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이 없는 집, 아니 사는 사람 모두가 주인인 집이 있다. 남산 밑 해방촌에 있는 '빈마을'이 그곳이다. '빈집'들이 모여 있는 곳이므로, 누구나 들어가 살 수 있다. 손님으로 찾아온 이들이 곧 단기투숙자가 되고, 이들이 눌러앉으면 장기투숙자가 된다. 장기투숙자가 늘어나니, 집도 늘어서 마을이 됐다.
얼핏 들어서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런 경우엔 때로 영어가 섞인 말이 도움이 된다. 이곳은 해방촌 게스츠하우스(Guests' house)라고도 불린다. '손님들의 집'이라는 뜻이다. 흔히 게스트하우스(Guesthouse)라고 불리는 곳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들러서 먹고, 마시고, 놀고, 쉬고, 자는 공간이다. 차이가 있다면, 게스츠하우스(Guests' house)에는 손님들을 위해 서비스를 해주는 사람이 따로 없다는 것. 이곳에서는 서비스를 해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의 구분이 없다. 모든 일을 스스로 처리하되, 도움이 필요한 대목에선 도움을 나눈다. 다른 사람의 도움을 마음껏 누리고, 역시 자신의 도움을 아낌없이 제공한다. 이곳에서 사는 김디온 씨는 이런 생활을 '함께-살아가기'라고 부른다.
김디온 씨가 주간 인권신문 <인권오름>에 연재하는 글을 소개한다. 집이 강력한 재테크 수단으로만 여겨지는 요즘, 김 씨의 연재가 '집은 사람이 살아가는 곳'이라는 원래 뜻을 다시 일깨워주는 계기가 되길 기대한다. <편집자>
함께 살기의 시작
뚜리가 운다. 거의 자지러진다. 하루 종일 저러고 있다. 열도 나고 입가에 뭔가 나서 아픈가보다. 방문을 닫고 최대한 글에 집중해보려 한다. '내일이 원고 마감이라고!' 그러나 나는 그의 비명소리를 들으면서 이제 막 고개를 뒤로 젖혀가며 발악을 하고 있음을 느낀다. 아까 우리 집에 있는 여자 셋이 뚜리를 감싸고 간신히 부~펜 시럽을 떠먹였다. 뚜리 엄마는 "역시, 디온이 이런 일은 능숙해"라며 안도했다. 뚜리는 돌을 갓 넘긴, 우리들의 아이다.
뚜리는 나와, 몇몇 친구들과 한 집에 사는 아기 이름이다. 나는 '해방촌 게스트하우스 빈집/빈마을'이라 불리는, 이제는 제법 인지도가 높아진 마을의 세 번째 집에 살고 있다. 처음 빈집 1호가 시작되었을 때부터 나는 일주일에 3~4일을 빈집에 들러서 밤 시간을 함께 했었다. 근처에 보증금 1000만 원에 월 30만 원의 월세에 혼자 살고 있던 나에게 한 달에 공간분담금 6만 원 이상, 식비 2~3만 원 정도인 빈집의 경제적 조건은 너무 매력적이었다. 게다가 함께 살 장기투숙객들의 면면이 참 빛나고 아름다워 보였다. 그러나 난 개와 고양이와 함께 살기 싫었다. 더럽고 혼란스럽고 시끄럽고 나에게 의존할 것 같은 존재들. '아, 나는 나 하나도 버거워요. 워워~ 제발 내게 도움의 시선 따위 보내지 말 것!'
그러나 더 두려운 것은 내가 남들에게 같은 이유로 불편을 끼치는 것이었다. 나는 잠잘 때 이를 심하게 빡빡 간다. 또 하루 종일 바쁜 일정을 소화하고 나면, 언제나 피곤했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의 훈훈한 분위기를 깰 것 같았다. 더욱이 비평가 스타일로 남의 단점을 잘 꼬집는 못된 성미를 가졌기 때문에 누군가와 함께 산다는 것조차 불편하고 피곤할 것 같았다. 최근 5년 사이에 나는 이미 다른 친구들과 동거를 하면서 그들에게 거의 살의에 가까운 증오를 느끼며 헤어졌던 일도 몇 번 있었다. 이 글을 보는 사람들은 느낄 것이다. 정말 피곤하지 않겠는가?
