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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질 환자가 日王에게 감사 편지를 쓴 까닭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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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질 환자가 日王에게 감사 편지를 쓴 까닭은?

[의학사 산책] 전국에 자혜의원을 설립하라!

메이지 천황께 감사드립니다

"본인은 42세로서 1907년부터 치질이 발생해 6년간 약을 시험해보았지만 효과가 없었다. 인자한 황제의 넓은 덕으로 이 지역에 자혜의원(慈惠醫院)이 설치됨에 따라 그 은혜를 입어 치료를 받았다. 22일 만에 모두 나았으니 치료를 통해 백성을 구하고자 하는 그 성스러운 덕에 감사하며 영원히 잊지 않을 것을 기약한다."

자혜의원에서 치료를 받은 환자가 쓴 감사의 편지이다. 여기서 그가 감사하고자 한 황제는 누구일까? 1897년 조선은 종래의 사대 관계를 벗고 대한제국이 되었다. 국왕도 황제가 되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이 감사하고자 한 황제는 고종? 아니면 고종의 뒤를 이은 순종? 모두 아니다.

이 한국인이 감사를 표시한 대상은 일본의 메이지 천황이다. 왜 이 사람은 일본의 왕에게 감사의 편지를 보냈을까? 그가 치료를 받은 자혜의원이 대한제국이 아닌 일제에 의해 설립되었기 때문이다.

자혜의원의 설치

자혜의원은 1909년 12월 전라북도 전주, 충청북도 청주, 1910년 1월 함경남도 함흥에 각각 설립되었다. 1910년 10곳이 증설되면서 모두 13곳, 즉 각 도마다 1개씩 설립되었다. 자혜의원이 설립되면서 지방민들은 중앙에서 건립한 의료 기관에서 치료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1920년대 중반 도립의원으로 개편되어 1945년 해방이 될 무렵 그 숫자는 46개로 늘어났다. 각 도마다 3개꼴이었다.

자혜의원은 초창기에 환자를 무료로 진료하였다. 설립 목적 자체가 가난한 사람들의 진료에 있었기 때문이다. 무료 진료 혜택은 한국인들이 더 폭넓게 이용하였다. 일본인의 경우 부군청, 헌병대, 경찰서, 거류민단, 학교 조합의 증명서가 필요했지만 한국인의 경우 특별한 증명서 없이도 진료를 받을 수 있었다.

▲ 평북 자혜의원(의주)과 강원 자혜의원(춘천). ⓒ동은의학박물관

자혜의원의 순회 진료

자혜의원은 진료의 혜택을 넓히기 위해 특별한 노력을 하였다. 순회 진료였다. 의사와 조수가 소속 지역의 주요 소재지를 방문하여 환자를 진료하였다. 매년 1회 또는 2회 정도 방문하였고, 한 곳에서는 대개 1주일에서 3주일을 머물렀다. 자혜의원 소재지에서 먼 곳에 거주하는 주민을 위해 시행하던 출장 진료를 공식화한 것이었다.

자혜의원이 증설되고 순회 진료가 이루어지면서 각 지방의 거주민이 받는 의료 혜택의 범위는 넓어져갔다.

1910년에 입원 환자 1만965명, 외래 환자 6만2609명, 총 7만3574명이 의료 혜택을 받았다면, 1918년에는 입원 환자 8135명, 외래 환자 33만900명, 총 33만9035명이 치료를 받았다. 8년 만에 총 환자 수가 거의 4.6배에 가까운 증가율을 보인 것이다. 진료 대상의 확대 추세는 계속적으로 이어졌다. 분명히 자혜의원은 한국인에게 혜택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있었다. 개원이 조급하게 이루어지다 보니 부대 시설을 완비하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사용하지 않던 관청 건물을 응급으로 수리하고 원무를 개시하기도 하였다. 심하게는 환자를 수용할 병실을 갖추지 못한 곳도 있었다. 의사들도 문제였다. 군의들이 대거 진료에 종사하였기 때문이다.

자혜의원과 일본 군의

▲ 조선 총독부의원장 후지타 스구아키. ⓒ동은의학박물관
사실 자혜의원의 설립 자체가 일본 육군의 지원 덕분에 가능했다. 조선주차군이 의료기구와 약품 5만 원 어치를 통감부에 기부함에 따라 자혜의원이 설립되었던 것이다. 설립 논의를 진행하였던 것도 조선주차군 군의부장으로 병합 후 총독부의원장이 된 후지타 스구아키(藤田嗣章)였다.

일본 군의들은 일본 정부가 특별히 양성한 의사인 만큼 일반 의사보다 우수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그들의 주요 목적은 부상자의 치료였다. 외과 경험에 비해 내과 경험이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그들의 치료 대상은 군인인 성인 남성이었다. 군인들에 대한 진료 경험은 풍부하지만 부인과, 소아과 경험이 부족한 것은 사실이었다. 군의들이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진료에서 가지는 한계는 분명했다.

한국인에게는 또 다른 고통이 있었다. 말이 통하지 않았다. 통역이 있다고 해도 일본인 의사에게 자신의 고통을 충분히 이해시킬 수는 없었다. 한국인 환자들은 "말과 정(情)이 잘 통하지 않는 의료 기관에서 진료받기를 싫어"한다는 평가가 나왔다. 언어와 문화가 다른 일본 의사들이 한국인에게 친숙한 상대가 될 수는 없었다.

