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서울이 본격적으로 커지기 시작할 때, 서울은 딱 그 시대의 생활수준에 맞춰 만들어졌다. 밀려드는 인구를 감당할 길이 없어 정부가 사실상 판자촌을 장려하고 터를 닦아주던 시대였다. 한강에 제방을 쌓아 생긴 땅을 팔아서 그 돈으로 다리를 하나씩 지을 시절이었다. 지금은 흉물 덩어리가 되었지만 세운상가는 근대화의 상징이었으며, 청계천 복개와 고가도로 건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워낙 없이 시작했던 일이라, 이 시대에 만든 공간은 거의 대부분 날림이었다. 심지어 시민아파트라고 지었던 와우아파트가 무너져 33명이 한 번에 목숨을 잃었다(1970년).
하지만 1980년대부터 사람들의 공간에 대한 요구는 근본적으로 변하기 시작한다. 충분한 주차 공간, 온수, 욕실, 널찍한 창문, 프라이버시. 이런 것들에 대한 기대와 요구가 커지면서 아파트는 누구나 선망하는 주거형태가 되었다. 산등성이 판자촌들이 아파트로 바뀐 것도 이때부터이다. 마침 1988년의 올림픽은 서울 근대화의 계기였다. 화장실 현대화가 급선무였고, 거리노점상 정비도 대대적으로 벌어졌다. 이렇다 할 빌딩도 없던 도심에 대형건물들이 줄줄이 들어서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 그러나 이 역시 날림이었다. 고궁 옆에 대형 건물이 들어서고, 한강변을 떡하니 막는 폭군형 아파트가 자리 잡았다. 판자촌 철거민들을 내쫓는 재개발이 기승을 부렸다. 삶의 질보다는 이윤 극대화 논리가 도시를 더욱 황폐화시킨 것이다.
그러던 중 벌어진 성수대교(1994년), 삼풍백화점(1995년) 붕괴는 날림개발의 시대가 끝났다는 상징사건이었다. 1960년대부터 계속된 30년간의 날림공사가 끝내 후진국형 사고를 내고만 것이다. 이제 서울의 날림개발을 정상화하고, 시대의 변화에 맞는 공간으로 탈바꿈시켜야 한다는 신호였다. 그러나 때마침 닥친 IMF 외환위기 때문에 서울의 정상화는 미뤄지게 된다.
2002년 지방선거에서 이명박 서울시장 후보가 청계천 복원을 들고 나왔을 때 사람들은 주저했다. 도심을 가로지르는 왕복 4차선 도로를 없애는 일이 간단키야 했겠는가? 그러나 당시 서울은 이미 달라진 시민의 요구를 받고 있었다. 날림개발을 되돌리고, 달라진 사회·경제 환경을 반영해서 서울을 정상화하라는 것이었다. 이명박 후보는 이런 시대적 요구를 잘 읽어냈다. 물론 청계천 복원이 제대로 된 것이냐 아니냐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오세훈 시장 역시 전임 시장을 능가하는 업적을 내기위해 동분서주하는 중이다. 광화문 광장 설치, 동대문 운동장 철거, 남산 복원, 고가도로 철거, 세운상가 철거, 걷고 싶은 거리 만들기 등 날림개발을 되돌리려는 사업들이 줄을 잇고 있다. 한강 르네상스라는 이름으로 한강변 공간이용을 극대화하겠다는 야심찬 계획도 진행 중이다. 뚝섬, 여의도 고수부지에는 그야말로 외국에서 보던 수준의 멋있는 휴식공간이 들어섰다.
▲ 지난해 8월 개방된 광화문 광장에 몰린 인파 ⓒ프레시안 |
그러나 이들 사업들이 진정 서울의 정상화 요구를 제대로 반영하고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조경사업일 뿐이다. 시청 앞 서울광장은 조잡한 조형물이나 갖다 두는 야적장으로 전락했다. 광화문 광장은 빌딩 숲 사이의 답답한 협곡을 고급 석재로 치장한 데 불과하다. 누군가는 국격에 맞지 않는 광장이라고도 하고, 차라리 은행나무 시절이 나았다는 사람들도 있다. 도심에서 여유와 사색은 찾아볼 도리가 없고, 그나마 자투리땅이라도 생기면 형형색색 치장해서 서커스 마당처럼 전락시키고 있는 형국이다. 과잉치장에 눈이 아프다.