그렇게 빈집 입주를 미루던 내게 방 하나를 온전히 내어주겠다, 남자친구를 데려와도 좋다는 천사 같은 친구들이 나타났다. 올 2월, 그 집을 빈집 3호로 소문내고 생활을 시작했다. 처음엔 나와 내 남친, 그리고 다른 친구들 둘, 그렇게 넷이 살았다. 방이 3개 있었으므로 남는 방 하나에 몇몇 손님들이 오고 갔다. 그러던 어느 날, 새로운 투숙객이 나타났다. 그는 세상 기준으로 볼 때 신분상으로 '엄마'였고, 인도인인 '아빠'와는 결혼증명서를 발급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는 당시 4개월 된 아기를 데리고 이 집에 들어왔다. 그 아기가 뚜리다. 나는 단번에 그들이 장투(장기투숙자)가 될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갑작스러웠으나 함께 살기로 했다.
아니 이 말에는 어폐가 있다. 함께 사는 것에 동의했지만, 그것은 나의 의지로 결정할 문제는 아니었다. 나도 이 집의 손님이고 그도 이 집의 손님이니까 우리는 존재론적으로 같은 위상을 갖고 있다. 언제든 원할 때 들어오고 나갈 수 있다. 우리 집엔 빈방이 있었고 그녀와 아기는 입주를 신청했다. 그 후로 모든 것이 바뀌었다.
참을 수 없는 너, 그리고 나
다른 사람의 입주에 대해 신경을 곤두세울 일은 아니었다. 게스트하우스라는 게 원래, 밖에서 일보고 들어와 잠만 자도 그만이고, 내가 쓰는 방으로 쏙 들어가버리면 마주칠 일도 별반 없으니. 물론 그러려고 빈마을 게스트하우스를 찾은 건 아니었지만 유사시 언제든 그런 삶의 방식을 채택할 수 있는 곳이었다.
그러나 뚜리는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뚜리의 울음소리에 의해 나는 밤마다 잠을 설치게 되었고, 이른 새벽(그야말로 졸려 죽겠다 싶을 때)에 잠을 깼다. 독자들은 짐작하시겠지만 난 이 사건에 무척 당황했다. 도저히 대화나 소통 따위를 기대할 수 없는 상태의 이 불편을 어떻게 조율한단 말인가. 까탈스럽고 짜증이 많으며 신경질적인 내가(독자들이여, 이 부분은 겸손함이나 자격지심이 있어 그런 게 아니라 실로 그렇다.) 아기랑 살게 될 줄이야. 난 아기를 싫어한다. 개나 고양이도 싫어한다. '민주적인 의사소통 과정'같은 것은 먹히지 않고 아예 그 정당성 자체를 주장할 수 없는 난국에 처할 때, 난 그저 도망가고 싶을 뿐이었다. 당시 연구실 생활을 하면서 처음으로 강의를 준비하던 시절이어서 더 그랬다. 그저 뚜리의 울음소리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내 존재의 허약함을 탓하며 견딜 수밖에 없었다. 견뎌라, 그러나 그것은 이유가 있는 견딤이다. 굳이 따지자면 뚜리도 이 집에서 살 권리가 있는 것이다. 이걸 인도주의적 처사로 볼 수 있을까. 그가 '아기'이기 때문에, '한부모 가정' 상태의 소수자이기 때문에, '다문화가정'의 구성원으로서 소수자이기 때문에? 그런 것과는 조금 다르다. 뚜리는 그저 이 마을의 투숙객, 손님이고 나와 같은 이방인일 뿐이다.
물론 함께 사는 데에는 공감, 연민, 죄의식과 정치적 올바름 등 모든 것이 다 동원되었다. 아기를 혼자 돌보느라 몸과 마음이 피폐한 아기 엄마는 늘 피곤해 보였다. 한 마디 위로를 하려해도 나는 그런 일에 익숙치 못했다. 아기 엄마는 그저 말없이, 졸린 눈을 부비며 아기를 달래곤 했다.
아기를 안고 거실을 서성이며 팔이 무거워 끙끙거리는 그녀를 보며, 나도, 내 남친도, 옆방 친구들도 시간 쪼개서 아이를 업고 달래기도 하고 재우는 일을 거들게 되었다. 화장실에 쌓여가는 똥 기저귀와 기타 잡스러운 아기 용품들. 아기는 점점 자라 더 많은 것들을 요청하고 아기 엄마는 점점 무너져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서너 달을 보낸 후, 결국 뚜리의 엄마는 뚜리를 데리고 인도에 갔다. 그녀는 그곳에서 한 달이 넘도록 뚜리의 아빠인 인도인 남성과 혼인신고 서류를 만들고 비자 신청을 하느라 온갖 고생을 해야 했다. 그리고 어느 날 그녀와 뚜리, 그리고 새로운 장투인 인도인 남성이 돌아왔다.
