주류 언론은 트립합을 랩과 레게의 합성물로 설명한다).
매시브 어택은 포티셰드(Portishead), 트리키(Tricky)와 더불어 '트립합(Trip-Hop) 3인방'으로 통칭되는 전자음악 밴드다. 매시브 어택은 이들 3인방 중에서도 큰 형님 격으로 대접받는다. 매시브 어택이 1991년 8월 발표한 데뷔앨범 [Blue Lines]의 성공이 여타 트립합 밴드의 세계화를 이끄는 발판이 됐기 때문이다.
트립합은 메시지를 던지지 않는다. 음악이 가진 분위기 자체가 전부라해도 과언이 아니다. 관통하는 의미는 '극도의 내면적 경향'. 매시브 어택의 핵심 멤버인 3D 델 나자의 말을 인용한다. 이 인터뷰는 패션 픽처스가 공영방송 <BBC>와 제작한 다큐멘터리 '브릿팝의 흥망성쇠(Live Forever - The Rise And Fall Of Britpop)'에 실렸다.
"우리가 발매한 [Blue Lines]는 대처 이후 개인주의 시대의 시작을 알렸다. '나 자신'에 대한 음악이었지, 사회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중략)… 당시 힙합 밴드들은 미국 사운드를 배끼려 했는데, 우리는 우리만의 사운드를 만들고 싶었다. '영국적'인 게 아니라 '우리 자신'의 음악 말이다. 우리 스스로에게 의미가 있는 메시지를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었다."
다시 앞으로 돌아가서, [Blue Lines]는 1991년 8월에 나왔다. 그리고 한달 후, 미국 시애틀에선 니르바나(Nirvana)의 [Nevermind]가 돌연 등장해 마이클 잭슨(으로 대표되는 주류팝과 80년대 헤비메탈)을 때려눕혔다. 낭만을 얘기하던 80년대가 가고, 90년대가 시작했다. 정치권력은 대처에서 노동당으로, 아버지 부시에서 클린턴으로 이행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는 경제권력을 더욱 강력히 휘어잡았다. 개인은 내면으로 도피했다. 펄 잼(Pearl Jam) 정도를 제외한 대부분 주류 밴드들이 내면의 세계에서 세상과 싸웠다. 무너진 아메리칸 드림과 몰락한 대영제국의 오늘을 살아가는 상처받은 개인. 유이하다면 유이한 주제의식이었다.
그 침잠을 가장 두드러지게 표현한 음악이 트립합이다. 과장 섞어 '브리스틀 지방 음악'이라 말해도 틀리지 않을 이 음악은, 한편으로 탈냉전·신자유주의·테러의 시대로 대표되는 90년대의 '진짜 사운드트랙'이었다. 당시는 세기말이었다(가장 내밀하게 개인적 이야기를 다루는 테크노 음악, 라디오헤드로 대표되는 포스트 브릿팝이 모두 제국의 초라한 종말을 맞이하고 있던 영국에서 나왔다는 점은 상징적이다).
▲[Heligoland]. ⓒ워너뮤직 제공 |
얼핏 들으면 기존 음악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싶으나, 조그만 변화들이 금세 귀를 잡는다. 그루브와 브레이크 비트가 줄어든 게 단적인 예다. '첫 싱글 곡으로 뽑았으면'하는 아쉬움이 남는 <Splitting The Atom>을 두고 <뉴 뮤지컬 익스프레스(NME)>는 "(데이먼 알반의 프로젝트 밴드인) 고릴라즈(Gorillaz)의 우울한 노래처럼 들린다"라고 평했다. 포르노 영화 <부도덕한 미스 존스>를 편집한 뮤직비디오로 화제가 된 첫 싱글 <Paradise Circus>는 팝적 사운드가 강화된 중기 음악적 느낌이다. 초기 매시브 어택의 사운드를 기억하는 팬들 일부는 아쉬움을 느낄 수도 있을 법하다.
새로운 멜랑꼴리를 살리는 몫은 앨범 전반에 퍼지는 차가운 공기와 객원보컬리스트들의 우울한 음색이다. 이 앨범에는 레게 뮤지션 호레이스 앤디(브리스톨은 역학적 특성으로 인해 영국에서 레게 음악이 퍼져나간 곳이기도 하다), 뉴욕의 록 밴드 '티비 온 더 라디오(TV On The Radio)'의 툰데 아데빔프, 엘보(Elbow)의 가이 가비 등이 객원 보컬로 참여했고 브릿팝을 대표하는 블러(Blur)의 데이먼 알반도 목소리를 제공했다.
그러나 너무도 화려한 객원 보컬이 오히려 매시브 어택의 정체성을 흩뜨리는 듯도 하다. <NME>는 리뷰 코너에서 "최고의 가수들이 참여했지만 지나치게 많아 3D 델 나자와 G 마셜의 존재감은 떨어진다"고 비판했다. 실제 신보에서 이들의 목소리는 세 번째 트랙인 <Splitting The Atom>에서야 처음 들을 수 있다.
평론가 김두완은 앨범 속지에서 "매시브 어택은 트립합을 그 안쪽에서 둘러보는 게 아니라 바깥에서, 거시적인 안목으로 바라본다"며 "매시브 어택의 바이오그래피가 곧 트립합의 역사"라고 강조한다. 어느 정도 홍보성 목적이 담겨있는 말이라곤 하나 쉬 흘러 넘길 성질이 아니다. 너무도 적절한 표현이기 때문이다. 트립합을 대하는 이들의 태도 역시 한 발 물러서서 멤버 개개인에게 영향을 미칠 것을 거부하는 듯한 느낌이다.
봄 기운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음습한 음악을 이 시기에 소개한다는 게 타이밍상으로 적절하지 않아 보인다. 트립합 유행은 이미 영미권 현지에서도 어느 정도 마무리되었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Heligoland]는 3월 첫째 주 현재 빌보드차트 102위에 힘겹게 올라 있다).
그러나 이 세기말적 기운은, 음울한 뉴스만이 매일 같이 도배되는 요즈음의 정서를 일견 가장 적확하게 드러낸다. 양대 세계대전이 끝나고서야 19세기가 끝났다. 20세기 말의 세계적 화두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경제위기, 신자유주의, 다극 체제. 21세기를 관통하는 모든 이슈가 20세기 형이다. 여전히 20세기는 끝나지 않았다. 아직도 개인은 내부로 침잠한다. 사회에 발을 내딛기가 어느 때보다 어려운 시대다. [Heligoland]는 최근 나온 어느 음반보다 적절한 시기에 발매됐다.
▲'머시룸' 바울스 탈퇴 후, 매시브 어택은 로버트 '3D' 델 나자(왼쪽)와 그랜트 '대디 G' 마셜의 2인 체제로 신보를 제작했다. ⓒ워너뮤직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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