더구나 이들 도시재생 사업이 모두 거대사업이며 특정지역에 편중되어 있다는 것도 문제다. 광화문 광장에 다녀간 사람이 몇 명이라는 게 자랑거리일까? 특히 4대문 안에 거창한 조형물들을 만들어 치장한 다음 손님을 끌어들이는 데서 구시대의 냄새가 난다. 아직도 도심의 권위적 공간이 시민들을 감동하게 할 것으로 기대하는 것일까? 전 세계적으로 운용 중인 100층 이상 건물은 6개에 불과한데, 서울에서만 5군데서 사업이 추진되고 있다. 이른바 메가 프로젝트 몰입이다.
반면 서울의 많은 주거지역들이 공원, 놀이터는 물론이고 주차할 공간도 없는 삭막한 공간으로 방치되고 있다. 뉴타운사업을 해서 아파트로 바꾸기만 하면 이런 문제가 일거에 해결될 거라고 믿은 사람들이 한때 열광하기도 했지만, 그것도 대개 사기극이거나 실패작이었다는 게 현재까지 밝혀진 사실이다. 세입자뿐만 아니라 영세 가옥주들까지 원래 지역에서 밀려나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 더구나 뉴타운사업 대상의 3분2는 채산성이 맞지 않아서 사업추진이 불가능하다.
일부 지역의 과잉치장과 세계적인 메가 프로젝트들의 추진과 대비되는 생활공간의 피폐 문제이다. 광화문에서 묘기 스키대회를 여는 이면에는 동절기 철거민의 애환이 있고, 동네에서는 마땅히 놀거리, 쉴거리가 없는 시민들의 불만이 감춰져 있다. 지난 8년간 계속된 서울시의 도시재생과 개발프로젝트들에 이제는 물렸다. 청계천 복원 모델을 너무 우려먹은 것이다. 천박한 상징사업들이 너무 많아 더 이상 감동이 없다.
이제 생활공간의 복원과 정상화가 과제이다. 안심하고 걸을 수 있는 골목길, 문 밖에만 나서면 있는 놀이터, 10분만 나가면 걸을 수 있는 동네 올레, 조금 걷더라도 편안히 차를 댈 수 있는 주차 공간. 동네를 모두 철거하고 아파트를 짓는 방식이 아니더라도 이렇게 생활공간을 정상화할 수 있는 비전을 내놓아야 한다. 걸어서 10분 거리에 꼭 필요한 생활서비스를 모두 충족시킬 방법이 있을까?
세 가지만 전제가 되면 가능하다. 천천히 단계적으로 추진하되, 10년 내에는 모두 해결한다는 구체적인 계획. 여기에 소요되는 비용의 상당 부분을 충당할 수 있는 서울시 재정. 골목길 주민들이 함께 계획을 세우고 추진하는 참여. 특히 재정을 걱정하는 분들이 많겠지만, 이제 서울은 지하철, 도로 등 기본 인프라를 완료했다. 다른 나라 경우를 보더라도 그 다음 단계는 도시재생에 대한 지원이다. 서울시의 재정규모로 본다면 장기계획을 세워서 차근차근 추진할 경우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지방선거가 다가오고 있다. 각 정당과 후보들은 고민할 것이다. 어떤 공약으로 시민들의 환심을 살 것인가? 100층 건물? 거대 개발계획? 무슨 무슨 하천 복원? 장담컨대 청계천 복원모델은 끝났다. 이제 생활공간의 복원이다. 걸어서 10분 이내에 꼭 필요한 서비스를 충족시키기 위한 10개년 계획을 내놓아야 한다. 뉴타운처럼 한 번에 해결하겠다는 허황된 약속이 아니라, 주민이 참여하고 시가 지원하는 새로운 마을 만들기 프로젝트가 서울 전역에서 일어나야 한다. 이번 지방선거에서 진짜 경쟁해야 될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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