함께-살기, 가족을 새롭게 하기
이렇게 새 식구가 생겼다. 밖에서 볼 때, 빈마을 사람들의 모습은 자유롭고 편안하게 마음 맞는 친구들과 모여 사는 것 정도로 보일지 모르겠다. 아니면 반대로, 남모르는 사람들끼리 어색하고 힘겹게 부대껴 사는 것처럼 생각될 수도 있겠다.
그러나 함께-살기는 그런 말들로는 부족하다. 굳이 해명하자면 타인과 나의 경계, 가족의 새로운 구성 등에 대한 질문을 계속해서 만들어내는 일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어디선가 읽은 표현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새로운 가족 구성이 아니라 가족의 새로운 구성 아닐까. 이미 한 집에 살고 있는 이 특별한 가족을 두고 혈연이 아니기 때문에 기존 가족과 다르다고 평가하는 건 너무 단순하다. 이 집에서는 혈연관계로 맺어지더라도 그 가족관계는 기존 가족관계와 다를 것이기 때문이다. 동질성으로 묶이는 것이 아니라 이질적이기 때문에 모여 살게 된 가족. 그래서 빈마을에서는 새로운 구성원이 문제가 아니라, 구성원들 사이의 관계를 새롭게 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
시간이 지나고 어느 날, 뚜리를 사랑함에도 그의 울음소리와 불화하던 나에게 한 가지 해법이 제시되었다. 방의 배치를 바꾸는 것 그리고 내 스스로 소리에 강해지도록 기다리는 것이었다. 다행히 뚜리가 자는 방이 방 맞은편으로 옮겨지고 자고 깨는 시각이 일정해지면서 마술처럼 숙제가 풀리기 시작했다. 어쩌면 내 귀도 소리에 적응되었는지 모른다. 나는 아기를 좋아하지 않지만, 뚜리는 좋다. 다행히도 이 까칠한 이웃마저 뚜리에게 약을 먹이거나 좌약을 넣는 등 응급조치를 해야 할 때 꽤 도움도 되는 것 같다. 이밖에도 나는 다양한 손님들과 이웃관계를 맺으며 살아가고 있다. 그러면서 나는 나 자신에 대하여 인내심과 기다릴 줄 아는 마음을 더 키우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다. 궁금하신 분들은 빈마을로 놀러 오시거나, 다음 연재를 기다려 주시기를.
*빈집/빈마을을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 잠시 소개하자면 말 그대로, 일단은 남산 밑 해방촌이라는 동네에 있는 게스츠하우스이다. 거기에 단기투숙자(줄여서 '단투')와 장기투숙자(줄여서 '장투')들이 모여 살고 있다. 즉 함께-살아가기를 하고 있다. 게스츠하우스니까 당연히 손님과 함께 살아가고, 그러다 눌러앉는 장투들이 함께 살아가고 있다. 장투들이 우글거리게 되자 집들을 더 늘리기도 하고, 이런 삶의 방식이 마음에 들어 자기 집을 빈마을의 하나로 끼워넣고 살기도 해서 지금은 해방촌에 총 4채(+1채 : '빈농집'이라 해서 수색에 터를 잡은, 도시에서 농사도 짓고 살고자 하는 친구들의 분가가 있다)에 스물 댓명의 장투들이 모여살고 있다. 간단히 산수를 해 봐도 여느 집들보다 인구밀도가 높은 편이다. 서울 한 가운데, 우리 집의 경우는 방 3칸짜리 집에 7명이 모여 산다. 우리들이 사는 이야기는 블로그 (http://blog.jinbo.net/house)와 홈페이지(http://house.jinbo.net/xe)에 빼곡하게 있으니 참고하시길. 하여간 나는 빈마을의 세 번째 집인 '옆집'에 방 한 칸에 살고 있다.
(이 글은 "뚜리가 운다"라는 제목으로 주간인권신문 <인권오름>에도 실렸습니다. <인권오름>기사들은 정보공유라이선스를 채택하고 있습니다. 정보공유라이선스에 대해 알려면, http://www.freeuse.or.kr 을 찾아가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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