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 중도실용'은 거품
"한나라당이 10미터 앞서 시작한 선거다." 각 지역 출마자들의 윤곽이 드러나던 10월초 한 정치권 인사의 진단은 이랬다. 당시 이명박 대통령의 높은 지지율과 '중도실용' 행보에 야당의 기세는 눌려 있었다. 언론을 타고 파란불이 들어온 각종 경제지표가 연일 타전됐다. 이명박 대통령이 "머지않아 국민소득 3만불, 4만불"을 호언하던 것도 이 즈음이다.
손학규 전 대표의 불출마 선언, 후보 단일화 진통 등으로 야당이 선거체제 정비에 어려움을 겪자 한나라당은 수도권 선거에도 자신감을 보였다. 소소한 공천 잡음은 일었지만 4월 재보선 때처럼 친이-친박 갈등이 표면화되지도 않았다. 선거환경이 호조건이었기 때문에 선거전 초반까지 한나라당은 최소 3승을 낙관했고, 잘하면 4:1, 5:0을 점치기도 했다.
ⓒ청와대 |
이런 분위기에 취해 한나라당이 위압적으로 제기한 '야당 견제론', '야당 심판론'은 결과적으로 민심과의 큰 괴리를 드러냈다. 한나라당은 유권자들의 경제 회복 기대감을 최대 무기로 삼았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서민들의 냉랭한 체감 경기를 체감했다. 실제로 재보선이 치러진 지역의 재래시장 등에선 '경제 회복' 구호가 헛돌았다. 소비자 심리지수는 2002년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지만, 고소득층에 국한된 얘기일 뿐 서민들의 지갑은 좀처럼 열리지 않고 있다는 방증이다.
특히 수원과 안산 등 수도권 2곳에서 정부여당은 'MB 중도실용-친서민'의 거품을 확인했다. 이들 지역은 서울로 출퇴근하는 직장인들이 많아 서울과 경기도 민심이 교류되는 요충지로, 이명박 대통령의 중도실용이 그린 과녁과 크게 다르지 않다. 게다가 수원 장안은 전통적인 한나라당 지지세가 6:4로 견조하게 우세했던 지역일뿐더러 이번엔 후보 인지도에서도 월등히 앞서 선거 초반 10% 차이의 넉넉한 우위를 보이기도 했다. 이곳이 뒤집어진 까닭을 단순히 '손학규 효과'에만 가두면 여권의 착시와 자충수가 은폐된다.
세종시 논란도 청와대와 한나라당이 너무 만만하게 봤다. 이명박 정부가 '지역적 중도'의 의미를 갖는 충청권 공략을 위해 발탁한 '정운찬 효과'는 재보선 결과 밑천을 드러낸 것으로 평가된다. 세종시 논란의 직접 당사자가 아닌 충북 표심마저 '충청권 홀대론'에 휩싸인 게 선거 과정에서 확인됐다. 백지화 위기에 처한 세종시를 보며 이 지역 유권자들은 "음성 혁신도시도 무산되는 게 아니냐"는 위기감을 표출했다. 이명박 정부에 대한 충청권의 반감은 지역 경계를 넘어 수도권에 거주하는 충청 출신 유권자들에게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도 있다.
결국 역대 재보선과 달리 여당이 10미터 앞서 출발했음에도, 실질적 승부처인 중부권 3곳 선거에서 전패함으로써 한동안 기세 좋게 휘몰아 친 이명박 정부의 중도실용 행보는 적지 않은 타격을 입게 됐다는 평가다.
'민심 불감증' 스멀스멀
재보선 결과는 곧바로 충돌이 예상되는 4대강과 세종시 사업, 새해 예산안 심사 등 첨예한 현안으로 이어질 전망이다. 이번 선거를 "4대강 사업에 대한 심판"으로 의미화한 민주당은 4대강 사업을 효성 비자금 의혹, 국정원 국내사찰 문제와 함께 국정조사 대상으로 점찍어 놨다. 이같은 이슈를 고리로 남은 정기국회에서 민주당은 대여 공세에 총력을 기울이며 정국 주도권 탈환에 적극적으로 나설 것으로 전망된다.
하지만 이 대통령이 4대강 사업에 대한 의지를 쉽게 꺾을 것 같지는 않다. 지난 정부부터 이어진 여당의 '재보선 0패' 행진을 깬 '텃밭' 승리로 "2승이면 본전"이라는 게 여권의 자체평가. '텃밭 2승'은 이 대통령이 이번 재보선 결과를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이는 빌미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지난 4월 재보선의 0:5 참패에도 불구하고 석 달 뒤 미디어법을 강행처리한 이 대통령의 국정운영 스타일에 비춰볼 때, 4대강 사업비 논란이 핵심인 새해 예산안 심사는 '미디어법 날치기' 당시에 버금가는 여야 간의 강대강 충돌로 확산될 가능성이 크다.
세종시 사업에 대해서도 수정 추진의 시기와 방식이 달라질지언정 청와대가 원안 추진으로 돌아설 여지는 별로 없다는 게 대체적인 관측이다. 선거 막판 '원안 추진 플러스 알파' 발언으로 파장을 일으킨 박근혜 전 대표도 이 문제로 이명박 대통령과 본격적인 대립각을 그어나갈지 미지수다.
29일 오후로 예정된 미디어법 처리과정의 적법성 여부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결정은 향후 정국을 좌우할 태풍의 눈이다. 헌재가 야당의 신청을 기각·각하하면 이명박 정부는 재보선 패배를 우회할 돌파구가 열린다. 그 여세를 몰아 4대강 사업, 세종시 수정, 비정규직법 등도 정면돌파할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반대의 결과가 나오면 재보선 패배의 충격과 뭉쳐져 여당의 밀어붙이기에 일정한 제동이 걸릴 전망이다.
이처럼 10.28 재보선을 분기점으로 정국이 새로운 국면으로 돌입한 건 분명해 보이지만, 여야 내부의 근본적 변화로 이어지기에는 조건이 다소 불충분하다는 평가다. 민주당의 3승은 내용적으로는 승리이지만, '재보선=여당의 무덤'이라는 공식이 깨진 이상 압승을 주장하기에는 다소 미흡해 보인다. 한나라당도 '텃밭 2승'을 내세워 '심판과 견제'로 요약되는 재보선 민의를 피해갈 여지가 있다.
양당 내부의 역학 관계도 근본적 변화로 이어질 가능성은 높지 않다. 한나라당의 정몽준 체제는 선거 패배에 따른 책임론에 휘말릴 것으로 예상되지만, 수도권 친이계를 중심으로 조기전당대회 개최 요구 정도가 최대치이다. 민주당도 선거 승리에 힘입어 정세균 체제의 공고화가 확실시되는 만큼 비주류의 도전은 당분간 표면화되기 어려울 것으로 전망된다.
결국 이명박 정부의 독주에 제동을 건 한편 야당의 분발을 촉구한 재보선 민의가 정치권의 아전인수 해석으로 왜곡될 여지가 없지 않다. 여야가 고질적인 민심 불감증으로 현상유지에 담합할 경우 내년 지방선거 전망도 상당기간 '시계제로' 상황을 벗어나지 못할 것으로 전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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