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모란 공모의 주체가 있어야 하고 대상이 명확해야 한다. 예컨대 영진위가 시네마테크를 공모하겠다고 한다면, 주체는 영진위이고 대상은 시네마테크가 된다. 이때 중요한 전제조건은 시네마테크의 소유와 권한이 영진위에 있어야 한다는 것. 그렇다면 시네마테크의 주인, 즉 서울아트시네마의 주인이 영진위인가? 천만에 말씀이다. 그간 영진위는 임대료를 지원해주었을 뿐이다. 두말 할 것도 없이 영진위 소유의 시네마테크는 서울 어디에도 없다. 따라서 이들이 주장하는 '시네마테크 공모' 대상은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는다. 그런데도 영진위는 마치 자신이 주인인양 행세하면서 대상조차 없는 실체를 공모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 서울아트시네마는 서울에서 유일한 민간 비영리 시네마테크다. 시네마테크는 그저 영화를 상영하기만 하는 곳이 아니라, 영화의 역사가 배어있는 공간인 동시에 켜켜이 쌓인 시네필 저마다의 추억과 고유의 공기와 풍경이 스며들어 마침내 만들어진 공간이다.ⓒ프레시안 |
시네마테크는 단순한 물리적 공간이 아니다. 그저 필름으로 고전걸작을 상영하기만 하면 시네마테크라는 명칭을 부여받을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얘기다. 그곳은 영화의 역사가 배어있는 공간인 동시에, 켜켜이 쌓인 시네필 저마다의 추억과 고유의 공기와 풍경이 스며들어 마침내 만들어진 공간이다. 누구보다 이러한 무형의 자산 가치를 인정해야 할 영진위가 (서울아트시네마가 이룩한 지난 8년간의 무형적 콘텐츠와 가치를 전혀 무시한 채), 시네마테크를 단지 임대료나 대주는 공간 정도로 여겨왔다는 사실에 분노가 치민다. 이제는 그것도 모자라 아예 자기 것이라 우기면서 빼앗을 태세다. 서울아트시네마가 영진위의 소유라도 된단 말인가. 임대료와 기타 운영비의 일부를 지원해주면서, 버젓이 서울아트시네마의 운영 사업자를 공모하겠다고 나서다니 아연실색할 노릇이다. 이처럼 '없는 물건을 팔고 주인 아닌 자가 남의 물건을 시장에 내놓으면' 그걸 바로! '사기'라고 한다.
시네마테크로 실체가 유일한 공간, '서울아트시네마'가 순수민간에서 시작해 오늘에 이르렀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이다. 당초 영진위가 '지정위탁' 형식을 빌려 지원해온 것도 이런 까닭이다. 성과와 이윤에 목 맨 기업도 발행주식의 51%를 보유해야 과점주주가 되는 법이거늘, 일 년 예산의 일부를 지원하면서 주인행세하려는 작태와 몰염치는 어디서 발로한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저잣거리 장사치에게도 상도덕은 있다. 최소한 남의 단골을 빼앗거나 빤한 속임수로 이문을 남기는 일 따위는 하지 않는다. 소위 건달의 세계에도 지켜야 할 규율이 존재한다. 이 정도의 기본조차도 모르거나 아랑곳 않은 채, 한줌 이권과 공명심에 눈이 멀어 오직 남의 것을 빼앗는 데만 골몰하는 이들을 가리켜 우리는 '양아치'라고 부른다. 오죽하면 <비열한 거리>의 깡패 병두 조차 "건달은 말이여, 굶어 디져도 자존심 하나로 가는 거여. 자존심 버리는 순간 뭐다? 양아치다!"라면서, 최소한 양아치는 되지 말아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을까. 그렇다면 자기 소유의 시네마테크도 없고, 지원대상이라고 해봐야 서울아트시네마가 유일한 시네마테크전용관 사업을, 마치 '전용관사업자'를 공모할 권한이 있는 양, 기세등등하게 공표하는 영진위는 어디에 속하는 것일까? 코흘리개 돈이나 갈취하는 동네 불량배도 이렇게는 안 한다.
