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시안>을 통해 창작곡 릴레이 발표 작업을 하자고 음악인들에게 제안하며 드렸던 부탁은 단지 저항의 노래를 만들어달라는 것은 아니었다. 현실이 우리를 아프게 하고 우리를 분노하게 한다면 그같은 현실을 슬퍼할 수도 있고 그같은 현실을 넘어서자고 다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마음의 파장은 그렇게 명료한 몇 가지의 감정으로만 정리되지 않는다. 부당한 현실에 대응하는 운동의 슬로건은 지극히 분명한 선언으로 명시화되겠지만 예술은 그런 것이 아니다. 예술은 부당한 현실에 의해 받은 상처와 아픔, 그리고 그 현실에 굴복할 수밖에 없는 자괴감과 패배까지를 모두 보듬어 안으며 비로소 존재한다. 또렷하게 현실의 문제를 지적하고 이 문제를 해결하자고 우리는 해낼 수 있다고 말하지 않더라도 좋은 것은 예술이 현실을 포괄하는 지점이 많아질수록 우리의 현실과 자신의 모습을 더 깊이 들여다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지금 많은 사람들은 이명박 대통령의 정치를 신물나게 싫어하고 그의 집권이 빨리 끝나기를 바라지만 결코 거리로 나오지는 못하고 있다. 그것이 단지 경찰의 탄압과 벌금 때문이라고 할지라도 이것이 현실이라면 예술은 우리의 분노와 좌절 사이를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아야 하지 않을까. 슬픔을 말하고 좌절을 말하는 것은 패배를 인정하겠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현실을 거부하지 않고 또렷하게 응시하겠다는 더 큰 용기이며 정직이다.
여성포크듀오 1984의 노래 <회색비>는 바로 이러한 현실을 직시하고자 하는 진실한 마음이 돋보이는 노래이다. 노래 속 화자는 하루를 다 보내고 방에 누워 달콤한 휴식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러나 혼자 있는 새벽은 자신을 둘러싼 현실을 냉정하게 마주하는 시간. 화자는 결국 지금 자신이 마주하고 있는 어떤 고달픔과 답답함이 거부할 수 없는 현실임을 다시 한번 인정하고 있다. 아무리 혼자 있는 시간이 달콤하다해도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은 결코 순식간에 뒤바꿀 수 없는 사실로 존재하고 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 현실은 누군가에게는 현 정부의 가혹한 통치일 수 있고, 누군가에게는 불안한 일자리일 수 있으며 또 누군가에게는 지극히 사적인 문제일 수도 있다. 어쩌면 이 모든 것일 수 있을 그 현실 앞에서 화자는 다시 희망과 꿈과 사랑을 되뇌여본다. 하지만 그것은 잘될 거라고 꿈을 잃지 말자고 사랑하자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희망 그 자체에 대해, 꿈 그 자체에 대해, 사랑 그 자체에 대해 되묻는 것이다. 어쩌면 절망과 낙관의 사이까지 고민을 밀고 가는 듯한 이같은 태도는 현실을 담담하게 인정하는 태도와 맞물려 오히려 더 진지하고 깊이있게 고민하고자 하는 마음이 느껴진다. 흡사 오윤의 판화 <검은 새>에서 어둠 속 또렷하게 눈을 뜨고 시대를 응시하고 있던 검은 새처럼 단단하지는 않더라도 그 엄정한 직시의 결기는 그리 다르지 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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