자혜의원의 운영 예산

▲ 공주 자혜의원장 田中德次郞. ⓒ동은의학박물관
나아가 자혜의원의 설립 목적이었던 무료 진료 혜택도 점차 줄어들었다. 1910년부터 1917년까지 60~80% 사이를 차지하던 무료 환자의 비율은 1920년대 중반을 지나면서 10%로 추락하였다. 1940년대에 이르면 5% 이하로 접어들고 있었다. 모두 예산 때문이었다.
자혜의원이 설립될 당시부터 운영 예산에 대해서는 말이 많았다. 계속 "국고에서 부담해야 할지 적당한 시기에 지방 예산으로 옮길지"에 대해 의견이 분분했다. 결론은 독립 운영이었다. 자체적으로 운영비를 충당하라는 요구였다.

구체적으로는 진료비와 약값을 징수하고, 나아가 가격 인상을 통해 수입을 확대하는 방안이 검토되었다. 결국, 자혜의원은 종래 할인을 하던 약값과 진료비를 올렸다.

도립의원으로의 전환

자혜의원의 운명은 1920년대 초반을 거치면서 결정되었다. 우선 일본 본국에서 재정 긴축이 이루어졌다. 1923년 간토대지진은 긴축의 정도를 강화시켰다. 일본 본국 자금으로 재정 부족을 보충해나갔던 총독부는 일본 본국에서 시작된 재정 긴축의 여파를 그대로 안을 수밖에 없었다. 총독부는 자신의 부담을 최소화하려 했다. 그 결과는 자혜의원의 운영 주체를 도(道)로 이관하는 것이었다. 자혜의원은 1925년 도립의원(道立醫院)이 되었다.

도립의원은 수익 위주의 운영을 시작하였다. 1925년 이후 설립된 도립의원에 대해서는 기존 자혜의원이 누리던 기금의 지원마저 없었다. 자체 수익에 의해 병원을 운영해야 했다. 운영비 조달을 위해 다양한 방식이 동원되었다. 의료진에게는 환자를 열심히 진료하고 친절하게 대우하라는 독려가 이루어졌다. 조기에 퇴원할 수 있는 환자를 장기간 입원시키는 편법이 자행되기도 하였다.

▲ 청주 도립의원의 진료 광경. ⓒ동은의학박물관
개업의들은 경쟁상대로 변해 버린 도립의원을 비판하였다. 도립의원의 전신은 자혜의원이며, 자혜의원은 본래 가난한 환자, 의지할 곳 없는 환자를 구제하기 위해 설립되었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그 비판은 통하지 않았다. 1930년대에 접어들면서 일본은 전쟁을 확대시켜나갔다. 전쟁 비용은 복지에 투여될 예산을 깎아먹었다. 한국인들은 자신이 받는 진료에 대해 적절한 가격을 지불해야 했다. 더 이상의 '자혜'는 없었다.

'자혜' 뒤에 숨은 뜻은?

▲ 원산의원. ⓒ동은의학박물관
이 글의 처음에 언급한 감사의 편지로 돌아가자. 치질의 고통은 겪어본 사람만이 안다고 한다. 화장실에 가야지 하는 생각만 해도 고통스럽다는 이야기가 있다. 6년 동안 겪은 그 고통을 한 달도 되지 않는 시간 동안에 치료를 해주었다니 감사하는 마음이 안 생길 수 없다. 감사는 당연한 인간의 도리이다.

하지만 이 편지가 실린 <조선총독부구제기관>(1912)을 읽어보면 일본인 환자의 감사 편지를 찾을 수 없다. 절대적인 수로는 한국인보다 적었지만, 상대적인 비율로는 높았던 일본인 환자의 편지가 없는 것은 왜일까? 그것은 한국인 환자의 감사가 자발적이지만은 않았다는 증거가 아닐까?

일제는 '자혜'라는 이름 아래 지방민에 대한 진료를 넓혀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 혜택은 공짜가 아니었다. 한국인들은 진료의 주체인 의사, 총독 나아가 천황에게 감사를 표시해야 했다. 더구나 식민 지배가 확고해지면서 처음에 한국인이 받았던 혜택은 줄어들었다. 의료는 이제 돈 없이는 살 수 없는 대상이 되어갔다.

일제시기의 도립의원 현황 (1925년 이전은 자혜의원)

1909년 12월 전북 전주, 충북 청주
1910년 1월 함남 함흥
1910년 9월 경기 수원, 충남 공주, 전남 광주, 경북 대구, 경남 진주, 황해 해주, 강원 춘천, 평남 평양, 평북 의주, 함북 경성(1920년 나남으로 이전)
1912년 8월 강원 강릉
1912년 10월 전남 제주, 경북 안동, 평북 초산, 함북 회령
1916년 2월 전남 소록도 자혜의원
1918년 함북 회령의원 출장원 진료소<중국 간도 용정(龍井)>
1922년 2월 전북 군산, 전북 남원, 전남 순천
1922년 9월 경남 마산
1922년 12월 평북 강계
1923년 1월 경북 금천
1923년 8월 함북 성진
1923년 11월 함남 혜산진
1925년 4월 경기 개성
1926년 8월 평남 진남포
1926년 12월 평남 신의주
1930년 6월 충남 대전
1930년 7월 황해 사리원
1931년 4월 강원 철원
1931년 6월 함북 회령의원 출장원 진료소<중국 간도 연길(延吉)>
1932년 5월 경기 인천(인천부립병원에서 이관)
1933년 7월 함남 원산(원산부립병원에서 이관)
1933년 10월 경기 이천
1936년 3월 경기 안성
1936년 12월 충남 홍성, 함남 북청
1937년 5월 충북 청주의원 충주분원
1938년 3월 평남 안주
1938년 12월 강원 장전
1938년 12월 용정, 연길 진료소, 만주국 이양
1939년 10월 강원 삼척
1940년 11월 평북 삭주
1941년 7월 경북 포항
1942년 1월 강원 원주
1943년 5월 황해 남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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