▲ 영화 <비열한 거리> 중 한 장면. |
하지만 조희문 위원장의 전력을 돌아보면 이 정도는 놀랄 일도 아니다. 영화계 좌파 척결을 구호로 이른바 '한예종 해체'를 주장했지만, 한국예술종합학교에 영상원이 설립되던 당시에는 그 학교 교수가 되겠다고 지원했고, 스크린쿼터를 둘러싸고 찬반 논쟁이 거세던 당시, '영진위 폐지'를 주장하고 나서더니, 지금은 자신이 그 영진위위원장 자리에 덥석 앉은 사람이니, 후안무치도 이 정도면 가히 국가대표급 아닌가! 어차피 영화는 산업이고 자동차 수천 대와 맞먹는 수출상품이며, 고전영화를 상영해줄 수 있다면 누가 하든, 무엇을 틀든 시네마테크 역할을 수행할 것이라고 여길 테니 말이다. 조희문은 임명 직후 가진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영진위는 시장이 자율성을 갖고 저절로 굴러가도록 돕는 역할에 주력해서 궁극적으로는 영진위의 할 일이 별로 없었으면 좋겠다."고 말 한 바 있다. 딱 지금,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때론 아무 일도 안 하는 것이 세상에 도움이 될 때도 있다. 지금이 바로 그때가 아닌가 한다. 더는 서울아트시네마의 이름을 더럽히지 말라.
그럼에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여전히 남아있다. 돈이면 다 되는 세상에, 3D영화가 대세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돈도 안 되고 고생만 죽도록 한 결과로 이런 수모까지 당하는 시네마테크전용관사업에 무엇 때문에 이리도 집착하느냐는 것이다. 이 사업에 군침을 흘리며 오랜 시간 공들여온 세력이 있지 않고서야, 한국을 대표하는 영화감독들이 반대하고, 관객이 나서 모금운동까지 하면서 지키려 애쓰는 서울아트시네마를 '통째로' 빼앗을 생각을 한단 말인가. 단지 '국정감사 지적사항'과 '상급 기관의 행정지침'이라는 간편한 답변으로 해명될 수 있는 문제는 아닐 것이다. 영진위가 공시한 바에 따르면 공모마감까지 6일의 시간이 주어졌을 따름이다. 준비기간이 너무 짧다는 점이 오히려 수상하다. 게다가 친절하게도 '1개 단체 지원 시 적격여부를 판단하여 선정할 수 있음.'이라며 모호한 내용을 복선처럼 깔아놓았으니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도처에 매복이고 곳곳마다 함정인 데다가, 한번 저지른 일에 대해서는 모르쇠로 일관하는 인물이 공복(公僕)이랍시고 앉아 있는 공·공·기·관이라 더욱 의심이 생긴다. 어쨌거나 주사위는 던져졌다. 다시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넌 셈이다. 단언컨대, 조희문은 시네마테크공모로 인한 결과에 대한 모든 책임을 져야 하며, 대내외의 거세 비판과 저항을 각오해야 할 것이다.
영화의 역사는 반복되고 회귀되며 어떤 것은 유령처럼 주위를 떠돌면서 끊임없이 우리를 환기시킨다. 시네마테크공모 사태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영화를 산업과 첨단기술의 범주 안에서 인식하고, 교환가치로써의 효용성에만 집착하는 집단이 영화정책을 좌지우지하는 한, 언제나 위태로운 '사냥꾼의 밤'을 맞이하겠지만, 그것들을 극복하는 매순간마다 더해지는 견고함과 무언의 신뢰를 바탕으로 이겨낼 수 있다는 믿음을 갖자. 페드로 알모도바르는 "프랑코에 대한 복수는, 그의 시대를 인정하지 않는 것, 그의 관한 기억을 부정하는 것에서 시작된다."라고 하였다. 시네마테크 지키기 운동 또한, 권리 없는 영진위의 공모를 무시하는 한편, 영진위를 인정하지 않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훗날 영화의 역사는 기록할 것이다. 2010년 2월의 시네마테크의 친구들과 관객을 기억할 것이고, 당신과 내가 마음 졸이며 안타까워했던 불면의 밤과 극장 위 허공으로 날려 보낸 무수한 담배연기와 한숨을 기억할 것이다. 자그마한 모금함 앞에서 조아린 관객과 시네필의 간절한 소망을, 영화인들의 한결 같은 바람을,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의 원인을 제공한 영화진흥위원회의 무용성을. 그리하여 이 나라 영화진흥정책기관의 몰염치가 빚어낸 '시네마테크 공모'라는 초유의 폭거를 분명히 기록할 것이다. 모름지기 "나무들이 자루가 되어주지 않는 한 쇠는 결코 나무를 해칠 수 없는 법" 이다. 바야흐로 시네마테크를 사랑하고 작금의 문화예술정책의 일방통행을 걱정하는 모든 관객과 시민사회의 목소리를 하나로 모을 때다. 시네마테크를 강탈하려는 자들로부터, 영화가 그리고 우리가 자유로워지는 그 날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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